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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의한(金毅漢)과 정정화(鄭靖和)

phllilp7 2015. 10. 30. 17:10

김의한(金毅漢)과 정정화(鄭靖和)

-임시정부와 함께 청춘을 보낸 독립운동가 부부

 

김학민(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사)

 

노블리스 오브리제의 감가진 일가

 

동농 김가진 선생은 조선 후기 권력을 독점하였던 안동김씨 집안에서 태어나 황해도관찰사, 충청남도관찰사, 법부대신, 농상공부대신 등을 지낸 구한말의 거물이다. 그러나 김가진은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병탄되자 자괴심에 두문불출하다가 1919년 3.1만세운동을 계기로 비밀결사 조선독립대동단을 결성, 그 책임자인 총재로 취임했다. 그리고 대동단 활동이 일제에 의해 발각당할 위기에 처하자 74세의 고령으로 상해에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으로 참여했다. 김가진은 일제에 적극 협력하지 않더라도 조용히만 있으면 국내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을 터인데, 스스로 가시밭을 택한 것이다.

 

김의한과 정정화는 김가진이 걸었던 조국광복운동의 험로를 함께 하고 뒷바라지한 아들이고 며느리이다. 두 사람은 김가진이 상해에서 77세로 한많은 생을 마감한 후에도 백범 김구 선생을 도와 조국광복이 되기까지 중국 대륙 수만리를 헤매었다. 김의한은 임정의 실무요원이자 김구 선생의 비서로 일하였고, 정정화는 홀로 계신 임정 요인들의 식사 뒷바라지에서부터 독립운동자금 모금, 한국독립당 참여, 대한애국부인회 조직 등 임정에 관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헌신하여 ‘임정의 잔 다르크’로까지 불리었다. 김가진, 김의한, 정정화 일가야말로 노블리스 오브리제의 전형인 것이다.

 

김의한은 1900년 1월 8일, 김가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의한은 1914년 매동(梅洞)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운 뒤, 1917년부터 중동(中東)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김가진은 조선 말 개화파 관료로서 보고 들은 견문과 식견을 줄곧 아들에게 교육시킨 듯하다. 그는 아들에게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얻었으며, 이제 조선에게도 독립의 기회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등의 이야기를 자주 해주었다. 곧 아들에게 국제정세를 알려주며 민족의식을 일깨워준 것이다.

 

손위 처남 정두화도 김의한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보인다. 정두화는 김의한의 부인 정정화의 오빠로 김가진과 뜻이 맞아 조선민족대동단 조직에 거금을 대기도 했고, 또 이로 인해 대동단 사건으로 옥살이도 했던 사람이다. 이러한 친가와 처가의 분위기에서 자연스레 갖게 된 민족의식으로 인하여 김의한은 1919년 부친이 조선민족대동단을 조직할 때 적극 가담하여 총재의 참모이자 조직원이 되었고, 그해 10월 김가진의 상해 망명도 밀착 수행한 것이다.

 

정정화는 1900년 8월 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수원유수를 지낸 정주영(鄭周永)과 이인화 사이의 2남 4녀 가운데 셋째 딸이었다. 부친은 충남 예산에 많은 토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정정화는 유복한 가정에서 부모의 귀여움뿐 아니라 두 오라버니와 언니들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부친의 완고한 반대로 어깨너머로 배울 수밖에 없었던 공부였지만, 어려서 한학을 익혀 신문 정도는 불편 없이 읽었다.

 

정정화는 11살이 되던 1910년 가을 김가진의 3남인 동갑내기 신랑 김의한과 혼인하였다. 김의한과 결혼하면서 정정화는 세상 물정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것은 개화파 관료였던 시아버지와, 그 집안 분위기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남편 김의한의 영향이 컸다. 김의한은 아버지 김가진으로부터 교육받은 국제정세와 민족의식을 정정화에게 전해 주었다

 

 

김가진과 김의한의 망명, 정정화의 망명

 

 

1919년 3.1운동의 발발과 그 와중에서 대동단 총재로 추대된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이 상해로 망명한 사건은 정정화의 생애에서 하나의 큰 전기였다. 이를 계기로 정정화 또한 상해 망명과 독립운동 투신을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정정화는 1920년 1월 초순 서울역에서 의주행 열차를 타고 상해로 망명길에 올랐다.

 

1920년 며느리 정정화까지 상해로 망명하여 오자 김가진 일가는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구한말 명문 일가가 임시정부 진영에 가담했으니, 독립운동 진영으로서는 국내외적으로 홍보효과가 높았고 이로 인해 사기가 충천했지만, 일제로서는 조선의 명문거족 출신의 기득권자조차 일제의 통치에 반발하는 것으로 대내외에 보이게 되었으니 무척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정정화는 1946년 귀국하기까지 망명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임정 요인들의 뒷바라지에 바쳤다. 백범 김구는 물론 석오 이동녕, 성재 이시영 등 임정 요인들의 식사 수발은 물론, 임정의 사무도구 가운데 정정화의 손때가 묻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임정 요인들의 고달픈 망명생활은 정정화가 있음으로서 위안이 되었고, 27년간이라는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임시정부 역사의 뒤안에는 정정화가 보이지 않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정정화의 상해 합류로 김가진 일가는 극도의 어려움 속에서도 약간의 안정을 찾았지만, 당시 임정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정정화의 제안으로, 정정화는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다시 국내로 밀파되었다. 당시 임정 법무총장으로 있던 예관 신규식과 시아버지 김가진의 지시, 남편 김의한의 조언에 따라 정정화는 1920년 3월 초순 상해를 출발하여 국내로 향했다. 국내 잠입 경로는 1919년 7월에 시행되어 국내외로 가동되고 있었던 임시정부의 비밀 지방행정 및 연락조직인 연통제를 따랐다.

 

이후에도 정정화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5차에 걸쳐 국내에 잠입했다. 이 시기 임정은 그야말로 간판만 있는 형세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과 대립으로 임정의 위상은 크게 손상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국내외 동포들의 임정에 대한 재정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 정정화가 어렵사리 모금해온 자금은 잠시나마 임정의 숨통을 터 주었다.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임정은 1925년 3월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고,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중심제 정부를 내각책임제 정부인 국무령제로 바꾸었다. 그러나 지도급 인사들의 외면으로 정부 조각조차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1926년 말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집단지도체제 형태인 국무위원제로 헌법을 개정하여 근근이 임정의 명목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정정화는 1929년 7월 여섯 번째로 다시 고국 땅을 밟았고, 이후 1년 6개월간 국내에 체류하다가 1931년 초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이즈음 김의한은 한인청년동맹에 참여, 재정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받혀 온 젊은 부부

 

 

 

1930년대 들어서자 동북아 주변 정세가 변화하여 독립운동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931년에 연이어 발생한 ‘만보산 사건’과 ‘만주사변’이 주된 요인이었다. 길림성 만보산에서 한중 농민간에 수로문제를 둘러싸고 마찰이 일어났을 때, 일제의 이간책과 악선전으로 국내 각 도시에서 중국인들을 습격 살해하는 일이 빈발하였다.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중국인들이 귀국하였고, 그로 인해 중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적대행위가 확산되고 있었다.

 

중국 영토 안에서 활동하고 있던 임시정부로서는 중국과의 관계나 한중 양 민족의 관계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들 사변 이후 중국인들이 한인들을 적대시하고, 심지어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의 길거리에서도 양국민간에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의열투쟁을 전개한다는 방침이었다.

 

그리하여 1931년 말 임정의 한인애국단이 조직되었고, 김구가 그 단장을 맡았던 것이다. 1932년 1월 이봉창 의거와 4월 윤봉길 의거는 한인애국단이 이루어낸 쾌거였다. 이들 의열투쟁으로 말미암아 한중 양민간의 갈등과 대립은 일거에 불식되었고, 항일투쟁의 연대 고리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봉창, 윤봉길 의거는 여러 해 동안 상해에 있는 한국 독립운동자들을 보호해 주었던 프랑스 조계 당국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말았다.

 

이봉창 의거를 계기로 상해사변이 발생하여 일본군이 상해를 점령한 상태에서 윤봉길 의거가 결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의 승전 축하 행사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린 윤봉길 의거는 이제 더 이상 프랑스 조계 당국이 임시정부를 비롯한 한국 독립운동자들을 보호할 수 없게 하였다. 프랑스 조계 당국은 한국 독립운동자들에게 즉시 상해를 탈출하라고 통고하였던 것이다.

 

1932년 5월 1일 김의한과 정정화는 상해를 떠나 기차 편으로 가흥으로 피신하였다. 여기서도 정정화는 석오 이동녕 등 임정요인들을 모시기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김의한은 중국 정부와 교섭을 맡고 있던 박찬익의 주선으로, 신강성 성장을 지냈던 임긍(林兢)이라는 사람을 소개받아 전원공서에 취직했다. 전원공서는 중앙정부에서 파견하는 지방 행정관리였다. 김의한과 정정화는 1934년 봄 임지인 강서성 풍성현에 도착하였다.

 

김의한과 정정화는 풍성에서 1년쯤 있다가 다시 무령현으로 이주하여 3년 가까이 생활하였다. 이 시기 정정화는 1935년 11월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창당된 한국국민당에 가담하였다. 김의한과 정정화는 1938년 2월 강서성 무령을 떠나 호남성 장사로 가서 임시정부와 다시 합류하였다. 이로부터 본격적으로 김의한은 임시정부 선전위원회의 선전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정정화는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총괄하게 되었다.

 

일제는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을 기화로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거점과 병참선’으로 이루어지는 대륙 침략작전으로 중국 전역을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정세 변화에 따라 독립운동단체들은 크게 두 갈래로 체제를 정비하여 본격적인 대일항전을 준비하여 갔다. 하나는 1937년 8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이 중심이 된 우파계열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결성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같은 해 11월 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등이 중심이 된 좌파계열의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이었다.

 

한편 중경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조직과 체제를 확대 강화하면서 독립운동의 활동기반을 갖추어 갔다. 1940년 5월 민족진영의 3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9월에는 군사조직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단일지도체제를 확립함으로써, 당(한국독립당), 정(임시정부), 군(한국광복군)의 체제를 갖추었다. 이로써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으로서 임시정부의 위상이 크게 제고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해 갔던 것이다.

 

이때 김의한과 정정화는 한국독립당의 창립 당원으로 가입, 김의한은 감찰위원과 상무위원을 맡았고, 광복군 조직훈련과장, 임시정부 외교연구위원으로 일하였다. 같은 해 6월 한국독립당의 여성조직으로 한국여성동맹이 기강에서 창립될 때 정정화는 간사로 선출되었고, 1943년 대한애국부인회가 재건될 때는 훈련부장직을 맡아 일하였다.

 

 

조국광복, 민족주의자의 좌절

 

 

김의한과 정정화는 일제의 패망을 중경 인근 토교에서 맞이하였다. 광복 후 임정 요인들은 11월 5일 중경을 출발하여 상해에서 20여일 지체한 후 11월 23일과 12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환국하였다. 김의한은 김구 선생을 수행하여 먼저 떠났고, 정정화는 임정 요인들이 중경을 떠난 뒤에도 토교에 남아 12월 한 달 동안 뒤처리를 마치고, 이듬해 1월 하순 상해로 갔다. 그 뒤 5월 9일 미군이 제공한 LST 수송선을 타고 사흘의 항해 끝에 부산에 도착함으로써 25년만에 조국땅을 밟았던 것이다.

 

환국 이후 김의한과 정정화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을 전개하던 김구와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지지하고 있었다. 김의한은 1948년 김일성과의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이룩해 보려는 마지막 희망을 갖고 북행을 결심한 김구 선생을 수행하여 평양으로 갔다. 정정화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 부통령에 취임한 성재 이시영이 감찰위원회의 감찰위원으로 추천하였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김의한은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에는 별다른 활동을 못하다가 1951년 6.25 동족상잔 시기 납북되어 생사를 확인치 못하였는데, 2006년 10월 재북임시정부요인 후손 성묘단의 평양 방문시 1964년 10월 9일에 서거하여 평양 근교 재북인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정정화는 1991년 서울에서 서거하였으며, 유해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두 사람의 공훈을 기리어, 정정화에게는 198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김의한에게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金毅漢

재한(載漢), 의환(毅煥)

출생 1900

사망 1951

직업 독립운동가, 국가유공자

경력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상해지부 재정위원, 애국단원, 한국독립당 감찰위원, 광복군총사령부 주계, 광복군 조직훈련과장

성별 남

 

 

요약 19001951. 독립운동가.

 

1.[개설]

2.[생애 및 활동사항]

3.[상훈과 추모]

 

[개설]

이명은 재한(載漢의환(毅煥). 서울 출신. 아버지는 조선민족대동단 총재를 지낸 김가진(金嘉鎭)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910월 국내에서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아버지 가진(嘉鎭)과 함께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86월 상해에 있던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中國本部韓人靑年同盟)의 상해지부 조직에 참가해 재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4월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폭탄의거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 해 5월 초 상해에서 항저우(杭州)로 이전을 하였다. 이 때 임시정부 요인 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 등을 모시고 장쑤성(江蘇省)자싱(嘉興)으로 피신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에 참가하였다.

 

19341월이동녕·김구·안공근(安恭根) 등과 함께 애국단(愛國團)을 조직하고 그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뤄양군관학교분교(洛陽軍官學校分校) 내의 한인군관학교와 의열단(義烈團) 계열의 군관학교에도 관여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39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비서처(秘書處) 비서, 선전위원회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충칭방송국(重慶放送局)을 통해 국내에 있는 한국인들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05월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창립되자 감찰위원회 위원과 상무위원 겸 조직부 주임을 맡았다.

 

그 해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전, 정착한 뒤 중국 국민당(國民黨) 정부가 광복군(光復軍) 활동을 정식으로 동의한 뒤 광복군총사령부 주계(主計)에 선임되었다. 19438월부터 광복군 조직훈련과장을 맡아 활동하였고, 19456월에는 정훈처(政訓處) 선전과장으로 광복군 활동에 참가하였다. 부인은 여성독립운동가 정정화이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 가야산역사문화연구회
글쓴이 : 내포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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