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가지 절경을 정원처럼 여기고 산다면
“무릇 산수는 정신을 즐겁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하는 것이다.
거처하는 곳에 산수가 없으면 사람들이 촌스러워진다. 그러나 산수가 좋은 곳은
생활의 이익이 풍부하지 못한 곳이 많다. 사람들이 자라처럼 모래 속에 숨어 살지
못하고, 지렁이처럼 흙을 먹지 못하는 바에야, 한갓 산수에만 취해서
삶을 영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름진 땅과 넓은 들,
그리고 지리가 아름다운 곳을 가려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좋다.
그리고 십리 밖, 혹은 반나절 길쯤 되는 거리에 경치가 아름다운 산수가 있어
가끔씩 생각이 날 때마다 그곳에 가서 시름을 풀고, 혹은 하룻밤쯤 자고
돌아올 수 있는 곳을 마련해 둔다면 이것은 자손 대대로 이어져 나가도 괜찮은 방법이다.
옛날에 주 부자가 무이산의 산수를 좋아하여 냇물 굽이와 산봉우리마다에 글을 지어서
빛나게 꾸미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주 부자는 그곳에다 살 집은 두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봄이 계속되는 동안에 저곳에 가면 붉은 꽃과 푸른 잎이 서로 비치는 것이,
또한 제대로 나쁘지 않다’하였는데 후세사람으로서 산수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것을 본받을 일이다.”
중국 북송시대의 郭熙(곽희)는 <林泉高致(임천고치)>의 山水訓(산수훈)에서
살 만한 곳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군자가 산수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전원에 거처하면서
자신의 천품을 수양하는 것은 누구나 하고자 하는 바요. 천석이 좋은 곳에서 노래하며
자유로이 거니는 것은 누구나 즐기고 싶은 바다.”
<林園十六志(임원십육지)>를 지은 서유계는 “사람 사는 마을 근처에 산수를 가히
감상할 만한 곳이 없으면 性情(성정)을 도야할 수 없다”고 했다.
옛사람들의 충고를 받아들여선지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나라 안의 경치 좋은 곳에
작은 집을 짓고 정자를 만든 뒤 말년의 삶을 영위했다. 현대인들 역시 살 만한 사람들은
강가나 산, 그리고 바닷가에 별장을 짓는 것이 유행처럼 됐다.
그것이 지금은 재물을 불리는 방법으로도 활용되고 있지만
삶이란 것이 어디 그런 것인가?
홍만종이 지은 <순오지>에 “율곡과 퇴계는 자기들이 살 곳을 가려 살았는데,
그들은 반드시 산수의 취지에 중점을 두고 골랐던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몇 십 년간에 걸쳐 이 땅을 주유하며 산천을 바라보고 사람이 살기에
가장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곳은 바로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경치가 좋은 곳’이다.
장유 서익손은 <명세설신어>에서 “내게 눈이 있고 발이 있으면 어디든 경치 좋은
산천이 있으면 즉시 간다네. 그리하면 내가 바로 이 경치 좋은 산천의 주인이 되네”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산수 좋고 인심 좋고, 아직은 사람들의 때가 덜 묻은 곳이 선유동이다.
이름 그대로 神仙(신선)들이 노닐던, 이곳을 사랑했던 先賢(선현)들이 최치원, 이준경, 이황, 송시열 등이다. 이 괴산 선유동에 자그마한 집 한 채 짓고서, 마음 비우고, 세상을 관조하면서 고개 너머에 있는 가은 선유동과 화양동의 아홉 가지 경치를 내 정원처럼 여기고 살아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아니한가
제2곡인 경천벽(擎天壁)은 기암절벽이 첩첩이 쌓여 하늘 높이 치솟아 있다.
(찾아보아도 경천벽이란 각자는찾을수없었다.)

제3곡인 학소대(鶴巢臺)는 기암절벽 사이로 울창한 소나무숲이 있으며,
청학이 깃들었던 곳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학소대라고 딱히 꼬집을만한곳이 두곳인데 이곳이 유력해보인다.)


. 제4곡인 연단로(鍊丹爐)는 위가 평평하고 가운데가 절구통같이 패어 있는데,
이곳에서 신선들이 먹던 금단(金丹)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 연단로인데 올라가보지는않았다 바위위에 각자가되어있단다.)


험준한 절벽 사이에 있는 제5곡인 와룡폭(臥龍瀑)은 용이 물을 먹었다가 내뿜는 듯
물안개가 퍼지고,
폭포소리가 벼락소리와 같다.
와룡폭인데 바위에 각자된걸 내가 밟고 글을 찾으니 보여야지요
바위에서 내려와보니 뭐가 팬인흔적이있어 물로 그어보니 조금은 선명하게 글씨가 보이네요


. 제6곡인 난가대(爛柯臺)에는 나무꾼이 신선들의 바둑 두는 모습을 구경하고
집에 돌아오니 오랜 세월이
흘러 5대손이 살고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사진참고: 느낌표님)
난가대이다.자료를 준비못해서 지나치면서도 의아했던곳이다.
난가상이란 바둑판을 의미하는것으로 운선구곡에 보면 바둑판이 새겨져있었다.
여기서 난가대는 바둑을두는곳을 볼수있는대라고할수있겠다.

기국암과 우측난가대

제7곡인 기국암(碁局巖)은 위는 평평하고 아래는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인데,
그 생김이 바둑판을 떠받친 듯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기국암은 바둑을 두는곳일것이다.
쳐다보면서도 저위에 신선들이 두던 바둑판이 그려져있을까 많은생각을 하게된다.
생각으로는 바둑판모양과 닮아서가 아니라 신선들이 바둑을 두던곳이라는전설이...
. 제8곡인 구암(龜巖)은 큰 거북이가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고 있는 듯한 모양의 바위로,
바위 표면이
여러 조각으로 갈라져 있고 등과 배가 꿈틀거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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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가대와 기국암 은선대의 전설>>
그중 난가대와 기국암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서려 있다.
조선 명종 때의 일이다. 한 나무꾼이 도끼를 가지고 나무를 하러 갔다가 바위에서 바둑을 두는
노인들을 발견하고 가까이 가서 구경을 했다.
한 노인이 그에게 “여기는 신선들이 사는 선경이니 돌아가라”고 했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나무꾼이 옆에 세워둔 도끼를 찾았는데
도끼자루는 이미 썩어 없어진 뒤였다. 터덜터덜 집에 돌아오니
낯 모르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누구인가 물었더니 그의 5대 후손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간 날을 헤아려 보니 그가 바둑 구경을 한 세월이 150년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도끼자루가 썩어 있던 곳을 난가대라고 불렀고 노인들이 바둑을 두던 곳을
기국암이라고 부르게 됐다.
(옛말에 "놀다보니 도끼자루 썩는줄 모른다" 는 말이 생각나네요.무슨일에 빠져서 헤어나지못하고 허송세월한다는 옛말이 150년이 흐를줄이야....)
그보다 더 재미있는 전설이 서린 곳이 은선암이다.
옛날 하늘에서 선녀가 이곳으로 내려와 목욕을 하고 있었다.
이것을 멀리서 보고 있던 총각 나무꾼이 선녀가 벗어 놓은 옷을 숨겼다.
결국 그 선녀는 돌아가지 못한 채 나무꾼과 살게 되었다.
대부분의 전설들은 나무꾼과 선녀가 아들 딸 잘 낳고 살다가 총각이 감춰 두었던 옷을
내주자 곧바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 은선암의 전설은 선녀가 하늘로 올라가자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깨어 보니
꿈이었고 그 사이 그가 백발의 노인으로 변해 있더라는 것이다.
은선암(隱仙巖)


. 제9곡인 은선암(隱仙巖)은 앞에는 맑은 시냇물, 뒤에는 큰 암석이 가로놓여 있으며
그 사이에 석굴이 있는데,
옛날에 신선이 이곳에 머물렀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은선암은 선유동 대표격이라할수있다.
은선 휴게소에 들러 주인아줌씨에게 선유동에 대하여 물어본다.
선유동구곡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에 있는 경승지.
화양동구곡으로부터 북동쪽 14㎞ 지점인 화양천 상류에 있다.
1984년 속리산국립공원으로 편입되었다. 신라시대 최치원이 경치를 감상하면서 바위에
선유동이란 글자를 남긴 데서 계곡의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조선시대 퇴계 이황이 경승에 도취되어 구곡의 이름을 붙였고, 송시열·김창협 등의
학자들이 이곳 경승을 노래한 시문이 전해지고 있다.
제1곡인 선유동문(仙遊洞門)
제2곡인 경천벽(擎天壁)
제3곡인 학소대(鶴巢臺)
제4곡인 연단로(鍊丹爐)
제5곡인 와룡폭(臥龍瀑)
제6곡인 난가대(爛柯臺)
제7곡인 기국암(碁局巖)
제8곡인 구암(龜巖)
제9곡인 은선암(隱仙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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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는 살 만한 곳을 반드시 가려서 택한다.”(공자)
“금강산 이남 가장 빼어난 山水”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선유동을 선택했다.
그는 이곳을 이렇게 설명했다.
“칠성대 서쪽으로 嶺(영) 등성이를 넘으면 外仙遊洞(외선유동)이 되고, 조금 내려가면 파곶이다. 골이 깊숙하고 큰 시냇물이 밤낮으로 돌로 된 골과 돌벼랑 밑으로 쏟아져 내리면서, 천 번 만 번 돌고 도는 모양은 다 기록해낼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금강산 만폭동과 비교하여 웅장한 점은 조금 모자라지만, 기이하고 묘한 것은 오히려 낫다 한다. 대개 금강산 다음으로는 이만한 水石(수석)이 없을 것이니, 당연히 三南(삼남) 제일이 될 것이다.”
이곳은 본래 청주군 청천면의 지역으로 소나무가 무성해 ‘松面(송면)’이라 불렀다. 송면리는 조선 宣祖(선조) 때 朋黨(붕당)이 생길 것을 예언했던 東皐(동고) 이준경이 장차 일어날 임진왜란을 대비,
자손들의 피란처로 지정해 살게 했던 곳이다.
이준경과 이황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
‘솔면’이라고 부르는 송면리에는 이준경이 그 자손들을 데리고 집을 짓고 살았다는 ‘이 동고 터’ 또는 ‘이정승 터’라 불리는 집터가 남아 있다. 그의 자손들이 거처했던 선유동 부근은 다른 지역과 달리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지 않았다. 솔면 서남쪽 삼거리는 청천, 상주, 괴산으로 가는 세 갈래 길이 있다. 솔면 남쪽에는 예전에 숲이 우거졌었다는 숲거리가 있고 솔면의 서쪽에 있는 소는 가래나무가 있어서 ‘가래소’라고 부른다.
화양천 상류에 있는 선유동 九曲(구곡)은 신라 사람 孤雲(고운) 崔致遠(최치원)이 이곳을 逍遙(소요)하면서 선유동이라는 명칭을 남긴 데서 유래된 곳이다. 조선시대 퇴계 이황은 칠송정에 있는 함평 이씨 댁을 찾아왔다가 이곳 비경에 사로잡혀 아홉 달을 돌아다닌 뒤 아홉개의 이름을 지어 글씨를 새겼다.
주자학을 창시한 朱熹(주희)는 성리학의 탐구에 이상적인 장소를 굽이굽이 돌아가는 계곡으로 보았다. 그는 그러한 형세를 갖춘 계곡을 중국 남부에서 발견한 뒤 武夷九曲(무이구곡) 이라고 지었다. 그 뒤 1곡에서 9곡에 이르는 물의 굽이마다 그 모양새에 합당한 이름을 붙인 뒤 성리학의 경지에 비유했다. 이황을 비롯한 조선의 선비들은 그것을 본받아 아름다운 산천에 구곡을 지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이이의 석담구곡과 송시열의 근거지였던 화양동구곡이다.
괴산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이곳은 30m 높이의 커다란 바위에 구멍이 뚫려 있고 바위에 ‘仙遊洞門(선유동문)’이라는 글씨가 음각된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곳에서부터 李退溪(이퇴계)가 이름 지은 선유구곡이 펼쳐져 있다. 바위가 깎아지른 듯 하늘에 솟아 있는 驚天壁(경천벽), 옛날에 암벽 위에 청학이 살았다는 鶴巢岩(학소암)이다. 학소암 위에 있는 바위로 화로처럼 생겨서 燃丹爐(연단로)라고 부르는 이곳은 옛날에 신선이 약을 달여 먹었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臥龍(와룡)이 물을 머금었다 내뿜는 듯이 급류를 형성하여 폭포를 이룬 곳이 臥龍瀑(와룡폭)이고 방석같이 커다란 모양의 바위가 爛柯臺(난가대)다. 바둑판의 형상을 한 커다란 암반인 棋局岩(기국암), 거북같이 생긴 龜岩(구암), 두 바위가 나란히 서 있고 뒤에는 큰 바위가 가로놓여 그 사이에 석굴이 있는 隱仙岩(은선암) 등이 선유동구곡으로, 주위의 수석층암과 노송이 어우러져 세속과는 거리가 먼 이상향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중 난가대와 기국암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서려 있다. 조선 명종 때의 일이다. 한 나무꾼이 도끼를 가지고 나무를 하러 갔다가 바위에서 바둑을 두는 노인들을 발견하고 가까이 가서 구경을 했다. 한 노인이 그에게 “여기는 신선들이 사는 선경이니 돌아가라”고 했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나무꾼이 옆에 세워둔 도끼를 찾았는데 도끼자루는 이미 썩어 없어진 뒤였다. 터덜터덜 집에 돌아오니 낯 모르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누구인가 물었더니 그의 5대 후손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간 날을 헤아려 보니 그가 바둑 구경을 한 세월이 150년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도끼자루가 썩어 있던 곳을 난가대라고 불렀고 노인들이 바둑을 두던 곳을 기국암이라고 부르게 됐다.
그보다 더 재미있는 전설이 서린 곳이 은선암이다. 옛날 하늘에서 선녀가 이곳으로 내려와 목욕을 하고 있었다. 이것을 멀리서 보고 있던 총각 나무꾼이 선녀가 벗어 놓은 옷을 숨겼다. 결국 그 선녀는 돌아가지 못한 채 나무꾼과 살게 되었다. 대부분의 전설들은 나무꾼과 선녀가 아들 딸 잘 낳고 살다가 총각이 감춰 두었던 옷을 내주자 곧바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 은선암의 전설은 선녀가 하늘로 올라가자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깨어 보니 꿈이었고 그 사이 그가 백발의 노인으로 변해 있더라는 것이다.
시간의 무상함이 여러 가지의 전설로 남아 있는 선유동에는 이름난 바위들이 많이 있다. 바위 위에 큰 바위가 얹혀 있어서 손으로 흔들면 잘 흔들리는 흔들바위, 바위에서 물이 내려가는 것과 같은 소리가 들린다는 바위는 ‘울바우’다. 울바우 옆에 있는 바위로 사람의 배처럼 생겨서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바위가 ‘배바우’고, 근처가 모두 석반인데 이곳만 터져서 문처럼 되어 봇물이 들어온다는 바위는 ‘문바우’라고 불린다. 또한 큰 소나무 일곱 그루가 정자를 이룬 칠송정터 등이 이곳 송면리의 선유동을 빛내는 명승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