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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成勳*
<目次>
1 . 머리말 2 . 해도의 민의 둔취와 해도기병설 1) 민의 해도 유입과 저항세력화 2) 해도기병설의 구조와 이상사회론 3 . 해도기병설 관련 변란의 추이 4 . 해도기병설 관련 변란의 구조와 특징 1) ‘小雲陵’ 관련 거사모의 2) ‘紅霞島’ 관련 거병설 5 . 맺음말-해도기병설의 성격-
1. 머리말
조선 후기의 변란은 농민항쟁, 즉 민란과 더불어 민의 저항을 대 표하는 전형적 틀이다. 변란은 주로 訛言이나 妖言․掛書․擧事謀議 등의 형태로 일어났으며, 이러한 저항의 가장 큰 특징은 주로 鄭鑑 錄등 민간사상 내지는 민중사상의 요소가 이념적 배경으로 작용하 였다는 점이다. 더욱이 정감록은 18세기 이후에 발생한 많은 변란에 서 그 사건을 반체제 성향으로 추동해가는 하나의 사상체계 역할을 하였다. 정감록이 이처럼 각종 변란에 이용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 체에 ‘현실 부정과 새로운 세계의 구현’이라는 혁명적 논리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는 眞人이 海島에서 군사를 이끌고 나와 현재의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 즉 이상사회를 건설한다는 이른바 ‘海島起兵說’1)에 응축되어 있으며, 이것은 변란의 강력한 이념
* 國史編纂委員會編史硏究士.
1) 여기에서 ‘해도기병설’은 ‘해도설’․‘남방설’과 ‘진인설’ 및 ‘기병설’ 등이
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정감록의 주요 논리인 해도기병설과 이를 이 념적 기반으로 하여 일어난 변란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그 구조와 성격을 이해하고자 한다. 먼저 해도기병설 발생의 전제가 되는 ‘해 도’의 실상을 검토하고 정감록에 서술되어 있는 해도기병설의 내용 과 그 성격을 파악하여, 이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고자 한다. 그리 고 해도기병설을 내걸고 일어났던 변란의 추이를 와언과 요언․괘서 ․거사모의 등의 유형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그 흐름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해도기병설 관련 변란의 사례 분석을 통하여 그 구조와 성격을 검토하려 한다. 이를 위해 해 도기병설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 있다고 판단되는 정조 때의 ‘小 雲陵’ 관련 거사모의 사건과 순조 때의 ‘紅霞島’ 관련 거사설을 분석 의 대상으로 삼았다. 아울러 본고의 검토 시기는 18세기와 19세기 전반에 중점을 두었 다. 19세기 후반에는 외세의 침략과 농민항쟁의 본격화, 동학의 창도 등으로 말미암아 그 성격을 달리하므로 별도의 검토를 요하기 때문 이다.2)
2. 해도의 민의 둔취와 해도기병설
1) 해도의 민의 유입과 저항세력화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동의 결과는 流民化, 즉 토지로부터 이 탈한 농민들과 관련한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3) 생산력의 총체적 수치
결합된 뜻으로 사용함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단 순히 ‘해도설’을 ‘해도기병설’의 뜻으로 사용하였으며 또는 ‘남방기병설’ 을 같은 범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2) 19세기 후반의 해도기병설 관련 변란에 대해서는 배항섭,「19세기 후 반 변란의 추이와 성격」,『1894년 농민전쟁연구 2 -18․19세기의 농민 항쟁』, 1992 참조.
가 증가되었다고 하나 그 혜택의 대부분은 지주들에게 돌아갔을 뿐 이고, 富農으로 성장한 자영농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많은 농민들이 토지로부터 이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전국적 현상이 었으나, 특히 三南지방이 더욱 심하였다. 숙종 37년(1711)에는 전라 도의 바닷가 7개 고을에서 가을 이래 고향을 떠난 유민이 부지기수 였는데, 務安에서만도 5천호 가운데서 2천호가 유민화하였다.4) 숙종 43년에는 충청도에서 10만 명의 유민이 발생하였고,5) 영조 9년(1733) 에는 경상도에서도 약 17만 명의 유민이 발생하였다.6) 이처럼 삼남 지방에서 전례없이 많은 유민이 발생한 것은 이 지역 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농민층 분화가 촉진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대 량의 소작농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관리와 지주․상인․고리 대업자 등에게 가혹한 수탈을 당하였고, 결국은 토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토지를 떠난 농민들, 즉 유민들은 나름대로 삶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다른 농촌으로 이주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화전․변방의 개간지․해도, 도시나 광산 지역으로 옮겨갔 고, 심지어 국경을 넘어 이주하는 자들도 늘어났다.7) 또한 일부 유민 들은 걸식하며 지내는 ‘流丐’의 신세로 전락하거나, ‘明火賊’이 되어 지배층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유민들은 여러 방법으로 삶의 길을 찾아나섰다. 그 가 운데서도 해도기병설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섬으로 흘러들어간 민인들의 존재이다. 이들은 섬으로 들어가 모여살면서 하나의 세력 을 이루었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형태의 저항을 도모하였다. 조선시대의 해도정책은 섬지방으로의 이주를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空島정책을 기본으로 삼고 있었으며, 이러한 정책은 조선 후기에도
3) 조선 후기의 유민 문제에 대해서는 邊柱承,『朝鮮後期流民硏究』, 高麗 大博士學位論文, 1997 참조. 4)『備邊司謄錄』611책, 숙종 37년 2월 20일. 5)『肅宗實錄』권 59, 숙종 43년 3월 계해. 6)『英祖實錄』권 34, 영조 9년 10월 신묘. 7) 邊柱承, 앞의 논문, 49~111쪽.
계속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유민들이 해도 이주를 강행하였 다. 그것은, 해도에서는 소규모나마 경작지를 확보할 수 있고, 漁採 나 鹽業등의 생업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에서도 해도 이주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결국 일부 섬에 한정 하여 민인의 이주와 개간을 허락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8) 정부내에 서는 공도정책의 완화로 말미암아 일어날 수 있는 여러 폐단을 예방 하기 위하여 ‘海島設邑論’이나 ‘海島設鎭論’이 설득력 있게 논의되기 도 하였다.9) 이처럼 정부의 해도정책이 완화되자 유민들의 해도 이주가 이전에 비해 더욱 활발해졌다. 숙종 4년(1678)에는 南陽의 大阜島, 仁川의 紫燕島에 많은 유민들이 이주함에 따라 進上用사슴이 멸종될 지경 이었으며,10) 숙종 33년에는 전라도의 可佳島에만도 100여 호의 유민 들이 몰려들었다.11) 이처럼 유민들의 대규모 해도 이주로 말미암아 그에 따른 폐단도 적지 않았다. 영조 7년(1731)에 호남어사 黃晸은 남해 연안의 여러 섬들이 悍民 가운데 군역을 도피한 자들과 역모 연좌자들의 소굴이 되고 있다는 보고를 올렸다.12) 영조 9년에 檢討官兪㝡基는 “진도와 나주의 여러 섬에는 주인을 배반한 많은 惡少輩들이 화폐를 몰래 주조하는 폐해 를 일으키며 혹은 荒唐船과 왕래하며 통하기도 합니다. 또한 역적의 연좌인들이 여러 섬에 많이 유배가 있으므로 妖言으로 선동하여 변 란을 일으킬 근심이 있습니다”13)라는 보고를 올린 바 있다. 이와 같이 당시 여러 섬은 유민들을 비롯하여 도적이나 도망노비 들의 주요 집결지였고, 역모와 관련된 자들의 유배지이기도 하였다. 이들은 현체제에서 소외된 자들로 그만큼 현실에 대해 불만을 품고
8) 邊柱承, 위의 논문, 78~88쪽. 9)『英祖實錄』권 21, 영조 5년 2월 경자․권 36, 영조 9년 12월 정묘. 10)『肅宗實錄』권 7, 숙종 4년 10월 경오. 11)『備邊司謄錄』58책, 숙종 33년 8월 21일. 12)『英祖實錄』권 29, 영조 7년 1월 무진. 13)『英祖實錄』권 36, 영조 9년 11월 신사.
있었다. 이들은 지리적으로 官의 직접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 점을 이용하여 세력화하였다. 즉 이들은 독자적으로 화폐를 주조하 거나 황당선과 교류하고, 조운선을 나포하기도 하면서 저항세력화하 였다. 이제 이들 세력은 변란을 도모할 수 있을 만큼 커져가고 있었 다. 이를테면 호남의 여러 섬에는 유민들이 몰려들어 ‘黨’을 이룰 정 도였다. 더욱이 邊山에서는 많은 적도들이 웅거하여 대낮에 장막을 치고 약탈을 자행하였는데, 이들은 큰 절의 승려들을 몰아내고 그 절을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을 만큼 세력이 강성하였다.14) 이러한 사 례들은 섬에 모여든 민인들이 단순한 생계유지 차원을 넘어 저항세 력화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정부에서는 관리를 파견하여 기찰하는 등의 대책을 강구하였 으나 바라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실제로 영조 4년(1728)의 戊申 亂때 변산에 웅거하던 노비도적은 난의 중심세력이었으며, 더욱이 이들 세력을 이끌던 鄭八龍은 ‘鄭都令’으로까지 불리던 유력자로서 ‘靑龍大將’ 12명 가운데 제1장으로 출병하였다.15) 이처럼 해도가 저항세력의 근거지가 되고 있던 사실은 당시의 사 회상을 반영한 소설에도 잘 나타나 있다.「語消長偸兒說富客」이라는 소설은 江壁里의 대부호가 중앙의 권력집단과 연결을 도모하는 한편 수하에 600여 명의 하인들을 거느리고 명화적을 대비하였으나, 스스 로 ‘綠林客’으로 일컫는 月出島의 대장이 신출귀몰한 전술을 써서 이 부호의 재물 100여 萬金을 탈취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 월출도 대장 은 “재물은 천하의 公器로서 어느 누구에게 독점되어서는 안된다”는 논리로 강벽리 부호를 훈계하였고, 끝내는 이 부호도 월출도 대장을 호걸로 여기며 흠모하기에 이르렀다는 내용이다.16) 이 소설에서 월출
14)『英祖實錄』권 14, 영조 3년 10월 임인. 15) 鄭奭鍾,「朝鮮後期理想鄕追求傾向과 三峰島- 燕巖許生傳의 邊山群 島와 無人島의 實在性여부와 관련하여 -」, 碧史李佑成敎授停年退職紀 念論叢『民族史의 展開와 그 文化(下)』, 創作과 批評社, 1990, 56~58 쪽. 16) 李佑成․林熒澤譯編,「月出島」,『李朝漢文短篇集(下)』, 一潮閣, 1978, 3 ~10쪽.
도 대장은 섬에 웅거하는 녹림당의 우두머리이지만, 그가 민중의 지 지를 받는 의적으로 묘사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관료들의 민중에 대 한 탐학이 매우 심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으로 당시 부패한 사회 상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요컨대 이들 해도세력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물리력을 바탕으 로 당시 빈번히 발생하던 각종 변란에 어떠한 형태로든지 참여하였 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러한 해도의 실상을 고려할 때, 변란은 보통 정감록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있으므로, 해도기병설에서의 기병 주체인 군사와 그 군사를 이끌 인물로서의 진인의 실체가 해도 에 둔취한 저항집단과 그 집단의 우두머리를 상징적으로 그려낸 것 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당시 주요 史料에 보이는 ‘海浪島’와 그곳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海浪賊’이라는 존재가 주목할 만하다. 해랑도는 이미 조선 초기부터 중국과 조선 유민들의 대표적 근거지로 알려져 왔으며, 해랑적 또한 해상의 불법세력을 대표하는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이에 정부내에서도 해랑도의 실상에 대한 보다 정확한 조사와 쇄환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17) 정부에서는 연산군 6년(1500)에 海浪島招撫使에 田霖을 임명하여 해랑도를 수색하고 그곳의 백성들을 쇄환하도록 하였다.18) 이러한 정 부의 조치는 민폐를 일으키는 등의 적지 않은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 으나,19) 배 2척을 나포하고 100여 명을 사로잡는 등 어느 정도의 성 과도 거두었다.20)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조처도 근본적 대책은 아니
17)『燕山君日記』권 29, 연산군 4년 4월 병술. 18) 이 일은 후에 李瀷이나 李肯翊과 같은 실학자들에 의해서도 해랑도와 관련한 대표적 대응 조치로 평가받은 바 있다(李瀷『星湖僿說』권2, 「天地門」海浪島; 李肯翊,『練藜室記述』別集권 17,「邊圉典故」海 浪島). 19) 의정부에서 평안도 軍民들이 피폐해진 원인 8가지를 보고한 가운데에, ‘海浪島招撫使의 필요 식량을 조달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을 만큼, 해 랑도 쇄환책은 적지 않은 민폐를 수반하였다(『燕山君日記』권 37, 연 산군 6년 3월 병자). 20)『燕山君日記』권 38, 연산군 6년 6월 경술.
었다. 정부의 쇄환정책에도 불구하고 해랑도 문제는 계속되었고 이 후 도서정책의 주요 현안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해랑도 문 제는 그곳의 거주민 또는 왕래하는 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일회성 사 건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해랑적의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그 폐해가 더욱 심해졌다. 예컨대 해랑적이 兩西지방의 연해에 자주 출몰하여 양곡 운반선을 약탈하였으나, 정부에서는 이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 처하지 못하였다.21) 또한 해랑적 문제의 실무를 맡은 황해도와 평안 도의 감사와 병사는 해랑적 수색에 나섰으나 오히려 그들에게 병선 을 빼앗기는 사태까지 일어났을 정도였다.22) 조선 후기에도 해랑도와 해랑적 문제는 계속되었다. 이 문제와 관 련하여 李瀷은 근래에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는 ‘海浪船’이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출몰하여, 이들에 의한 폐해가 심각함을 지적한 바 있다.23) 이처럼 해랑적과 관련한 사회문제는 언제라도 변란과 결부될 수 있는 것이었다. 숙종 38년(1712)에 江華府에서 匿名投書로 수감된 鄭濂은 해랑적 관련 流言등을 지어내어 스스로 풀려날 길을 찾으려 하였다.24) 즉 鴨綠江건너편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 사는 자들 이 7~8천 명에 이르는데, 그들은 근래에 곳곳에 출몰하여 식량을 약탈하는 이른바 ‘해랑적’의 무리라는 내용이다. 정렴은 이 밖에도 당시 정국 현안이었던 延恩門괘서 사건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는 말 을 퍼뜨렸다. 그는 이러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풀려나기를 바랐으나, 결국 그 스스로 지어낸 말임을 자백함으로써 무위로 끝났 다. 정조 11년(1787) 4월에는 경기와 호서지방에 와언이 널리 퍼졌는 데, 이 때 북방족의 기병이 들이닥칠 것이라는 말과 함께 ‘해적의 배’가 가까운데 정박하고 있다는 말이 유포되어 인근 사람들이 대피 하는 소동까지 일어났다.25) 또 정조 21년 11월에 天安의 進士姜彛天
21)『宣祖實錄』권 164, 선조 36년, 7월 을묘. 22)『宣祖實錄』권 209, 선조 40년 3월 병자. 23) 李瀷,『星湖僿說』권 2,「天地門」海浪島. 24)『肅宗實錄』권 51, 숙종 38년 정월 무자.
이 西海의 섬 가운데에 ‘해랑적’이 있다는 등의 와언을 유포한 사건 이 일어나기도 하였다.26) 이처럼 이들이 해랑적과 관련한 유언을 퍼뜨리며 일종의 변란을 도모했던 것은 당시 해랑적과 관련한 공포심이 두루 퍼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아울러 그 실체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요컨대 변란은 흔히 불명확한 사실의 유포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랑도와 해랑적의 실체를 모르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할수록, 이와 관련된 문제들은 더욱더 변란에 이용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해랑도는 당시 민인들이 둔취하고 있던 여러 해도를 대표하며, 해랑적은 해도의 저항세력을 대표하는 존재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해도기병설의 구조와 이상사회론
해도기병설은 변란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하는 강력한 논리이며, 실 제로는 해도의 현실, 즉 해도에서 저항세력화한 민의 실체를 반영하 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정감록에서 해도기병설은 어떻게 표 현되고 있을까? 먼저 그 유형과 내용의 파악을 통하여 해도기병설의 구조를 이해하려고 한다. 정감록 사상에 함축된 여러 논리 가운데 가장 강력하면서도 현실 적으로 변란의 이념으로 기능한 것은 이른바 ‘해도기병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해도기병설의 논리가 당시 유민을 비롯하여 해도에 둔취해 있던 무장집단의 저항의지를 상징적으로 수렴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해도기병설’은 ‘남방진인설’을 포함하여 ‘해도진인설’의 보다 넓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일반적 의미로 진인은 도를 닦아 높은 경지에 이르러 용력이나 무술이 뛰어나며, 나라를 차지하거나 세상을 구하
25)『正祖實錄』권 23, 정조 11년 4월 병진. 26)『正祖實錄』권 47, 정조 21년 11월 병자․정축․무인․신사․을유.
는 성스러운 과업을 담당할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다.27) 그러므로 해 도기병설과 관련한 진인의 존재는 해도의 군사력을 이끌 군사지도자 로서의 의미와 함께 민중의 현실적 고통을 구제할 수 있는 메시아적 인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土亭家藏訣』에는 “靑衣와 白衣가 함께 서남쪽을 침략하니, 이 때에 奠邑이 해도의 병사를 이끌고 方氏․杜氏의 성을 가진 장수와 더불어 갑오년 12월에 곧바로 錦江을 건너면 천운이 回泰할 것이 다”28)라고 하여, 奠邑즉 鄭眞人이 해도에서 군사를 이끌고 나와 적 의 침략을 물리치고 천운의 회태, 즉 이상사회를 구현할 것을 예견 하였다.『慶州李先生家藏訣』에도 거의 같은 내용으로 해도기병설 관 련 부분이 표현되어 있다.29) 이러한 사례들은 해도기병설의 정형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이러한 해도기병설은 ‘李亡鄭興’에 의해 새로운 사회, 즉 ‘이상사회’가 구현된다는 정감록의 핵심 논리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 밖에도『三韓山林秘記』에는 “太白山아래의 六戶東土에 天星이 한 바퀴 돌면 세 사람의 대장이 바다 가운데서 나와 간사한 도적을 토벌할 것이나, 세 사람의 대장도 몸을 보전할 수 없을 것이다”30)라 고 하여, 앞의 사례와는 다르게 서술되었다. 요컨대 이 사례는 정진 인 대신 세 명의 대장이 기병의 주체로 설정되어 있고, 더욱이 이들 자신도 몸을 보전할 수 없다고 하는 점에서 앞의 해도기병설의 정형 과는 다르다. 그러나 이것은 정진인 출현 이전 단계의 상황, 즉 ‘東
27) 趙東一,「진인출현설의 구비문학적 이해」,『韓國說話와 民衆意識』정 음사, 1985, 87쪽. 한편 용력이나 무술이 뛰어난 존재는 將軍이며, 진인 에게는 이러한 성격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하여, 진인의 군사지도자로 서의 성격을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張泳敏,「東學農民運動硏究」, 韓國 精神文化硏究院博士學位論文, 1995, 80쪽). 28)『土亭家藏訣』“靑衣白衣幷侵西南此時奠邑率海島之兵與方杜之將甲 午臘月卽渡錦江則天運回泰”. 29)『慶州李先生家藏訣』“此時奠邑率海島之兵與方杜之將甲午臘月直渡 錦江則天運回泰”. 30)『三韓山林秘記』“太白之下六戶東土天星一周三大將出自海中剿徐奸 賊三大將亦不保身”.
國三分說’31)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道詵秘記』에도 해도기병설의 유형으로 볼 수 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즉, “푸른 옷을 입고 남쪽으로부터 오니 胡도 아니며 倭도 아 니다.․․․오직 저 奠邑이 총명하고 神異로우며 예지롭다. 군사를 서쪽 변방에서 일으키니 天子가 그 공을 아름답게 여긴다. 세 이웃 이 도와서 鷄龍山에 세 아들이 편안하게 도읍을 정할 것이다”32)라고 하여, 남쪽에서 진인이 군사를 일으킨다는 ‘남방기병설’과 ‘동국삼분 설’의 형태가 함께 실려 있어서 해도기병설의 또 다른 유형을 보이 고 있다. 결국 해도기병설은 서책에 따라 그 형식과 내용을 달리하고 있으 나,33) 그 구조의 요체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해도에서 진인이 군사를 이끌고 나와서 현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 즉 이상사 회를 건설한다”는 데로 귀착된다. 그러므로 해도기병설은 체제모순 이 심화되어 가는 사회상황과 맞물려 강력한 저항논리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해도기병설이 민인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앞에서 설명한 바 있는 현실성과 관련된 문제로, 당시 도서지역에 둔취해 있던 민의 존재, 즉 저항세력화하고 있던 해도세력의 존재가 해도기병설의 논 리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해도의 저항세력을 정감록에서 말하는 해도의 군사로, 그리고 저항세력의 우두머리를 정감록의 진 인으로 설정할 수 있는 현실성을 갖고 있다. 둘째는 해도기병설은 이상사회 구현의 문제로 귀착된다는 것이다. 이 때의 이상사회 문제는 체제모순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민중의 폭발
31)『三韓山林秘記』“三國定峙定在卯辰之年太白之下最爲强盛經百七十 年終幷二國末爲奠邑外姓所簒其時人士須問鷄龍山下”. 32)『道詵秘記』“着靑衣而自南非胡非倭․․․唯彼奠邑聰明神睿起兵西塞 天子嘉乃三隣助安鷄龍山三子奠安”. 33) 우윤은 정감록 가운데 해도기병설 관련 내용을「정감록 이본에 보이는 진인출현관련기사」라는〈표〉로 요약․정리하였다. 우윤,「19세기 민중 운동과 민중사상 - 후천개벽, 정감록, 미륵신앙을 중심으로」,『역사비 평』, 1988 봄, 249쪽 참조.
적인 에너지를 수렴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해도기병설에서 제시된 이상사회는 비현실․비합리․비과학적인 논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의 약점은 적어도 온갖 현실의 고통과 좌절을 일 상적으로 겪는 민인들에게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문제는 얼마나 민중에게 호소력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해도기병설의 도달점, 즉 진인에 의해 구현된다고 믿고 있는 이상사회 문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문제는 이른바 ‘南朝鮮信仰’34)을 통하여 어느 정도 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崔 南善은 ‘남조선 신앙’에 대하여, “우리의 앞에는 남조선이 있어서 때 가 되면 진인이 나와서 우리를 그 곳으로 이끌어 간다. 그러면 지금 시달리고 졸리는 모든 것이 다 없어지고, 바라고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게 되는 좋은 세월을 맞이하게 된다”35)는 논리로 설 명하였다. 즉 최남선은 남조선이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이상사회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상사회로 묘사된 ‘남조선 왕국’ 의 실체를 살펴보자.『雞鴨漫錄』에는 “남조선은 남해의 가운데 제주 도 밖에 있는 지역으로 매우 크고 토지가 기름져 살만한 곳인데, 언 제 점유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延日鄭氏의 후예들이 들어가 살면 서 무리를 불러모아 大事를 경영하고 있다. 이는 곧 후일 계룡산으 로 도읍을 옮길 조짐이라고 한다. 이 일이 있은 지는 백년이 되었 다”36)라고 남조선의 실체를 설명하였다. 이것은 여기에 해도와 정씨, 계룡산 등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마치 정감록의 해도기병설 내용을
34) 해도기병설과 관련하여 ‘南朝鮮’이라는 표현은 19세기에야 보이는데, 崔南善이『朝鮮常識問答』에서 ‘南朝鮮信仰’으로 정리하였다. 35) 崔南善,『朝鮮常識問答』, 三星文化文庫16, 1972, 162~165쪽. 그는 여 기에서 남조선을 “본래 조선 민족의 현실고에 대한 정신적 반발력으로 부터 만들어낸 하나의 이상사회 표상이며, 어의상으로 보면 朝鮮語에 南을 ‘앞’으로 새기니 남조선이란 곧 전방에 있는 조선, 곧 미래 영원의 조선을 나타낸 것으로 언제까지나 희망으로 품는 조선”이라고 하였다. 36)『雞鴨漫錄』(坤) 奎가람 古813.08 G997m “南朝鮮者在南海中濟州之 外而地方絶大土沃可居而未知何時所占延日鄭之後裔入處聚黨經營大 事此是後日移都鷄龍之兆也云有此事已爲百年矣”.
풀어서 쓴 듯하다. 그리고 이 해도(남조선)에는 사람들이 모두 영민 하고 준수하며 모든 器械가 갖추어졌을 뿐만 아니라, 이 해도는 스 스로 국도를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 하나의 이상사회로서의 ‘남조선 왕국’을 표현한 말이다. 이와 같이 최남선의 ‘남조선 신앙’과 계압만 록의 기록으로 보아, 남조선은 민중의 염원이 깃들어 있는 ‘미래의 조선’, 즉 해도기병설에서 추구하는 도달점, 이상사회 그 자체로 민 인들의 마음 속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사회는 소설 등 문학 작품을 통하여서도 민중의 마음 속에 자리잡아 왔다. 許筠의 소설 洪吉童傳에서의 ‘硉島國’이 가장 대표적이며 전형적 사례이다. 洪吉童이 정벌한 ‘율도국’은 “도적이 없 으며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는 태평세계”이며, “임금은 한 사람의 임금이 아니라 천하 사람의 임금”이라는 표현과 같이, 전 제국가가 아니라 민중의 왕국인 理想國이다.37) 그러므로「홍길동전」 에서의 ‘율도국’은 존왕적 군주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등 봉건체제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38) 당시로서는 체제모순이 심화된 조선 사회를 대체할 이상사회의 모범이었던 것이다. 朴趾源의 소설「許生傳」에서의 ‘無人島’도 민중의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상사회의 표본이다. 허생이 도적떼를 이끌고 들어간 무 인도는 일본의 長崎와 沙門사이에 위치해 있어 배를 타고 밤낮 사 흘을 가는 거리인데, 인간의 발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섬이다. 이곳은 “모든 꽃과 잎이 저절로 피며, 온갖 과실이 저절로 성숙되고, 사슴이 떼를 이루고, 노니는 고기들이 놀라지 않는 樂土”인 것이다. 許生은 이곳에서 집을 짓고 울타리를 만들고 농사를 지어 풍성한 수 확을 거두었다. 결국 이 소설에는 허생이 ‘땅이 작고 덕이 박하다’는 이유로 무인도를 떠나지만, 이곳은 현실 사회와는 별도의 문자를 만 들고 의관을 제정하는 등 독립적으로 성장해 가는 理想國으로 설정
37) 蘇在英,「韓國文學에 나타난 理想鄕硏究」,『東洋學』23, 檀國大東洋 學硏究所, 1993, 13~14쪽. 38) 申一澈,「崔濟愚의 後天開壁的理想社會像」,『韓國史市民講座』10, 一 潮閣, 1992, 88~89쪽.
되어 있는 것이다.39) 이 밖에도 李矼의「義島記」에는 평양 사람 桂生이라는 자가 어릴 때 大洞江에서 배를 타고 놀다 큰 바람이 불어 바다로 떠내려 갔고 마침내 義島라는 한 섬에 표류하였는데, 그 섬은 “君長이 없으며 조 세나 공납의 의무도 없는 곳”이라고 하였다.40) 이강이 ‘의도’라는 섬 을 평등한 세계로 그린 것은 신분제의 질곡과 과중한 납세의 굴레에 서 벗어나려는 민중의 희망을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소설 속의 이상사회에 대한 설정은 민중의 마음 속에 있는 이상사회에 대한 염원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보다 적극 적으로는 문학을 통하여 민중에게 이상사회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불어넣으려는 작가의 처방이다. 작가의 의도는 현실의 온갖 불합리 한 모순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그곳으로부터의 탈출 공간으로 설 정한 ‘무인도’를 이상사회로 제시하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상사회 는 저절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민중은 이같은 소설을 통해 체제모순이 심화되어 가는 현실을 바로 보고 그것을 변 혁하려는 의지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사회론이 제시 되어 있는 소설들도 정감록과 마찬가지로 민중저항운동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주는 논리로 기능하여 온 것이다.
3. 해도기병설 관련 변란의 추이
조선 후기의 ‘민의 저항’의 범주에 속하는 변란에는 흔히 정감록 등 민간사상이 이념적 틀로 작용하였다. 정감록의 주요 내용 가운데 해도기병설은 가장 강력한 저항 논리이다. 해도기병설은 변란 과정 에서 흔히 訛言이나 妖言의 형태로 유포된다. 그러나 단순히 와언이
39) 蘇在英, 앞의 논문, 15~16쪽. 40) 李佑成․林熒澤譯編,『李朝漢文短篇集(上)』, 一潮閣, 1973, 337~339쪽.
나 요언의 단계에 그치는 경우도 있지만, 掛書나 擧事謀議형태의 변란으로 발전하기도 한다.41) 이에 변란의 유형별로 주요 사건들의 추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와언이나 요언으로 그친 경우이다. 정조 9년(1785) 3월에는 충청도에서 陳東喆․陳潝등이 “을사년 3월 15일에 舒川에서 군사를 일으켜 서울을 침범하려고 한다. 이 때 瑞山이나 泰安에 반드시 해 적이 나타날 것인데, 倭賊같지만 왜적이 아닐 것이다”라고 하며, “난리를 피하기 위해서는 산골짜기로 들어가야 하고, 창과 환도를 준 비해야 한다”는 등의 해도기병설 관련 요언을 유포하여 민심을 크게 동요시켰다.42) 이 사건은 영조 때부터 자주 이용되어 왔던『道詵秘 記』의 해도기병설 유형인 이른바 ‘似倭非倭’의 설을 이용한 것으로, 『道詵秘記』가 영조 때 이래 지속적으로 체제저항에 이용되어 왔음 을 보여준다. 순조 때에는 해도기병설과 관련된 와언․요언 사건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순조 원년(1801) 4월에 姜彛天은 驪州의 문벌로 천주교도 인 金建淳, 그의 친족 金履白과 교제하면서 해도설 관련 요언을 퍼 뜨렸다.43) 그는 “바다 가운데 品字모양을 닮은 섬이 있는데 병마가 强壯하다”라고 하거나, “바다 가운데에 진인이 있는데 六任(골패 등 으로 점치는 법)과 둔갑술을 알고 있다”며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더 욱이 이 사건은 정조 말년에 이미 천주교도와 함께 해적 관련 와언 을 유포하여 처벌을 받은 바 있던 강이천이44) 재차 요언을 유포했다 는 점에서 주목된다. 순조 13년 7월에는 진주병사 李晦植의 幕裨인 白泰鎭이 星州의 白 東源과 공모하여 해도와 관련된 온갖 와언으로 진주병영을 소란에
41) 변란의 범주 및 와언, 요언, 괘서, 거사모의 등 변란의 유형별 구분에 대해서는 高成勳,「朝鮮後期變亂硏究」, 東國大博士學位論文, 1993, 20~25쪽 참조. 42)『正祖實錄』권 19, 정조 9년 3월 계유~기묘 및 4월 경진. 43)『純祖實錄』권 2, 순조 원년 4월 병인. 44) 高成勳, 앞의 논문, 66~67쪽.
빠뜨린 사건이 일어났다.45) 백태진과 백동원은 “일찍이 해도를 왕래 할 때에 도적의 괴수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는데, 여기 에서 해도는 ‘蓮島’이며 그 도적들은 ‘神兵’이라는 것이다. 또 “섬에서 이회식을 죽일 자가 나올 것이다”라는 말로 이회식을 협박하며 그를 자신들의 의도대로 움직이도록 하였다. 이들은 이 밖에도 ‘제주도를 襲破한다’는 등의 말을 퍼뜨리기도 하였다. 이 사건에서 진주병사라 는 한 지역의 군사 책임자가 자신의 수하가 말하는 그럴듯한 와언에 쉽게 넘어가는 모습을 통해 당시 혼란한 사회상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진주병사도 두려워 했듯이 해도세력 의 무장력이 녹녹하지만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해도기병설이 와언이나 요언으로 유포되면서 괘서사건과 연결된 경우이다. 영조 24년(1748) 4월에 충청도 淸州․文義에서 일 어난 요언 및 괘서 사건 때 해도기병설의 논리가 유포되었다.46) 寒儒 인 李之曙․朴敏樞․吳命垕등은 청주와 문의에서 요언을 유포하여 민심을 동요시켰고, 이에 자극받아 청주에서 일대 소요가 일어났다. 이들은 이 과정에서 문의에서 괘서사건을 일으켰다. 이들이 유포한 요언은 “倭人같지만 왜인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올라온다”는 등의 『道詵秘記』의 내용을 근간으로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왜인 같지 만 왜인이 아닌 집단의 정체는 해도에 있는 戊申亂의 餘黨이라는 것 이다. 또 “울릉도 건너편에 黃鎭紀등 무신란의 여당이 있다. 황진기 가 죽지 않으면 반드시 나올 것이다”라고 하여, 무신란 때 주요 수배 대상 인물이었던 황진기가 죽지 않고 해도를 근거지로 세력을 이루 고 있다는 ‘黃鎭紀不死說’47)을 내세웠다. 이로 볼 때 이 사건은 무신 여당 가운데 황진기 세력을 해도기병의 주체로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지서는 “무신년 때의 사람들은 陳勝․吳廣의 무리에 불 과하다. 이제 마땅히 진인이 나올 것이다.․․․․金山鳳溪에 사는 鄭
45)『純祖實錄』권 17, 순조 13년 7월 임신․을해. 46) 高成勳, 앞의 논문, 112~125쪽. 47) 黃鎭紀에 대해서는 鄭奭鍾, 앞의 논문, 75~77쪽 참조.
哥가 아들을 낳았는데 아침에 땅에 떨어져 태어나서 저녁에는 말을 하였으며 장대한 삼척동자가 되었으므로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 이 없었다”48)라고 하여, 지금까지 해도기병의 주체로 말해온 ‘무신여 당’을 진승․오광의 무리와 동일시하고, 그 대안으로 봉계의 정진인 을 내세웠다. 이것은 논리상의 모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황진기를 비롯한 무신여당을 해도기병의 주체로 설정하면서도 그들의 실패한 경험 때문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대안으로는 다른 인물이나 집단, 즉 정진인을 등장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조 31년 2월의 ‘羅州掛書사건’49) 때에도 해도기병설의 논리가 유 포되었다. 전라도 나주에 유배되어 있던 尹志․尹光哲父子등은 거 사를 준비하면서 괘서사건을 일으켰는데, 이 때 주동 인물들 사이의 대화에서 윤지는 “秘記가운데 明年에 安城과 竹山사이에 시체가 쌓여 산과 같이 되고, 聖世에 仁川과 富平사이에 밤에 배 1,000 척 을 댄다”는 등의 정감록의 말을 유포하였다. 또 윤지는 무신란 때는 너무 쉽게 육지에서 출병하였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하면서 해도에 거점을 두는 것이 좋다는 뜻을 말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먼저 탐라 에 거점을 구축하여 연해를 출몰하면서 稅船을 잡아들이고 珍島로부 터 곧바로 강화에 도착하면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50)라고 하여, 제주 →진도→강화→서울이라는 해상 공격로를 설정할 정도로 해도의 역 할과 기능을 중시하고 있다. 순조 때는 홍경래란의 창의문에서 ‘鄭聖人’, ‘紅衣島’ 등 해도기병설 의 요소가 나타난 이래 이와 비슷한 논리로 해도기병설 관련 변란이 이어졌다. 순조 19년(1819) 6월에는 官奴출신의 金在黙이 “錢貨를 마련하여 해도에서 군병을 일으킬 계획을 짜놓았으며, 金魯信을 都 元帥로 삼고 장수가 80명이며 병사 10만”51)이라는 내용의 문건을 華
48)『英祖實錄』권 67, 영조 24년 5월 무신. 49) 이 사건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李相培,「英祖朝尹志掛書事件과 政局 의 動向」,『韓國史硏究』76, 1992과 裵惠淑,「乙亥獄事의 參與階層에 關한 硏究」,『白山學報』40, 1992 참조. 50)『英祖實錄』권 83, 영조 31년 3월 계미.
城의 성문에 괘서한 사건이 일어났다. 요컨대 김재묵은 김노신이라 는 가공 인물을 해도기병의 주체, 즉 진인으로 내세워 민심을 선동 하려고 했다. 순조 26년에는 金致奎와 李昌坤등이 정감록 등을 이용하여 해도 기병설을 유포하고 괘서하였다.52) 이들은 “황해가 다시 맑아지고 동 해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聖人이 나올 것이다”라는 말을 유포하 였는데, 이것은 강화도에 鄭籙이라는 聖人이 있는데 이른바 鄭元帥 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주장과 통한다. 또한 “태백산 아래의 鄭喜祚 는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여 장수가 되었다”는 말을 유포하여 민심을 선동하였는데, 이것은 정희조가 鐵冠大將과 太白神將을 겸하고 있다 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이 밖에도 “洪景來․李禧著가 서쪽에 서 제주도로 들어갔다”라고 하거나, “홍경래․禹君則이 제주에서 취 회한다”라는 말을 유포하였다. 이것은 이른바 ‘홍경래불사설’과 ‘제주 난리설’로 표현되는 ‘남방기병설’을 괘서 등의 형태로 유포한 것으로 충청도 일대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다음은 해도기병설이 와언이나 요언으로 유포되면서 거사모의 단 계로 이어진 경우로, 주로 정조 때 이후에 일어났다. 정조 6년(1782) 에 강원도 襄陽등지에서 李京來․文仁邦등이 서울공격을 기도했던 거사모의 사건이 일어났다53) 이들은 정감록의 논리를 유포하며 전국 에 걸쳐 동조인물을 모으고, 都元帥-先鋒將-運糧官등의 조직체계를 갖춘 후 양양에서 거사하여 杆城→江陵→原州→東大門으로 입성한다 는 계획 아래 거사를 준비하였다. 요컨대 물리력에 의한 정권의 쟁 취를 목표로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해도기병설을 제기하였는 데, 해도를 구체적으로 ‘小雲陵’이라 불렀다. 이것은 단순히 정감록에 들어있는 해도기병설 내용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차용하 여 보다 구체적인 논리로 발전시킨 것이다.
51)『純祖實錄』권 22, 순조 19년 6월 무인. 52)『推案及鞫案』(亞細亞文化社影印本, 이하 :『推鞫』) 282책, 丙戌罪人 致奎昌坤柳聖浩李元基鞫案. 53) 高成勳, 앞의 논문, 135~155쪽.
정조 9년(1785)에 洪福榮․李瑮․梁衡․文洋海등이 경상도 河東 을 근거지로 삼아 거사를 준비했던 이른바 ‘산인세력’ 거사모의 사건 이 일어났다54) 이들 가운데 地師인 문양해와 醫員인 양형은 사건의 추진 과정에서 정감록의 각종 논리를 내세웠는데, 이러한 논리는 智 異山仙苑을 근거로 활동하는 이른바 異人(仙人․神人)이 제공한 것 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들은 ‘北賊出現說’․‘靈巖起兵說’ 및 ‘東國三分 說’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동국삼분설을 설명하면서, “조선의 산천과 천문지리는 모두 삼분의 조짐이 있다. 임자년에 도적이 나타나고 그 후에 삼분되었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진다. 삼분의 姓은 鄭․劉․金 哥인데 필경 鄭哥가 하나로 통일시킬 것이며 남해의 섬 가운데에 있 다”55)라고 하여, 삼분 후 통일을 말하면서 통일의 주체는 해도에 있 는 鄭眞人이라고 하였다. 요컨대 정감록의 ‘해도에서 정진인이 기병 한다’는 논리를 적용한 사례이다. 정조 11년 6월에 충청도 堤川의 金東翼․金東哲형제와 강원도 橫 城의 鄭武重등이 해도기병설과 관련이 있는 요언을 유포하면서 거 사를 모의하였다.56) 이들은 수시로 “왜적 같지만 왜적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온다”라고 하여,『道詵秘記』의 해도(남방)기병설인 ‘似倭非 倭’의 논리를 유포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보다 구체적으로 해도의 이 름을 적시하고 그곳에서 군사를 양성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 요지는 김동철의 아들 曾悅이 일본과 동래의 중간에 있는 ‘無石國’이라는 섬 을 정벌하였고, 현재 그 섬 근처에 있는 ‘麻島’ 또는 ‘薪島’라는 섬에 서 군사를 양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鄭希亮의 손자 醎을 추대하 여 6월 11일에 거사할 예정인데 거사를 단행하면 전국에서 호응할 것이라고 하면서 거사의 성공을 예상하여 사전에 관직의 배분까지 해놓았다. 순조 4년(1804) 9월에는 安岳출신의 李達宇와 長淵출신의 張義 綱등이 “古白翎과 鬱陵島에서 병기를 만들고 군량을 쌓아두고 있
54) 高成勳, 위의 논문, 155~172쪽. 55)『正祖實錄』권 19, 정조 9년 3월 경술. 56)『正祖實錄』권 23, 정조 11년 6월 경술.
다”는 등의 와언에 가탁하여 사람들을 모으고 거사를 준비하였다.57) 이달우는 不道한 내용의 歌詞를 지어 민심을 선동했고, 장의강의 무 리와 함께 도당을 불러모아 날짜를 정해 거사하려 했다. 특히 이 때 궁궐로 쳐들어가 조정의 여러 신하들 가운데 죽일 자는 죽이고 쫓아 낼 만한 자는 쫒아낸다는 등의 거사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58) 순조 17년 3월에는 長水출신의 행상 蔡壽永이 安有謙등과 함께 황해도에서 배가 내려온다느니 홍경래가 살아있다는 따위의 말을 퍼 뜨렸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전라감영→충청감영→서울로의 공격로 를 설정하고 입성한 후에 여러 신하들을 죽이고 江華죄인을 모셔와 큰 일을 일으키려 한다는 말을 퍼뜨리기도 하였다.59) 이 과정에서 일 이 실패할 경우에는 古群山을 통해 제주도로 들어가 대마도에 청병 하겠다는 등의 와언을 퍼뜨리며 인심을 선동하였다. 더욱이 이 사건 은 충청도 지방에서 활동하던 명화적 張應人․權塤등과도 연결되었 던 것으로 드러남으로써,60) 단순한 와언이나 요언의 차원을 넘어 거 사모의 단계로까지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순조 26년에는 충청도 청주 일대에서 해도기병설 관련 변란이 일 어났는데, 鄭尙采와 朴亨瑞가 주도하였다.61) 해도기병설은 주로 정상 채에 의해 유포되었는데 그는 ‘呼風喚雨’ 등의 神異한 술책을 지녔다 고 알려진 인물로서, “병화가 해도에서 일어났는데 진인은 홍하도에 있으며 그 이름은 정재룡이다”라는 말을 주창하는 등 온갖 요언을 지어 유포하였다. 정상채․박형서 등은 요언을 유포하여 동조인물을 모으면서 島中에 보낼 名帖을 작성하고, 군복을 만들기 위해 면포를 구입하는 등의 거사모의를 추진하였다. 이들은 이 밖에도 ‘南賊出現
57)『純祖實錄』권 6, 순조 4년 9월 신묘. 58) 이 사건의 개요와 성격에 대해서는 李離和,「19세기 전기의 民亂硏究 」,『韓國學報』35, 1984 65~67쪽 및 한명기,「사회세력의 위상과 저항 」,『조선정치사 (상) 1800~1863』, 청년사, 1990, 293쪽~294쪽 참조. 59)『純祖實錄』권 20, 순조 17년 3월 기미. 60) 이 사건의 明火賊관련 부분에 대해서는 한명기, 앞의 논문, 282~285 쪽 참조. 61)『推鞫』281책, 丙戌罪人亨瑞尙采申季亮鞫案.
說’이나 ‘福州播遷說’ 등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박형서는 검거되어 있 던 와중에도 청주관장에게 투서하였는데, 여기에는 ‘홍경래불사설’․ ‘小旋風’․‘大爺爺’․‘外援兵’ 등의 와언이 들어 있었다. 결국 이 사건 으로 말미암아 淸州牧이 西原縣으로 강등되었으며, 이에 따라 忠淸 道또한 公忠道로 바뀌는 등 적지 않은 파장이 미쳤다. 지금까지 ‘민의 저항’에 해당하는 범주로서의 변란, 즉 민중운동의 성격을 지닌 변란 가운데서 해도기병설과 관련 있는 사건만을 살펴 보았다. 이 밖에도 드물기는 하지만 換局과 같은 권력집단 내부의 정치적 변란에서도 해도기병설이 이용되었다. 그 대표적 사례로 숙 종 20년(1694) 甲戌換局때에 해도기병설의 논리가 이용되었다.62) 이 사건에서 해도기병설 관련 사실은 소론측 환국기도의 주요 인물인 康晩泰의 진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강만태는 “任合土 가 또 말하기 를 甲乙兩年사이에 (鄭姓)眞人이 마땅히 출륙할 것이니 장차 가서 맞이하여야 하는데 너도 꼭 銀子를 내라고 하므로 제가 대답하기를, ‘가난하여 은자를 내놓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라는 진술을 하였다. 이 진술은 해도기병설의 전형적 구조이다. 아울러 이를 현실 문제에 대입했을 때는 정진인이 거느린 세력을 ‘義賊’63)이라고까지 부를 수 있을 지는 의문이지만, 해도에 둔취한 세력, 요컨대 노비도적을 빗댄 것으로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한편 민란, 즉 농민항쟁 과정에서도 간혹 해도기병설의 논리가 이 용되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홍경래란의 격문에는, 紅衣島에서 태어 난 聖人이 鐵騎10만으로 東國을 숙청할 뜻을 가졌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요컨대 이 내용은 해도(홍의도)에서 정진인(성인)이 군사(철기 10만)를 이끌고 나와 조선(동국)을 정벌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 는 해도기병설의 정형과 같은 것이다. 19세기 말의 사례이기는 하지만, 1898년 제주도 농민항쟁 때에도 해도기병설의 논리가 부분적으로 이용되었다. 화전민들로 이루어진
62) 이 사건에 대해서는 鄭奭鍾,「肅宗朝의 甲戌換局과 中人․商人․庶孼 의 動向」,『朝鮮後期社會變動硏究』, 一潮閣, 1983, 79~130쪽 참조. 63) 鄭奭鍾, 위의 논문, 98․121쪽.
南學黨을 이끌며 항쟁을 주도한 房星七은 “濟州는 房星분야이고, 나 의 姓이 房이므로 서로 부합된다. 그리고 비기에 房氏와 杜氏의 장 수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또한 나의 성과 부합되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 아닌가? 지금 국운이 이미 쇠퇴하여 진인이 마땅히 해도에서 나올 것이니, 이 기회를 잃을 수 없다”64)라고 하여, 자신의 성이 해도 기병설에 나오는 방씨와 같음을 이용하여 민심을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고 봉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1811년의 홍경래란과는 달리, 發通→聚會→呈訴→蜂起라는 민란의 정형 단계를 거치며 일어났던 1862년 농민항쟁의 과정에서는 해도기 병설을 비롯한 정감록 사상이 이용되었던 예는 찾아볼 수 없다. 그 만큼 민란 유형의 항쟁에서는 정감록 사상의 이용이 드물었던 것이 다. 그러므로 해도기병설, 더욱 확대하여 정감록 사상은 변란을 뒷받 침하는 사상체계로서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東學 의 교리에 정감록의 요소가 들어 있고, 東學農民戰爭의 과정에서는 정감록 사상이 적극 이용되었다. 요컨대 이 때부터 민란과 변란의 결합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볼 때 민란의 모범 유형이었던 제주도 농민항쟁에서 해도기병설이 이용되었던 사 실도 같은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4. 해도기병설 관련 변란의 구조와 특징
1) ‘小雲陵’ 관련 거사모의
이 사건은 정조 6년(1781)에 洪國榮의 측근이었던 宋德相이 유배 되었을 때 李京來․文仁邦등 송덕상과 개인적 친분관계를 맺어온 인물들의 주도로 일어났다.65) 이경래․문인방 등은 전국에서 동조세
64) 金允植,『續陰晴史』(上) 권 8, 광무 2년 3월 4일, “濟州房星分野吾姓 房與之相符且秘記有房杜之將亦與吾姓相符此非天耶今國運已衰眞 人當出於海島此機不可失也”.
력을 모으며 서울을 공략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이 과정에서 정감록 사상을 퍼뜨림으로써 동조세력을 원활히 포섭하는 등 보다 효율적으로 일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요컨대 이 사건은 정 감록 사상을 이념적 배경으로 하여 추진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 사건은 ‘鄭鑑錄’이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거론 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정감록 관련 사건은 자주 일어났다. 그러나 이들 사건에서는 흔히 정감록의 범주에 속하는『道詵秘記』․『南師古秘記』등의 이름이 등장하였을 뿐 이고, ‘정감록’이라는 이름이 직접 거론되지는 않았다. 이 사건이 일 어났을 때부터 비로소 ‘정감록’이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다.66) 이 사건은 ‘정감록’이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내걸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해도에서 진인이 군사를 이끌고 나와 현왕조를 정벌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해도기병설’의 논리가 구체적으로 적용되었다는 점에서도 매우 주목할만 하다. 이 사건에 서의 해도는 곧 ‘小雲陵’으로, 여기에 해도기병설의 실체가 응축되어 있다. 소운릉 관련 사항은 주로 朴瑞集의 공초와 박서집․문인방의 대질 심문과정 검토를 통해 알 수 있다. 박서집은 문인방의 말을 빌려 소운릉의 위치에 대해, “문인방이 전에 말하기를, 소운릉은 白頭山밑에 있는데 일찍이 李京來의 집 앞에서 배를 타고 소운릉에 갔다”67)라고 하였으며, 또한 “(문인방이) 소운릉은 三陟의 海中에 있다”68)라고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제(박서
65) 이 사건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高成勳, 앞의 논문, 135~155쪽 참 고. 66)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영조 15년(1739) 서북지방에서 요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처음으로 ‘鄭鑑讖緯之書’라는 책 이름이 나왔다(『英祖實 錄』권 50, 영조 15년 8월 경진). 67)『推鞫』235책, 壬寅逆賊仁邦京來等推案, 乾隆47년(1782) 11월 19일, 同日罪人瑞集年五十二白等, 166쪽, “仁邦嘗言小雲陵在白頭山下曾於 李京來家前乘舟往小雲陵矣”. 68)『推鞫』235책, 壬寅逆賊仁邦京來等推案11월 20일, 同日罪人文仁邦年 二十八白等, 189쪽, “小雲陵在於三陟海中”.
집)가 일찍이 ‘정감록에 이른바 海島라는 곳이 소운릉을 가리키는 것 이냐’라고 물으니, 그(문인방)가 ‘아니다. 南方의 해도다’라고 하였 다”69)라는 진술도 했다. 이로 볼 때 소운릉의 위치가 백두산 밑․삼척 해중․남방 해도 등 으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고 있으므로, 그 구체적 위치뿐만 아니라70) 소운릉이 실존하는 섬인지도 매우 불투명하다. 그 러므로 여기에서는 ‘소운릉의 존재’를 정감록에서 말하는 해도와 관 련하여 이해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소운릉은 어떠한 의미와 기능을 가졌을까? 첫째로 문인 방 등은 물산이 풍부하여 경제적으로 가치가 큰 섬으로 인식하였다. 문인방은 소운릉의 자연환경에 대해, “땅이 매우 비옥하여 이전에 그 곳에 씨앗을 뿌려두었는데 다시 가서 보니 곡식이 매우 풍성하였 다”71)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박서집에게 함께 가볼 것을 권유하였다. 요컨대 문인방이 생각하는 소운릉은 평범한 해도가 아니라 자체적으 로 경제생활을 꾸릴 수 있을 만큼 자연조건이 탁월한 곳이었으며, 그 자체로 민중의 이상사회에 대한 열망을 수렴한 곳일 수도 있다. 둘째로는 소운릉을 전장으로 여기는 등 이곳에 군사적 의미를 두 었다. 문인방은 박서집에게 자신이 이경래와 더불어 군사를 일으키 려고 하므로 洪忠道산막 옆에 묻어놓은 돈을 찾아서 소운릉에 들어 갈 것을 요구하였다. 또 그는 박서집에게 양식을 전장으로 운송할 때 運糧官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면서 전장이 소운릉에 있다고 하였
69)『推鞫』235책, 壬寅逆賊仁邦京來等推案11월 20일, 瑞集與仁邦面質, 192쪽, “吾嘗曰小雲陵卽鄭鑑錄中所謂海島乎汝曰非也乃南方海島 也”. 70) 小雲陵의 실재여부와 또 실재할 경우 그 위치와 관련하여 ‘雲陵’과 발 음이 같은 동해의 ‘鬱陵島’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朴瑞集또한 文 仁邦에게 ‘소운릉이 곧 울릉도인가?’를 물었으나, 문인방은 ‘아니다’라 고 대답한 바 있다. 이로 볼 때도 소운릉의 위치와 실재여부를 파악하 기는 더욱 어렵다(『各司謄錄』80,「親鞫日記」16, 國史編纂委員會, 1995, 80쪽). 71)『推鞫』235책, 壬寅逆賊仁邦京來等推案11월 20일, 同日罪人瑞集更招, 191쪽, “小雲陵土甚沃嘗一往見之播穀而還再往穀甚茂”.
다. 이러한 박서집의 진술로 볼 때 소운릉은 거사 때 식량을 조달할 루트로서의 기능과 함께 거사를 위한 비밀 거점으로서의 역할이 주 요 기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운릉에 군사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군사를 일으킬 주체는 누구이 며 어떠한 집단일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海浪賊’으로 불리는 집단 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박서집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 고 있다. 제가 어렸을 때 단지 諺書鄭鑑錄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단초는 고려 때에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말한 기록에 海島는 南方해도를 가리키는 것이며, 400년이 지나 국운이 줄 어들게 되는데, 만약 그 해에 해랑적이 나온다면 ‘木’邊의 姓을 가진 사람이 그들을 討平할 것이므로 국운이 다하지 않을 것입 니다.72) 이 진술은 정감록과 관련하여 답변하는 중에 나온 것이므로, 이 때의 해랑적 또한 해도기병설에서의 군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러나 이 때 문제는 해랑적이 군사를 일으키지만 조선을 정벌하고 새 로운 국가를 건설할 주체가 아니라, 木변의 성씨에 의해 곧 토벌될 대상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해랑적=해도기병설의 주 체’라는 등식이 곧바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때의 해랑적은 이전부터 섬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세력을 상징하며, 이들은 거사 때 도원수로 내정된 이경래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는 목변 성씨가 거느린 군사의 토벌에 의한 흡수 대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문인방이 해도 세력을 정벌하고 해랑적들을 흡수하여 거사를 일으키려는 희망을 해도기병설의 틀을 본따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해랑도 관련 진술 내용은 문인방의 실전계획이
72)『推鞫』235책, 壬寅逆賊仁邦京來等推案, 11월 19일, 朴瑞集供曰, 169쪽, “矣身幼時只見諺書鄭鑑錄而聞其起端則出自高麗王朝矣矣身言錄中 海島卽指南方海島而四百年爲小運其年若有海浪賊而木邊姓人討平之 則國運爲勿限年矣”.
라기 보다는 거사를 효율적으로 이끌기 위해 해도기병설에 가탁하여 짜놓은 구도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73) 이 문제는 해랑적에 대한 박서집의 또 다른 진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즉, 박서집은 “정감록에 ‘해랑적’이 해도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는데, 문인방이 항상 ‘소운릉’이라고 말한 까닭은 해도와 관련하여 수작한 단서가 있었기 때문”74)이라는 진술을 하였다. 이로 보아 그 실상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문인방이 박서집에게 말한 소운릉과 관련 된 대화가 어떠한 형태로든지 정감록의 해도기병설을 염두에 두었음 이 분명하다. 그러면 문인방이 소운릉, 해랑적을 통하여 해도기병설을 이용한 것은 어떠한 현실을 반영한 것일까? 그의 행적을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문인방은 황해도 谷山출신의 천민으로서 풍수질을 생업으로 삼아 활동하다가, 이경래와 함께 10여 년 전부터 거사를 계획하고 준비하였다. 그는 비록 천민 출신이었으나 이조판서를 지낸 宋德相 의 제자로서 해박한 지식을 지녔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그는 醫員이 나 訓長을 가칭하는 방법 등으로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까지 두루 편 력하며 동조 인물들을 모을 수 있었다.75) 또한 거사계획이 발각당하 기 몇 개월 전에는 충청도 鎭川의 산 속에서 白天湜․金勛등과 체 결작당하여 雜術을 논리로 삼아 妖言을 주장하고 인심을 미혹시키는 계책을 꾸미다가 포도청에 체포되었다.76) 흔히 변란 주도층을 地師․醫員․訓長등을 생업으로 삼아 각지를
73) 文仁邦․李京來등 주동 인물들의 실전계획에 따른 거사장소는 존재여 부가 불투명한 ‘小雲陵’이 아니라 강원도 襄陽으로, 이들은 양양을 점 령한 후 ‘杆城→江陵→原州→東大門’이라는 실제적 공격루트까지 이미 정해놓고 있었다(『正祖實錄』권 14, 정조 6년 11월 계축). 74)『推鞫』235책, 壬寅逆賊仁邦京來等推案, 11월 19일, 同日罪人瑞集年五 十二白等, 171쪽, “鄭鑑錄有海浪賊出自海島之說而仁邦常云小雲陵故致 有海島酬酌之端矣”. 75)『推鞫』235책, 壬寅逆賊仁邦京來等推案11월 20일 文仁邦供曰, 199쪽, “矣身入往甲山雙臾洞尹雲起家假稱醫員留連一年求得人物․․․於李 石三家訓長之計”. 76)『正祖實錄』권 14, 정조 6년 3월 무오.
떠돌던 寒儒․貧士가운데 저항적 인물이라고 할 때,77) 문인방이야말 로 지사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의원이나 훈장 등을 생업으로 삼아 전국을 돌아다니는 ‘유랑 지식인’이요, 그 가운데서도 ‘思亂’의 마음을 품고 있던 ‘저항 지식인’의 전형적 인물이다. 이로 볼 때 변란의 주체가 지사․의원․훈장 등을 생업으로 삼는 ‘저항 지식인’이라는 사실과 이들은 장기간에 걸쳐 연속적으로 변란 을 준비해온 이른바 ‘직업적 봉기꾼’이라는 사실은 19세기에 일어난 변란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 아니라, 발생 횟수와 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으나 18세기 후반에 이미 보편화된 현상인 것이다. 이 를테면 이 사건에서의 이경래와 문인방, 정조 9년(1785)의 ‘산인세력’ 거사모의 때 의원과 지사로서 사건을 주도했던 양형78)과 문양해,79) 또 지사로서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민심을 끌어모았던 朱炯采와 吳 道夏80) 등은 전형적인 ‘유랑 지식인’이요, ‘저항 지식인’이다. 문인방은 진천에서의 요언 사건으로 絶島에 유배되었다. 그는 유 배지에서 박서집 등을 끌어들여 거사계획을 더욱 구체화하였다. 문 인방은 절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범법자들과 유리민들이 몰려들 고 있던 해도의 실상을 자세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해도의 세 력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였을 뿐 아니라 해도기병설의 논 리를 다듬는데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서 해도기병설의 현실성은 문인방의 절도 유배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제 이 사건을 해도기병설의 구조에 대입할 때, 이경래를 도원수 로 하는 거사군이 기존의 해도 세력을 아우르고 물산이 풍부한 소운 릉에서 군사를 모아 거사를 일으켜 서울을 공격하려 했다는 구도를 그려낼 수 있다.
77) 변란의 주체에 대해서는 배항섭, 앞의 논문, 262~270쪽 참조. 78)『正祖實錄』권 19, 정조 9년 2월 기유. 79)『正祖實錄』권 19, 정조 9년 3월 정사. 80)『正祖實錄』권 19, 정조 9년 3월 신미.
2) ‘紅霞島’ 관련 거병설
이 사건은 순조 26년(1826)에 청주 일대에서 鄭尙采를 비롯하여 朴亨瑞․李奎汝․申季亮등이 일으킨 요언사건으로, 부분적으로는 투서를 병행했으며 거사모의를 추진하기도 하였다.81) 사건은 주로 정 상채와 박형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해도기병설과 관련하여 볼 때는 정상채가 주도하였다. 정상채는 본래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부모를 따라 평양으로 옮겨 그곳에서 장성하여 다시 강원도 영월로 옮겼다. 그는 의술․풍수 등을 생업으로 삼고 각지를 돌아다니는 ‘유 랑 지식인’이었다. 그는 평소 이곳저곳에 출몰하여 종적이 홀연하고 이름과 나이를 수시로 바꾸며,『幻妙門』과 같은 비기를 이용하여 환 술을 부렸다고 한다.82) 그러므로 정상채는 ‘呼風喚雨’의 神異한 능력 의 소유자로 알려졌고, 박형서나 이규여 등도 이러한 사실을 믿었다. 요컨대 이러한 정상채의 신이한 능력이 해도기병설의 바탕을 이루었 고, 이것이 사건의 추진 동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정상채 등은 이 사건을 통해 “해도에서 정진인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현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것”이라는 해도기 병설의 정형을 적용시키고 있다. 즉 이들은 군사를 기르는 해도는 ‘紅霞島’이며, 군사를 이끌 진인은 ‘鄭在龍’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새 로운 도읍을 ‘福州’로 설정하였다.83) 이들이 주장한 해도기병설의 실
81) 이 사건의 개요에 대해서는 우윤, 앞의 논문, 237~240쪽 및 李離和, 앞의 논문, 62~63쪽 참조. 82)『推鞫』281책, 丙戌(1826) 亨瑞尙采申季亮鞫案, 10월 27일 罪人尙采結 案, 847~848쪽. 83) 그런데 朴亨瑞가 鄭尙采의 말을 인용한 진술에는, “지금 마땅히 ‘新都 國’을 건설해야 하기 때문에 해도에 있는 鄭氏가 마땅히 나올 것이다 (今當新都國建故海島中鄭氏當出云矣)”라고 하여, ‘복주’가 아닌 ‘신도 국’이라는 새로운 도읍지 또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것으로 묘사되 어 있다. 이것은 마치 정씨가 건설할 ‘新都=鷄龍山’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비결의 내용을 말한 것으로 보이므로, ‘新都國=福州’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推鞫』281 책, 丙戌罪人亨瑞尙采申季亮鞫案, 10월 17일, 推考次罪人朴亨瑞年五十 三白等, 754쪽).
체는 “홍하도에서 군사를 기르고 있는데, 정재룡이 이들 군사를 이끌 고 먼저 대마도를 정벌하고 다음에 조선을 정벌하여 복주로 파천하 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홍하도’․‘정재룡’․‘복주’가 해 도기병설을 이루고 있는 3가지 핵심 요소인 것이다. 먼저 해도기병설로 볼 때 기병 장소라고 할 수 있는 ‘홍하도’의 자 연환경과 그 섬의 기능 및 성격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홍하도가 어 느 곳에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다만 이들이 ‘南賊出現說’을 주 장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홍하도의 위치도 그 실재 여부와는 관계 없이 남해안의 어느 섬으로 설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정상채는 홍하도의 자연환경에 대해 “수로가 4,000리이며 돌이 매우 험해 사람 이 통과할 수 없으므로, 우리들이 아니면 출입자가 없다”84)고 하였다. 요컨대 홍하도의 자연환경은 소운릉이 매우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 다는 사실과는 정반대의 악조건을 지녔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소운릉은 군사적인 면과 함께 그 자체로 이 상사회의 열망을 수렴하고 있지만, 이에 비해 홍하도는 자체적으로 경제활동의 기능 등은 고려되지 않았고, 단지 出陸하기 위한 군사거 점으로의 기능만이 부여되었다. 이것은 정상채․박형서 등이 “도당 을 모아 名帖을 작성하여 홍하도에 보낸다고 말하거나, 홍하도에 보 낼 군복을 만들기 위해 자금을 모으고 면포를 구하는 사실”85)을 보아 도 홍하도가 군사적 의미에 중점이 두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홍하도에서 군사를 이끌고 기병할 인물로 정재룡이라는 진인이 설정되어 있다. 이 인물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없다. 이것은 아마도 정재룡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인물로 설정하여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를 신성시하고 신비화시 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채가 박형서(朴在勝이었음) 에게 진인의 이름에 저촉되므로 이름을 바꾸도록 독촉한 것도 같은
84)『推鞫』丙戌罪人亨瑞尙采申季亮鞫案, 10월 21일 推考次罪人鄭尙采年 四十白等, 782쪽, “紅霞島水路四千里最石甚險人莫能通而非我則無 以出入云者”. 85)『純祖實錄』권 28, 순조 26년 10월 을해.
맥락이다. 그리고 정상채가 진인의 출현과 관련하여 진인을 보좌할 인물로 정감록에 등장하는 ‘裵哥將’과 ‘卞哥相’을 설정해 놓고 있는 점도 주목할 일이다. 이들이 홍하도에서 여러 해에 걸쳐 군사를 양성한 다음 출륙하는 과정에서의 핵심은 조선을 정벌하기 전에 일차적으로 대마도를 정벌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그 이유를 명확히는 알 수 없으나, 현실 의 군사적 의미로는 대마도를 아우르고 그 병력을 이용하려 했던 것 으로 보인다. 이것은 마치 고종 13년(1876)에 崔鳳周․張赫晋등이 거사를 모의하면서 軍器를 빨리 마련하기 위한 방법으로, “楸島를 공 격하고 이어서 濟州를 습격하여 그 印符를 탈취하고 그 城池를 빼앗 아 나의 동료 가운데서 골라 맡겨 군기의 취득을 도모하도록 하고 육지로 올라가 기회를 보아 일을 도모하려 했다”86)는 사례와 같은 맥 락이다. 그러나 이를 해도기병설의 관점으로 볼 때는 대마도정벌설 이 군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기 보다는 남적출현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동 인물들이 주장한 “서적이 나온 이후에 남적이 마땅히 나오고, 진인이 해도에서 나온다”87)는 말을 검토할 필요가 있 다. 여기에서 서적은 봉기에 실패한 홍경래군을 뜻하며, 그들은 陳 勝․吳廣의 무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살펴보았던 영 조 24년(1748)의 괘서사건 때 핵심 인물인 李之曙가 ‘戊申餘黨’을 진 승․오광의 무리라고 했던 사례와 비슷하다. 이로 볼 때 단순하게 ‘홍경래불사설’은 저항의 논리로, ‘해도설’은 부정의 논리로 자리매김 할 수는 없는 것이다.88) 홍경래란 이후 ‘남적출현설’은 ‘서적출현설’을
86)『左捕盜廳謄錄』(保景文化社影印本) 17책, 정축 10월, 589~590쪽 “先 攻楸島仍襲濟州奪其印符奪其城池吾儕中擇而任之圖取軍器旋爲登 陸隨機圖事”. 87)『推鞫』丙戌罪人亨瑞尙采申季亮鞫案, 10월 21일, 推考次罪人鄭尙采年 四十白等, 787쪽, “西賊出後南賊當出而眞人出於島云矣”. 88) 한명기는 ‘해도설’과 ‘홍경래불사설’을 비교하여 “해도설은 정감록에 바 탕을 두고 기존 체제의 멸망을 예언했다는 점에서 ‘부정의 논리’로서 일정한 기능을 했었지만 공상적 성격을 벗을 수 없었던 점에서 저항 대체하면서 ‘대마도정벌설’이나 ‘제주도정벌설’과 함께 유력하게 전파 되었다. 이 때 진인은 남적의 우두머리라기 보다는 남적을 아우르고 이들을 거느려 출륙하는 존재로서의 ‘남적출현설의 주체’로 보는 것 이 옳을 것이다. 이들이 조선을 정벌하고 파천할 곳으로 福州를 선정한 뜻도 음미 할만 하다. 이 때 복주는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복주는 安東의 옛 지명이며, 박형서가 정상채의 말을 빌려, “저는 단지 안동이 복주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라는 진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복주=안 동’을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劉吉龍이라는 인물로부터 들었다는 시에서 복주는 ‘乾淨地’로 묘사되었다. 이는 정감록에서 복주가 ‘安定 地’나 ‘要靜處’로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이 시는 창작시가 아니 라 정감록의 소절인 것이다.89) 그러므로 이 사건에서 주동 인물들은 복주가 정감록에 ‘吉地’로 묘사되어 있는 부분을 시라는 형식으로 차 용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복주, 즉 安東이 鑑訣의 十勝地가운 데 2번째에 해당하는 곳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90) 그러므로 이 들이 파천할 복주는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논리나 정치 사상으로서 약점을 갖는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저항 논 리로서의 ‘홍경래불사설’은 그것의 실체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었다 는 점과 홍경래군이 가졌던 막강한 역량의 바탕에서 당시 정권과 전면 적으로 맞붙은 이후에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실천성과 현실성의 측면에 서 한 단계 나아간 것이었다”라고 하여, ‘홍경래불사설’을 높게 평가하 였다(한명기, 앞의 논문, 307쪽). 이러한 평가는 논리에 대한 설명으로는 적절하다. 그러나 실제 여러 변란에서의 논리는 ‘홍경래불사설’ 못지않게 홍경래란 실패 이후의 대 안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으며, 그 대안은 西賊(홍경래)이 실패했기 때 문에 南賊이 출현할 것이며, 이마저도 남쪽 바다에서 진인이 출현하여 모두 아우른다는 것이다. 이 때의 진인이야말로 새로운 국가, 즉 이상 사회를 구현할 메시아적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민인들은 홍경래란 의 실패 이후 오히려 죽은 홍경래가 살아 돌아오기보다는 자신들의 마 음 속에 오랫동안 품어온 메시아적 인물의 출현을 염원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89) 우윤, 앞의 논문, 238쪽. 90)『鑑訣』“沁曰保身之地有十處一曰豊基醴泉二曰安東華谷三曰開寧 龍宮四曰伽倻五曰丹春六曰公州定山深麻谷七曰鎭木八曰奉化 九曰雲峰頭流山乃永居之地賢相良將繼繼而出十曰太白”.
나아가 진인에 의해 이상사회가 실현될 수 있는 곳, 즉 남조선 신앙 이 실현될 수 있는 바로 그 땅이다. 결국 이 사건은 해도기병설 관련 요언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주동 인물들이 체포됨으로써 그 이후 본격적 거사모의 단계까지 진척되지 못하였다. 이는 소운릉 거사모의 사건이 여러 도에 걸쳐 동조 인물 을 모으고 거사시 조직체계를 갖추는 등 치밀한 계획 아래 실재로 거사를 준비했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 러나 이 사건이 비록 요언 단계에서 그쳤다 해도, 주동 인물들이 청 주 鎭營에 체포되어 있는 상태에서 박형서가 營將에게 투서하여 반 전을 꾀했던 사실로 보아도 단순한 요언사건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 이다. 지금까지 이 사건의 해도기병설 관련 부분에 중점을 두어 살펴봄 으로써, 사건 전체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 에서 변란의 추세와 관련하여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같은해 5월에 일어난 청주괘서사건과의 관련에 대한 검토이다. 이 두 사건은 공통 적으로 ‘홍경래불사설’을 내세웠다는 점 외에도 ‘강화도’와 ‘홍하도’라 는 해도를 끌어들였으며, ‘제주도취회설’과 ‘대마도정벌설’이라는 일종 의 남방기병설을 제기하는 등 비슷한 맥락에서 추진되었다. 그러므 로 몇 개월의 시차를 두고 청주 일대에서 일어난 두 사건은 연속선 상에서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91) 그러므로 이러한 사 실을 통하여 충청도 일대에서의 저항세력 내지는 변혁세력의 존재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5. 맺음말-해도기병설의 성격-
조선 후기의 정감록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강력한 민간 사상으로 기
91) 李離和는 이 두 사건을 별개의 사건이 아닌 연속해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으로 파악하고 있다(李離和, 앞의 논문, 62~63쪽).
능하였다. 더욱이 해도기병설은 정감록 사상 가운데에서도 저항세력 의 유력한 근거지로 알려져 있던 해도의 실상을 반영하는 논리라는 점에서 가장 현실적인 저항 이념이었다. 그리고 이 해도기병설은 단 순히 정감록 사상의 일부로만 알려졌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괘서나 거사모의 따위의 변란 때 해도기병설에 나오는 군사와 진인이 해도 의 저항세력과 그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와 동일시 되기도 하였다. 해도기병설이 민의 저항과 본격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한 것은 영조 24년(1748) 문의괘서사건 때였다. 이 때의 해도기병설은 黃鎭紀를 중 심으로 하는 이른바 ‘무신여당’의 실체를 반영하였다는 점에서 현실 속의 저항이념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이 때 해도기병설이 강력 히 제기되었던 배경은 당시 해도의 상황, 특히 영조 4년(1728)의 무 신란 때 해도에서 노비도적의 핵심 인물로 알려졌던 鄭八龍이 청룡 대장의 제1장으로 출병했던 사례와 관련이 있다. 정조 때의 변란에서 ‘정감록’이라는 명칭이 쓰이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해도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등 해도기병설도 본격적으 로 다듬어졌으며, 그 주체세력도 보다 뚜렷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소운릉’ 거사모의는 그 핵심 인물 문인방 등이 해도에서의 유배생활을 통해 해도의 실상을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해도기병설 을 유포하였다. 이 때의 해도기병설은 즉흥적으로 유포되었다기 보 다는, 평소 ‘思亂’의 마음을 품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장기간에 걸쳐 거사를 계획하고 준비하던 ‘유랑 지식인’이요, ‘저항 지식인’에 의해 유포되었다. 이를테면 문인방․이경래 등 소운릉 거사모의 핵심 인 물, 양형․문양해․주형채 등 ‘산인세력’ 거사모의 핵심 인물, 해도 관련 요언을 퍼뜨렸던 강이천과 같은 인물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 므로 흔히 말하는 ‘직업적 봉기꾼’은 19세기 중반 이후에야 출현한 것이 아니라, 정조 때 이미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순조 때의 해도기병설은 ‘홍경래불사설’․‘남적출현설’․‘남방기병 설’․‘제주도정벌설’․‘대마도정벌설’ 등과 연관되어 보다 다양하게 전 개되었다. 이러한 논리들은 홍경래란의 실패로 말미암아 출현한 것 으로, 서쪽 내지 북쪽에서의 실패로 이번에는 남쪽에서 일어나야 성 공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는 변란 주도층의 현실 인식에 따른 것 으로, 현실적 변혁의 꿈이 깨진 민중들에게 새로운 투쟁의지를 끌어 내려는 논리의 창출이다. 해도기병설은 정감록 사상의 일부로, 요언․괘서나 거사모의 등 주로 변란 유형의 저항이 일어났을 때 그 주요 논리로 작용한다. 그 런데 변란이 정치지향적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결국 해도기병설도 어떠한 형태로든지 정치적 현실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문의괘서의 주체가 무신란의 잔여세력이라는 점과 아울러 사건의 전 개과정도 무신란 이후의 정세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사실로 보아 그 정치적 경향을 알 수 있다. 또 소운릉 거사모의도 정조 때 홍국영 일파의 실각을 둘러싼 정세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또 ‘홍하도’ 거 사설을 포함하여 순조 때의 대부분의 변란도 ‘홍경래불사설’이 유행 하는 등 홍경래란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으려는 측면이 강하다. 그러 므로 해도기병설 유포의 주체, 즉 변란의 주체는 거사의 명분으로 ‘撥亂反正’92)을 선언하는 등 매우 정치색 짙은 구호를 내걸었다. 그러므로 해도기병설과 같은 정감록 사상의 유포에 대한 정부의 대응도 간단하지는 않았다. 이는 정감록 사상 자체가 혁명적 내용과 함께 폭발적 대민 전파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변란으로 진전될 경 우 곧바로 정치투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 특히 국왕은 기본적으로 正道, 즉 성리학을 강화하면 정감록과 같은 잡술은 자연 스럽게 차단될 것이라는 인식을 지녔다.93) 그러나 실제로 정감록 사 상은 더욱 만연하였고 변란과도 쉽게 연결되었다. 그러므로 정감록 유포에 대한 정부의 대응책은『大明律』의 ‘요언’ 조항94)을 적용하는 등 현실적으로 매우 강력하였다. 더욱이 이것이 변란으로 이어졌을
92)『正祖實錄』권 19, 정조 9년 3월 경신. 93) 정감록 사상의 유포에 대한 정부의 대응책은 高成勳, 앞의 논문, 173~ 181쪽 참조. 94)『大明律』권 18, 刑律, 造妖書妖言條“凡造讖緯妖書妖言及傳用惑衆者 皆斬”.
경우에는 거사여부에 관계없이 강경대응으로 일관하였다. 거사모의 등의 변란과정에서 해도기병설의 가장 큰 기능은 무엇이 었을까? 그것은 변란 주도층에 의한 고도의 심리전으로, 그들은 해 도에 막강한 물리력을 소유하고 있는 집단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을 민인들에게 암시함으로써 변란과정에서의 정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려는 선전․선동술의 일환이다. 당시 여러 해도에는 많은 유민들이 몰려들고 있었으며, 이들 유민 가운데는 세력화하여 군사력을 가진 저항집단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관리와 군사들을 해도에 파견하여 조사하는 등 나 름대로 대처하였으나, 지리적․경제적․군사적 요인 등으로 말미암 아 어느 섬에 몇 명이 있으며, 그들의 주요 생활방편은 무엇인지, 그 들이 무장하고 있는지 또는 무장할 가능성이 보이는지 등 해도에 대 한 기초적 실상조차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처 럼 해도에 대한 정확한 정보의 부재, 특히 해도의 무장력 정도를 정 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은 오히려 변란을 준비하는 세력에게 이 용가치를 높여주었다. 그들은 해도의 군사력을 과장하는 방법으로 정부의 정책에 혼란을 일으키고 일반 여론을 동요시켰다. 더욱이 여 기에 정감록의 해도기병설을 연계하여 유포함으로써 선전․선동의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해도기병설은 정감록의 여러 논리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 또한 정감록의 추상적이며 비합리․비현실적 논리의 틀 속에서 이루 어졌으며, 그 기능 또한 근본적으로는 정감록의 그것과 같다. 그러나 해도기병설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해도의 실체와 깊은 관련이 있 을 뿐만 아니라, 해도기병설의 도달점, 즉 이상사회 구현의 논리는 체제모순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민중의 폭발적 에너지를 수렴한 것이 다. 그러므로 해도기병설은 정감록의 다른 논리들보다 반체제 저항 이념으로서의 현실성이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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