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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장수가 신고한 대곡리 청동국보 유물

phllilp7 2016. 3. 1. 07:36

엿장수가 신고한 대곡리 청동국보 유물>연합뉴스|입력2007.11.26. 15:30|수정2007.11.26. 16:57

 

광주박물관 27일부터 특별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71년 12월20일,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유전 학예연구사(65.현 토지박물관장)는 전라남도 문화공보실로 내려가라는 출장 지시를 받는다. 이 출장은 당시 국립박물관 윤무병 고고과장이 문화재연구소에 요청한 것이다.

청동기 유물이 무더기로 신고돼 전남도청 문화공보실에서 보관 중이니 그것을 직접 조사해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현지에 내려간 조 학예사는 유물들을 보고 경악하고 말았다.

청동칼인 동검이 3점에다가 8개 방울을 단 청동 팔주령이 2점, 아령 모양 방울 두 개를 마주 단 청동 쌍두령이 2점이나 됐다. 뿐만 아니었다. 청동 새기개(새김질을 하는 데 쓰는 연장)와 청동도끼 각 1점과 함께 잔무늬거울(다뉴세문경)도 2점이나 포함돼 있었다.

모두 11점인 이 유물들이 진품이라면 당장 국보감이었다. 실제 이 유물들은 진품으로 판정돼 이듬해인 1972년 3월2일 국보 제143호로 일괄 지정됐다.

도대체 이토록 훌륭한 유물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 과정을 추적해 가던 조 학예사는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엿장수가 자발적으로 전남도청으로 들고와 신고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 엿장수를 상대로 탐문한 조 학예사는 그것이 화순 대곡리라는 마을의 한 노인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렇게 해서 신고 나흘 뒤인 1971년 12월24일 조 학예사는 엿장수를 대동하고 대곡리 현장으로 내달았다.

이 청동 유물들을 엿장수에게 넘긴 사람은 당시 67세 노인인 이 마을 '구재천 영감님'으로 밝혀졌다. 조 학예사가 구씨 노인에게 출처를 물으니 바로 그의 집 근처였다.

노인에 의하면 얼마 전에 낙수를 빼내기 위한 공사를 집 주변에서 하다가 돌무지를 발견하고는 그 것을 캐내다가 그 안에서 이 청동유물들을 발견해 보관하다가 엿장수에게 넘겼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 근처에는 구 노인이 캐낸 무수한 돌무지가 널려있었다.

나아가 구덩이를 보니 목관 흔적까지 바닥에서 드러났다. 조 학예사는 즉시 발굴에 착수해 하루만에 수습조사를 끝냈다.

이처럼 출토지가 분명하고 그 발견 신고 과정이 드라마틱하기만 한 화순 대곡리 국보유물을 위한 자리가 그 소장처인 국립광주박물관(관장 조현종)에 마련된다.

박물관은 기원전 4-3세기 유물로 평가되는 이 청동 유물들을 27일부터 내년 3월2일까지 특별 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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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29) 엿장수가 알아본 청동기 유물 기사의 사진

1971년 8월 어느 날, 전남 화순 대곡리에 살던 한 농부가 집 북쪽의 담장 밖으로 떨어지는 낙수 때문에 물이 고이자 배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삽과 곡괭이로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땅 속이 비어있는 듯 텅텅 소리가 나더니 고철같은 희한한 물건들이 줄줄이 엮어져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농부는 아무 생각 없이 며칠 뒤 엿장수에게 이 고물을 팔아 넘기고 말았답니다.

물건을 건네받은 엿장수는 곰곰이 생각했지요. 그리고는 땅속에서 나온 물건이라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전남도청에 신고를 했답니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12월, 당시 조유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가 전남 지역 지표조사를 위해 도청에 들렀다가 이 사실을 전해듣고는 실물을 확인한 결과, 깜짝 놀랄 수밖에요. 그것은 현재 국보 143호로 지정된 청동 예기(禮器) 11점이었거든요.

공식 발굴단이 급파돼 조사해보니 농부의 집터는 2400년 전 청동기시대 화순 일대를 다스린 소국의 왕이나 제사장의 무덤이었다는 결론을 얻게 됐지요. 목관 흔적이 남아있는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청동 잔무늬 거울, 여덟 개의 방울이 달린 팔주령(八珠鈴)과 양쪽 머리 부분에 방울이 각각 달린 쌍두령(雙頭鈴), 한국형 세형동검과 청동 도끼 등 고색창연한 예기들이랍니다.

이듬해 11점이 국보로 일괄 지정된 대곡리 청동 유물은 엿장수의 신고가 없었으면 영원히 빛을 보지 못했을 겁니다. 문화재보호법에는 매장문화재를 발견하면 즉시 신고하도록 돼 있고 신고자에게는 일정한 보상을 하도록 돼 있으나 엿장수는 이름과 연락처를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이 있지만 소중한 문화재를 알아본 엿장수의 안목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37년의 세월이 흘러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을 거쳐 경기도박물관장을 맡고 있는 고고학자 조유전은 2008년에 다시 이곳을 찾았답니다. 흉측한 폐가로 변한 현장에 대한 정비작업을 하던 중 37년 전 농부의 손을 피해 숨어있던 청동검 2점을 발굴했지요. 청동기인들이 무덤 주인의 영원불멸을 기원하며 함께 묻었던 청동기 세트를 모두 찾아낸 것이죠.

이렇듯 문화재 발굴에 얽힌 에피소드는 가지가지입니다. 1978년 충북 단양 하방리 적성에서 발견된 비석은 현장 조사단이 깔고 앉은 돌로 알고보니 신라 진흥왕 때 제작된 비석이었다는 겁니다. 이 비석은 이사부(伊史夫)를 비롯한 여러 명의 신라 장군이 왕명을 받고 출정, 고구려 지역이었던 적성을 공략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79년 국보 198호로 지정됐습니다.

8000년 전 한국 최고(最古)의 선박이 발견된 창녕 비봉리 유적은 2003년 한반도를 덮친 태풍 매미로 인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사례입니다. 조유전 관장이 이같은 고고학 관련 흥미로운 일화들을 담아 ‘한국사 기행’(책문)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다소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지는 고고학의 세계를 재미있게 이끄는 역사 길라잡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