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29) 엿장수가 알아본 청동기 유물 기사의 사진](http://image.kmib.co.kr/online_image/2010/0822/100822_17_4.jpg)
1971년 8월 어느 날, 전남 화순 대곡리에 살던 한 농부가 집 북쪽의 담장 밖으로 떨어지는 낙수 때문에 물이 고이자 배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삽과 곡괭이로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땅 속이 비어있는 듯 텅텅 소리가 나더니 고철같은 희한한 물건들이 줄줄이 엮어져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농부는 아무 생각 없이 며칠 뒤 엿장수에게 이 고물을 팔아 넘기고 말았답니다.
물건을 건네받은 엿장수는 곰곰이 생각했지요. 그리고는 땅속에서 나온 물건이라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전남도청에 신고를 했답니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12월, 당시 조유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가 전남 지역 지표조사를 위해 도청에 들렀다가 이 사실을 전해듣고는 실물을 확인한 결과, 깜짝 놀랄 수밖에요. 그것은 현재 국보 143호로 지정된 청동 예기(禮器) 11점이었거든요.
공식 발굴단이 급파돼 조사해보니 농부의 집터는 2400년 전 청동기시대 화순 일대를 다스린 소국의 왕이나 제사장의 무덤이었다는 결론을 얻게 됐지요. 목관 흔적이 남아있는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청동 잔무늬 거울, 여덟 개의 방울이 달린 팔주령(八珠鈴)과 양쪽 머리 부분에 방울이 각각 달린 쌍두령(雙頭鈴), 한국형 세형동검과 청동 도끼 등 고색창연한 예기들이랍니다.
이듬해 11점이 국보로 일괄 지정된 대곡리 청동 유물은 엿장수의 신고가 없었으면 영원히 빛을 보지 못했을 겁니다. 문화재보호법에는 매장문화재를 발견하면 즉시 신고하도록 돼 있고 신고자에게는 일정한 보상을 하도록 돼 있으나 엿장수는 이름과 연락처를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이 있지만 소중한 문화재를 알아본 엿장수의 안목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37년의 세월이 흘러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을 거쳐 경기도박물관장을 맡고 있는 고고학자 조유전은 2008년에 다시 이곳을 찾았답니다. 흉측한 폐가로 변한 현장에 대한 정비작업을 하던 중 37년 전 농부의 손을 피해 숨어있던 청동검 2점을 발굴했지요. 청동기인들이 무덤 주인의 영원불멸을 기원하며 함께 묻었던 청동기 세트를 모두 찾아낸 것이죠.
이렇듯 문화재 발굴에 얽힌 에피소드는 가지가지입니다. 1978년 충북 단양 하방리 적성에서 발견된 비석은 현장 조사단이 깔고 앉은 돌로 알고보니 신라 진흥왕 때 제작된 비석이었다는 겁니다. 이 비석은 이사부(伊史夫)를 비롯한 여러 명의 신라 장군이 왕명을 받고 출정, 고구려 지역이었던 적성을 공략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79년 국보 198호로 지정됐습니다.
8000년 전 한국 최고(最古)의 선박이 발견된 창녕 비봉리 유적은 2003년 한반도를 덮친 태풍 매미로 인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사례입니다. 조유전 관장이 이같은 고고학 관련 흥미로운 일화들을 담아 ‘한국사 기행’(책문)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다소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지는 고고학의 세계를 재미있게 이끄는 역사 길라잡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