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錦江水運과 浦口市場圈*
고 동 환**
Ⅰ. 머리말
Ⅱ. 錦江水運과 浦ㆍ津의 발달
1) 금강 수운의 조건
2) 포구와 津渡의 발달
Ⅲ. 錦江流域의 場市와 浦口市場圈
1) 금강유역 장시의 발전과 포구장시
2) 포구시장권의 구조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조선후기 시장은 도시시장, 농촌시장, 포구시장, 해외시장으로 구분된
다. 시전상인과 난전상인을 중심으로 한 도시시장과 장시를 중심으로 한
농촌시장에 대한 연구에 비해, 포구시장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1) 최근에 들어 조선시대 교통과 상품유통의
* 이 논문은 한국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지원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
(KRF-2004-072-AM2007)
**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1) 조선시대 시장과 시장권에 대한 연구동향에 대해서는 고동환,「상품유통경
제의 발전」『한국역사입문②-중세편』풀빛, 199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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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에서 차지하는 水路와 海路의 중요성이 재인식되면서 포구시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이들 연구도 전체적인 포구중심의 상품유
통에 관심을 두었을 뿐, 지역별 포구시장권의 내용에 대해서는 연구가
심화되지 못한 형편이다.2) 이러한 사정 때문에 기왕의 시장권에 대한 분
석은 전적으로 장시망에 의존하여 이루어졌다. 즉 邑底나 감영 등 주로
행정중심지와 이를 연결하는 육상교통로를 기반으로 한 장시간 위계를
확정함으로써 시장권 분석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러한 연구들에서는 육
로와 수로의 차별성이나, 수로를 통해 형성되는 포구시장권에 대해서는
소홀하게 취급될 수 밖에 없었다.3)
이러한 연구상황에 유의하여 본고에서는 錦江이라는 수로를 통해 형
성되는 포구시장권을 살펴보고자 한다. 錦江유역은 한반도 서남부에 위
치한 곡창지대로서, 18세기 이래 연안 각 포구들이 江鏡을 중심으로 서
로 유기적인 관련성을 가지면서 하나의 상품 유통권을 이루고 있었다.
이중환은『擇里志』에서 “錦江의 근원은 비록 멀지만, 공주 동쪽은 물이
얕고 여울이 많아 배가 통하지 못한다. 부여, 은진에서 비로소 바다 조수
2) 그간 포구시장을 중심으로 한 연구를꼽으면 다음과 같은 연구를 들 수 있다.
고동환,「18, 19세기 외방포구에서의 상품유통발달」『한국사론』13, 1985.
이영호,「19세기 은진 강경포의 상품유통구조」『한국사론』15, 1986.
고동환,「포구상업의 발달」『韓國史市民講座』9, 일조각, 1991.
고동환,「조선후기 船商活動과 浦口間商品流通의 양상-漂流關係記錄을
중심으로-」『韓國文化』14, 1993.
고동환,「조선후기 商船의 항행조건-영호남 해안을 중심으로-」『한국사
연구』123, 2003.
3) 충청도지역의 장시망과 상품유통을 치밀하게 분석한 이헌창의 연구(이헌창,
「朝鮮後期忠淸道地方의 場市網과 그 變動」『經濟史學』18, 1994)에
의하면 충청남도의 시장권은 둔포를 중심으로 한 북부지역, 예산 및 서해안
지역, 강경을 중심으로 하는 금강연안지역으로 대별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시장권 구분을 통해 수로교통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기는 하지만, 개별 시
장권을 형성하는데 수로교통이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흡함이 많이 남아있다.
조선후기 錦江水運과 浦口市場圈103
와 통하여 백마강 이하 진강일대는 모두 배편이 통한다. 은진 강경은 충
청도와 전라도의 육지와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 금강 남쪽 들 가운데 하
나의 큰 도회가 되었다. 바닷가 사람과 산골 사람이 모두 여기에서 물건
을 내어 교역한다”4)라고 하여 금강이 전라도와 충청도 남부지역을 연결
하는 상품유통로로 중시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전근대 철도교통이 놓
이기 이전까지 가장 우월한 교통수단이 뱃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금
강유역의 시장권의 형성에도 금강의 수로가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
을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금강유역의 포구시장권 분석을 위해 금강의
수로상황과 그 주변에 발달한 포구와 나루들을 살피고, 이들과 금강연안
에 설치된 장시의 관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금강유역 포구시장권이 어떻
게 형성되었고, 그 구조가 어떠했는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Ⅱ. 금강 수운과 浦․津의 발달
1) 금강 수운의 조건
금강은 전라, 경상도의 경계상의 六十嶺에서 발원한다. 본류는 九里香
川, 程子川등의 지류들과 합류하여 북쪽으로 흐르다가 전북 북동부에서
南大川, 鳳凰川과 합류하고 충북에서 松川, 옥천의 報靑川과 합류한 뒤
다시 충남 芙江에 이르러 연기의 美湖川과 합류하고, 공주에서는 維鳩
川, 그리고 은진 論山川등의 지류가 본류와 합류하여 강경에 이르러 충
남과 전북의 경계를 이루며 서해로 흘러들어간다. 금강의 길이는 발원지
에서 河口까지 407.5km로 우리나라에서는 6번째로 긴 강이며, 남한에서
는 한강·낙동강에 이어 3번째로 긴 강이다.
배가 운항할 수 있는 소강종점은 하류에서 126km 떨어진 芙江이며,
4) 이중환,『擇里志』卜居總論生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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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지점 河口로부터의 距離河幅
河口3207.6m(1782間)
群山4,908m(1里 9丁) 1555.2m(864간)
厚浦14,179m(3리 22정) 1315.8m(731간)
江景41,232m(10리 18정) 388.8m(216간)
昆岩56,940m(14리 18정) 302.4m(168간)
窺岩59,777m(15리 8정) 106.2m(59간)
白馬江6) 61,957m(15리 28정) 120.6m(67간)
公州88,574m(22리 20정) 347.4m(193간)
羅城103,846m(26리 16정) 453.6m(252간)
黃谷(鶯廳, 鵲川合流點) 110,392m(28리 4정) 592.2m(294간)
芙江114,973m(29리 10정) 180m(100간)
坪村(分岐點) 127,844m(32리 20정) 180m(100간)
懷德138,208m(35리 7정) 120.6m(67간)
梧根場146,389m(37리 10정) 120.6m(67간)
鎭川172,788m(44리) 75.2m(42간)
조류가 미치는 최상류지점은 부여의 窺岩이다. 금강은 발원지에서 芙江
까지를 상류, 부강에서 강경까지를 중류, 강경에서 군산까지를 하류로 구
분한다. 부강 이상의 상류는 흐름이 급하고 물이 얕아서 선박이 통행할
수 없다. 부강에서 강경까지 73km에 달하는 중류지역은 연기, 연산, 진
잠, 회덕, 공주, 부여, 노성, 은진, 석성을 지나며, 범람원이 발달해 농업
생산이 활발하다. 중류구간은 바닷물이 올라오는 부여의 규암을 기준으
로 다시 중상류와 중하류로 구분된다. 강경에서 하구까지 41km에 달하
는 하류지역은 은진, 임천, 한산, 서천, 여산, 용안, 함열, 임피, 옥구를 통
과하며, 이 지역도 범람원 지형으로, 한반도 서남부 최대의 곡창지대로
꼽힌다. 금강수로를 자세히 살피기 위해 1905년 조사된 금강의 하류에서
상류까지 주요 기항지와 거리, 하천폭을 보면 다음의 <표 1>과 같다.5)
<표 1> 금강하구에서 주요지점까지의 거리와 하폭
(* 1里=3,927m, 1丁=109m, 1間=1.8m로 환산)
5) 『韓國土地農産調査報告』, 충청도(明治38년; 1905년)
조선후기 錦江水運과 浦口市場圈105
금강의 각 구역에서 운항 가능한 선박을 조사한 한말 자료에 의하면,
하류지역은 <표 1>에서 보듯이 수심이 깊었을 뿐만 아니라, 하폭도 강경
부근은 388m, 군산은 1,555m로 넓었기 때문에 7~8백톤의 대형선박도
운항이 가능했다. 그러나 강경에서 규암까지 중하류지역은 100石정도의
적재량을 가진 선박이, 그 이상인 규암에서 부강까지의 중상류지역은 50
石이 적재한도인 소형 韓船만이 운항할 수 있었다.7)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금강의 하류와 중류를 운항할 수 있는 조
건이 선박의 규모였을 뿐 선박구조의 차이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중상류
를 운항한 소형 傳統韓船은 平底船으로 강은 물론 바다를 항해할 수 있
는 선박이었다.8) 일반적으로 강에서 운항하는 선박을 江船이라하고, 바
다에서 운항하는 선박은 海船이라 하여 명칭을 달리했을 뿐만 아니라 구
조 또한 크게 차이가 났다. 풍랑이 많은 바다를 운항해야 하는 海船은
밑바닥이 넓은 반면, 江船은 폭이 좁거나 암초가 많고 물살이 센 지역을
운항해야 했으므로 좁고 길었다.9) 그렇기 때문에 한강이나 대동강등 주
요 강에서는 조류가 올라오는 지역을 기준으로 그 상류지역을 水上, 하
류지역을 水下라 하여 水下에서 사용하는 海洋과 江에서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海船을 水下船이라 하였고, 水上지역을 운항하는 江船을 水上
船이라 하여 구분하였다.10) 강의 흐름차이 때문에 水下船은 水上地域을,
6) 白馬江은 일반적으로 부여를 감싸 흐르는 금강을 지칭하지만, 여기서는 良
丹浦와 金剛川그리고 錦江본류가 합하여 林川郡으로 들어가는 곳에 있
는 古多津지역을 지칭한다.(扶餘縣邑誌(奎17376)白馬江在縣四五里良丹
浦及金剛川與公州錦江合流入林川郡界今爲古多津)
7)『韓國土地農産調査報告』충청도 (明治38년; 1905년)
8) 韓船의 구조에 대해서는 김재근, 1994 『한국의 배』서울대 출판부 참조.
9) 海船과 江船의 규모의 차이를『經國大典』工典舟車條에 의해 살펴보면,
中船의 경우 해선은 길이 33척 6촌, 너비 13척 6촌인데 비해, 강선은 길이
46척, 너비 9척으로 규정되었다.
10) 水上船과 水下船에 대해서는 고동환,『조선후기 서울상업발달사연구』지
식산업사, 199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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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上船은 水下地域을 제대로 운항할 수 없었다.11) 그러므로 한강의 경
우 서해를 거쳐 한강으로 반입된 화물은 반드시 마포에서 수상선으로 옮
겨 실은 다음 상류로 올라가야만 했다.
이처럼 한강과 대동강 등 큰 강에는 수상선과 수하선의 구분이 있었지
만, 금강에서는 이러한 구분이 없었다.12) 이처럼 대부분 큰 강에 있는 수
상선과 수하선, 강선과 해선의 구분이 금강에는 왜 없었을까. 그 이유는
강선과 해선의 구분없이 선박이 항행가능한 지역에는 해선도 충분히 항
행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강과 달리 금강의 경우 금강
하구와 소강종점인 부강까지 경사도 차이가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23년 조선총독부에서 펴낸『朝鮮の河川』에 따르면, 하구의 경사도는
한강과 금강 모두 2/10,000로 동일하지만, 중류의 경우 한강은 9/10,000,
금강은 4/10,000였다.13) 금강의 경우 하류와 중류사이의 경사도가 매우
완만하기 때문에 조류가 미치지 않은 지역이지만 바다를 통항할 수 있는
傳統韓船인 平底船으로 운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14) 이와 같이 소형선
박이라면 하류에서 부강까지 중간에 배를 교체하지 않고도 운항가능하
다는 점은 금강의 수로조건이 한강에 비해 유리했음을 의미한다.
금강은 겨울철에 결빙기간이 한 달 정도에 불과하고, 날씨가 따뜻한
해에는 결빙되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에 겨울철 漢江水系가 결빙되었
11) 『備邊司謄錄』176책, 정조 14년 2월 20일
水下船不能行上江之淺灘水上船不能當下江之險濤
12) 茶山丁若鏞은 ‘水上船은 오직 한강에만 있는 배로서 원주, 춘천, 낭천, 양
구 등 서너 고을에만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經世遺表》권 14. 均役事目
追議船稅), 대동강에도 수상선이 존재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큰 강에는 수
상선이 있었을 것이다.
13) 조선총독부,『朝鮮の河川』, 1923, p.113.
14) 금강변 포구마을이었던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에 거주하는 김주달씨(56세)
의 증언에 의하면, 장하리에서 건조한 배를 이용하여 인천까지 돌을 싣고
운항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강에서 건조한 배로 바다를 운항한다는 것은
강선과 해선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조선후기 錦江水運과 浦口市場圈107
을 때 이를 보완하는 수로로도 활용되었다. 여름철 범람기는 7월로서, 강
수위가 평상시보다 8미터가량 높아질 때도 있어, 주변 농경지의 침수피
해가 연례적인 행사가 되었다.15) <표 1>에서 보듯이 부여의 규암과 백마
강구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강폭이 크게 좁아지기 때문에 유속 또한 매
우 빨라 배의 운항에 지장을 초래하였다.
금강의 하류에서 소강종점인 부강까지 오르내리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한강의 경우, 다른 활동없이 모든 시간을 소강에만 쏟을 경우
하루에 약 50리를 소강할 수 있다고 한다.16) 이러한 소강속도는 육로이
동속도에 비해 절반에 불과한 것이다. 금강의 경우 1910년 대한제국 농
상공부에서 편찬한 『韓國水産誌』의 기록에 따르면, 강경과 부강간은
하상이 낮고 곳곳에 모래톱이 있어서 항행이 어려워서, 하강할 때는 순
풍이 불면 하루 만에 도달하지만, 소강할 때는 2일이 걸렸다고 한다.17)
강경에서 부강까지 73km를 이틀에 소강하는 속도는 한강의 하루 소강속
도 50리 즉 20km에 비해 두배 남짓 빠른 속도였다. 육로이동속도와 거의
비슷한 속도를 낼 수 있었기 때문에 금강을 이용한 상품운송은 매우 활
성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강경과 금강 하구까지의 거리는 41km였는데, 이 구간을 운항한 사례
는 1873년(고종 10) 공주의 대동미 등 조세곡 823석을 실은 선박이 강경
포를 출발하여 서울로 올라가던 중에 서해에서 표류한 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배는 윤 6월 18일 강경포를 출발하여 그 날 전라도 여산 운교포
에 도착하여 留宿하였고, 19일에는 충청도 임천 황동에서 留宿하였으며,
20일에는 전라도 임피의 西浦에 도착한 뒤에 風勢가 不順하여 이틀을
머물고 있다. 23일에 서포를 출발하여 금강의 하구인 紫巖에 留宿하고
있다.18) 풍세가 불순하여 운항을 하지 못한 이틀을 제외하면, 강경에서
15) 『韓國土地農産調査報告』충청도 (明治38년; 1905년)
16) 김종혁,「전근대의 물길과 이용방식」『역사비평』71, 2005, pp. 255-256.
17) 대한제국 농상공부, 1910『韓國水産誌』3권 충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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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최하류인 자암까지 도달하는 데는 4일가량 걸렸다. 41km를 운항하
는데 4일이 걸린 것이다. 하루 평균 10km의 속도로 운항하였는데, 이는
일반 선박의 운항과는 매우 다른 특이한 사례로 보여진다. 세곡선이기
때문에 강경 하류로 내려오면서 각 지역 해창에 모아진 대동미를 싣고
오기 위해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만 아니라, 선박의 운항도 주간에만 행
해졌다. 세곡운송의 중요성 때문에 예상치 못한 여울이나 바위 등 장애
물을 피하기 위해 야간운항을 기피한 것이다.19)
이러한 세곡선의 운항과 달리 상선 등 일반 선박의 운항은 강경과 부
강운항에 비해 훨씬 용이하고 빨랐다.20) 금강의 하류구간은 밀물과 썰물
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말 조사 자료에 의하면 밀물과 썰물시
강수위의 차이는 하류인 군산에서는 4~5미터, 강경에도 2미터 정도 차
이가 있었다.21) 이와 같은 수위차이를 이용하여 배가 운항했기 때문에,
야간에도 물때가 맞으면 운항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조류를 이용한다면,
18) 『各司謄錄』7 충청도편 2, 忠淸道監營狀啓謄錄7책, 고종 10년(1873) 7월
초9일, p.270.
19) 고동환, 2003 앞의 논문 참조.
20) 강경과 부강사이 소강과 하강 속도의 차이는 평균적으로 2배였지만, 1965
년부터 1975년까지 장배로 강경의 상류에 위치한 장하리에서 12km(30리)
거리의 강경포까지 운항하는데, 상행은 2시간, 하행은 1시간 반정도 걸렸다
고 앞서의 김주달씨는 증언하고 있다. 소강과 하강속도의 비가 2배였던 금
강의 중상류에 비해 중하류가 1.5배로 줄어들었다는 것은 곧 하류로 내려
올수록 소강속도가 상류에 비해 빨랐다는 점을 의미한다.
21) 『韓國水産誌』의 기록에 따르면 군산 개항이후 강경과 군산 간에 석유발
동기선인 群山丸(19톤), 津航丸(17톤)등 2척이 매일 정기적으로 왕복운항
하였다. 강경-군산강 석유발동기선의 운임은 승객 1인에 50錢, 곡물 1석에
12전, 잡화 1개에 8전이었다. 석유발동기선외에 일본형 선박 및 韓船도 왕
래했는데, 이 배의 운임은 승객 1인당 30전, 곡물 1석 5전, 잡화 1개 4전내
지 5전이었다. 군산과 경강사이 뿐만 아니라 강경과 부강사이에서도 여객
과 상품운송량이 증가하면서, 1906년 강경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흘수가 낮
은 소형의 석유발동기선을 이 구간에 취항시켰다고 한다.(대한제국 농상공
부,『韓國水産誌』3권, 충청도, 1910)
조선후기 錦江水運과 浦口市場圈109
군현 浦口, 津渡, 灘個數
연기 東津1
회덕 利遠津, 木浦, 立名津, 井浦, 新灘津5
공주 錦江津, 今尙津, 羅里津, 德津, 半灘津, 芙江浦, 粉浦倉, 山城津,
瓦灘津, 熊津, 陰暗津, 紙洞津, 彩浦倉12
부여 古省津, 光之浦, 九龍浦, 龜岩津, 窺岩津, 大王浦, 白馬江 北浦,
石灘, 良舟浦, 旺浦, 注浦, 後浦13
석성 觀音浦, 浪淸浦, 盤湖津, 鳳頭津(古多津)22), 蓬湖津, 佛巖津,
泗津, 水湯浦, 猪浦, 倉浦11
임천 古城津, 鼓岩津, 九郎浦, 南塘津, 浪淸津, 上之浦(津), 笠浦, 場
岩津, 菁浦津9
연산 草浦, 德浦, 俗隱津3
은진 甑山浦, 江鏡浦, 市津浦, 私津, 論山浦5
한산 朽浦, 岐浦, 瓦浦, 芽浦, 鎭浦, 望五里津, 竹山津, 月浦, 瓦草津9
서천 鷄山浦, 吉山浦, 金浦, 泊浦, 朴浦津, 舒川浦, 芽浦, 龍堂津, 長
巖津, 戰船廠, 鎭浦11
여산 乃所岩浦, 黃山浦2
용안 掘井浦, 金頭浦, 龍頭浦, 倉山浦, 菁浦, 薍浦6
함열 馬浦, 聖堂倉, 熊浦, 板浦, 皮浦5
금강하구에서 강경까지 반나절 정도면 충분했을 것이다.
2) 포구와 津渡의 발달
금강 수로는 중류이하에서 경사도의 편차가 심하지 않고 하폭의 변동
또한 규암과 백마강 구역을 제외하고 큰 편차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로부터 수운이 발달하여 이 지역에는 포구와 나루, 여울이 많았다. 조
선시대 읍지나 지도를 비롯한 지리지에서 확인되는 각 군현별 浦口와 津
渡, 그리고 여울(灘)을 보면 다음의 <표 2>와 같다.
<표 2> 금강유역 군현별 浦口, 津渡, 灘현황
110 湖西史學第43輯
임피 京浦, 羅里浦(羅浦), 西施浦(西浦), 石浦, 新倉津, 栗浦, 鎭浦7
옥구 古沙浦(居沙浦), 群山浦, 屯山浦, 石浦, 城浦, 新倉津, 楮田浦,
鎭浦, 火巨所津9
(전거: 『新增東國輿地勝覽』, 『忠淸道邑誌』, 『湖西邑誌』『邑誌』(아세아문화
사 1895), 『廣輿圖』, 『海東地圖』, 『備邊司印方眼地圖』, 『朝鮮地圖』)
<표 2>에서 보듯이 금강의 가항종점인 부강에서 금강 하구인 옥구의
군산진까지는 수많은 포구와 津, 灘이 존재하였다. 군현의 읍지, 지리지,
지도의 특성상 중복 집계되거나 또는 시대에 따라 동일한 포구와 나루의
명칭이 바뀐 곳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되긴 하지만, 금강 하구에서 가항
종점인 부강까지 총 115km의 구간 안에 108개의 포구와 나루, 여울이 존
재하였다. 금강 중류이하 지역에서 선박이 통항하는데 필요한 시설이 대
략 1km당 한 곳 정도로 매우 촘촘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이는 금강의 자
연적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면서 동시에 금강 수운을
활성화시킨 중요한 조건이기도 했다.
강의 도하처로서 나루인 津과 선박의 정박처로서의 浦口는 기능상 확
연히 구분되는 곳이다. 그러나 나루는 육상교통을 매개하는 지점이면서
동시에 육상교통과 수상교통을 매개하는 결절점으로서 기능도 지닌다.
대부분의 나루는 소규모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포구의 기능도 동시에 수행하였다. 그러므로 ~浦津이나, ~津浦라
는 지명이 많은 것이다.
금강 유역은 전국적 도로교통이 매우 발달한 지역의 하나였다. 그러므
로 조선후기 전국을 연결하는 10대로23)중 금강을 건너는 도로는 서울과
22) 봉두진은 과거 古多津의 개칭된 것이다. (石城邑誌(奎17377) 古多津在縣
西五里扶餘白馬冮下流今改爲鳳頭津)
23) 조선후기 간선도로는 시기가 지나면서 확대된다. 18세기 후반 신경준이 편
찬한『道路考』에는 간선도로를 6대로로 설정하고 있지만,『동국문헌비
고』에는 9대로로 설정되어 있다. ①제1로 서울~의주 ②제2로 서울~서수
라 ③제3로 서울~평해 ④제4로 서울~부산 ⑤제5로 서울~통영 ⑥제6로
조선후기 錦江水運과 浦口市場圈111
통영을 연결하는 제6로이다. 제6로는 서울에서 동작진으로 한강을 건너
과천을 지나고 진위와 소사를 거쳐 충청도 지방으로 들어온다. 통영으로
직접 통하는 길은 천안-덕평-모로원을 거쳐 錦江津을 건너서 공주읍을
지나 경천역-노성을 거쳐 전라도 전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러한 直路
외에 충청도 지역에는 다양한 間路가 발달하였다. 천안-덕평-모로원에
서 銅川-公西院-恩山-林川을 거쳐 南塘津에서 금강을 건너 함열을 거
쳐 전주로 빠지는 길이 있으며, 임천에서 다시 한산-서천을 거쳐 龍堂津
에서 금강을 건너 군산-옥구-전주로 가는 길, 한산에서 竹山津에서 금
강을 건너 臨陂-전주로 가는 길이 있다. 이 길들은 비록 직로는 아니지
만, 조선후기 苧布산지로 유명한 임천, 한산, 서천, 홍산, 비인 등을 통
과하는 길이다. 상류에서 금강나루를 건너는 주요 도로는 천안에서 덕평
-연기를 거쳐 羅里津에서 금강을 건너 유성과 진잠-연산으로 가는 간
로가 있으며, 또한 예산-銅川-熊津에서 금강을 건너 공주-이인-부여
로 통하는 길이 있으며, 또 다른 길은 예산-대흥-청양-古省津을 거쳐
부여로 통하는 길도 있다. 이와 같이 금강유역을 연결하는 도로망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김정호의『大東輿地圖』이다. 이를 보면 다
음의 <그림 1>과 같다.
서울~통영 ⑦제7로 서울~제주 ⑧제8로 서울~충청수영 ⑨제9로 서울~
강화로로서, 제5로는 경상도에서 성주, 함안, 고성을 거쳐 통영으로 가는
길이고 제6로는 전라도에서 남원, 순천을 거쳐 통영에 이르는 길이다.『도
로고』에는『동국문헌비고』의 9대로 중에서 제5, 6, 8로가 간선도로에서 제
외되었다. 한편 19세기 전반에 간행된 김정호의『大東地志』에서는 9대로
중에서 제5로, 제6로를 1개 간선도로로 삼고, 이외에 서울-수원로와 서울-
봉화로를 첨가하여 10대로를 선정하였다. 조선후기 간선도로망의 확대에
대해서는 고동환, 1998 앞의 책 참조.
112 湖西史學第43輯
<그림 1>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육상교통로와 금강수로
<그림 1>에서 실선으로 표시된 부분이 도로망이며, 실선이 금강과 만
나는 지역에는 <표 2>에서 기록된 津渡가 대부분 기록되어 있다. 금강을
중심으로 한 육상도로망을 보면, 도로가 단선적으로 몇몇 지역만을 연결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대부분을 포괄적으로 연결하고 있으며, 나루를
통해 금강수로와 모두 연결되고 있었다.
여울인 灘은 하천운반물질이 하상에 퇴적되어 수심이 얕아진 곳으로
서, 갈수기에는 걸어서 건너갈 수 있을 정도로 수심이 낮아지기 때문에
종종 도하지점이 되기도 한다. 新灘津이라는 지명을 통해서도 여울의 이
와 같은 기능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여울은 도하처로서 보다는 강의
운항에서 장애물로 인식된다. 남한강과 북한강의 상류에 이와 같은 여울
조선후기 錦江水運과 浦口市場圈113
이 많이 발달하여 배로 오르내릴 때 여울을 어떻게 통과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였다. 여울을 통과하는 전통적 방법은 배를 끈으로 묶어 끌어올리는
것이지만, 배가 통과할 수 있도록 임시로 여울부분에 뱃골을 파서 운항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강의 경우 가항수로 내에 남한강에는 104곳, 북한
강에는 23곳으로 조사되고 있다.24)
이에 반해 금강의 가항수로 내에서 확인되는 灘이라는 지명은 <표 2>
에서 보듯이 회덕의 新灘津, 공주의 半灘津, 瓦灘津, 부여의 石灘등 4곳
에 지나지 않는다. 부여 이하 지역에서는 수심이 깊고 강폭이 넓기 때문
에 여울은 나타나지 않는다. 남한강이나 북한강과 달리 여울이라는 장애
물이 적었기 때문에 금강 수운의 조건은 매우 양호한 것이었다.
津渡가 육상교통과 수로를 연결하는 매개점이라고 한다면, 포구는 금
강 수로의 중심이었다. <표 2>에서 浦라는 지명은 하류에 집중적으로 분
포하고 있으며, 津이라는 지명은 중류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이러
한 지명상의 분포 때문에 금강 중류에 포구보다는 나루가 많았다는 인식
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하류에는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기 때문에 津渡
가 발달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상류의 津이 모두 나루로서만 기능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浦와 ~津은 지명 상에 차이
에도 불구하고 실제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津이라는
地名은 포구상업이 활성화되기 훨씬 이전 육로교통을 연결하는 지점으
로서 나루가 중요시 될 때 고착화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津이라는 명
칭이 사용되긴 했지만, 18세기 이후 전국적 포구시장권의 형성된 이후
수운의 중요성이 배가되면서, 이들 津들은 나루로서의 기능보다는 포구
로서 훨씬 중요한 기능을 하는 곳이었다.
금강의 포구 중 가장 중요한 포구는 말할 것도 없이 강경포였다. 강경
포는 금강 본류와 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내륙으로 통하는 논산천, 강경
24) 최영준,「남한강 수운연구」『지리학』35, 대한지리학회, 1987.
김종혁,「북한강 수운연구」고려대 석사논문, 1992.
114 湖西史學第43輯
천, 염천 등의 지류가 이어지고 있어 천연의 자연적 입지를 구축하고 있
다. 강경포 주위의 지형이 충적 범람지형이지만, 포구의 거점은 화강암층
이 탁월하게 발달하여, 홍수 때 주변이 범람하여도 선박의 정박은 용이
했다. 강경포 주위의 시진포(논산), 증산포 등지에도 조수가 통했지만, 이
지역은 퇴적토 지형으로, 홍수나 조수로 인하여 침식되거나 토사퇴적으
로 대형선박의 통행이 불가능했다. 주변 포구의 이와 같은 지형적 불리
함으로 인해 화강암층이 발달한 강경포가 이 지역의 중심포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25)
강경과 더불어 중요한 포구는 상류의 芙江浦였다. 금강의 가항종점이
기도 한 芙江浦는 청주, 보은, 음성, 괴산 등 충청북도지역에서 생산된
상품을 금강수로를 통해 반출하거나, 서해안에서 반입된 물품을 이 지역
을 반입하는 중요한 포구였다. 개항기 소금의 유통경로를 보면, 서해안에
서 생산된 소금은 금강 수로를 따라 부강까지 올라온 뒤에, 죽강-문의-회
인-보은 방면과, 청주-진천-음성 방면, 문의-청산-괴산 방면의 세 갈
래로 다시 나뉘고 있다. 특히 괴산방면은 한강수계의 단양을 거쳐 강원
도의 영서 일각까지 소금을 공급하는 중요한 유통로였다. 이와 같은 부
강을 경유하는 소금유통로는 철도가 놓이기 이전 서해안산 소금을 강원
도까지 유통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교통로였다.26) 부강은 금강수계와 남
한강 수계를 연계하는 기능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27)
한편 강경포의 하류에 있었던 林川의 笠浦, 臨陂의 西浦·羅浦, 咸悅의
25) 나도승,「금강수운의 변천에 관한 지리학적 연구」금강권 연구소,
1980.
26) 이헌주,「개항기 군산항의 유통권 변화와 무역구조」『사학연구』55, 한국
사학회, 1998.
27) 1905년 8월 경부철도가 개통되면서 종래에 금강수운을 통해 연결되었던 부
강에 철도역이 개설됨으로써 군산과 강경을 경유하여 부강으로 공급되던
수산물과 일용 잡화의 상당량이 부산과 인천을 경유하여 철도편으로 운송
되게 되어 금강의 수운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따라 금강 중상류의 공주
와 청주 지방은 금강 수운의 영향력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조선후기 錦江水運과 浦口市場圈115
熊浦, 서천의 吉山浦, 芽浦들은 후술하듯이 강경포로 올라가는 선박을
중간에서 차단하여 당해포구로 유도하기가 보다 용이하였기 때문에 강
경포와 심각한 유통분쟁을 노정하고 있었다. 임피의 나포는 1722년 제주
도의 특산물을 팔아서 제주도 양곡을 구입하는 교역처로서 設浦되면서
발전하였다. 이후 19세기 들어서 이러한 정부주도의 교역은 소멸하였지
만 포구는 계속 발전하여 역시 강경포의 유통독점에 대항세력으로 성장
하게 된다. 그 밖에 群山漕倉과 聖堂漕倉이 이 지역 조세상납의 창구로
서 성장하였다. 이 지역은 국가적 수운인 조운제의 영향으로 수많은 地
土船들이 드나들며 비교적 대규모 포구로 성장할 수 있었다.
Ⅲ. 錦江流域의 場市와 浦口市場圈
1) 금강유역 장시의 발전과 포구장시
1470년경부터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설치된 장시는 16세기 전반에
는 충청도로, 16세기 중엽에는 경상도로 확대되었고, 임란이후에는 경기
지역만이 아니라 중부 이북의 황해도․평안도 지역까지 확대발전하였다.
충청도의 장시망은 16세기 전반부터 인구가 많고 교통이 편리한 금강 유
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임란이후 금강유역의 장시 발전은 두드
러졌는데, 전쟁의 참화가 이 지역을 피해갔기 때문에, 피난처이자 군량조
달지로서 중시되어 많은 장시가 생성되었다. 초기 이 지역에는 임천장,
대흥장, 함열장, 홍산장, 홍주장, 익산장, 비인장 등 주로 邑底를 중심으
로 장시가 발달하였다. 읍내장이 먼저 발생하는 까닭은 교통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인구가 많았고, 관수물자 조달에 따른 상품거래 수요가 많
았기 때문이다. 지방관의 입장에서도 場稅의 징수나 관청에서 필요한 물
자의 손쉬운 조달을 위해 읍내장이 선호되었다.
초기 읍내장을 중심으로 발달하는 단계에서는 개별 장시들이 서로 연
116 湖西史學第43輯
계를 맺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오희문이 1592년(선
조 25) 12월부터 1596년 12월까지 만 4년동안 임천에 머물면서 쓴 일기
인『瑣尾錄』에 의하면, 임천장 1․6일, 홍산장 1․6일, 한산장 1․6일,
함열장 3․8일, 서천장 2․7일, 비인장 2․7일로 주변 읍저의 장시와 개
시일이 겹치고 있다. 4․9일, 5․10일에 개시하는 장시가 없다는 것은 이
지역의 읍내장 사이에 아직까지 장시망을 형성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
한다. 이러한 사정은 17세기 이후 개시일이 각각 임천 4․9, 홍산 2․7,
한산 1․6, 함열 3․8, 서천 2․7, 비인 2․7일로 달리하면서 이웃한 읍
내장 간에 장시망을 형성하게 된다.28)
이와 같이 장시간에 연계가 형성되는 시기는 18세기 이후였다. 1770년
간행된 『東國文獻備考』에는 전국 총 1,062기의 장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충청도 지역의 장시는 총 157기이며, 군현당 평균 2.8기의 장시를
보유하였다. 장시권의 평균 면적은 107㎢로, 전라도의 91㎢에 이어 전국
에서 두 번째로 장시 밀도가 높았다. 장시권의 평균 면적이 107㎢라는
점은 아무리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하루만에 장시를 왕복할 수 있었다
는 점을 의미한다. 또한 장시밀도가 높다는 점은 이 지역이 인구밀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논농사가 발달하고 田結數가 많아 인구부양능력이 컸
을 뿐만 아니라, 농가의 상품경제화 수준도 다른 지역에 비해 높았음을
의미한다. 충청도 지역에서도 금강유역은 내포지역과 함께 가장 장시밀
도가 높은 곳으로 꼽히는 지역이었다.29) 장시밀도가 전국적으로 매우 높
은 금강유역에 개설된 장시망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의 <표 3>과 같다.
28) 이헌창, 1994 앞의 논문 참조.
29) 이헌창, 위의 논문. 각 도의 장시망의 평균 면적은 경기도 118㎢, 경상도
111㎢, 전라도 91㎢, 강원도 397㎢, 황해도 211㎢, 평안도 327㎢, 함경도
1921㎢였다.
조선후기 錦江水運과 浦口市場圈117
군현 장시 개시일 행정구역 위치 비고
연기 邑場2, 7
회덕
邑場
新灘場
知命場
楊川市
1, 6
3, 8
4, 9
5, 0
近北面
一道面
東面
북 10리
북 30리
동 20리
공주
邑市
敬天市
毛老院市
大田市
大橋市
利仁市
維鳩市
銅川市
甘城市
儒城市
廣程市
旺津市**
芙江市
孔巖市
乾坪市艾川市
1, 6
2, 7
2, 7
2, 7
3, 8
5, 0
5, 0*
4, 9
4, 9
5, 0
5, 0
5, 0
1, 6
4, 9
1, 6
4, 9
益口谷面 敬天里
要堂面 毛路院
山內面 大田里
長尺洞面 酒幕里
半淺面 驛里
新上面 倉里
牛井面 銅川里
陽也里面 甘城里
縣內面 酒幕里
安面 驛里
半淺面 旺津里
鳴淺面 芙江里
谷火川面
남 40리
북 20리
동 80리
동 20리
남 20리
서 50리
서 20리
동 40리
동 50리
北四十里五
府西四十里
府東五十里
在府東四十里
在府南四十里
* 1872년 공주목지
도에는 장시가 13곳
만이 기록되어 있다.
1859년 간행된 公山
誌(經古 132-Imlgv.
1-2)에 수록된 15
개 장시중 건평장,
공암장이 빠져 있다.
그리고 1872년 공주
목 지도의 유구장은
5, 0일 개시로 기록
되어 있으나, 공산지
의 기록은 3,8 개시
로 기록되어 있다.
** 공산지에는 공주
군 소속이나 후에 부
여면 저석리로 편입
되었다.
부여 邑場
銀山場
3, 8
1, 6 淺乙面(方生洞面) 서 10리
석성 邑場
倉里場
2, 7
5, 0 縣內面 倉里
임천
邑場
南塘場
笠浦場
4, 9
3, 8
4, 9 良火面 笠浦里
연산
邑場
豆磨場
沙橋場
3, 8
1, 6
5, 0
豆磨面
赤寺谷面
북 20리
서 20리
은진 邑場
江鏡場
1, 6
4, 9 金浦面서 20리
<표 3> 금강 유역 군현별 장시의 위치와 개시일
118 湖西史學第43輯
論山場
楮橋場
3, 8
2, 7
花枝山面
九子谷面
북 10리
남 10리
한산
邑場
新場
長登場
1, 6
3, 8
4, 9
河北面
西下面
북 10리
서 20리
서천
邑場
吉山場
大棗場
2, 7
4, 9
5, 0
여산 邑場
黃山場
1, 6
2, 7 北一面서 30리
용안
蘭浦場
釰望場
錦成場
2, 7 서 5리
남 8리
함열
邑場
黃登場
熊浦場
3, 8
5, 0
1, 6
南一面
西二面
동 1리
서 20리
서 10리
임피
邑場
日雲場
西(市)浦場
新場
狐山場
2, 7
1, 6
4, 9
4, 9
上北面
東二面
북 15리
남 10리
동 5리
옥구
邑場
京浦場
地境場
坪沙場
長財場
3, 8
5, 0
1, 6
5, 0
5, 0
京浦面
博山面
博山面
북 10리
북 15리
동 15리
(전거: 『東國文獻備考』, 『道路考』, 『忠淸道邑誌』(1871년), 『湖南邑誌』
(1872년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호서읍지』(1895년), 『호남읍지』(1895년,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1872년 지도』, 『韓國水産誌』, 『朝鮮地誌略』(陸軍
參謀本部編{復刊版, 忠淸道之部, 龍溪書舍), 『韓國各府郡市場狀況調査書제2
편 충청남북도, 전라북도』(度支部司稅局, 1909 隆熙三年九月))
18세기 중엽 금강유역의 장시의 개시간격을 보면, 이웃한 장시간에 개
시일을 달리하면서 장시간에 긴밀한 연계관계가 형성되었다. 인접한 장
시간 개시간격이 하루나 이틀이어서 지역주민은 언제든 편하게 장을 볼
조선후기 錦江水運과 浦口市場圈119
수 있었으며, 행상들은 특정 장을 본 후 그 날 중으로 이동할 수 있으면
서 다음 날에 열리는 장시를 구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18세기 이후 금강유역 장시의 변동을 살펴보면,30) 소멸되는 장시는 공
주의 艾川場, 은진의 楮橋場, 임천의 南塘場, 임피의 日雲場, 옥구의 地
境場5곳이었다. 애천장, 남당장, 일운장, 지경장은 임원경제지 단계인 19
세기 초에 소멸되었고, 저교장은 19세기 후반 소멸되었다. 저교장은 강경
장과 논산장이라는 大場과 가까웠기 때문에 이들 장에 흡수되어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개시일이 바뀌는 장시는 임천 읍내장이다. 임천 읍내장은 16세기 말에
서 18세기 후반까지 4, 9일 개시되었는데, 19세기 전반이후 5, 0일로 바
뀌었다. 4일에서 5일로 설장일이 변화한 것은 금강 포구시장권의 중심시
장인 강경장과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신설되는 장시는 공주의 芙江場, 석성의 倉里場, 임천의 笠浦場, 옥구
의 坪沙場, 長財場, 용안의 釰望場, 錦成場, 함열의 熊浦場, 임피의 狐山
場등 9곳이었다. 폐지되는 장시보다 신설되는 장시가 두배가량 많았다.
부강장은 19세기에 신설되었는데, 부강이 금강의 소강종점으로서 금강수
로를 통한 상품분배기능이 강화되면서 이 지역에 장시가 신설된 것이다.
창리장은 19세기 중엽 이후 신설되었는데, 이는 석성 읍내장이 分設된
것으로 보인다. 석성 읍내장은 2, 5일, 즉 한달에 12차례 개시되는 장이
었다. 이 읍내장이 2, 7일 개시되는 오일장으로 전환되면서 5, 0일에 서
는 장시로서 창리장이 신설된 것이다. 입포장은 남당진의 하류에 위치하
였기 때문에 남당장을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남당장이 3일 개시했
지만, 입포장은 강경장과 동일한 4일 개시장으로 신설되었다. 한산의 장
등장도 강경장과 동일한 4일을 개시일로 하여 19세기 초 신설되었다가
30) 충청도지역의 장시망 변동은 이헌창, 1994 앞의 논문에서 치밀하게 연구되
었다. 금강유역의 장시망 변동도 이헌창의 연구에서 제시된 부표 조선후기
충청도에서의 장시의 변천을 기초로 한 것이다.
120 湖西史學第43輯
19세기 후반에 소멸되었다. 장등장은 후술하듯이 입포장이나 길산장처럼
강경장과 대립되는 시장권을 형성하지 못해 곧 소멸되는 것으로 보인다.
함열의 웅포장과 임피의 호산장도 19세기 초에 신설되었으며, 웅포장은
금강하류의 중요한 장시로 성장하게 된다. 옥구의 坪沙場, 長財場, 용안
의 釰望場, 錦成場은 읍지와 지리지에서 파악되지는 않지만, 한말 조사
자료에 나타나는 장시이다. 19세기 후반 이후 새로 신설되는 장시로 이
해된다.
이와 같은 금강유역의 장시변동에서 주목할 점은 신설되는 장시가 대
부분 포구이고, 신설 시기도 19세기 이후라는 점이다. 이는 충청도 전체
의 장시수 변동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이라고 하겠다. 충청도
의 장시망은 18세기 이전 숫적 증가가 완료되고, 18세기 이후에는 장시
간 연계관계가 형성됨에 따라 인접 장시간에 개시일의 중복을 피하여 개
시일을 조정하거나 인근 대장에 의해 소장이 흡수되는 등의 변화를 겪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18세기후반 이후 장시수는 오히려 시장권의 확대로
인해 정체되거나 흡수, 통합 등의 진전으로 감소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반해, 금강유역의 장시망은 포구를 중심으로 증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 신설되는 장시중에서 공주 부강장과 창리장을 제외한
나머지 7개 장시는 모두 금강 하류지역에 분포하였다. 충청도 장시변동
에 대한 기왕의 연구에 따르면 19세기 이후 금강하류지방의 장시밀도가
감소한 반면, 상류지방의 장시밀도는 증가한다고 한다.31)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충청도 지역 장시만을 대상으로 한 결론이다. 행정구역을 중심으
로 장시망을 구분하지 않고, 금강이라는 수로조건을 기준으로 시장권을
구분했을 경우는 이러한 추세는 크게 달라진다. 충청도만을 대상으로 했
을 경우 금강하류의 좌안인 옥구, 임피, 함열 등 전라도지역이 빠지게 된
다. 그러나 금강수로 전체를 시야에 넣고 장시망의 변동을 살피면, 금강
31) 이헌창, 위의 논문 참조.
조선후기 錦江水運과 浦口市場圈121
하류지역의 장시는 19세기 이후 크게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18세기 후반 이후 금강유역 포구시장권의 확대된 결과였다. 그
중에서도 금강의 포구시장권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강경포보다 하류
에 대거 포구시장이 증가한 것은 후술하듯이 포구간 상품유통의 주도권
을 둘러싼 대포구와 소포구간의 경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32)
군현당 평균 2.8개의 장시를 지녔던 충청도 지역의 장시간 시장권은
주로 읍내장을 중심으로 그 주변 장시가 포섭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장
시권연구에서 시장권 분석은 大場이나 읍내장을 중심으로 주변 장시간
의 개시일을 통해 장시간의 위계를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금강유역의 시장권을 분석할 때는 이처럼 행정중심지를 중심으로 분석
하는 것은 적절한 방법은 아니다. 예컨대 서천의 길산장과 서천 읍내장
의 규모에 대해 한말의 조사자료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吉山場은 4, 9일에 開市하는데, 금강의 지류인 길산천이 흐르는 곳
이며, 조수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내지의 작은 배들도 이곳을 오
르내린다. 2, 7일에 개시하는 서천읍장에 비해 두배 이상 규모가 크다.
서천군 주민의 3할, 한산군 주민의 7할이 길산장을 이용한다. 주변에서
큰 장시로서, 集散高는 장시 한 번 열릴 때 100원내지 500원에 달한
다.33)
여기서 보듯이 금강 하류에 위치한 서천의 길산장은 행정중심지인 邑
場보다 거래규모가 두 배나 된다. 그 이유는 이 지역 장시망이 읍내장이
아니라 포구중심으로 편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금강유역의 장시망
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행정중심, 육로교통 중심의 시장권 분석보
32) 대포구와 소포구간의 시장권 대립에 대해서는 고동환, 1985 앞의 논문 참
조.
33) 대한제국 농상공부, 『韓國水産誌』3권 충청도, 1910.
122 湖西史學第43輯
다는 장시의 입지가 배가 드나들기 편한 포구와 나루에 위치했는가를 먼
저 확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표 3>의 장시중 굵은 글씨로 표시한 장시
가 바로 금강연안에 위치한 장시였다. 이들 장시를 따로 분류하여 각 개
시일을 비교해 보면, 금강 수로를 통한 시장권 형성의 양상들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장시와 읍내장을 하나의 지도에 표시하면 다음의
<그림 2>와 같다.
<그림 2> 금강유역의 포구장시와 개시일
<그림 2>에서 보듯이 금강의 중상류에 연기읍장(2), 회덕읍장(1) 부강
장(1), 신탄장(3), 대교장(3) 동천장(4), 공주읍장(1), 왕진장(5), 중하류에
은산장(1), 부여읍장(3), 석성읍장(2), 창리장(5), 논산장(3), 은진읍장(1),
하류에 강경장(4), 저교장(2), 임천읍장(2) 남당장(3), 저교장(2), 황산장(2),
조선후기 錦江水運과 浦口市場圈123
여산읍장(1), 임천읍장(2), 함열읍장(3), 입포장(4), 난포장(2), 웅포장(1),
임피읍장(2), 한산읍장(1), 길산장(4), 서포장(4), 경포장(5), 서천읍장(2),
옥구읍장(3)등 총 33개 장시가 있었다. 군현의 읍장 14개를 제외하면 순
전히 포구주변의 장시는 19개인 셈이다.
포구장시의 개시일 간의 상관관계를 보면, 상류로부터 개시일이 하루씩
늦어지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부강장(1), 대교장(3), 동천장(4),
왕진장(5)의 경우는 배를 통해서 이들 장시를 운항할 수 있도록 장시 개시
일이 편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조류가통하는규암진 이하의 수로에서는강
경장(4)을 중심으로 창리장(5), 논산장(3), 남당장(3), 은산장(2), 난포장(2).
황산장(2)이 편성되어 있었다. 하류에는 입포장(4), 웅포장(1), 한산 신장(3)
으로 다시 길산장(4)과 서포장(4), 경포장(5)으로 구성되어 있다.
포구에 위치한 장시간의 상관관계를 살펴볼 때, 중상류지역은 동천장
을 중심으로 수로를 통한 장시간 연계관계가 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
으며, 중하류지역은 강경장을 중심으로 장시간 연계관계가 형성되었다.
하류에는 웅포장과 한산신장, 경포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개시일이 강경
장과 동일한 4일이었다는 점이 특징으로, 하류지역은 강경장의 시장권과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2) 포구시장권의 구조
(1) 금강 포구시장권에서의 강경의 위치
포구는 포구주인층의 중개에 의해 도매적 성격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원격지 유통을 위한 결절점으로서, 주변 농민을 위한 소매 상업이 이루
어지는 장시와 유통체계에 있어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었다. 그러므로
포구시장권은 포구와 더불어 선박에 의해 운송되는 대규모의 물량을 빠
른 시일 내에 분배할 수 있는 배후 시장인 장시유통망이 결합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포구시장권은 18세기 중엽이후 대포구를 중심
으로 발전하였다. 19세기에는 대포구주위의 소포구들도 주위 장시와 결
124 湖西史學第43輯
합하여 지역내 시장권의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장시유통망과의 결합을
강화한 소포구와 대포구 사이에 유기적인 연계관계가 형성되면서 전국
적 시장권이 형성될 수 있었다.34)
전국적 시장권의 핵은 京江, 恩津江鏡浦, 昌原馬山浦, 元山浦등 대
포구들이었다.35) 금강유역의 시장권도 군현의 邑底를 중심으로 한 시장
권보다는 금강연안의 포구와 장시간의 긴밀한 연계관계 속에서 시장의
위계가 형성되었다. 이와 같은 금강 연안의 포구시장권의 핵은 바로 강
경포였다. 『擇里志』에서는 강경을 전국적인 상업 중심지의 하나로 설
명하면서, “큰 배와 작은 배가 밤낮으로 두 갈래진 항구에서 담처럼 벌여
있고, 한 달에 여섯 번 열리는 큰 장에는 먼 곳과 가까운 곳의 화물이 모
여 쌓였다”고 기록하고 있다.36) 또한 19세기 초에 편찬된『萬機要覽』
에는 전국 최대장 15개 장시중 하나로 강경장을 꼽고 있다.37)
금강 유역의 포구시장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강경을 중심으로
한 상품유통이 어떻게 변모했는가를 추적할 필요가 있다. 강경의 시장권
은 충남의 은진, 석성, 노성, 연산, 부여, 임천, 홍산, 공주, 정산 그리고
전북의 여산, 용안, 익산, 함열, 고산, 금산, 진산을 포괄하고 있었다.38)
강경포와 강경장을 중심으로 한 시장권은 군현이나 충청도라는 행정구
34) 고동환,「조선후기 交通發達과 全國的市場圈의 형성」『문화역사지리』8,
1996.
35) 고동환, 1993 앞의 논문 참조. 전국적 시장권은 대포구를 중심으로 원산포
와 부산포, 마산포를 중심으로 하는 동남해안을 포괄하는 시장권, 김해 칠
성포와 마산포를 중심으로 한 남해안과 낙동강을 포괄하는 시장권, 영산포
와 법성포를 중심으로 하는 영산강과 서남해안을 연결하는 시장권, 은진 강
경포를 중심으로 한 서해안과 남해안을 연결하는 시장권, 그리고 京江을
중심으로 하는 서해안 시장권, 그리고 평양의 진남포를 중심으로 하는 대동
강과 북서해안을 포괄하는 시장권으로 세분될 수 있다.
36) 『擇里志』卜居總論生利
37) 『萬機要覽』財用5 各廛附鄕市
38) 度支部司稅局, 1909 隆熙三年九月韓國各府郡市場狀況調査書제2편
충청남북도
조선후기 錦江水運과 浦口市場圈125
역을 넘어서, 금강 수로와 연결되는 모든 군현을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 강경이 금강수로의 가장 중요한 포구로 성장하였을까. 금강
의 수로는 세곡운송로로서 일찍부터 중시되었다. 고려시대부터 임피에
조창을 두어 세곡을 운송하였으며, 조선시대에도 함열에 성당창을 두어
주변 군현의 세곡을 운송하였다. 또한 17세기 후반이후 대동미의 운송량
이 대폭 증가하면서 세곡임운이 보편화되자, 대동미를 운송하기 위해 공
주의 분포, 은진의 시진포에 각각 창을 두어 금강 이남의 세곡을 賃運하
도록 하였고, 임피에는 羅里浦를 설치하여 제주도의 미곡공급을 담당하
게 하였다.39)
이처럼 금강수로에는 국가차원에 중요한 세곡운송기능을 하는 포구들
이 많이 존재했지만, 강경포는 세곡운송기능을 담당하지는 않았다. 현재
까지 찾을 수 있는 강경에 대한 가장 앞선 기록은 17세기 후반 강경포
주변 民田에 江景場을 개설하여 民田주인들이 상인들로부터 收稅하고
있다는 기록이다. 이곳을 1683년(숙종 9) 훈련도감이 포구라는 명분으로
절수하고, 점포를 설치하여 상인들에게 세금을 거두기 시작하였다.40) 훈
련도감에서는 세금을 勒徵했을 뿐만 아니라 선인들이 싣고 온 어물들을
싼값에 勒買하여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다.41) 이에 주민들의 원망이 높아
지자 사헌부까지 나서서 훈련도감에서 개설한 점포를 혁파할 것을 요구
39) 최완기,『조선후기 선운업사 연구』일조각, 1989.
40) 浦口折受는 선조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궁방등에 분배할 토지가 부족하자
해안의 어장이나 염분, 포구등을 절수하기 시작하였다. 포구절수에 대해서
는 고동환, 1985 앞의 논문 참조.
41)『승정원일기』숙종 9년 윤6월 6일(병오) 제299책/제15책
軍門稱以設鋪差送別將貽害於外方爲近日之痼弊恩津江景場市自前
設行於民人田地收捧厥稅施給垈主其規已久民人亦懋遷有無以爲資生
之路矣前冬訓局大將陳達筵中折受江景場巿又送別將仍留設鋪刦捧
地稅其數倍簁於本縣之所捧怨言旣多而捧稅之外商賈每船各以麤木一
匹出給之後石魚眞魚等物定數勒捧至於百束之多船人怨讟絶不來聚
市肆殆空江景民人已失資生之路方有離散之擧許多垈主亦失世傳之業
126 湖西史學第43輯
하여 훈련도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42) 강경포가 금강에서 가
장 중요한 포구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앞서 언급했던 각종 수해
를 피할 수 있었던 자연지형의 우월성외에도 민간 주도의 상업포구로서
안착되었다는 요소가 있었다. 대부분의 포구들이 처음에는 세곡운송의
기지로 기능하다가 상업중심지로 전환하는데 비해, 강경포는 세곡운송의
기능을 이웃한 시진포나 함열의 성당창에 넘겨주고, 처음부터 상업적 기
능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포구라는 점도 매우 특징적인 점이다.43)
그러나 상업이윤이 상당하게 발생하는 포구를 봉건권력이 방치하지는
않았다. 강경포는 그 이후 다시 어의궁에 절수되어 어의궁에서 收稅하였
지만, 1822년에 용동궁으로 그 소속이 바뀌었고, 용동궁에서는 균역법 실
시이후 포구절수가 대부분 혁파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난을 피하기 위
하여 북어선 선주인권을 給價買得하여 강경포를 드나드는 선상들에게
구문을 거두는 권리를 획득하였다.44)
42) 『승정원일기』숙종 9년 윤6월 16일(병진) 제299책/제15책
43) 최완기 교수는 강경포도 여타의 포구와 마찬가지로 세곡운송기능을 주로
하다가 상업중심지로 성장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강경포 주위에 시
진포, 성당창 등 조세창이 발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확한 추론은 아니라
고 생각된다.(최완기,「조선후기 강경포구에서의 선상활동-그 입지를 중심
으로」『역사교육』79, 역사교육연구회, 200. 참조)
44) 『일성록』헌종 원년 8월 1일
備局啓言頃因忠淸監司金在三所報龍洞宮所屬恩津江景論山兩浦收稅事
詳査報來之意捧甘於內需司矣卽見該司所報則枚擧該宮手本以爲江景
浦本以肅廟朝判下於義宮折受之地壬午因下敎移屬本宮後北魚船旅客
主人給價買得定置監官口文名色中有所宮納論山浦則年前江景下流浦
民輩有主來船從中橫奪自備局行關兩湖嚴加禁斷分稅則從民願營邑
酌定成節目遵行則今此奸民輩之乘時作梗掩諱本事歸之於非理占稅禁
斷之中故具報廟堂以待決處之際其間稅錢之留置於主人者該浦居民金
哥漢誣呈營邑從中偸執云亦爲嚴關査實一一督捧後痛懲其罪爲辭矣
均役設始之時凡係海浦船隻之稅無論宮房折受與衙門所管一竝移屬於均
廳今此於義宮折受旣在於均役創制之前則至今有不可以此爲言而本浦
收稅則旣云給價買得且況有年前判下事體自別不容混歸於冒占禁斷之中
조선후기 錦江水運과 浦口市場圈127
강경포에서 유통되던 주요 상품은 조선최대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미곡을 비롯하여, 면포, 마포, 어염, 수공업제품 등이 있었다. 미곡 등 곡
물은 주로 서울을 비롯,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소비지에 공급되었
으며, 도기, 토기, 철물 등의 수공업제품, 전라도의 면포, 그리고 서해안
에서 생산되는 어염 등 해산물, 심지어는 함경도 원산에서 나는 북어까
지 강경포로 유입되어 매매되었다. 즉 미곡 등의 곡물은 강경포에서 수
집되어 유출되었고 어염·수공업제품·각지의 특산물 등은 강경포로 유입
된 뒤 인근 각지로 분배되어 나갔다.45)
1909년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전라도 여산, 충청도의 은진, 노성, 부여,
석성의 각 군으로부터 산출되는 미곡, 잡곡, 牛皮, 기타 제 잡품 등이 모
두 강경을 경유하고, 외국수입품 및 한국 해산물 같은 것도 강경을 거쳐
각 지방으로 수송되었다. 강경을 거쳐 유통되는 상품중 외부로 반출되는
상품으로는 미곡, 외부에서 반입되는 상품은 소금이 가장 중요한 상품이
었다. 강경시장은 상품의 종류가 다양하여, 전라도의 목면, 마포, 서울로
부터의 중국 견직물, 전주로부터의 종이, 세공물, 서양직물 등도 집산되
고 있다.46) 직물류 등의 수입품 및 어염을 미곡을 중심으로 하는 내륙의
농산물과 교역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로써 보면, 강경은 금강유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전국적으로 반출하는 핵심 시장이었음과 동시에 전국
각지의 상품이 강경포를 통해 반입되어 금강수로를 통해 다시 금강유역
제지역으로 분배되는 고차 중심지 시장으로서 금강유역의 最大場이었다.
許令依前施行如果有從中偸執之類亦令本道査實懲處而宮差輩若或藉
此而有科外濫占之弊則自本道隨卽摘發論報另施嚴懲之意請竝爲申飭
於該道臣處允之敎以宮差初不下去勿論雖以監官輩言之若有科外作弊
之端則斷當依法嚴懲而如是定式之後地方官及道臣如或誤聽奸民輩誣
訴復以本浦收稅等說更煩登聞亦當施以制書有違之律竝以此意一體分
付
45) 이영호, 1986 앞의 논문 참조.
46) 度支部司稅局, 1909 隆熙三年九月『韓國各府郡市場狀況調査書』제2
편 충청남북도
128 湖西史學第43輯
郡面포구마을 漁名판매시장
부근
장시와의
거리(里)
부근
장시
개설일
扶餘
淺乙
窺巖浦沙沈魚, 七魚,
自開魚
方生面恩山市10 1, 6
乭里浦秀魚, 鯉魚, 七魚恩山市10 1, 6
道城
虎巖浦沙沈魚, 七魚,
自開魚恩山市10 1, 6
(2) 금강 포구시장권의 구조
시장권은 最大場-大場-小場의 위계관계를 통하여 형성된다. 대장은 거
래량이 많을 뿐만 아니라 소장의 잉여물자를 집하하여 大場圈외로 이출
하고 권외의 이입물자를 배급하는 고차중심지였다. 대장권은 대장이 주
변 소장들과 개시일을 달리하여 그것들을 포섭함으로써 형성된다. 그러
므로 포구시장권을 파악하려면, 그 지역에서 생산된 상품의 유통경로를
해명하는 것과 함께 대포구와 그 주변 소포구에 위치한 장시 개시일의
상관관계를 분석하는 것이 요구된다.
금강 연안의 상품유통의 경로가 어떠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흔치
않다. 다만 『韓國水産誌』에는 금강 연안의 포구마을에서 어획된 물고
기들이 어느 장시를 통해 처분하는가를 조사한 자료가 있다. 비록 강에
서 잡힌 물고기의 유통경로를 제시한 자료이긴 하지만, 이로 미루어 일
반적 상품도 같은 경로를 따라 처분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조
사된 자료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의 <표 4>와 같다.47)
<표 4> 금강연안 포구마을에서 어획된 수산물의 판매장시
47) 이 조사는 금강에서 어업을 행하는 마을을 대상으로 조사하였기 때문에 공
주, 연기, 회덕 등지는 조사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금강포구시장권의 구조를
다루려면 마땅히 금강의 중상류지역, 즉 부강에서 규암까지도 분석대상에
포함시켜야 했으나, 자료의 한계상 시장권 분석은 부여의 규암에서 하류지
역까지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조선후기 錦江水運과 浦口市場圈129
石城
北面
路下里秀魚, 鯉魚, 葦魚,
鮎魚
恩山市20 1, 6
江景市30 4, 9
縣內
鳳頭亭里秀魚, 鯉魚, 鮎魚,
葦魚, 錢魚
江景市20 4, 9
論山市23 3, 8
林川
世道
桂陽里秀魚, 葦魚, 宗魚林川邑市江市景10 4, 9
白巖
頒詔院里同林川邑市10 4, 9
舒川
南部
白沙里中鰕, 大鰕, 小石魚,
潜滂魚, 鰖魚
舒川邑市10 2, 7
吉山市20 4, 9
長岩里石魚, 鮻魚吉山市2205 4, 9
西部
冬之里石魚, 全魚江景市
舒邑川10 吉山4, 9 市20
芦項里同江景市1200 4, 9
臥石里同江景市1200 4, 9
竹山里葛致魚, 油魚, 石魚江景市1200 4, 9
山所里葛致魚, 油魚, 石魚吉板山橋市市1200 4, 9
金浦里葛致魚, 油魚, 石魚吉山市20 2, 7
板橋市30 4, 9
沃溝
長面
五峰浦鮻魚
京場市
20
10
長財市5
北面
京浦里鮻魚, 石魚海上來往商船3
礪山北
一 黃山浦葦魚黃山市江景
市2
江市景14
19
黃市山2,
7
<전거: 대한제국 농상공부 편, 1910 『韓國水産誌』3권, 부록 2, 漁事一覽表
pp. 67-70 >
130 湖西史學第43輯
<표 4>에서 보면, 부여군 천을면 규암포와 돌리포, 도성면의 호암포에
서 잡힌 어물은 10리 떨어진 1, 6일 열리는 은산장시를 통해 판매되었다.
석성군 북면의 노하리, 현내면의 봉두정리에서 잡힌 어물은 20리 떨어진
부여의 은산장이나 4, 9일에 열리는 30리 떨어진 강경장, 또는 3, 8일에
열리는 논산장에서 판매되었다. 임천군 세도면 계양리나 백암면 반조원
리에서 잡힌 어물은 임천읍장이나 4, 9일에 열리는 10리 떨어진 강경장
에서 판매되었다. 서천군의 경우 금강에 면한 남부면 백사리와 장암리에
서 잡힌 어물은 2, 7일 열리는 서천읍장이나 4, 9일에 열리는 길산장에서
판매되었다. 서천군 서부면의 동지리와 호항리, 와석리, 죽산리에서 잡힌
어물은 강경장에서 판매되었다. 같은 서부면이지만 산소리, 김포리에서
잡힌 어물은 길산장이나 4, 9일에 열리는 비인의 판교장48)에서 판매되었
다.
한편 금강 좌안의 전라도쪽 사정을 보면, 여산군 북일면 황산포에서
잡힌 물고기는 2, 7일에 열리는 황산장이나, 2리 떨어진 강경장에서 판매
되었다. 옥구군 장면 오봉포에서 잡힌 물고기는 5, 0일에 열리는 京(浦)
場이나 長財場에서 판매되었으며, 북면 경포리에서 잡힌 물고기는 특정
한 장시에서 매매되기 보다는 포구를 드나드는 상선(海上來往商船)에 직
접 판매되었다. 포구가 상선의 정박처임과 동시에 상거래의 기능을 수행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浦市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경우를 지칭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상행위는 경포 외에도 전라도 만경군의 夢
山浦에서 잡힌 물고기들도 직접 海上放賣하고 있는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표 4>를 통해서는 금강 포구시장권의 중심은 강경포였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강경포의 상류에는 부여의 은산장이, 강경포의 하류에서는 서
천의 길산장이 중심이었다. 은산장은 강경장과는 개시일을 달리하였기
48) 동국문헌비고에서는 비인 판교장의 개시일은 5, 0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후기 錦江水運과 浦口市場圈131
때문에 강경장에 포섭되면서 하위 중심장으로서 기능한 것으로 보여지
지만, 길산장의 경우 강경장과 개시일이 동일하기 때문에 강경시장권과
의 연계성이 긴밀하지 않은 시장이었다.
포구 시장간 연계를 확인하기 위해서 강경장을 중심으로 한 장시 개시
일을 살펴보도록 하자. 앞의 <그림 2>에서 보듯이 금강 유역 포구시장
대부분은 강경장의 개시일인 4, 9일과 겹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개시일
이 겹치는 장시는 공주의 동천장, 임천의 입포장, 서천의 길산장, 임피의
서포장이었다. 금강의 중상류인 공주목의 對岸에 위치한 동천장은 부강
에서 강경까지 수로 중간에 위치하는 장시이다. 부강에서 강경까지 하강
하는데는 하루 걸리지만, 소강하는 데는 이틀이 걸리기 때문에, 동천장에
서 강경장까지 하루만에 왕복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므로 동천장은 강경
장과 동일한 4일에 열릴 수 있었으며, 주변 소장시의 중심장으로 기능하
였다. 부강장과 강경장을 중계하는 장시였던 것이다.
동천장을 제외한 나머지 입포, 길산, 서포장시는 강경포 보다 하류에
위치한 장시들로서 모두 포구에 위치한다. 이 포구들은 강경포에는 미치
지 못하지만, 주위의 포구에 비해 선박왕래가 많은 중규모의 포구였다.
이들 포구장시는 강경장과 개시일이 동일하기 때문에 강경장에 직접적
으로 포섭된 것으로 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왜 강경포의 하류에 있는 중규모의 포구에 있는 장시들이 강
경시장권에 편입되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우선
두가지 경우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유통상품의 차이나 또는 시장권의
대립이 그것이다.
첫째 유통상품의 차이는 입포장과 강경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입포장
은 강경장과 근접한 포구였지만, 주된 유통상품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
로 보여진다. 입포장은 저포유통의 중심지로서 주목되었기 때문에, 미곡
이나 해산물 거래위주였던 강경장과는 직접적 포섭관계없이 개시일이
달라도 장시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132 湖西史學第43輯
또 다른 원인은 포구상업의 발달과정에서 포구간 시장권 대립현상으
로 나타난 것이라고 보여진다. 조선후기 포구상업의 발달과정에서 강경
포의 영향력 아래서 발전하고 있었던 소포구들은 19세기 중엽이후부터
점차 성장하여 강경포로 가는 선박을 자신의 포구로 유치함으로써 강경
포의 상대적인 쇠퇴를 초래하고 있었다.49) 강경포의 하류에 있었던 중소
규모의 포구사이에 상선을 유치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강경포
의 경우 각종 궁방이나 지방권력, 그리고 주인층의 침탈로 인하여 대부
분의 선상들이 기피하는 바가 되었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하류
의 포구에서는 선상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하류 포구의 상인들은 작은
선박을 가지고 직접 서해 바다까지 나아가 상선이 올라오기를 기다려 상
선을 자신의 포구로 유인하기도 했다.50) 이와 같은 상선유치에는 함열의
熊浦나 임피의 羅浦,51) 그리고 韓山의 新牙浦, 臨陂의 西浦, 鷄浦, 沃溝
의 沙王浦52) 礪山의 羅岩浦가 가담하였다.53) 이와 같은 강경포와 강경
49) 『要考』(奎古5125-49) 권1
江景者卽一邑之大都會也非但一邑抑亦一國一道之都會也百貨之所委積
一邑之所支賴也挽近以來米商舶之湊集漸少閭里之蕭索日甚昔盛今衰
(중략)今年遇亢旱之災雖曰厄運之自天豈無人事之所召官屬之侵漁多端
居民之習俗日偸富商大賈多懷遷徙之計農舍漁戶莫有安保之恩世所稱
恩津之以江景撑支者今殆有其名而少無其實矣
50) 『內需司庄土文績』권7 龍洞宮手本
近來小浦奸民輩多聚徒黨別造飛艇伺侯海口上來商船截江執捉無異
白奪各處商船百無一到仰利之戶十不存一必至於渙散
51) 『龍洞宮謄錄』(奎19573) 乙丑(1865) 10월 25일 全羅監營營吏處
挽近以來咸悅熊浦臨陂羅浦等處無賴射利輩不顧判下所重景浦入去北
魚船中間勒執私自卸下恣意賣買不爲納稅以致莫重上納欠縮之境
52) 『內需司庄土文績』(奎19307) 권 7, 龍洞宮手本道光20年(1820) 正月
刑房
下浦捉船之漢則韓山新牙浦元道一舒川杜茂峙宋啓弘全羅道臨陂西浦金
光謙鷄浦韓聖擧沃溝沙王浦李福哲等各自本道嚴刑定配(중략)以杜其弊
以完宮納使浦民船商得以安堵之地事
53) 《要考》(奎古5125-49) 己亥(1839) 春礪山羅岩橫執商船故論報.
조선후기 錦江水運과 浦口市場圈133
포 하류의 제포구간의 상선을 유치하기 위한 경쟁은 개항이후에도 계속
되었다. 하류포구의 상업세력이 상선유치에 대한 대응은 강경포만이 아
니라 강경포에 이웃한 논산포와 황산포의 상인들이 함께 대응하였다.
1901년의 자료이긴 하지만, 임천의 명학도, 양내겸, 김기수 3명이 강경포,
논산포, 황산포 등으로 올라오는 상선을 하류에서 집착하였기 때문에 자
신들의 상거래가 줄어든다고 하여 이들을 징치해주라는 議送을 세포구
의 상인들이 모두 함께 연명하여 視察使에게 올리고 있는 것이다.54)
금강 하류에서 전개된 상선유치경쟁은 포구시장권 내부의 대립을 반
영하는 것이다. 포구시장권의 대립은 대포구에 종속되었던 소포구가 대
포구의 광역시장권을 잠식하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가능했다.55) 이것이
임천의 입포, 임피의 서포, 한산의 길산포가 강경장과 개시일이 동일했지
만 흡수되거나 통합되지 않고 오히려 한말에 이르면 더욱 성장할 수 있
었던 요인이었다. 19세기 후반 금강유역의 포구시장권은 포구와 포구사
이의 시장권대립이라는 형태를 취하면서 포구간의 경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Ⅳ. 맺음말
이상에서 금강수운의 조건과 포구시장권의 구조에 대해 살펴보았다.
54) 서울대 규장각 『고문서』24책, (규고문 66306) 忠清道恩津江鏡論山魯城論
山全羅道礪山黃山啇民等議送. 참고로이때의송에참여한세포구의상인들
의 명단을 보면 江鏡浦에서 權汝弘崔贊益孔士兼郭敬德俞俊聖金洛文
車載巨黃敏植金乃京金成文金敬三林敬逸등12명이, 論山浦에서 金輔逸
朴敬連金輔仁許贊化金成局趙敬章朴德兼李聖化朴致浩金永枸趙成學
徐世京등 12명, 黃山浦에서 李自順金聖逸韓才京孟信才方良信朴亨直
徐道有申禹西金在鎬徐在成鄭聖必徐化西등 12명이다.
55) 고동환, 1985 앞의 논문 참조.
134 湖西史學第43輯
이하에서는 앞서의 논의를 요약함으로써 글을 맺고자 한다.
금강은 한강에 비해 훨씬 유리한 수로조건을 지닌 강이었다. 국내 다
른 강에 비해 중류이하에서 경사도의 편차가 심하지 않고 하폭의 변동
또한 규암과 백마강 구역을 제외하고는 큰 편차가 없었다. 그러므로 수
상선, 수하선의 구분없이 소규모 海船이 가항종점인 부강까지 운항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유리한 수로조건 때문에 금강연안에는 선박이 통항하는
데 필요한 포구와 나루, 여울 등이 대략 1km당 한 곳 정도로 매우 촘촘
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이는 금강의 자연적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면서 동시에 금강 수운을 활성화시킨 중요한 조건이었다.
조선후기 금강유역의 포구시장권은 금강이라는 매우 유리한 수로조건
을 토대로 포구와 장시의 긴밀한 연계 하에 형성되었다. 금강유역의 장
시망은 임란이후 훨씬 확대되었는데, 임란의 전쟁 참화가 이 지역을 피
해갔기 때문이다. 금강유역의 장시망은 다른 지역과 달리 19세기 이후에
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에 있었다. 19세기 이후 신설되는 장시는 대부
분 포구에 위치하고, 또 금강하류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었다. 금강의 포구
시장권은 포구와 더불어 선박에 의해 운송되는 대규모의 물량을 빠른 시
일 내에 분배할 수 있는 배후 시장인 장시유통망이 결합됨으로써 형성되
었다.
금강 포구시장권의 중심지는 강경이었다. 강경의 상류에는 부여의 은
산장이, 강경포의 하류에서는 서천의 길산장이 중심시장으로 기능하였
다. 은산장은 강경장에 포섭되면서 하위 중심장으로서 기능하였지만, 길
산장의 경우는 강경장에 직접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다. 길산장과 더불어
금강 하류에는 임천의 입포, 임피의 서포가 강경장과 개시일이 같았다.
이들 포구장시는 강경으로 올라가는 선박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포구로
유인하여 자신의 시장을 스스로 창출하였다. 이와 같은 금강 하류에서
전개된 상선유치경쟁은 포구시장권 내부의 대립을 반영하는 것이다. 19
세기 후반 금강유역의 포구시장권은 포구와 포구사이의 시장권대립이라
조선후기 錦江水運과 浦口市場圈135
는 형태를 취하면서 포구간의 경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왕의 장시연구에서 내려진 결론은 높은 수준의 장시밀도를 지닌 농
촌의 정기시체제는 18세기 후반에 완성되었고, 이 체제는 매우 안정적이
었기 때문에 상설시장으로의 전환이 어려운 구조였다고 설명한다. 즉 고
밀도의 농촌장시망은 도시시장과 원격지 유통의 새로운 차원의 발전, 농
촌공업의 발달이라는 새로운 충격이 없으면 안정성이 깨어지기 힘든 구
조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 연구를 통해서 확인한 바와 같이 금강유역
의 장시망은 포구상업의 발달로 인해 19세기 중엽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이러한 변동이 원격지유통의 새로운 발전에 기반한 시
장 창출을 전망할 수 있는 수준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차원의 검토가 필
요할 터이다. 그렇지만 18세기 후반 완성된 농촌정기시체제가 그 이후
큰 변동없이 지속되었다는 기왕의 장시연구의 결론은 포구시장의 성장,
발전이라는 차원에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논문접수: 2006. 03. 30, 심사시작: 2006. 03. 31, 심사완료: 2006. 04. 10.]
주제어: 錦江, 輸運, 浦口市場圈, 場市, 江鏡
136 湖西史學第43輯
<Abstract>
River Geumgang Water Transportation and Port Market
Area during the Latter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Ko, Dong-Hwan
On the shore of River Geumgang, ports, ferries, rapids, etc. necessary for
sailing of vessels were located very closely about one per 1km. On the basis
of this advantageous watercourse condition, port market area around River
Geumgang was formed by connecting ports and markets. The market
network around River Geumgang was expanded after Imjinoeran,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because it could avoid the ravages of war. The
number of markets in the latter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reached
saturation condition since the latter half of the 18th century, and the total
number of markets decreased after th 19th century because larger markets
absorbed small-size markets. However, differently from other area, The
market network around River Geumgang steadily increased even after the
19th century. Markets established after the 19th century were mainly
distributed around the lower reaches of River Geumgang.
The center of River Geumgang port market area was Ganggyeongpo.
Eunsan Market in Buyeo upstream of Ganggyeongpo and Gilsan Market in
Seocheon downstream of Ganggyeongpo functioned as central markets.
조선후기 錦江水運과 浦口市場圈137
Eunsan Market functioned as a subordinate central market after being
absorbed by Ganggyeong Market. Gilsan Market located downstream
conflicted with Ganggyeong Market becaue they had the same market day.
Also Ippo Market in Imcheon and Seopo Market in Impi had the same
market day as Ganggyeong Market. These port markets conflicted with
markets in Gyanggeongpo because they invited vessels going up to
Ganggyeong. Port market area around River Geumgang in the latter half
of the 19th century developed through market competition among ports.
key words : River Geumgang, Port market area, Water Transportation,
rural market, Gangg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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