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왕조사회에서 왕은 의제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대부분의 경우에는 실질적으로도 권력구조의 정점에 서있는 권력집단의 대표자이다. 그러한 왕의 권력이 어떠한 위상과 크기를 가지고 있는가는 당대 정치권력과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왕권을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왕이 권력구조의 정점에서 거의 모든 분야에 관련이 되어 있는 만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요소들은 다양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는 복잡하다. 왕권은 당대의 정치세력 및 정치집단의 분포, 정치구조, 정치운영형태, 정치운영론과 정치에 대한 일반적 관념 등이 얽혀 이루어진 정치적 지형 위에 존립한다. 왕권은 또한 주변 조건이 같다 하더라도 왕의 개인적 정치 역량에 따라 달라진다. 왕권의 위상은 이러한 여러 요인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다. 이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지 않은 채 왕권의 위상과 크기를 논한다면 매우 공소한 논의가 되어버릴 것이다.
왕의 정치적 역량은 크게 보아서 왕 자신이 획득한 조건과 외부로부터 주어진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외부로부터 주어진 조건이란 왕의 부모, 외가, 처가 등 혈연적 출신기반, 그로부터 생겨나는 왕위 승계의 정통성, 즉위시의 나이, 재위기간 등이 있을 것이고, 획득한 조건에는 학문 수련, 정치적 학습을 비롯한 王者 수업의 수준, 그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정치행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혈연적 출신기반, 왕위 승계과정의 정통성과 같은 주어진 조건은 비교적 객관적인 것으로서 왕권의 위상을 살펴보는 데 기초적으로 고려해야 할 조건이다.
19세기 전반, 흔히 세도정치기로 부르는 시기 정치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왕권의 위상이 낮아졌다는 점이다. 18세기 탕평정치기에는 왕이 정치권력행사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던 데 비해 19세기에는 흔히 세도가로 불리는 몇몇 유력한 가문과 그 가문의 중심인물이 그것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근래까지 19세기의 왕권 문제에 대해서는 어린 왕이 등극하였기 때문에 약화되었다는 정도의 지극히 통속적인 설명 외에 본격적인 연구가 없었다.註 001 어린 왕이 즉위한 것이 물론 왕권의 약화에 영향을 주었음은 틀림이 없지만, 그것이 근원적이거나 궁극적인 원인이 아님 또한 자명하다. 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더라도 계속 어린 나이로만 있는 것은 아닐 뿐더러, 경우에 따라서는 어린 나이라 하더라도 왕권을 정상적으로 행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세기에는 왕조사회의 일반적 기준인 적장자 계승 방식으로 왕위 승계가 이루어진 예가 한번도 없을 정도로 왕위 승계 과정이 난맥상을 드러낸다. 어린 왕이 즉위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왕위 승계 과정의 결과이다. 19세기 왕권의 위상을 살펴보는 데는 그러므로 각 왕의 승계 과정과 그 과정에 내재되어 있는 바 왕들의 왕권 행사에 영향을 주는 여러 조건을 검토해 보는 작업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특히 적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예가 없는 19세기 왕들은 그 내외 조상의 구성에서 특징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내외 조상은 왕의 혈연적 기반으로서 정통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그러한 내외 조상의 구성에 나타나는 특징적 면모를 살펴보는 것은 왕권의 특성을 아는 데 도움을 주리라 생각한다. 이 글은 이러한 견지에서 19세기 왕들을 대상으로 그 각각의 왕위 승계과정과 여러 조건, 그 가운데서도 내외 조상의 구성을 살펴봄으로써 왕권의 정통성과 위상, 더 나아가서는 당시 정치의 특성의 일단을 밝혀 보려는 목적을 가지고 썼다.
조선시기 정치사 연구의 기본 사료가 되는 실록이 19세기 순조, 헌종, 철종의 것은 그 내용이 매우 소략하다. 실록이 특히 당시 정국의 추이를 비롯하여 각 정치집단과 인물들의 정치 행위를 동태적으로 밝히는 데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19세기 실록이 소략하다는 점은 이 시기 정치사의 동태적인 측면을 추적하기 어렵게 한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실록 외의 다른 자료들을 발굴하여 이용하여야 할 것이다. 또 정치사의 동태적인 측면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정태적인 인적 구성 관계를 밝히는 것도 정치사를 좀더 깊이있게 이해하는 데 일조한다는 점에도 착안하여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에서 이 글을 쓰는 데는 19세기 실록과 함께 《璿源系譜紀略》을 비롯한 왕실 족보를 참고하여 왕실 및 내외척 인물들의 구성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왕실 족보류는 왕실 구성원과 왕실 관계 내·외척의 구성을 밝히는 데는 일차적인 자료이다.註 002 그 가운데서도 특히 왕의 내외 조상의 구성을 밝히는데 왕실 족보류 가운데 《선원계보기략》에 들어 있는 〈八高祖圖〉를 주로 활용하였다.
- 註 001
- : 18세기와 대원군 집권기 이후 고종대를 대상으로 한 정치사 연구는 있으나, 19세기 전반의 세도정치기 왕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거의 없었다. 윤정애, 〈정치사 연구의 동향과 과제〉 (《조선정치사》 상, 1990, 청년사) 참조. 최근 한국역사연구회 19세기정치사 연구반의 《조선정치사 1800∼1863》 상·하는 이런 공백을 메꾸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왕권의 문제는 본격적으로 다루지 못하였다. 본고는 이 작업의 연장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 註 002
- : 洪順敏, 〈조선후기 王室의 구성과 璿源錄―1681년 (숙종 7) 《璿源系譜紀略》의 편찬을 중심으로―〉(《韓國文化》 11,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1990) ; 〈조선후기 《璿源系譜紀略》 改刊의 추이〉 (《奎章閣》 13, 서울대학교 도서관, 1990).
Ⅰ. 왕위의 승계 과정과 위상 변동
1. 왕실의 구성과 왕위 승계 과정
18세기 후반 영조대 이후 조선의 왕위 승계는 왕의 적장자로 이어지는 왕조 사회의 일반적 기준에 비추어 볼 때 거의 대부분 비정상적인 형태로 이루어졌다. 조선 왕조 27명의 왕 가운데 적장자로서 왕위를 승계한 경우가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대를 뛰어 넘어 할아버지에서 손자로 왕위가 이어지기도 하고, 왕의 직계가 끊어지면 종실의 인물을 맞아들여 왕위를 잇는 경우가 나타나며 더욱이 그것이 세대를 거슬러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왕위 승계 과정상의 이러한 문제들은 19세기 왕들의 정치적 위상을 낮게 만드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영조에서 고종에 이르는 조선 말기 왕의 승계 관계를 정리하면 〈부표 1〉 ‘영조 이후 조선왕위 계서도’와 같다. 이 절에서는 〈부표 1〉과 같이 이어지는 순조에서 고종까지의 왕위 승계 과정과 왕권의 위상 변동을 살펴보기로 한다.註 003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뒤를 이어 왕위 승계 후보자로서 준비를 하던 중 정조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그 준비를 다하지 못한 상태에서 왕위에 올랐다. 순조는 즉위 직전인 정조 24년(1800, 경신) 정월 초하루에 왕세자 책봉례를 행하고 2월에 관례를 행하였다.註 004 그 해에 혼인까지 할 예정이었으나 정조가 갑자기 죽음으로써 혼인은 재위 2년 10월에 가서 하였다.註 005 학문수준에서도 순조는 《맹자》를 막 떼고 《서전》을 처음 공부하는 초보적 수업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註 006 순조는 당시 기준으로 이제 막 어른의 문턱에서 왕이 되었으나 실제로는 성인으로서 행동을 하기에는 부족한 형편이었다. 즉위식을 거행하면서 바로 신료들의 청에 따라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도록 결정되었고, 최고 권력의 대부분을 정순왕후가 장악하고 순조는 거의 아무런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경주 김씨 가문 출신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는 기간에는 벽파 집단이 주도권을 장악하여 남인과 천주교도들을 제거하고, 사도세자의 아들 은언군과 혜경궁 홍씨의 동생인 홍낙임을 처형하는 한편, 시파의 김조순 계열의 기반이 되어 있었던 장용영을 혁파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순조의 정치적 위상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순조 4년 수렴청정이 끝나고 순조가 친정을 하면서부터는 순조 2년 10월 국구가 된 김조순을 중심으로 하는 안동 김씨 가문과 이에 협력하는 순조의 외가 반남 박준원 가문, 풍양 조만영 가문 등으로 정치권력의 주도권이 넘어갔다. 이 시기에도 왕으로서 순조의 권한이 미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재위 8년에 이르러 순조는 국정을 전반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오위도총부를 강화하고 궁궐을 경비하는 군인들의 의장을 위엄있게 정비할 것을 지시하는 등 역할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몇몇 유력 가문으로 정치 권력이 집중되어 있고, 그들을 견제하면서 왕권의 행사를 뒷받침할만한 관료 집단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성공하기 어려웠다. 이 시기 국정을 파악하여 그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시도가 좌절된 후 순조는 34년 죽기까지, 재위기간이 상당히 긴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내 정치적 비중이라는 측면에서는 극히 미미한 존재로 머물고 말았다.
순조에서 헌종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할아버지에서 손자로 왕위가 이어진다는 점에서 영조에서 정조로 이어지는 과정과 겉모양은 같으나 실제 사정은 크게 다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음을 당한 뒤 일찍 죽은 효장세자(진종)의 후사로 정해졌다. 영조 말엽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조처를 옹호하는 집단과 비판하는 집단으로 나뉘었고, 이 문제는 왕에 대한 신하들의 義理 문제로 확대되었다. 정조는 이렇게 왕위 승계자로서 위치가 불안하기는 하였지만, 영조의 비호아래 왕위 후계자로서 수업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영조가 죽기 수개월 전인 영조 51년 10월 영조는 대리청정하라는 명을 내렸다. 홍인한 등이 이를 반대함으로써 우여곡절을 거쳤으나, 12월 7일 경술부터는 정식으로 대리 청정을 시작하였고, 이듬해 3월 병자에 영조가 죽자 25세의 나이로 왕위를 이어받았다.註 007 이러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정조는 손자로서 할아버지의 왕위를 승계하였고, 더구나 할아버지 영조의 뜻을 이어 받는 것과 생부인 사도세자에 대한 효를 다하고 그를 신원하여 추숭하는 문제, 곧 壬午義理 문제로 갈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으로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일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정조는 정치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탕평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註 008
순조는 재위 27년 되던 해에 그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를 하도록 하였다. 이는 순조가 정치 일선에서 실질적으로 은퇴하고 왕권을 거의 효명세자에게 넘겨주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효명세자는 할아버지 정조를 본받아 왕권을 강화하고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대리한 지 3년만에 갑자기 죽음으로써 그 뜻을 펴지 못하였다.
헌종은 네 살 되던 해인 1830년에 아버지 효명세자가 갑자기 죽음으로써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여덟살에 즉위하면서 관례를 행하고, 재위 3년에 혼인을 하였다.註 009 헌종은 즉위 당시 경연에서 당시 학문 체계상 가장 초보 단계인 《소학》을 교재로 하고 있었으며, 재상이 무엇인지, 품계가 어떤지를 물을 정도로 아직 정치적 역량이 지극히 미숙하였다.註 010 이 때문에 당시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고, 왕으로서 헌종의 권한은 축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즉위하기 전에 받은 왕자 수업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개 왕들은 즉위 초에는 왕으로서 제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하고 그 결과 정치적 위상은 낮게 마련이다. 그러나 재위 기간이 늘어감에 따라 정치적 감각을 익히고 정세를 파악하면서 역량을 강화시키게 되고, 점차 위상을 높여가는 것이 보통이다. 헌종도 즉위 당시에는 그 정치적 위상이 낮았으나 재위 전시기를 통하여 그 위상이 한결 같았던 것은 아니다. 헌종이 19세가 되던 헌종 11년 무렵부터 자신이 주체가 되어 국정을 운영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국정운영에 대한 왕 자신의 책임을 강조한 것, 정조, 순조, 익종의 치적을 정리하여 《삼조보감》을 편찬한 것, 정조대 이후 유명무실해져 있던 초계문신제도를 다시 실시한 것, 총융청을 총위영으로 승격한 것 등이 그것이다. 가문 사이의 역학관계에서도 안동 김씨 가문을 견제하기 위하여 자신의 외가인 풍양 조씨 조만영 가문을 상대적으로 더 부양하려 하였다. 그러나 안동 김씨 가문을 비롯한 몇몇 가문으로 정치권력이 집중되어 있고, 그의 변화 시도에 대해 신료들이 전체적으로 반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던 상황에서 그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영조에서 정조, 순조에서 헌종처럼 대를 뛰어넘어 할아버지에서 손자로 왕위가 이어지는 것 자체는 왕위 승계자로서 정통성에 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여러 면에서 실질적으로 왕권을 행사할 자질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왕위를 이어받는 점이 왕권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왕의 직계가 끊어져 왕실 방계의 인물을 맞아들여 왕위를 잇는 경우는 왕위 승계자로서 정통성부터 문제가 된다. 19세기 후반 왕위에 오른 철종과 고종이 이에 해당되는 왕들이다. 철종과 고종의 가계는 왕실의 직계가 아니며, 따라서 그 혈연 관계와 왕위 승계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부표 2〉 ‘영조 이후 조선왕실 구성도’는 19세기 왕실 관련 인물들의 혼인, 혈연 관계와 왕위 승계 관계를 좀더 상세히 살펴보기 위해 〈부표 1〉 ‘영조 이후 조선왕위 계서도’에 비빈과 종실 인물들을 망라하여 작성한 표이다.註 011
철종은 〈부표 2〉에서 보는대로 사도세자와 양제 임씨 사이의 소생인 은언군 인의 손자이다. 그런데 사도세자―은언군에서 전계군―철종으로 이어지는 가계는 영조 연간부터 철종 즉위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파란 만장한 곡절을 겪었다.註 012 은언군 인(1754∼1801)과 은신군 진(I755∼1771)은 영조 47년(1771, 신묘) 軒轎, 籃擧를 타고 그 傔從, 僕隸가 방자한 행동을 한다 하여 영조의 노여움을 사 제주 대정현에 안치되었다.註 013 그러나 《영조실록》을 편찬한 史臣의 말에 따르면 이는 그들 자신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두 척신 洪鳳漢과 金龜柱 사이의 싸움의 여파가 미친 것이라 한다.註 014 은신군은 이 사건의 충격으로 적소인 제주에서 곧 죽었고, 은언군은 풀려났다.註 015
정조대에는 다시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 담이 홍국영과 연결되었다는 혐의를 받아 역모로 몰려 죽었다. 이 이후로 은언군과 그 아들들은 강화에 유배당하였다. 그들은 정조 연간 줄곧 그들에 대해 처벌을 엄히 할 것을 주장하는 신료들과 그들을 끝까지 비호하는 국왕 정조사이의 힘겨루기의 쟁점이 되었다.註 016
순조 원년 이른바 신유사옥이라 불리는 천주교 탄압의 와중에서 은언군의 처 송씨와 상계군의 처 신씨가 周文謨와 연결된 것이 탄로나 賜死당하였다.註 017 이 사건을 계기로 은언군과 그 아들들은 다시 이들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는 신료들의 논란의 쟁점으로 부각되었다.註 018 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는 이들을 처벌하자는 견해에 기본적으로는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선왕 정조가 그토록 비호하던 이들을 함부로 처형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강화 내 다른 곳으로 이배하여 가시 울타리를 둘러쳐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라는 명을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註 019 위리안치되어 있던 은언군은 그의 세 아들 가운데 鐵得을 데리고 그곳에서 도망하려다 적발되어 더욱 날카로운 감시를 받다가 결국 사사당하였다.註 020 은언군이 사사당한 후 그의 아들들은 위리안치된 집에 온돌을 놓아 주는 등 처벌의 강도가 조금 완화된 가운데 유배 생활을 계속하였다.註 021
은언군의 아들들은 순조 12년 朴鍾一 역모에서 그 추대의 대상으로 드러나 계속 신료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는 등 궁지에 몰리었다.註 022 그러나 이 무렵 정치적으로 어느 정도 자기 입지를 마련하였던 순조는 정조가 이들을 보호하였다는 점을 내세워 강력히 비호함으로써 이들은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註 023 순조 17년 11월은 은언군의 첫아들 成得의 죽음을 계기로 순조는 자신의 밀사를 보내어 나머지 두 아들 철득과 快得을 비롯한 여나믄 명의 식구들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註 024 이어 순조 22년 2월 순조는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들이 있는 곳의 가시 울타리를 철거하여 일반민과 똑같이 거주하게 하고, 혼수를 내사에서 내려주어 혼인을 할 수 있게 했다.註 025 이 조치로 두 아들 철득(풍계군 당 1783∼1826)과 쾌득(전계대원군 광 1785∼1841)은 혼인을 하여 순조 24년 철득의 아들 익평군 회(1824∼1863)가 태어나고, 뒤이어 쾌득의 아들들, 회평군 명(1827∼1844), 영평군 욱(1828∼ ) 그리고 元範(철종 1831∼1863)이 태어났다.註 026 철종이 서울 경행방의 전계대원군 사제, 곧 은언군 인의 어머니 양제 임씨의 사제로서 은언군이 살던 집에서 태어난 사실로 미루어 이들은 순조 말년 무렵 어느 때부터는 실질적으로 유배 상태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와 살 수 있었던 듯하다.註 027 그러다가 헌종 7년(1841) 전계대원군이 죽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철종이 11세 되던 헌종 10년(1844)에 온 집안이 다시 교동으로 옮겼다가 10여일 후에 강화로 옮겨 살게 되었다. 철종 행록을 보면 철종이 강화에 있을 때에 동리에 완악하고 패려한 자가 술에 취해 문밖에서 소란을 부리며 오만한 언사를 한 적이 있었으나 철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그를 문제삼지 않았다든가, 어떤 유수가 防守를 위해 조절하는 것이 너무 가혹하므로 집사람들이 이를 고통스럽게 여겼으나 철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그를 승지에 임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강화에서 철종 일가의 생활은 어느 정도 일반민과 접촉은 있으나 강화 유수의 감시를 받는 상태였던 듯하다.註 028
이러한 처지의 원범(철종)을 헌종의 뒤를 이을 왕으로 결정할 때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는 영조의 유일한 혈맥이라는 점이었다.註 029 〈부표 2〉에서 볼 때 영조에서 헌종까지는 5대의 간격이 있고, 헌종 다음 왕이 정상적으로 헌종 아래 세대의 인물이 된다면 영조에서 그와의 세대 간격은 6대에 이른다. 그러할 때 왕을 선정하는 논거가 영조의 유일한 혈맥이라는 점은 정통성이라는 점에서 볼 때 매우 허약한 것이다. 영조의 유일한 혈맥을 찾다보니 헌종보다 한 세대 윗대인 원범(철종)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그 시점에서 원범(철종)이 영조의 유일한 혈맥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 시점에서 영조의 혈맥은 철종 이외에도 철종의 형인 영평군 욱(1828∼?), 은언군과 순조 원년에 천주교도로 죽은 여산 송씨 사이의 소생 풍계군 당의 아들 익평군 회(1824∼1863) 등이 있었다. 이들은 고종 때 만들어진 《선원속보》등에는 서자로 표기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그 때문에 왕위 승계자 후보에서 제외되었던 듯하다.註 030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서자였는가 역시 의문이다. 고종 원년에 만들어진 《선원계보기략》에는 이들이 서자로 표기되어 있지 않다.註 031 영평군은 그 형 회평군 명이 1827년 9월 11일 생이고 그는 1828년 7월 20일 생으로서 생일의 간격이 10개월이 채 못되는 점으로 보아 그 둘은 異腹으로 보이기는 하나,註 032 철종 〈행록〉에 철종이 어렸을 때부터 孝友가 뛰어나서 혹 어떤 사람이 과일을 바치는 경우가 있으면 반드시 먼저 전계대원군에게 진헌하였고, 그 나머지를 회평군과 영평군에게 진궤한 뒤에야 비로소 맛을 보았다거나, 의대를 진헌하면 그 때마다 먼저 회평군, 영평군에게 먼저 증여하여 손수 입혀 주었다는 이야기는 적어도 영평군이 차대를 받는 서자는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註 033 풍계군이나 익평군도 서자라기보다는 여산 송씨가 천주교도로 죽은 것 때문에 후일에 서자로 처리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설사 이들이 서자라고 하더라도 이미 은언군이 사도세자의 적자가 아니기 때문에 철종 역시 기본적으로 적통은 아니라고 하겠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철종이 영조의 유일한 혈맥이기 때문에 왕으로 선택하였다는 논거는 설득력이 취약한 것이다.
철종을 영조의 유일한 혈맥이기 때문에 왕으로 결정하였다기 보다는 입지가 취약한 인물을 왕으로 정함으로써 순원왕후 자신과 자신의 친정인 당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안동 김씨 가문의 지위를 공고히 유지하려는 의도가 더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철종이 헌종이 대통을 계승하면서, 統序로는 헌종이 철종의 윗대 사당 즉 禰(예)가 되나, 倫序로는 순조가 철종의 아버지 즉 考가 되도록 한 것이 그를 말해준다.註 034 결과적으로 철종이 왕이 되면서 왕실의 위계질서에서 공식적으로 철종의 어머니가 되는 순원왕후 자신의 지위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철종은 왕위 후계자의 자리―世子를 거치지 않고 바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19살의 나이로 다음 왕으로 결정되면서야 관례를 행하였고,註 035 재위 2년에 가서야 혼인을 하였다.註 036 그때까지 왕으로서는 물론이고 일반 사족들이 받는 기본 교육조차 받은 바가 없어서 《소학》보다도 더 기초 단계인 《史略》부터 새로 배워야 하는 실정이었다.註 037 당시 기준으로 나이로는 어른이라고 할 수 있으나, 학문적·정신적 수준에서는 아직 미성년이라고 해야할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철종을 순원왕후가 선택해서 왕위에 오르게 했다는 사실은 철종이 왕으로서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기 어렵게 하는 중요한 한 원인이 되었다. 철종이 즉위할 때부터 2년 12월까지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한 기간은 물론이고 철종 재위 거의 대부분의 기간동안 안동 김씨 가문이 정치권력의 핵심을 장악하였다. 재위 10년 무렵부터는 철종도 親政의 경험을 바탕으로 비교적 적극적인 역할을 시도하기는 하나 정국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칠만한 것은 되지 못하였다. 철종은 결국 재위 기간동안 왕실 조상의 묘소나 사당에 제사지내는 등의 典禮 행위 외에 왕으로서 이렇다 할만한 정치적 역할을 해보지 못하였다.
고종은 왕위 승계자로서 정통성에 철종보다도 더 많은 문제를 갖고 왕위에 올랐다. 〈부표 2〉에서 보면 고종의 가계는 사도세자에서 은신군―남연군―흥선대원군―고종으로 이어진다. 은신군은 그 형 은언군과 함께 영조 47년 제주 대정에 유배되었다가 그 충격으로 죽은 사람이다.註 038 그 당시의 나이가 17세로서 아직 혼인하지 않았던 때라 후사가 없었다. 그러한 그에게 순조 15년 12월에 이르러 麟平대군의 5대손, 생원 秉源의 둘째 아들 유학 寀重을 후사로 정하고 이름을 球로, 군호를 南延君으로 정하였다.註 039 남연군 구의 가계는 안평대군에서 福寧君 栯―義原君 爀―鎭翼―병원―채중으로 이어진다. 이 가계는 이미 남연군의 할아버지인 진익이 종친에게는 금지되어 있는 진사를 거쳐 참판에 이르는 벼슬을 했던 것으로 보아 왕실 종친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다.註 040 은신군이나 그 후사로 정해진 남연군이나 당시에는 모두 왕실 종친의 일원으로서 정치적으로나 혈연 관계에서 커다란 흠이 있었던 사람들이다.
남연군은 은신군의 후사로 정해져 종친이 된 후에 몇차례 근종으로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였다거나,註 041 그 하속들이 作奸을 하여 일반민의 재산을 빼앗았다는 등의 논척을 받아 순조 19년에는 削版의 형을 받기도 하였다.註 042 삭판의 형을 받아 자격을 박탈당한 상태가 4, 5년 지속되다가 다시 종친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였다.註 043 그 이후 헌종 7년 2월 그의 아들 흥인군 치응과 흥완군 시응이 가자를 받는 등 그 집안은 종친으로서 지위를 유지하였다.註 044 그러나 그 지위는 왕실과 종친이 미약한 세도정국하에서 그리 대단한 것은 되지 못하였던 듯하다. 헌종 7년 이후 이 집안에 관한 기사, 특히 고종의 아버지 흥선군 이하응에 관한 기사는 국가적 공식 기록인 실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실록에 나올만한 행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듯이 그가 아무런 지위를 갖지 못한채 일반 상민과 똑같은 처지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헌종 13년 2월부터 철종 8년 2월까지, 그리고 철종 11년 11월에 다시 종친부 유사당상직을 맡았었음이 확인된다.註 045 종친으로서의 지위는 유지하고 있었으나, 드러날만한 활동은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남연군의 손자, 흥선군의 둘째 아들인 命福(고종)을 왕으로 정한 사람은 철종 말년 당시 대왕대비였던 익종비 신정왕후이다. 철종이 죽는 철종 14년 12월 경진(8일) 당일에 신정왕후가 명복에게 사위시키라고 명함으로써 고종의 왕위 승계가 전격적으로 결정되었다. 고종 역시 세자를 거치지 않고 바로 왕위에 올랐다. 왕으로 결정되면서 관례를 행하고 즉위하였으며, 재위 3년에 가서야 혼인을 하였다.註 046 이처럼 고종은 즉위 당시 아직 나이가 어릴 뿐만 아니라 그 역시 학문 능력이나 정세 판단 능력에서 미숙한 미성년이었다. 그러므로 즉위 초년에 고종은 신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하에서 왕으로서의 위상과 역할은 거의 찾지 못하였다.
고종은 철종의 뒤를 이으면서도 익종의 대통을 잇는 것으로 정하여졌다.註 047 사위후에 종묘의 혼전 축식에서 고종이 익종, 헌종, 철종과 어떤 관계를 설정한 것인가가 논란이 되었다. 신정왕후는 이 논란을 최종 마무리짓기를, 정조, 순조, 익종, 헌종으로 이어지는 대통이 대행대왕 즉 철종으로 전해졌다가 고종이 이은 것이기 때문에 대통이 두 갈래라는 이견은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고종이 익종을 皇考, 자신을 孝子, 헌종을 皇兄, 자신을 孝嗣, 철종을 皇叔考, 자신을 삼년 복중에는 哀從子, 그 이후에는 孝從子라고 칭할 것을 정함으로써 대통의 주 흐름이 익종―헌종―고종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하고 철종은 從系로 설정하였다.註 048 이는 순조와 순원왕후의 후사로 되어 있는 철종을 종계로 밀어냄으로써 익종 비인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고종이 왕으로 결정되는 과정은 철종이 왕으로 결정되는 과정과 유사하면서도, 왕위 승계의 정통성이라는 점에서는 그보다 더욱 약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철종의 경우는 겉으로나마 영조의 유일한 혈맥이라는 점을 내세웠으나 고종을 세울 때는 선택의 근거를 공개적으로 내세우지도 않았다. 고종(1852∼1919)이 왕이 되는 1863년 당시에는 고종의 친형 재면(1845∼?) 뿐만 아니라 흥완군의 아들로서 흥령군에게 입양한 재원(1831∼1891), 다른 집안에서 흥완군에게 입양한 재완(1855∼?), 흥인군의 아들 재긍(1857∼1881) 등 그 사촌들이 생존해 있었다.註 049 이들은 〈부표 2〉에서 보듯이 입양 관계가 복잡하다. 고종의 친형 재면도 〈부표 2〉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 시점에서는 흥완군에게 입양되어 있었던 것을 고종 원년에 대왕대비의 특교로 다시 흥선군에게로 환속한 것이었다.註 050 흥인군의 아들 재긍은 1863년 당시 12살이었던 고종보다 나이가 어린 일곱살이었다. 이렇게 보면 고종을 왕으로 선택하는 사정을 이해할 만하기는 하다. 그렇기는 하나 그것이 꼭 고종을 왕으로 선택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고종은 왕위 승계의 당위성이라는 측면에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여러 면에서 철종보다도 박약한 것만은 사실이다. 풍양 조씨 조만영 가문 출신의 신정왕후는 안동 김씨 김조순 가문 출신의 순원왕후가 했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내용상으로는 더욱 자의적인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왕위의 승계가 이제는 공적인 성격이 줄고 대왕대비의 개인적 결정에 의존하는 모습을 더욱 강하게 띠게 되었다.
- 註 003
- : 19세기 정국의 추이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는 순조, 헌종, 철종실록과 오수창, 〈정국의 추이〉 (《조선정치사》 상, 청년사, 1990)를 참조하였다. 이후 이미 널리 알려진 내용에 대한 주는 생략한다.
- 註 004
- : 《순조실록》 부록 〈행장〉.
- 註 005
- : 《순조실록》 권4, 순조 2년 10월 신해.
- 註 006
- : 《순조실록》 권1, 순조 즉위년 8월 갑인.
《순조실록》 권 2, 순조 1년 2월 기유.
- 註 007
- : 《정조실록》 부록 〈행장〉.
- 註 008
- : 박광용, 〈蕩平論과 政局의 變化〉 (《한국사론》 10, 서울대 국사학과, 1984).
홍순민, 〈정치 집단의 성격〉 (《조선정치사》 상, 제6장, 1990) pp. 233∼236.
- 註 009
- : 《헌종실록》 부록 〈행장〉 ; 《선원계보기략》 〈총서〉 (규 8645).
- 註 010
- : 《헌종실록》 권2, 헌종 1년 1월 계유.
- 註 011
- : 《조선정치사》 상, 부록의 〈부표 8〉 ‘영조 이후 조선왕위 계서도’를 일부 수정 보완하였다.
- 註 012
- : 은언군가의 행적에 관한 기초적 설명은 이태진·홍순민, (《日省錄》 刀削의 실상과 경위〉 (《한국 문화》 10,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1989)를 참조.
- 註 013
- : 《영조실록》 권116, 영조 47년 1월 신미 ; 2월 임신.
위의 책 권116, 영조 47년 2월 경진.
- 註 014
- : 위의 책 권 116, 영조 47년 2월 정축.
- 註 015
- : 위의 책 권 116, 영조 47년 4월 임오.
- 註 016
- : 주 12).
- 註 017
- : 《순조실록》 권2, 순조 1년 3월 임진.
- 註 018
- : 위의 책 권2, 순조 1년 3월 갑오 ; 4월 신해 ; 4월 신미.
- 註 019
- : 위의 책 권2, 순조 1년 4월 계유.
- 註 020
- : 위의 책 권3, 순조 1년 5월 계묘 ; 5월 갑진.
- 註 021
- : 위의 책 권3, 순조 1년 11월 을유.
- 註 022
- : 위의 책 권15, 순조 12년 3월 병자 ; 4월 정미.
- 註 023
- : 위의 책 권15, 순조 12년 4월 정미 ; 권16, 순조 12년 8월 무신.
- 註 024
- : 위의 책 권20, 순조 17년 11월 기사 ; 12월 계사.
- 註 025
- : 위의 책 권25, 순조 22년 2월 갑진 ; 2월 을사 ; 3월 병오 ; 3월 정미.
- 註 026
- : 《선원속보》 七 권6(규 8401의 2).
〈부표 2〉 영조 이후 조선왕실 구성도 참조.
- 註 027
- : 《철종실록》 부록 〈행장〉.
- 註 028
- : 위의 책 부록 〈행록〉.
- 註 029
- : 《헌종실록》 권 16, 헌종 15년 6월 임신.
- 註 030
- : 《선원속보》 규 8401-2.
- 註 031
- : 《선원계보기략》 七 권20(규 8742).
- 註 032
- : 《선원속보》 규 (8401의 2).
- 註 033
- : 《칠종실록》 부록 〈행록〉.
- 註 034
- : 위의 책 부록 〈행장〉. 〈부표 2〉 영조 이후 조선왕실 구성도.
- 註 035
- : 《철종실록》 부록 〈행장〉 ; 《선원계보기략》 〈총서〉 (규 8645).
- 註 036
- : 《철종실록》권3, 철종 2년 9월 정축.
- 註 037
- : 위의 책 권1, 철종 즉위년 6월 을해.
- 註 038
- : 주 15).
- 註 039
- : 《순조실록》 권18, 순조 15년 12월 기사.
- 註 040
- : 《선원속보》 六 권1 (규 8401의 2). 원종대왕자손록.
- 註 041
- : 《순조실록》 권19, 순조 16년 7월 경신.
- 註 042
- : 위의 책 권22, 순조 19년 12월 계유.
- 註 043
- : 순조 22년 11월까지는 삭판 상태가 계속되었던 듯 수릉관을 다른 사람이 대신하는 것이 보이나, 순조 25년 6월에는 6대조 인평대군의 문집인 《송계집》을 증간하는 일을 추진하여 성공하는 것으로 보아 이때쯤에는 지위를 회복한 듯하다.
《순조실록》 권25, 순조 22년 11월 계미 ; 권27, 순조 25년 6월 정묘.
- 註 044
- : 《헌종실록》 권8, 헌종 7년 2월 기사.
- 註 045
- : 延甲洙, 〈大院君 執政의 성격과 權力構造의 변화〉 (《韓國史論》 27, 서울대 국사학과, 1992) pp. 212∼213.
- 註 046
- : 《선원계보기략》 〈총서〉 (규 8645).
- 註 047
- : 《철종실록》 권15, 철종 14년 12월 경진, “大王大妃殿 命興宣君嫡己第二子(命福) 嗣位”.
《고종실록》 권1, 계해 12월 초8일 경진, “大王大妃曰 以興宣君嫡己第二子命福 入承翼宗大王大統 爲定矣”.
〈부표 2〉의 翼宗에서 ㉖高宗으로 이어지는 굵은 선 참조.
- 註 048
- : 《고종실록》 권1, 고종 즉위 계해 12월 30일, “大王大妃敎曰……欲因沒世不忘之群情 重固舊邦維新之大命 所以定策傳敎中 先定大倫 其曰大統云者 大倫之謂也 若論傳國之統 則正純翼憲四廟之統傳至于大行大王 而主上承之 豈有貳統之疑哉 百世之下 皆當諒予此心矣 其於翼宗 稱皇考 稱孝子於憲宗 稱皇兄 稱孝嗣 於大行大王 稱皇叔考 三年內 稱哀從子 三年後 稱孝從子”.
- 註 049
- : 《선원속보》 七 권5 (규 8401의 2).
〈부표 2〉 영조 이후 조선왕실 구성도.
- 註 050
- : 《선원속보》 七 권5 (규 8401의 2).
2. 왕위의 위상 변동
앞 절에서 살펴본 바 19세기 왕위 승계 과정의 기본적 특징은 왕조 사회의 일반적 왕위 승계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적장자 상속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그 유형은 첫째, 순조에서 헌종으로 이어진 경우처럼 대를 뛰어 넘어 할아버지에서 손자로 왕위가 이어지는 형태와 둘째, 헌종에서 철종, 철종에서 고종으로 이어진 경우처럼 왕의 직계가 끊어져 먼 종실의 인물을 맞아들여 왕위를 잇는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왕위에 오른 왕들은 순조를 빼면 모두 왕위 승계의 정통성이라는 점에 문제가 있는 셈이다. 왕위 승계 과정상의 이러한 문제들은 19세기 왕들의 정치적 위상을 낮게 만드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왕위 승계의 난맥에서 비롯되는 결과로서 19세기 왕들의 개인적 정치 역량은 전반적으로 매우 미숙하였다. 그들이 왕이 될 때의 나이는 순조가 11살, 헌종이 8살, 철종이 19살, 고종이 12살로 모두 10대, 혹은 10대 이전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왕위 승계 후보자로서 정치적 수업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왕이 되었다. 순조는 왕세자로 있던 기간이 6개월, 헌종은 왕세손으로 있던 기간이 4년이었으나 대리청정 등 실질적 왕자 수업은 전혀 해보지 못하였다. 철종과 고종은 그나마 세자 등 왕위 승계 후보자의 위치에 있어 보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왕위를 이어 받게 되었다. 왕이 될 당시 학문 수준도 모두가 초보적 수준의 경전이나 史書를 읽는 정도로 낮은 단계였으며, 모두 미혼에, 성인의식인 관례도 치루지 않은 상태였다. 인격, 학문 수준, 정세 판단 능력 등에서 미숙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정신적·학문적·사회적 미성년이었다.
19세기 왕들은 순조와, 재위 기간이 19세기 후반이어서 이 글의 대상 시기를 벗어난 고종을 제외하면 헌종이 15년, 철종이 14년으로 대체로 짧다고 할 수 있다. 왕이 권력 행사의 주체로서 자기 위치를 잡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재위 기간이 필요하다. 어리고 정치적 역량이 미숙한 왕이라도 얼마동안 왕으로 재위하다보면 정치적 감각과 능력이 커지는 것이 보통이다. 19세기에 순조는 그럴만큼 긴 기간인 34년을 왕으로 재위하였지만, 정치권력이 왕으로부터 세도가로 옮겨져 있는 당시의 정치상황을 타파하지 못하고 말았다. 순조보다 재위 기간이 훨씬 짧은 헌종이나 철종은 그러한 노력을 기울여 볼만큼 성숙하기도 전인 23살, 33살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19세기 전반 세도정치기에는 정치권력이 정치구조의 면에서 외형상으로는 공적인 장치인 관료제, 그 가운데서도 비변사를 통해서 행사되는 형태를 띠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소수의 유력한 가문이 그 비변사를 장악해서 권력행사의 주도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하고 있었다.註 051 이러한 정치상황은 왕권을 매우 미약하게 만드는 외부적 환경이 되었다. 그와 함께 지금까지 이 글에서 보아온 여러 요인에 의해 자신의 정치적 역량 역시 매우 약한 상태에 있었다. 그 결과 19세기 세도정치기 왕권의 위상은 18세기 탕평정치기에 비해서 비교가 되지 않은 만큼 낮아지게 되었다. 탕평정치기에는 왕이 스스로 세도의 주관자를 자임하고, 특히 정조는 신료들보다 정치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월등히 높은 위치에 자신이 서 있음을 강조하였다.註 052 이에 비해 19세기에는 이른바 세도가로 불리는 유력 가문의 대표자가 세도의 주관자로 표방되었다.註 053 이러한 사정은 비단 왕에 대한 인식의 측면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실질적인 왕권의 크기와 위상 역시 눈에 띄게 미약해지고 낮아졌다.註 054 19세기 이전에는 예외적 현상이라고 해야 할 수렴청정이 19세기에는 순조에서 고종까지 예외없이 실시되었던 사실이 그 단적인 예이다.
19세기의 왕권이 18세기에 비해서 이렇듯 약해지고 낮아졌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안에서도 순조에서 헌종, 철종, 고종으로 갈수록 그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순조는 전왕의 아들로서, 헌종은 전왕의 손자로서 왕위를 이어받아 정통성이라는 점에서는 근본적인 결격 사유가 없지만, 철종과 고종에 이르면 왕실의 방계로서 더구나 전 시기에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인물의 후손이라는 점이 승계의 정통성에 결정적인 흠이 되었다. 그들은 마땅히 왕이 될 인물로서 왕위를 이어 받은 것이 아니라, 대왕대비라는 다른 인물의 선택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왕은 체제의 정점이자 최고의 권위를 갖는 존재에서 선택의 대상으로 위상이 점점 낮아져 갔다.
이에 따라 왕으로서 그들의 권한도 점점 작아져 갔다. 순조와 특히 그의 아들로서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 단계에서는 현실 상황을 바꾸어 보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헌종 철종으로 갈수록 그러한 실질적 권한 행사는 줄어들었다. 실질적 권한이 줄어드는 것과 상응하여 헌종과 철종, 특히 철종의 조상에 대한 전례 행사가 잦아졌다. 왕이 陵廟에 행차하는 것은 정조같은 경우에는 단순한 전례 행사에 그치지 않고 그 과정에서 일반민들과 직접 만나 그들의 사정을 청취하는 자리로 삼았다. 정조대에 특히 활발하게 벌어졌던 상언이나 격쟁은 그 대표적인 형태이다.註 055 그에 비해 철종대에도 능묘 행차 등 전례 행사가 자주 있었으나, 상언 격쟁 등 민과의 접촉이 활발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분위기이다.註 056 철종대의 전례 행사는 왕권이 약화되고 그 위상이 낮아져 실질적 권력행사에서 배제된 결과 나타난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전례 행사가 잦아진 것은 왕의 조상이 전왕과 왕비가 아닌 왕실 방계 인물이어서 그 전례의 대상이 많아진 것과도 관계가 깊다. 다른 면에서는 왕권의 정통성이 약화된 현상과 왕권의 약화 현상이 연결되는 접점이기도 하다. 다음 장에서는 왕의 내외 조상의 구성을 살펴봄으로써 왕권의 정통성 문제를 좀더 따져 보기로 한다.
- 註 051
- : 한국역사연구회 19세기 정치사연구반, 《조선정치사 1800∼1863》 상·하, 청년사, 1990).
- 註 052
- : 이태진, 〈朝鮮王朝의 儒教的政治와 王權〉 (《한국사론》 23, 서울대 국사학과, 1990. 8) ; 〈正祖의 《大學》 탐구와 새로운 君主論〉 (《李晦齋의 사상과 그 세계》 대동문화 연구총서 11, 성균관대학교》 1992).
- 註 053
- : 박광용, 〈정치운영론〉 《조선정치사 1800∼1863》 하, 청년사, 1990).
- 註 054
- : 주 51).
- 註 055
- : 한상권, 〈18세기 중·후반의 농민항쟁〉 (《1894년 농민전쟁 연구》 2,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역사비평사, 1992).
- 註 056
- : 철종 연간에 전례 행사가 매우 잦아졌음은 실록을 일별하면 쉽게 감지되는 분위기이다. 이 문제는 전례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방과 궁방전의 폐해, 민과의 접촉 등 여러 문제와 관련있는 것으로 전례의 빈도와 대상 인물 등을 조사하여 별고로 다루어야 할 주제이다.
Ⅱ. 내외 조상과 왕권의 정통성
1. 〈八高祖圖〉의 구조
왕은 국가체제의 최고 정점으로서 왕조사회에서 그 권위는 의제적으로는 불가침의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왕이 권력을 완전히 독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각 시기마다 차이는 있지만, 왕과 길항 관계에 있는 정치세력은 늘 있게 마련이다. 특히 정치집단이 붕당으로 결집되어 정치권력의 상당 부분을 나누어 맡고 있던 붕당정치기와, 이들간의 권력을 둘러싼 갈등이 증폭되는 환국기에는 왕권의 권위는 더욱 제약을 받게 되었다. 더구나 왕위 승계에 난맥상이 나타나고 정통성에 흠이 많은 인물이 왕위를 이어받는 일이 많았던 19세기에는 왕의 권위는 더욱 손상을 입게 되었다. 그에 비례하여 왕의 권위의 존엄성을 확인하고, 그 권위를 높여야 할 필요성은 커졌다. 그런 목적에 따라 실록 등 국가 공식 문서들보다도 더 격을 높여 《선원계보기략》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왕실 관련 문서가 국가적 차원에서 작성·관리되었다.註 057
그러한 문서들 가운데 왕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팔고조도이다. 팔고조도란 어느 개인의 부모, 그 부모 각각의 부모 곧 조부모와 외조부모, 그 조부모와 외조부모 각각의 부모, 이런 식으로 관계 조상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조대는 여덟 쌍이 되는 바 이 범위의 조상들을 하나의 도표로 정리한 것이다. 팔고조도는 일반에서도 만들어졌지만, 특히 왕들의 것은 빠짐없이 작성되었다. 원래는 그 자체 별개의 문서로 작성되었던 것이 《선원계보기략》에 포함되었다. 이렇듯 《선원계보기략》의 팔고조도는 왕과 관련있는 가까운 조상들을 정리한 간단한 도표이지만, 여러 왕들의 것을 종합해 보면 각 왕의 정통성과 관련있는 몇 가지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본래의 작성 의도는 왕의 조상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왕실의 기반을 공고히 하고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려는 데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왕의 가계가 왕실의 방계로 이어지면서 애초의 의도와는 다른 면모를 드러내게 되었다.
팔고조도는 대상이 되는 인물을 맨 밑단에 놓고 고조까지 4대를 올라가며 부모, 그 부모 각각의 부모를 누층적으로 도표화하여 구성되어 있다. 이를 정리하여 도식화한 것이 〈표 3〉 ‘팔고조도 배치도’이다. 〈표 3〉에서 보는 대로 팔고조도에는 본인 외에 4대에 걸쳐 30명의 내외 조상을 대상으로 본인과 그 각각의 대상인물 사이의 관계, 생시에 가졌던 최고 관직 혹은 증직된 관직, 작호, 시호, 본관, 이름 등이 기재되어 있다.
〈표 3〉 八高祖圖 배치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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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인물위의 숫자는 팔고조도에는 본래 없는 것을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필자가 임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아래에서 위로 가면서 붙인 일련번호이다. |
〈표 3〉에서 보는 것처럼 팔고조도에는 본인과의 관계가 어느 한 세대의 조상들은 거의 같게 표현되어 있다. 즉 직계 조상이 1. 고, 3. 조고, 7. 중조고, 15. 고조고, 2. 비, 4. 조비, 8. 증조비, 16. 고조비로 부, 모라는 표현 대신 考, 妣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조상들은 9에서 14까지는 모두 증조부, 증조모로, 17에서 30까지는 고조부, 고조모로 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는 본인과의 관계를 정확히 구별할 수 없다. 〈표 4〉 ‘팔고조도 관계도’는 그 구별을 좀더 정확히 하기 위하여 작성한 것이다. 〈표 4〉의 표기를 위해서부터 읽으면 본인을 기준으로 가까운 세대부터 먼 조상으로 가는 관계가 된다. 예를 들면 20번 부모부모는 아버지의 어머니의 아버지의 어머니, 즉 할머니의 할머니이고, 25번 모부모부는 어머니의 아버지의 어머니의 아버지, 즉 외할아버지의 외할아버지이며, 3번 부부는 아버지의 아버지, 즉 친할아버지, 4번 부모는 아버지의 어머니 즉 친할머니, 5번 모부는 어머니의 아버지 즉 외할아버지, 6번 모모는 어머니의 어머니 즉 외할머니이다.
〈표 3〉과 〈표 4〉에서 번호가 홀수 번은 남성, 즉 본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들이고, 짝수 번은 여성, 즉 어머니나 할머니들이다. 1번과 2번에서 29번과 30번에 이르기까지 바로 옆의 홀수 번과 짝수 번은 부부이고, 3, 5번 부부와 5, 6번 부부에서, 27, 28번 부부와 29, 30번 부부에 이르기까지 바로 옆의 두 칸 사이는 사돈이다. 1―3―7―15번은 본인의 남계 직계 조상들이고 2―5—11―23번은 외가의 남계 직계 조상들이다.
〈표 4〉 八高祖圓 관계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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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팔고조도는 원래는 개개 인물들을 대상으로 별도의 문건으로 작성되었다. 그것이 대상인물의 세대가 내려가면서 계속 작성되었고, 《선원계보기략》에는 이렇게 작성된 여러 왕들의 팔고조도가 모두 모아져 있다. 팔고조도들을 합해 보면 정상적인 경우, 다시 말해서 어느 대상인물의 아들이 다음 대상인물이 되는 경우에는 세대가 내려감에 따라 각 인물들의 팔고조도상에 기재된 위치가 다음과 같이 규칙적으로 이동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현 대상인물의 아들이 새 대상인물이 됨에 따라 〈표 4〉‘팔고조도 관계도’에 나타난 관계의 맨 앞에 ‘父’자가 더 추가된다. 현 대상인물의 1. 부―아버지는 3. 부부―할아버지가 되고, 3. 부부―할아버지는 7. 부부부―증조 할아버지, 7. 부부부―증조 할아버지는 15. 부부부부―고조 할아버지가 된다. 2. 모―어머니는 4. 부모―할머니가 되고, 4. 부모―할머니는 8. 부부모―증조 할머니, 8. 부부모―증조 할머니는 16. 부부부모―고조 할머니가 된다. 1→3→7→15, 2→4→8→16순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마찬가지 원리로 5→9→17, 6→10→18, 11→19, 12→20, 13→21, 14→22 순으로 이동한다. 현 대상 인물의 부인은 아들이 새 대상인물이 됨에 따라 그 어머니로서 2번에 기재되고, 이와 관련하여 그의 조상들, 곧 표에서 보면 왼편 반쪽의 번호 5, 6, 11, 12, 13, 14, 23, 24, 25, 26, 27, 28, 29, 30에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동시에 맨 윗단의 번호,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에 기재되어 있던 인물들은 모두 탈락된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 〈표 5〉 팔고조도 세대 이동표와 같이 된다.
〈표 5〉 팔고도조 세대 이동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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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註 057
- : 주 2) 참조.
2. 국왕 내외조상의 門地
왕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가 왕위를 승계할 때는 팔고조도의 기재 내용이 위와 같이 규칙적으로 변화하며, 한 사람의 팔고조도는 한 가지만 작성하면 된다. 그러나 대상인물이 왕의 아들이 아니거나, 왕비 소생이 아닌 경우에는 팔고조도 역시 불규칙적인 변화를 하며, 전 왕과, 왕비를 부모로 한 팔고조도 외에 생부나 생모를 기재한 별도의 팔고조도를 더 작성하게 된다.
왕과 왕비 소생으로서 왕위를 승계한 경우가 매우 적은 조선왕조에서는 각 왕의 팔고조가 하나만 작성된 경우가 매우 적다. 특히 왕위 승계에 난맥상이 나타나는 18세기 이후에는 거의 모든 왕들마다 팔고조도를 두개씩 만들었다. 〈표 6〉 ‘순조―고종 팔고조도 축약표’는 순조에서 고종까지 왕들의 팔고조도 가지수와 그 가운데 부계와 모계의 직계 조상, 팔고조도상에서 1―3―5―7, 2―5—11―23만을 뽑아 정리한 것이다. 〈표 6〉에서 보는 것처럼 순조에서 고종까지 네 왕과 왕으로 추존된 익종을 합한 다섯 사람의 대상자 가운데 팔고조도가 하나인 사람은 익종과 헌종 두 사람 뿐이다.
순조의 아버지는 전왕 정조이지만 생모가 왕비가 아닌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라서 모후인 후의왕후를 妣로 하는 것과, 생모 수빈 박씨를 어머니로 하는 것 두 가지가 작성되었다. 철종은 앞에서 말한대로 순원왕후에 의해서 순조의 후사로 장해져 왕위를 승계하였기 때문에 순조와 순원왕후를 고, 비로 하는 것과 생부, 생모인 전계대원군, 용성부대부인 염씨를 고, 비로 하는 것 두 가지가 작성되었다. 고종도 철종과 같은 방식으로 익종의 후사로 정해져 왕위를 승계하였기 때문에 익종과 신정왕후를 고, 비로 하는 것과 생부, 생모인 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 민씨를 부, 모로 하는 것 두 가지가 작성되었다.
〈표 6〉 순조―고종 八高祖圖 축약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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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 원년판 《선원계보기략》(규 No. 8645)의 각 왕 팔고조도를 근거로 작성하였음. * 일반적으로 부르는 호칭을 주로 썼으나 차이가 있는 것이 있음. 예를 들면 정종은 광무 3년(1899)에 정조로 묘호가 개칭되어 흔히 그렇게 쓰고 있으나, 여기서는 본래의 호칭을 썼음. |
팔고조도가 두 가지 작성되었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왕과 왕비 소생이 아니기 때문이며, 결국 그것은 왕위 승계의 정통성에 흠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표 6〉에서 보는 대로 아버지가 왕이 아닌 왕들, 즉 철종, 고종의 경우, 이들이 모두 한결같은 것은 아니지만, 전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점이 왕권의 정통성에 상당한 제약 요인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익종은 순조와 순원왕후의 소생으로서 팔고조도는 하나이지만 나중에 추존되어 왕으로 된 것일 뿐 실제로 왕은 아니었으므로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헌종은 익종과 신정왕후의 소생으로서 익종이 왕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팔고조도는 하나가 작성되었지만 익종이 실제 왕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또한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왕위 승계의 정통성 자체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지만, 전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실제 왕권의 확보와 행사에 상당한 한계를 가져 왔다고 할 수 있다.
혈연을 매개로 한 신분제가 강력한 사회 구성 원리로 작용하던 전근대 사회에서는 어느 개인의 門地가 그의 정치적 입지 확보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18, 19세기 조선 사회에서는 가문의 정치적·사회적 비중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왕실은 여늬 사대부가와는 구별되는 특수한 가문이고 따라서 왕은 일반 사족들과 똑같이 문지를 따지지는 않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왕 역시 문지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왕의 부모가 어떤 사람인가가 왕권의 정통성에 영향을 준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철종의 친계로서 장헌세자―은언군―전계대원군으로 이어지는 가문처럼 정치적으로 처벌을 당하였고 심지어 역적으로 몰린 사실이나, 고종의 친계로서 장헌세자―은신군―남연군―흥선대원군으로 이어지는 가문처럼 정치적 결격 사유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여기에 더하여 남연군이 실질적으로는 왕실과의 혈연적 근친관계가 멀다는 사실은 철종과 고종 왕권의 정통성에 커다란 한계로서 작용하였다.
이러한 왕의 부계뿐만 아니라 모계 역시 왕권의 정통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왕비 소생이 아닌 왕들은 그 생모의 문지가 은연중에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이전에도 이미 경종이 남인계의 희빈 장씨 소생으로서 그 정치적 색채 때문에 서인, 노론이 주도하는 숙종 후반기의 정국에서 정치적으로 상당히 곤란한 처지에 있었던 것이나, 영조가 미천한 숙빈 최씨의 소생으로서 그가 그 점에 대해 줄곧 자격지심을 갖고 있었고, 그것이 그의 정치적 행태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것은 좋은 예이다. 정조는 생모 혜빈 홍씨가 세자빈이며, 또 그 출신 가문 역시 당시 당당한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는 풍산 홍씨이다. 이런 경우에는 왕권의 정통성 자체에는 커다란 문제가 없다. 영조 말년에서부터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 처벌의 당위성 문제를 둘러싸고 정치집단이 시파와 벽파로 나뉘었을 때 정조의 외조부인 홍봉한은 시파의 중심 인물로서 정치적으로 정조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다.註 058
순조도 생모 수빈 박씨가 왕비는 아니었지만 반남 박씨 박준원 가문 출신으로서 그 외조부 박준원이 순조대 세도정국에서 안동 김조순가와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순조 역시 생모의 문지 때문에 정치적으로 제약을 받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註 059 순조 2년 11월 당시 대왕대비였던 정순왕후가 정조의 딸이자 순조의 유일한 누이인 귀주를 숙선옹주로 봉작하면서 그 생모 가순궁에 대해서 양반으로서 빈으로 들어온 경우 중에서도 특히 친영만 하지 않았을 뿐 육례를 갖추었음을 강조한 데서 보듯 수빈 박씨는 그 입지 면에서 다른 빈궁들과는 다른 점이 컸다.註 060
이에 비해서 철종의 생모 용성부대부인(1793∼1834)은 매우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서 철종의 정통성에 상당한 장애 요인이 되었다. 용담 염씨는 19세기에 문과 점유율이 1% 이상인 성관에도 들지 못하는 성관이다.註 061 그 중에서도 용성부대부인의 친정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강화에 있는 장적의 본관을 용담에서 파평으로 바꾼 것이 탄로나 그 행위를 한 廉宗秀가 참수당하였다. 이에 따라 철종의 생모의 작호가 ‘鈴原府大夫人’에서 ‘龍城府大夫人’으로 바뀌었다. 이는 철종 생모의 친정가가 매우 한미한 가문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철종 자신도 이 일을 부끄럽게 여기었다.註 062 이러한 사실은 왕의 외가로서 격이 크게 떨어지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왕권의 정통성에 흠이 되었다.
왕의 외가의 문지는 외조부 직계의 문지뿐만 아니라, 외가 계열의 고(증)조부를 보아도 어느 정도 나타난다. 팔고조도에서 25번 모부모부, 곧 왕의 외조부의 외조부와 13번 모모부와 그 아버지인 27번 모모부부, 곧 외할머니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29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등도 왕의 먼 외가로서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친다. 〈표 7〉 ‘순조―고종외가 계열의 고(증)조부’는 순조에서 고종까지 이러한 왕의 외가 계열의 고(증)조부를 정리한 것이다.
〈표 7〉 순조―고종 외가 계열의 고(증)조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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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표에서도 철종의 생모 용성부대부인의 아버지의 외할아버지 金東岳과 용성부대부인의 외할아버지 池右英이 학생으로 표기되어 있어 생시에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으며, 더구나 그 27번 용성부대부인의 외증조부나 29번 용성부대부인의 외할머니의 아버지는 확인조차 되지 않은 상태로서 다른 비빈의 외가 계열의 고, 증조부의 사회적 지위에 비해서 대단히 한미하다는 점이 확인된다.
팔고조도에 나타난 왕의 내외조상의 구성에도 19세기 왕들의 정치적 위상이 반영되어 있다. 팔고조도에는 앞 장에서 살펴본 바 왕의 아버지가 전 왕이 아닌 데서 생겨나는 정통성의 문제가 그대로 나타난다. 이에 더하여 팔고조에는 왕의 모계 조상의 구성과 그 문지가 나타나 있다. 철종과 고종은 그 생모는 물론 모계 조상들의 문지도 낮아 왕으로서 위상이 낮았던 그들의 처지를 보여주고 있다.
- 註 058
- : 홍순민, 〈정치집단의 성격〉 (《조선정치사》 상) pp. 247∼248 및 부록 〈부표 16〉 풍산 홍씨 가계도 참조.
- 註 059
- : 홍순민, 〈정치집단의 성격〉 (《조선정치사》 상) p. 248 및 부록 〈부표 17〉 반남 박씨 가계도 참조.
- 註 060
- : 《순조실록》 권4, 순조 2년 11월 갑신.
- 註 061
- : 남지대, 〈중앙정치세력의 성격〉 (《조선정치사》 상) p. 171.
- 註 062
- : 《철종실록》 권13, 철종 12년 11월 경인 ; 신묘.
맺음말
19세기 세도정치기에는 왕권이 매우 약해지고 왕의 정치적 위상이 낮아진 것으로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그 원인과 구체적 실상에 대한 연구는 매우 적어 어린 왕이 즉위하였기 때문이라는 통념이 아직도 불식되지 못하고 있다. 19세기에는 대체로 어린 왕이 즉위하였다는 사실 자체는 크게 틀린 것이 아니나, 그 사실만으로 왕권의 약화와 위상 저하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왕조사회에서 왕은 권력구조의 정점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한 왕의 권한과 위상을 살펴보는 데는 따라서 여러 변수를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기초적인 요인 가운데 하나가 왕이 태어나 성장하고 왕위를 승계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부여받거나 획득하는 왕 개인의 역량이 있다.
19세기 왕들은 이러한 왕위 승계 과정에서 볼 때 적장자 계승이라는 당시 기준에 비추어 거의 모두가 비정상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왕위 승계가 순조에서 헌종처럼 할아버지에 서 손자로 세대를 뛰어넘어 이루어지거나, 헌종에서 철종, 철종에서 고종처럼 그러한 흐름도 끊겨서 방계의 인물이 선택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러한 비정상적인 왕위 승계로 인해 왕권의 정통성에 문제가 생겼고, 왕 개인으로 보아서도 역량이 미숙한 인물들이 왕위를 잇게 되었다. 19세기 왕들은 모두 10대, 혹은 10대도 못된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며, 그때 대개가 미혼에 관례도 치루지 않은 상태였으며, 학문 수준도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 미성년들이었다. 또 순조나 고종처럼 재위 기간이 30년이 넘게 오래인 경우가 없지 않으나, 헌종과 칠종은 15년 내외로 짧은 편이었다. 그 결과 헌종, 철종처럼 재위 기간이 짧은 왕들은 물론이거니와 순조조차도 왕으로서 제 위치를 잡고 왕다운 역할을 거의 해보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이러한 내외 요인은 19세기 왕권을 18세기 탕평정치기에 비해 약하게 할 뿐 아니라, 19세기 내에서도 점점 약해지게 하는 데 한 요인이 되었다. 순조와 헌종은 그래도 왕위 승계의 정통성이라는 면에서 커다란 문제가 없었으나, 철종과 고종은 그 점에서부터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철종, 고종이 왕이 되는데 이르러서는 왕은 이제 권력구조의 정점에 서 있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닌 피택의 존재로 전락하였다. 19세기의 순조부터 고종에 이르는 네 왕은 모두 처음부터 왕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하지 못하고 수렴청정이라는 대행체제를 거침으로써 정상적인 행사에 근본적인 제약을 받았다. 이는 외부적으로는 당시 세도가가 권력의 핵심을 장악하고 있는 권력구조에 의해 크게 규정되는 것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왕위 승계의 정통성이라는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왕의 정통성에 영향을 미치는 형식적 일차 요인은 전왕의 적장자 여부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신분제가 지배하는 전근대 사회에서 신분을 매개하는 가장 기본적인 혈연집단인 가문은 중시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17세기 이후 조선에서는 가문의 비중이 점점 커져 갔다. 19세기 세도정치기에 이르러서는 가문이 정치집단 형성의 주요 요인이 되고, 정치권력이 몇몇 유력한 가문으로 집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수하기는 하지만 하나의 가문인 왕실과 그 대표자인 왕의 위상은 내외 조상의 문지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왕이 전왕의 적장자가 아니고, 방계 출신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할 때 왕의 부계만이 아니라 모계 조상들의 문지 또한 부차적이기는 하지만 왕위의 위상과 왕권의 강약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었다.
이러한 내외 조상들을 정리하여 도표화한 팔고조도를 분석해 본 결과 왕으로서 권한이 작고, 위상이 낮았던 철종과 고종은 내외 조상의 문지에서도 다른 왕들과는 두드러지게 한미하였다. 왕권의 크기 및 왕의 위상과 내외 조상의 문지는 상당히 밀접한 상관관계를 드러내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내외 조상의 문지가 한미하다는 것은 왕의 정통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왕권을 약화시키고 왕의 정치적 위상을 낮게 만드는 데 한 가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요인들이 외형적 빌미가 되어 수렴청정같은 왕권의 대행체제가 자주 이루어졌던 것이다.
왕권이 강한 것이 반드시 권력이 공정하게 행사되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당대의 기준으로 보면 대체적으로 그럴 개연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에 왕권이 약해지고 왕의 위상이 낮아짐으로써 다른 대극에서는 몇몇 유력한 가문이 득세를 하게 되었다. 이는 결국 공적인 국가권력이 사권화하고, 국가 관료기구의 권한과 역할이 약해지면서 가문이 부상하는 현상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정치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권력 집단은 수구성이 커지고 시대적 과제 해결에 경색된 대응만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권력집단의 행태는 이 시기 민의 반발과 저항이 활발해진 데 따른 결과이면서 동시에 민의 저항을 더욱 촉진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왕권 문제는 이러한 당시 사회의 여러 측면과 연결시켜 생각해야 할 주제이다.
이렇듯 왕위 승계과정과 개인적 역량, 그리고 내외 조상의 문지에서 비롯되는 왕의 정통성과 같은 문제는 왕권의 강약, 왕의 정치적 위상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당대 정치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한 가지 측면이다. 이 문제는 그러나 그 자체로서 끝나는 것은 아니고 다른 여러 요인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더 폭넓고 깊이있게 밝히기 위해서는 더 넓은 범위의 왕실 내외척의 구성과 역할, 이를테면 인사권, 병권, 경제력, 정책 결정권과 같은 구체적인 정국에서 차지하는 왕권의 크기와 위상, 민의 정치적 등장과 저항으로 표현되는 시대적 과제 해결에 대한 왕의 역할과 한계 등을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출처 :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글쓴이 : 樂民(장달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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