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원사지 철불반출과정 조선불교 1928년1월호
지금은 서산군 해미읍내에 있는 가야산(덕산이 있는 쪽의 건너편)에서 대불주상을 경성으로 운반한 것은 분명히 대정 6년경<대정(大正) 6년은 1917년>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지금은 김천군수 다시로가 그 처리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하루에 인부 사오십 명 소달구지 대여섯 대 그리고 지방관청으로 하여금 도로와 교량을 개수하게 하여 천안역까지 20리를 운반하게 하는 데 7,8일을 소모하였다.
그것을 과연 어떤 방식으로 천안역의 기차에 옮길 것인가 하는 것은 그 지방에 사는 조선사람들의 흥미를 돋우었던 바였는데 나중에 들으니 기차에 옮겨 싣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던 모양이다.
필시 이는 다시로군의 재임 중에 벌어진 사건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 금불은 지금 창경원의 북쪽 모퉁이에 있으며 그 장대함과 용안의 풍만함은 원내에 이에 견줄 만한 것으로 찾아보기 어렴다.(조선불교 1928년1월호P48)
(2015.1 국립박물관-김헌식)
* 보원사지에서 천안역까지 구간이 20리에 불과한 것은 그 당시 일본식의 거리단위가 (1리=3,9272km)일본식으로 표기된 것으로 우리식으로 환산하면 200리길, 현재의 기준은 80km에 해당한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시 자연 마을인 용비동(龍飛洞)에서 ‘용’자와 보현동(普賢洞)에서 ‘현’자를 따서 용현리(龍賢里)가 되었다. 이곳의 옛 지명인 강당동(講堂洞)은 최치원(崔致遠)이 893년(신라 진성여왕 7)에 7년간 부성태수[서산군수에 해당]직을 마치고 가야산에 위치한 용현리에 강당을 마련하여 학동들에게 글을 가르쳤던 데서 연유됐다고 전해 온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해미군 부산면 갈골[葛洞], 보현동, 벌말[伐里]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이전은 해미군 부산면 지역인엇다.
1914년 보현동 . 강당리.갈동.용비동.이도면의 거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용비동과 보현동으로 이름을 따서 용현리라 하여 서산시 운산면에 편입 되었다.
조선시대 때 행인의 편의를 도와주는 원집이 있었으므로 원벌 또는 원평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대문동, 새절,으름재 (어름재)가 있다.
으름재(어름재)는 산이 험해서 여러 사람이 어울려서 넘어 다닌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 연복현 으름이 많아 생긴 지명이다. <이철환 상산삼매에서>
다음은 조선불교(朝鮮佛敎)> 1928년 1월호에 게재된 토요타 시게카즈(豊田重一)의 "유지에서 본 조선불교(遺趾から 見た 朝鮮佛敎)"라는 제목의 글 속에 포함된 내용이다. 여기에는 서산군 가야산에서 경성으로 옮겨진 불상 한 구에 관한 구절이 들어있는데, 물론 이에 관해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문맥에 비추어 보아 이는 보원사지 철불과 관련된 것이 분명하다고 여겨진다. 이 글은 특히 불상이 옮겨질 당시의 상황에 대한 자세한 증언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참고자료인 듯이 평가된다.
지금의 서산군 해미읍내에 있는 가야산 (덕산이 있는 쪽의 건너편)에서 대불주상(大佛鑄像)을 경성으로 운반한 것은 분명히 대정 6년경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지금의 김천군수 다시로(田代)가 그 처리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하루에 인부 사오십 명, 소달구지 대여섯 대, 그리고 지방관청으로 하여금 도로와 교량을 개수하게 하여 천안역까지 20리를 운반하는 데 7, 8일을 소모하였다. 그것을 과연 어떤 방식으로 기차에 옮길 것인가 하는 것은 그 지방에 사는 조선사람들의 흥미를 돋우었던 바였는데, 나중에 들으니 기차에 옮겨싣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던 모양이었다. 필시 이는 다시로 군의 재임 중에 벌어진 굉장한 사건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 금불(金佛)은 지금 창경원의 북쪽 모퉁이에 있으며, 그 장대함과 용안의 풍만함은 원내에 이에 견줄 만한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위의 잡지, p.48 여기에서 천안역까지의 구간이 20리에 불과한 것은 그 거리단위가 일본식(1里=3.9272km)으로 표기된 까닭이며, 이를 우리 방식으로 환산한다면 200리길, 즉 80km에 해당하는 거리이다. 한편 앞서 이 글의 본문에 나오는 주석을 통해 "조선휘보(朝鮮彙報)" 1919년 1월호에 수록된 '대정7년에 있어서 조선'이라는 제하의 기사 중에 석가철상 1구의 출처가 충청남도 서산군 해미면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지적한 바 있거니와 여기에서도 주철불의 출토지를 해미(海美)라고 적고 있음에 주목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데, 따라서 이에 관한 약간의 세부적인 설명이 필요한 듯이 보인다.
한글학회가 편찬한 "한국지명총람 4 (충남편) 하" (한글학회, 1974)를 보면, 보원사지의 소재지인 충남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는 '본래 해미군 부산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보현동, 강당리, 갈동, 용비동, 이도면의 거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용비동과 보현동의 이름을 따서 용현리라 하여 서산군 운산면에 편입되었다(p.54)'고 적고 있어, 당초 해미군 지역에 포함되어 있던 보원사지가 서산군 지역으로 편입된 이후에도 한동안 해미라는 지명이 함께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할 듯싶다.
이러한 용례는 실제로 "조선금석고(朝鮮金石攷)"를 포함한 여러 문헌에서 이미 사용된 바 있기 때문에 그다지 생소한 사실은 아닌 셈이다. 따라서 위에서 말하는 '해미읍내 가야산 운운'하는 부분은 실상 서산군 운산면 소재 보원사지의 그것을 지칭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여겨도 무방한 듯이 판단된다. 한편 위의 글에서 '창경원 운운'하는 것은 문맥으로 보아 '경복궁'의 착오가 분명하다고 보여지며, 또한 이 금불의 반출시기를 대정6년경 즉 1917년경이라 적고 있는 점 역시 지금까지 알려진 보원사지 철불의 반출사실과 전혀 어긋남이 없는 부분인 까닭에 위의 글은 결국 보원사지 철불의 반출경위에 대한 서술이 틀림없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 아래의 사진은 발굴중인 보원사지와 보현동 일원의 모습
내포에서 동학혁명운동의 깃발을 처음 올린 곳은 운산면(雲山面) 원벌(元坪)이었다.
1894년 3월에 전라도에서 혁명의 깃발이 올려지자 이 소식을 들은 이 지역 동학도들은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龍賢里) 보현동(普賢洞)에 있는 이진사(李進士)를 응징하기 위해 통문을 돌려 약 3백 명이 원벌에 모였다. 이진사는 평소 동학도를 탄압했으며 소작관계로 마찰을 일으켜 민심을 잃었던 것 같다.
당시 이 지역에 살고 있던 김윤식(金允植)은 4월 9일에 동학군 1백여 명이 원평 마을에 와서 자고 개심사(開心寺)로 넘어 가는 것을 보았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어제 동학도 백여 명이 원평 마을에 와서 자고 오늘 개심사로 향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개심사로 가는 동학도들이 끊이지 않았다. 알아보니 보현동 이진사가 평소 동학을 심하게 배척하여 동학도 들이 원한을 품고 개심사에 모여 회의한 후 그 집을 부수리라 한다. 내포에는 동학도가 매우 적었으나 지금은 가득 차서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엄청나게 늘어났으니 이 역시 시운이라 매우 통탄스럽다.표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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