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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석조미술 연구>를 통해 본 통일신라시대 석탑 특징

phllilp7 2012. 11. 26. 06:40

<통일신라 석조미술 연구>를 통해 본 통일신라시대 석탑 특징

박경식이 쓴 <통일신라 석조미술 연구/학연문화사>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석탑, 불상, 부도, 석등, 석비 등에 대하여 양식적 특성과 석조물의 시대적 의미에 대해 쓴 책이다. 책 서문에 의하면 박경식은 <통일신라 석조미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것을 기본으로 1994년 같은 제목인 <통일신라석조미술연구>로 책을 낸 것을 2002년 수정판으로 발간한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많은 자료를 분석하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나름의 기준을 정하려 했다는 노력이 있었음을 느꼈다. 특히 석탑에 대해서는 본인이 그간 알고 싶었던 양식상의 구분을 보다 명확히 밝히고 있어 그것을 같이 공유하자는 차원에서 정리하여 올리는 것이다. 다만 내 생각과 다른 부분은 나름의 의견을 제시할 것이다.

우선 통일신라시대의 특징을 보이고 있는 석조물의 분포를 보면 경상북도에 가장 많고 북으로는 강원도 강릉지역까지 서로는 서산까지 남쪽으로는 지리산지역을 거쳐 전라도 장흥까지 뻗어나갔다. 이런 확산은 정치·군사적 요충지를 따라 확산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9세기에도 불교의 석조물은 계속 조성되었는데 이것이 8세기의 석조물보다 질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불교경향의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보고 있다.

박경식은 “한국석탑의 시원양식은 백제에서 확립하였는데 중국의 목탑양식을 석재로 충실히 옮겨 미륵사지 석탑과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건립하였으며 신라는 목탑과 전탑양식을 충실히 번안하여 선덕왕 3년(634)에 분황사 모전석탑을 조성하면서 우리나라 탑파사상의 서막을 열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석탑의 양식적 근원은 목탑과 전탑에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신라는 이와 같은 양식을 소화·정리하여 7세기 전반기에 이르러 시원양식인 의성탑리오층석탑을 건립하게 되었다.”(57쪽)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통일 후 감은사지석탑, 고선사지석탑, 나원리오층석탑이 탑파의 제 2기를 형성하고 이후 불국사삼층석탑으로 완성기를 이룬다고 하고 있다. 9세기 석탑은 8세기의 양식적인 획일성을 벗어나 다양한 변화가 시작되고 탑에 대한 신앙도 변화가 보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변화를 신앙에서 찾고 있다.

저자는 통일신라 하대에 들어서면서 왕이나 왕실 그리고 지방호족의 발원에 의한 탑이 많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전기의 탑이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탑을 조성하였다면 하대에서는 개인의 욕구에 의해 탑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석탑의 규모로 보면 통일신라말기로 갈수록 탑의 규모가 작아진다고 한다. 탑의 크기에 대한 것은 이 책에 나와 있는 자료가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61쪽의 9세기 전기 석탑양식(표1)과 83쪽의 9세기 후기 석탑양식(표2)에 있는 탑의 높이에서 상륜부를 제외한 높이를 정리하면 5m이상의 되는 탑이 전기에는 47%인 반면 후기에는 20%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4m미만의 탑을 보면 전기는 12.5%인 반면 후기에는 52%에 달한다. 이 수치로만 보아도 전반적으로 규모가 작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7세기에 지어진 탑을 보면 모두가 5m이상 되는 큰 탑이다.

탑 규모가 작아지는 것은 8세기 이전의 탑은 국가가 주도해서 지어진 탑인 반면에 9세기의 탑은 저자의 말대로 개인의 발원에 의한 탑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개인이 불사를 하다 보니 재정능력의 한계로 큰 규모의 탑을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런 탑의 규모가 작아지면서 나타는 현상에 대해서는 나중에 양식의 변화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저자는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인 불국사석가탑이 완성된 후 탑의 변화가 생기는데 이것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보고 있다. 우선 석가탑을 대표로 하는 8세기 탑의 특징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139쪽)

1. 기단은 상하 2층으로 탱주가 2개씩이고 하층기단상부의 받침은 1/4원형인 호형弧形이 두 단이고 상층기단의 초층탑신받침은 각형으로 두 단이다.

2. 지붕돌 받침은 5단이고 지붕돌 위에 탑신받침은 두 단이다.

3. 상륜부가 대부분 없어졌지만 노반에는 부연이 있다.

9세기 전기 탑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81쪽)

1. 상하기단은 유지되지만 하층기단의 탱주가 828년 법광사지 석탑부터 하나로 변하는 예가 나오기 시작한다.

2. 상층기단은 탱주가 하나로 줄어든다.

3. 지붕돌받침이 다섯에서 넷으로 줄어들기 시작한다.

4. 기단과 초층탑신에 팔부신중 및 안상이 중요한 문양으로 나타나고 있다.

5. 남산 용장곡 석탑처럼 산천비보에 의한 탑이 생기고 단층기단 석탑이 나오고 있다.

6. 8세기 창림사지석탑처럼 국왕이 발원發願한 탑이 만들어진다.(주 1)

7. 중기에는 경주 중심으로 석탑이 만들어지나 9세기에 들어서는 탑 조성이 지방으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 주 1) 국왕이나 왕족에 의한 원탑願塔은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이미 8세기에도 만들어지고 있으므로 그 시대의 특징이라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을 9세기 후반 원탑이 많이 만들어지는 초기 현상으로 이해하기 위해 원탑을 강조하고 있다.

후기의 석탑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113쪽)

1. 단층기단의 출현(최초의 예 : 881년경에 조성된 봉암사 3층석탑)

2. 탱주가 상하 한 개씩으로 줄어든다(최초의 예 : 828년 법광사지 3층석탑)

3. 초층탑신 받침이 전기석탑은 모두 2단인 반면 후기석탑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특히 별석받침이 출현하기 시작한다.(주2)

4. 초층탑신이 다른 탑신에 비해 커진다.

5. 장엄조식이 전기 석탑보다 다양해지는데 사방불, 비천상, 문비형 등은 후기만의 특징이다.

6. 왕, 왕족, 귀족, 호족에 의한 원탑이 유행한다.

7. 탑의 조성이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주2) 저자는 별석받침의 예로 828년 법광사지석탑이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이후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에서 완형의 별석받침이 나오면서 확산되어 간다고 한다. 그러나 법광사지의 초층탑신 받침은 상부 받침부분이 만곡이 되어 들어가는 모습이 새로운 탑신받침의 출현을 예고하는 모습이긴 해도 완벽한 별석받침은 아닌 듯하다.

이런 변화에 대해 저자는 8세기보다 9세기 탑은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탱주수의 축소가 기단의 규모를 축소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본인은 8세기 탑과 9세기 탑의 결적인 차이는 지붕돌의 반전이라 생각한다. 8세기 탑은 지붕돌에 반전이 약하고 지붕돌 모서리(우동隅棟)의 지붕선이 직선으로 되어있고 처마 밑 선이 직선인 반면 후대로 갈수록 우동의 지붕선이 곡선으로 반전反轉이 있고 처마선도 끝으로 갈수록 하늘로 올라가는 반전이 있는데 곡선으로 되어있다.

8세기 석탑이 직선으로 강한 남성미를 보여준다고 한다면 9세기의 석탑은 곡선의 사용으로 여성적인 면을 보여준다. 특히 9세기 하대로 내려가면 퇴폐적인 모습이 된다. 이런 점은 문화적 양상이 최소한 석탑에서는 쇠퇴기로 들어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통일신라 하대의 시대 상황으로 볼 때 문화적으로도 전반적으로 퇴보가 되는 시대인 것은 맞는 것 같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보면 최고의 모습을 보인 부분도 있다.

석가탑(760년 경/출처:문화재청) 보림사북탑(870년/출처:문화재청)

부도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부도는 새롭게 부각된 선종禪宗과 당시 중요세력으로 발흥하고 있었던 지방호족의 목적과 맞물려 새로운 발전을 맞이한다. 철감선사부도는 당시 석탑의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통일신라 전시대를 걸쳐보아도 최고의 예술품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부도의 시원이라는 진전사지 부도 역시 절제된 미학을 보여준다. 이런 것들은 당대 최고의 가치가 탑에서 부도로 넘어갔다는 증거이다.

탑이 저자의 말대로 새로운 변신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 동력이 전대에 비해서는 약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철감선사부도(868년 이후/출처:문화재청)

저자는 석탑기단 “탱주 수의 축소는 기단의 규모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139쪽)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석탑이 규모가 줄었기 때문에 탱주의 숫자를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원인과 결과를 뒤바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탱주란 결국 비어있는 기단 벽면을 해결하기 위한 장식적 요소이다. 탑의 규모가 낮아지면 기단의 규모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규모가 줄어들었음에도 가운데 있는 탱주가 줄어들지 않으면 답답해질 수밖에 없다. 탱주 숫자의 축소는 석탑 규모 축소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다음으로 저자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백제가 중국목탑양식을 석재로 충실히 옮겼다고 하는 부분이다. 우선 삼국유사에서 황룡사구층목탑을 백제의 장인을 초빙하여 지었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백제가 목탑을 지을 만한 충분한 능력을 갖추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지금 백제가 지은 목탑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고 해서 백제가 목탑을 짓지 않았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중국의 목탑양식을 석재로 충실히 옮긴 것이 아니라 백제 나름으로 목탑을 석탑으로 번안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주3) 왕궁리석탑은 목탑의 자리에 석탑을 세웠다고 하며 미륵사지 3개의 탑 중에서 양쪽의 두 개 탑은 석탑이며 가운데 탑은 목탑이다.

현재 남아 있는 일본, 중국의 목탑과 비교해보았을 때 백제계 석탑의 대표격인 정림사지 삼층석탑은 비례감이라든지 전체적인 형태가 일본목탑과 더 유사함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백제의 목조기법은 일본 것과 유사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남아 있는 동탑銅塔을 봐도 백제의 목구조로 추정하고 있는 하앙식이며 전체적으로 세장한 느낌이 있다. 따라서 석탑이 목탑의 번안에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중국 목탑의 번안이라기보다는 백제가 가지고 있던 고유한 목탑을 번안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정림사지 삼층석탑(출처:문화재청) 백제재현단지목탑(출처:참고문헌참조)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성주사지의 석탑에 대한 해석이다. 이 책에서 서산 성주사지탑이 석가여래사리탑, 정광여래사리탑, 가섭여래사리탑, 약사여래사리탑으로 밝혀졌다고 하면서 ‘탑이 부처로 대용되는 변화를 보이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107,8쪽) 성주사석탑고(聖住寺石塔考/41쪽/李殷昌/史學硏究 21/韓國史學會/1969)에서는 성주사사적기를 기준으로 하여 금당 앞의 오층석탑은 석가여래사리탑이고 나머지 세 탑이 정광여래사리탑, 가섭여래사리탑, 약사여래사리탑으로 이라고 소개하고 있다.(주4)

그러나 이것이 저자의 주장대로 탑이 부처로 대용되는 것이라 이야기할 수 없다. 이전부터 예배대상이 불상으로 변화되면서 탑의 권위가 낮아져왔다는 것은 정설이다. 그렇지만 탑은 탑으로서 상징적인 가치를 가져왔다. 그러나 탑이 많이 세워진다는 것은 절의 중심으로서의 탑이 아니라 그냥 다양한 상징를 의미하는 것을 전락하여 탑의 권위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책에서 주장하듯 남산 용장곡 삼층석탑처럼 비보의 개념으로 탑이 설치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149쪽)

주4) 考古美術 第9卷 第9號(1968년 9월)에 崇巖山聖住寺事蹟에 나온 내용을 근거로 주장하는 것이다. 이 고고미술에 자료 편에 있는 사적은 설명에 의하면 구례 화엄사의 주지였던 정휘헌鄭彙憲이 채집한 자료로서 필사한 것이라 한다. 작성된 시기 등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9세기의 특징 중 하나가 탑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하는 부분이다. 이런 현상은 전국이 삼국시대의 독자적인 문화권에서 벗어나 비로소 하나의 불교문화권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지리산을 넘어가는 문화전파 경로를 확보하게 된 것을 중요한 원인으로 이야기하고 있다.(144쪽) 그러나 이런 현상은 청해진을 보면 그런 개념이 과연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조선시대까지 해상교통로는 매우 중요한 문화전파수단이었다. 따라서 육로도 중요하지만 해상교통로도 중요하다. 곡성 태안사나, 장흥보림사는 오히려 해상교통로를 중심으로 내륙으로 문화가 전파된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볼 수도 있다. 특히 곡성 태안사의 경우 섬진강을 이용한 수로로 교역하였다는 연구도 있다. 또한 성주사가 있는 지역은 과거 백제와 중국을 잇는 중요교통로였다. 서해안에는 이를 증명하는 수많은 유적들이 있다. 특히 태안 삼존불은 북제불 양식을 계승하고 있고, 태안이 백제와 중국과 통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는 점에서 교역길을 평탄함을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태안마애삼존불/답사여행의 길잡이 4:태안마애삼존불)

어쨌든 중요한 것은 백제도 이미 많은 불사가 있었다. 성주사지도 성주사사적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백제시대 오합사烏合寺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수많은 사찰기록과 사지가 남아 있다. 그러나 백제가 망한 다음 백제지역은 식민지역으로서 수탈지역으로 전락되었다. 그러므로 백제지역은 경제적으로 매우 열악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사는 거의 중단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또한 많은 귀족들이 모여 있던 경주가 7-8세기 불사의 중심이 된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 백제지역이 다시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게된 것은 지방호족들의 발흥한 하대부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중앙의 힘이 약해지면서 지방호족은 힘을 가질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장보고의 청해진세력이다. 경주의 힘이 빠져가면서 다른 지역도 경제적 힘이 축적된다. 그런 자신들을 과시하기 위해서 새로운 종파인 선종을 받아들이고 절을 짓는데 노력하게 된다. 이런 배경이 새로 불사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된 배경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단순히 교통로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백제지역을 포함한 다른 지역이 자체로 절을 만들 수 있는 역량이 축적된 것이 새로운 탑을 조성한 이유일 것이다.

참고문헌

통일신라석조미술연구/박경식/학연문화사

聖住寺石塔考/李殷昌/史學硏究 21/韓國史學會/1969

崇巖山聖住寺事蹟/考古美術 第9卷 第9號/1968년 9월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답사여행의 길잡이 4(충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