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사지

미륵의 용화 세계가 펼쳐질 그곳, 가야산

phllilp7 2017. 12. 1. 07:14

<미륵의 용화 세계가 펼쳐질 그곳, 가야산>


상가리미륵불 고려시대

백제시대 가야사로 시작한 가야산의 절집은 고려시대 정점에서 조선시대 중기 이후부터 쇄퇴하게 된다.

전성기를 누리던 내포 지역의 불교는 고려 말 잦은 왜구의 침입에 의한 문화재 약탈과 사찰의 소실로 고려 전기의 화려함이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내포 지역이 가진 개방성과 풍요는 선진 문물의 수용에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해상을 통한 왜적의 침입이 극심하였던 점은 그 개방성의 양면을 보여준다. 왜구의 침입뿐만 아니라 자연 재해, 질병에 따른 고려 말의 혼란은 서산 지역 민중들 사이에 미륵 신앙(彌勒信仰)이 성행하게 하였다. 이 지역의 민초들은 공동으로 미륵불을 세우고, 미륵불에 공양할 침향을 땅에 묻어두면서 자신들을 구원하여 용화 세계로 이끌어줄 미륵을 기다렸다. 가야산 주변의 고을에 세워진 해미매향비, 안국사지 매향암각, 덕산매향비 등은 당시 민중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것이다.

 

 

안국사지

<왜구토벌사 - 가야산의 가야사는 해미와 인접한 해안지역에 위치하여 왜구의 출몰에 약탈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한다.

왜구토벌사 1377년의 기록에 해미을 거처 도주하는 왜구가 면천에서 가야산의 가야사로 침입하는 기록이 있다.

당시 왜구는 해미에 상륙해 개심사, 보원사 그리고 당진을 거쳐 면천 그리고 가야사를 침탈했다.

결성지역으로 해안선이 연결되는 홍성도 왜구에 침탈 당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문화재를 약탈되었다.

당시 기록에는 수시로 해미일대가 침탈되어서 태종이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을 설치했다.(1418)

태종은 세종(충녕대군)과 함께 14162167,0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도비산 일대에서 사냥몰이 강무를 했다>

 

1958년 서산마애삼존불

이와 함께 실질적으로 용화 세계를 이끌어줄 미륵불의 형상을 새겨 가야산과 그 인근에 조성하였다. 운산 용현리 미륵불상, 운산 미평리 미륵불상, 해미 반양리 미륵불상, 해미 조산리 미륵불상, 해미 황락리 미륵불상, 해미 산수리 미륵불상, 해미 대곡리 미륵불상, 덕산 사동리 미륵불상, 덕산 신평리 미륵불상, 고덕 석곡리 미륵불상, 덕산 상기리 미륵불상 등 많은 불상은 당시 이 지역에 미륵 신앙이 얼마나 성행하였는지 잘 보여준다. 바로 가야산은 567000만 년이라는 먼 미래에 하생·성불하여 민중들을 구제할 희망불이 용화 세계, 즉 이상 세계를 만들어낼 곳이었던 것이다.

<기록과 같이 서해안지역 대부분이 왜구의 침입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근 해미읍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을 설치한다.

해미와 접해 있는 도비산은 부석사가 있는 산으로,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고려 시대 왜구가 훔쳐간(1370년을 전후) 대마도 관음사 불상이 바로 부석사에 있었다.

1753년 가야산을 여행한 예헌이철환은 가야산일원을 3차례에 걸처 여행하며 가야산일원의 사찰 위주로 상산삼매라는 기록을 남긴다.

개심사

상산삼매에는 가야사의 금탑이 화마에((임진왜란으로 159212, 이여송이 이끄는 대군이 들어온 이후 16009,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많을 때는 10만여 명의 명군이 조선에 주둔했다.오희문(吳希文)?���쇄미록(?���尾錄)?���에서 당시 명군 주둔지 부근의 백성들은 낮에는 숲에 숨고, 밤에만 이동한다고 적고 있다. 바로 명군의 약탈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훼손되어 스님들이 석회을 이용하여 임시로 수리하였다고 기록한다>

 

조선이 개국한 후에 내포 지역의 불사는 점차 쇠퇴하고 민간 신앙으로서 민중의 종교로 자리하였다. 억불 숭유에 따른 탄압 및 왕실과 중앙 정부의 지원이 끊어지자 대규모 사찰을 유지할 수 없었다. 조선 전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동안 가야산을 위시한 내포 지역의 사찰은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실제로 남아 있는 사찰 역시 10여 칸이 되지 않는 소규모인 경우가 대다수였다는 점은 운영의 어려움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다만 등촉계(燈燭契)가 만들어진 개심사(開心寺), 추사 김정희(金正喜) 집안에서 중건한 화암사, 고종과 대원군의 지원으로 창건된 보덕사 같은 몇몇 사찰의 경우에는 외부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번창할 수 있었다.

 

18세기 가야산여행기 상산삼매

내포 불교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현대에 이르러 선종을 중흥시킨 대선사 경허(鏡虛), 일제 강점기에 만해 한용운(韓龍雲)과 함께 일본 불교화에 강하게 맞선 만공(滿空) 월면(月面) 등 걸출한 승려들을 배출함으로써 내포 불교의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등촉계(燈燭契) - 부처 앞에 등촉을 켜려고 모으는 계

 

불유(佛油)| 조선 종교의례 용어사전

사찰의 불전(佛殿)을 밝히는 데 쓰이는 기름.

개설

불유(佛油)는 부처를 공경하여 예배를 드리거나 사찰의 법당을 밝히는 데 쓰이는 기름을 가리킨다. 넓은 의미로는 공양을 의미하기도 하고, 어두운 곳을 밝히는 등촉(燈燭)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대개 불교에서 등불은 지혜·교화 등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에는 등촉을 마련하기 위해 일반인의 시주를 유도하는 모연(募緣) 활동을 벌이는가 하면, 불교계 내에서 계()를 결성하여 자체적으로 조달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사찰에서 등불은 부처에게 올리는 공양물(供養物) 가운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부처에 대한 공경을 드러낼 뿐 아니라 중생의 번뇌를 소멸시킨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등에는 생사(生死)의 험난한 길을 비추고, 무명(無明)의 두터운 밤을 깨뜨린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그 때문에 조선시대 불교계에서는 불유를 마련하기 위한 모연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1468(세조 14)에 승려 수미(守眉)는 왕에게 글을 올려, 여러 승려와 재가(在家) 신자의 무리인 사장(社長)이 원각사(圓覺寺)에서 쓸 불유를 모연한다고 하면서 여러 고을에 폐를 끼친다고 아뢰었다. 생업이 없는 남녀가 돌아다니면서 모연을 핑계로 재물을 모금해 생계를 유지하는 까닭에 민간에 폐를 끼친다고 지적한 것이다. 이에 세조는 내섬시(內贍寺) () 손소(孫昭)를 보내 국문하게 하였다[세조실록1454]. 여기에서 불유를 모연한다는 표현을 쓴 것은 불단의 등불이 부처에게 바치는 대표적인 공양물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불유는 승려들이 사찰 소유의 토지에서 규정 이상의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구실이 되기도 하였다. 1485(성종 16)에 승정원에서는, 당시 승려들이 사찰 소유의 토지를 백성들에게 빌려 주고 토지세를 거두어들일 때 불유 값, 청소비, 자릿세, 혹은 심부름에 대한 대가 등의 명칭으로 여러 가지 물건을 더 거두어 민폐가 적지 않다고 지적하였다. 그런 까닭에 역대 왕의 명복을 비는 능침사찰(陵寢寺刹) 이외에는 사찰 소유의 토지세를 영구히 없앨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왕은 토지세를 이미 삭감한 적이 있어 더 이상 내릴 수 없다며 허락하지 않았다[성종실록1676].

 

조선후기 불교계에서는 등촉을 매개로 사원경제를 활성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승려와 신도들이 계를 결성하여 사원경제를 유지해 나간 것이다. 계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일정 기간 동안 일정한 액수의 금전을 내어 서로 돕거나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는 모임이다. 이른바 등촉계(燈燭契)는 불전을 밝히는 등촉을 마련하기 위한 계로, 등촉의 다른 이름을 따서 장명등계(長明燈契)라고도 하였다. 통도사(通度寺오어사(吾魚寺) 등 크고 작은 사찰과 암자에서 등촉 마련을 위한 계를 결성하였다. 모연 활동에서는, 등촉은 번뇌와 무명을 광명으로 이끈다고 그 의미를 설명하고, 등촉을 시주하면 조상이 극락왕생하고 진리를 밝히게 될 것이라며 그 공덕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18세기 말 실상사(實相寺)실상사법전등촉계서(實相寺法殿燈燭契序)에 따르면, 출가자와 재가 신자가 함께 참여하여 계금(契金)을 마련해 등촉의 재원(財源)을 시주하였다고 한다.

 

한편 같은 글에 "지금 암자는 근근이 이어 가지만, 사찰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이 없어 아침저녁의 예불에도 법당은 깜깜하고 부처님의 형상도 어둠 속에 묻혀 있다."라는 내용도 보인다. 이처럼 불유는 불전을 밝히는 빛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부처에게 공양을 하는 물품이라는 의미로 자주 쓰여졌다.

 

가야사지삼층석탑(보덕사)

참고문헌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이재창, 한국불교사원경제연구, 불교시대사, 1993.

채상식, 고려후기불교사연구, 일보각, 1991.

홍윤식, 한국불교사의 연구, 교문사, 1998.

한상길, 조선후기 사찰계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