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가리(가동)

[스크랩] 가야산의 숯가마 터 사라져 가는 백성들의 흔적 /옛길 주변의 수백 개에 숯가마와 움막 터 지역의 향토문화유산으로 보존이 필요하다.

phllilp7 2014. 8. 28. 08:33

가야산의 숯가마 터 사라져 가는 백성들의 흔적

옛길 주변의 수백 개에 숯가마와 움막 터 지역의 향토문화유산으로 보존이 필요하다.

 

내포가야산은 수 천 년에 걸쳐 인근에 사는 백성들이 안식처며 넉넉한 품에 기대어 살아온 어머니와 같은 산이다

678m높이의 비교적 작은 산이지만 주변이 평야지대로 우뚯 솟아 있어 실제 높이보다 높게 보이는 홍성과 예산 서산 내포지역의 진산(鎭山)이다.

고대의 뱃사람들은 서해를 지나며 뱃길을 잡아가는 길잡이 역할도 있다고 한다.

가야산에는 조선후기의 왕실 역사 유적과 불교를 비롯한 종교와 관련된 역사유적이 있다.

그러나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삶과 이여기는 알려진 게 별반 없다.

필자는 가야산의 폐사지와 옛길을 답사하며 그 주변에서 살아가던 주민들의 삶이 애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가야산의 수백에 이르는 가마터로 부터 전해지는 서민의 역사와 문화에 주목하며 이글을 기고한다.

내포가야산에서 조선시대 후기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처 1970년 때까지 사용하던 숯가마와 움막 터인 숯막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숯가마와 움악이 합쳐져 숯막이라고 한다.

특히 가야산의 빈발, 대문동봉림옛길, 백암사지. 용연사지 주변의 숯가마는 작은 움막 터와 함께 발견되어 당시 숯을 굽는 사람들의 생활상을 잘 알 수 있다.

천 년 넘는 세월동안 자연스럽게 오가는 길이 생겨난 옛길 주변에 숯을 생산하여 수송이 용이여 집중적으로 가마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가야산의 폐사지 와 옛길주변의 참나무 숲이 우거진 가야산의 빈발주변의 인적 끊긴 그곳을 들어가니 여기저기서 숯가마 터와 움막 터인 무너져 내린 돌담이 눈에 들어온다.

작은 움막은 100여 년 전의 당시 숯 굽는 사람들의 산에서 작업하는 기간에 사용하던 임시 거주지였다.

이제는 오랜 세월이 흘러 움막의 무너진 돌담과 가마 위에는 사라졌던 나무가 높이 자라 세월의 흔적을 말해준다.

가야산에 넓은 참나무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숯가마가 많았다고 한다.

식생중 가장 많은 수목은 참나무류로 이곳에서 7일 낮과 밤을 세워 생산한 참숯은 최고 제품이었다고 한다.

인근의 덕산과 해미 장으로 내다 팔았으며 최고 품질의 숯으로 인기가 많던 참나무 숯이다.

한 때는 생산한 숯과 나무를 덕산 장에 내다 팔기 위해 지금 등산객 수 만큼의 행렬이 이어지기도했다.

우리사회가 산업화되기 전 까지 덕산장의 경우 나무전이라고 불리는 가야산의 나무와 숯을 팔던 전문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옛 사람들이 숯 굽는 기간은 최소 7일에서 15일이며 참나무의 무게로 나무하는데 더 많은 시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가마는 마을에서 깊고 험준한 계곡에 있어 100년 전 사람들은 가마를 떠나지 않고 가마 옆에서 생활했다.

마을이 멀고 산이 험해 오가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산에서 생활한 것이다.

작업은 가을부터 겨울철에 작업하기 때문에 추위를 피하고 식량을 직접 산에서 구하기 위해 직접 사냥했다고 하며 가야산에 전문포수도 많았다고 한다.

숯가마을 운영하는 시기는 겨울에 주로 숯을 굽기 때문에 생활할 움막을 짓고 그 안에 돌로 화덕을 만들어 난방하여 추위를 피했다고 한다.

숯쟁이들이 임시로 기거하던 움막은 규모가 작고 드나드는 문이 아주 작다.

눈이 많이 내리는 산속의 강한 추위와 야생 동물을 피하기 위하기 위해서 작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가야산 포수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고종 8년 신미(1871) 4월 22일(신사) 기록에 충청도 각 군에 포군을 두다, 기록이 있다 .

그중 가야산의 포수 90명이 포군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해미현(海美縣)에 포수 50명, 예산현(禮山縣)에 포수 40명,)

오페르트가 남연군묘 도굴당시에도 이들이 출동하기도 한다.

대원군은 부친의 묘 굴총 사건 이후에는 당시 지명인 가동의 정비를 강화하여 소도화하여 마을 전제출입을 통제하고 각 방향에 4개의 보루를 설치하여 200여명이 중무장한 포수들이 주둔했으며 이들이 아침저녁으로 마을을 가로지르는 행군은 장관이었다고 마을의 어르신들은 말씀하신다.

조선시대 가야산에는 호랑이가 사냥의 기록이 전해지고 70년 때 까지 호랑이를 목격했다고 마을의 고노들은 주장한다.

숯가마는 가야산에 거주하던 서민들의 생활상과 애환이 담긴 시설로 숯을 구워 일본인들에게 팔았으며 덕산과 해미 장으로 내다 팔아 생활하던 삶의 애환을 느낄 수 있다.

다행이 지금도 빈발계곡 원효봉계곡.쉰질바위주변 등 가야산의 대부분 지역에서 규모가 크고 작은 숯가마 터를 발견할 수 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숯가마와 움막 터를 보존하고 향토문화유산으로 활용하고 알렸으면 한다,

우선은 그곳에 표지석과 안내판이라도 세우고 현황이라도 파악하자는 것이다.

가야산 숯가마에서 역사와 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우리의 자연유산을 찾아보는 아름다운 인문학적 체험을 해봤으면 한다.

옛길 폐사지주변의 숯가마 터의 보존 및 활용방안과 인문학 가치를 재평가하고 지역을 알리고 재생 시키는 자산으로 하는 활용 방안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이란 낯선 시골길을 걷다가 무심코 발부리에 채인 돌멩이 하나에도 만년의 세월과 숨결을 느끼고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하고 사람이 사람을 아파하는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학문인 것이다.

최근 각 지자체는 지역 재생이라는 명목 하에 지자체가 지닌 문화유산을 자원화 하는 작업이 활발하다.

숯가마 터와 폐사지 역사유적은 우리의 향토 문화유산들이라 고할 수 있다.

예산군은 가야산의 옛길과 주변의 숯가마터을 활용한 상가리만이 간직한 매력 있는 역사문화스토리텔링을 시도했으면 한다.

이곳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하면 조선시대 말부터 근대의 가야산 주민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지역을 알리는 향토관광 상품으로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가야산 그리고 상가리사람들인 백성들의 고통스런 삶의 흔적과 그들의 이야기 즉, 향토이야기를 찾아 보존하고 지역의 역사문화상품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숯을 구웠던 사람은 80대를 훌쩍 넘어 생존해 계시다.

이불들의 경험과 이야기는 가야산의 역사로 그분들의 이야기가 관광 사업으로 추진 한다면 향토역사를 알리고 마을경제에 도움이 되는 관광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으리라 는 생각이 든다.

눈으로 보여지는 것만이 가야산이 아닐 것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자연의 일부이며 역사의 일부로 가야산의 넉넉한 품에 기대어 수천 년의 세월은 인문학인 가치를 잊어서는 가야산의 가치와 의미는 반감될 것이다.

가야산에는 백제의 미소길.가야구곡길.내포문화숲길 등 여러 곳의 탐방 길이 있다.

그러나 그곳에 살고 있고 살았던 사람과 가야산에 관한 이야기가 부족하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애씀이 담겨있는 수많은 자취들과 수천 년의 시간을 견뎌온 옛길들,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갔던 이들의 정신과 애환, 한스러움들이 하나하나 시간을 거슬러 그 의미를 찾아보면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옛길의 역사, 길 주변의 숯가마와 그것에 관한 민담 및 설화 이야기를 그리고 동학과 대원군의 이야기을 고증하여 그냥 걷는 길이 아닌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인문학적인 체험을 할 수 있는 역사, 문화, 자연 등에 관심이 필요할 것이다.

가야산 일원의 향토 역사와 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자연유산을 찾아보는 답사 길에서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와 그들의 삶을 통해 인문학적 체험을 기대한다.

충청남도와 예산군은 가야산의 소중한 향토문화유산과 자연환경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숯가마 터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출처 : 가야산역사문화연구회
글쓴이 : phillip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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