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가리(가동)

가야산 상가리의 홍수맥이 (횡수橫手) 삼재풀이 굿

phllilp7 2014. 8. 10. 08:27

현재는 행해지고 있지 않지만 옛날에 는 절-(상가리 주민들에 의하면 보덕사(報德寺)를 말하는데 건립 (建立 이전에는 어떤 절을 말하였는지 확실히 모른다. 다만 가야사로 추측할 뿐이다). 측과 마을 사람들과 함께 길일을 잡아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대동산제(大同山祭)를 지냈다고 한다. 제관(祭官)은 스님 한분, 도가(산신제를 지내도록 선출된 집)그 외 2명인데 마을 사람들도 산제당에서 제를 올릴 수 있었다. 제 를 재낼 때 마을 사람들은 비린 것을 먹는 것과 부정한 일은 일체 금했다고 한다. 또한 부정한 사람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대문앞 양쪽 에 3무덤의 황토흙을 놓아 두었다고 한다. 제를 지내는 시각은 저녁으로, 집집마다 쌀 1되 씩 거둬 시루떡을 만들어 제단에 바 쳤다고 한다.(예산문화원)

 

굿은 공동체을 이어주는 마을의 축제이다.

위안과 평안·무사함을 기원하는 굿이다.

2014년2월14일 상가리 산신각터 아래의 미륵불이 있는 백제의 미소길에서 있었던 홍수맥이 삼재풀이 굿은 수백여 년 전부터 내려온 마을의 대표적인 전통 마을 굿이다.

 

상가리에서 마을내 사태마을, 윗남전 ,아래남전,쉰질바위 아래의 관음전등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굿을 지내는 다양한 전통이 있다.

수십년만에 굿이 벌어진 곳은 상가리 미륵불 옆을 보면 길흉 점치던 참나무가 서 있는 산이 있다.

 ‘중[僧]의 산제당’이라 부르는데, 중이 절을 짓고 산신에 치성드리는 산제를 지낸 곳이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 대동제를 지내던 성스러운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상가리의 굿은 마을주민들의 이야기 속에 전해지는 다양한 전통이 있다.

상가리에서는 조라와 관련하여 재미난 이야기가 전한다.

신에 헌작하던 술은 ‘조라술’(산신제나 용왕제 등을 지낼 때 쓰는 술. 막걸리의 일종으로 순내주(旬內酒)라고도 하며, 술맛이 달아 감주(甘酒)라고도 부른다)

산제당에 조라를 담가 두었는데 마을 주민이 그것을 몰래 꺼내 마셨다.

이 술을 마시면서 먼저 산신령에게 한 잔을 권하고, 그다음에 본인이 마시는 방식으로 모든 조라를 비웠다.

그 후 그 사람은 나날이 부자가 되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욕심쟁이가 조라를 몰래 훔쳐 마셨다.

 

욕심쟁이는 그 길로 하산하던 길에 다리가 부러졌고, 나날이 가산이 축나 거지가 되었다.

조라는 산신에게 바친 제물이므로 산신의 전유물이다.

이것을 인간이 홀로 차지하게 되면 벌을 받는다. 산신에게 먼저 권하고, 그다음에 자신이 취한 것은 신령을 대접한 것이 되므로 오히려 상(償)을 받는 빌미가 된 것이다.

이처럼 조라는 신령과 직접 연계된 대표적인 제물로서 신의(神意)를 확인하는 도구이다.

 

오늘 있었던 중이 있는 산신각의 굿은 수십 년간 끊어졌던 마을의 전통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전통문화 행사로 계승 발전시켜서 마을주민들의 화합과 협동으로 공동체 결속을 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가야산 관음전 스님의 홍수맥이 삼재풀이 굿의 의미는 그동안 잊혔던 지역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고 전통을 살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40~50년 전에는 홍수맥이 삼재풀이와 대동산신제는 마을 행사 중에서 가장 큰 행사였었다.

정월 대보름 날에 우리마을 기원하는 기원제를 지내고 솟(깃)대봉 산신각이 있는 당산으로 올라가 우리마을의 공동체의 안녕과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는 제사도 지낸다.

가야산에서 중심이었던 가야사와 상가리미륵불이 함께 있는 솟(깃)대봉이 영험한 산이라 신라시대부터 산신제와 기우제를 지내던 전통이 전해지며 인근에 있는 상가리미륵불과 가막골등은 신들이 사는 계곡이라는 뜻이 있는 영험한 산이다.

마을의 영봉인 솟(깃)대봉에서 매년 여러회에 산제와 기우제를 모셨는데 1970년대 초에 산제당이 사라지고 없어 진 뒤로는 그 터만 남아 있으며 올해 처음으로 관음전의 스님을 통해 홍수맥이 삼제제사를 모셨다.

 

굿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마을주민이 하나가 되는 마을을 대표하는 축제이다.

주민이 화합하고 즐기며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행사였던 것이다.

마을 전통과 공동체가 무너져 가는 시골 마을에 뭔가 새로운 힘을 불어 넣고 부모님 과 또 그 이전 부모님 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우리마을을 이끌어 오신 전통을 이어온 것에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이어 가자는 의미에서 수 백년 동안 우리 마을이 지탱할 수 있는 전통을 이어 오신 어르신들의 뜻을 굿이라는 축제를 통하여 기려본다.

 

홍수맥이

한국민속신앙사전 > 무속신앙 > 무속제의

 

집필자양종승(梁鍾承)

갱신일 2010년 11월 11일

 

정의

일상적 삶 속에서 닥쳐올 뜻밖에 좋지 못한 횡수(橫數) 또는 액을 미리 막아내기 위해 행하는 무속의례. 이를 횡수막이, 홍수막이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내용

무속신앙에서는 좋지 못한 나쁜 액이 달을 지날 때마다 수시로 들어올 것이라고 예상하는데 이러한 액운을 사전에 막아내는 것이 홍수맥이이다. 이 의례를 큰굿으로 할 때는 홍수맥이굿이라고 한다. 이때에는 굿 뒷부분에서 행해지는 창부거리를 하면서 일 년 열두 달에 들어오는 나쁜 액을 막는다. 그러나 홍수맥이는 일반적으로 간단하게 치루는 소규모 의례이다.

홍수맥이를 하는 기간도 정해져 있다. 새해가 시작되는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 대략 보름 동안이다. 이때가 되면 무당집은 홍수맥이를 하러온 재가집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사람들은 홍수맥이를 하기 위해 아침 일찍 목욕재계하고 초, 향, 쌀, 막걸리와 소액의 금전을 들고 만신집으로 간다. 의례가 간단하게 치러지기 때문에 소요 시간도 짧다. 홍수맥이를 하는 동안 무당은 일 년 동안 닥쳐올 여러 가지 좋은 일과 나쁜 일에 대한 공수를 내린다. 그리고 가족성원들의 생년월일과 성명을 청하면서 나쁜 액운을 막아내기를 기원한다.

일 년 열두 달의 홍수는 다음과 같이 막아낸다. 정월달 드는 홍수는 설날 세배로 막고, 2월 홍수는 한식날 막고, 3월 홍수는 삼짇날 막고, 4월 홍수는 초파일에 막고, 5월 홍수는 단오날 막고, 6월 홍수는 유두날 막고, 7월 홍수는 칠석날 막고, 8월 홍수는 한가위로 막고, 9월 홍수는 구일날 막고, 10월 상달 홍수는 무시루떡으로 막고, 동짓달 홍수는 옹시미 팥죽으로 막고, 섣달 홍수는 스무닷새 태종차기로 막는다.

 

참고문헌

한국민속대사전 2 (한국민속사전편찬위원회, 민족문화사, 1991)

서울 이태원 부군당굿 (양종승, 민속원, 2007)

 

 

삼재풀이

한국민속신앙사전 > 가정신앙 > 제의

집필자김효경(金孝慶)

 

갱신일 2012년 5월 30일

 

 

정의

태어난 해의 간지(干支)에 의해 사람의 운명과 길흉을 점쳐서 삼재라는 액운을 풀어내는 종교적 방법의 하나.

 

역사

중국의 역법(曆法) 가운데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주기법이 십간십이지 주기법이다. 일명 천간지지(天干地支)라 하여 음양의 설로 풀이한다. 십간십이지의 간지법은 전국시대에 목성의 천구상 운행이 12년을 걸려서 1주 한다는 사실 속에서 하나의 역법으로 자리 잡았다. 오랜 활용을 거치면서 민간의 주술적인 종교 원리로 작용하기에 이른다. 한 개인의 태어난 해[年], 달[月], 날[日]에 각기 간지를 배당하여 그에 따라 사람의 운명과 길흉을 점치는 간지법이 그것이다. 간지법 가운데 하나가 삼재를 확인하는 방법이다. 12년마다 되풀이되는 삶의 주기인 12지에 근거할 때 9년마다 되풀이되어 3년 동안 액운이 닥친다는 관념이다. 삼재에 대한 믿음은 오랜 기간 있어 왔겠지만 이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숙종실록(肅宗實錄)』 숙종 45년에 장희빈을 다시 중전으로 옹립하기 위해 중전을 해하는 방재를 행하였다. 이것이 발각되어 추국을 당하게 되면서 무당이 그해인 기해년이 장희빈에게 삼재가 드는 해이므로 신사를 행하지 않아야 했다고 하였다. 장희빈을 중전으로 복위시키기 위해 방재를 행하면서도 기해생인 장희빈이 삼재임을 고려하여 신사를 행하지 않아야 했다고 한 것이다. 이는 삼재가 들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자가 무당이며, 삼재가 드는 해는 좋지 않기 때문에 신사조차도 행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삼재가 실제 개인의 운명에 악재로 활용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비록 궁궐의 이야기이지만 무당이 간지기년법(干支紀年法)에 의해 삼재를 파악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사회의 삼재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김매순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정월 편에는 삼재법이 수록되어 있다. “남녀 모두 나이가 삼재(三災)에 든 자는 매 세 마리를 그려 문 상방에 붙인다. 삼재법이란 사(巳), 유(酉), 축(丑)이 든 해에 태어난 사람은 해(亥), 자(子), 축(丑)이 든 해 신(申), 자(子), 진(辰)이 든 해에 태어난 사람은 인(寅), 묘(卯), 진(辰)이 든 해에 해(亥), 묘(卯), 미(未)가 든 해에 태어난 사람은 사(巳), 오(午), 미(未)가 든 해 인(寅), 오(午), 술(戌)이 든 해 태어난 사람은 신(申), 유(酉)), 술(戌)이 되는 해 각기 삼재가 든다는 것이다. 세속에서는 이 복설(卜說)을 믿고 매 그림을 사용하여 액을 예방한다. 태어난 해로부터 9년 만에 삼재가 들기 때문에 이 삼재의 해에 해당하는 3년 안에는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삼가고 꺼리는 일이 많다.”

매 그림 부적은 신년 초두에 붙였다. 유만공의 『세시풍요(歲時風謠)』 정월 편에 “문 위에 그려 놓은 반폭의 금계그림, 머리 셋인 매 그림도 삼재를 물리친다네.”라는 기록이 있다. 금계그림은 새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배(門排)이고, 삼재는 특별한 경우에만 붙인다. 이 둘 모두 정초에 액막이를 위해 대문에 붙였다.

삼재를 막는 방법으로는 매 그림이 대표적이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경사 편 5 풍속조의?매[鷹]를 그려서 방문 위에 붙이는 데 대한 변증설에 그 내용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이규경은 삼재를 막는 데 더 힘이 센 호랑이가 아니라 매를 이용하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변증하였다. “매는 사나운 새 가운데에서도 후려치기를 잘하고 위세 있게 허공을 날기 때문에 주(周)의 태공(太公)을 나는 매에 비유한 것도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이다. 지금 재앙을 물리치는 데 으레 매를 그려 붙이고 액막이를 한다. 범이 언제 허공을 날고 가느다란 털[秋毫]을 관찰한 적이 있던가. 옛적의 이름난 그림이 가끔 영험을 보였다는 말은 이전의 기록에 흔히 보이고 있으니 도군(道君, 송 휘종을 이름)의 매 그림도 그런 영험이 있게 마련이다. 어찌 그런지의 여부를 굳이 따질 필요가 있겠는가.” 삼재를 잡는 데 강력한 힘의 소유자인 호랑이보다 매가 민간에서는 영험이 있는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삼재는 액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으로서 반드시 예방해야 하는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한 해를 잘 살아내기 위해 정초에 매 그림 부적을 대문에 붙여 삼재를 막고자 하였다. 삼재의 재난은 일정한 방향성을 지니고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미지의 공간인 허공과 육지를 자유롭게 오가는 매야말로 강인한 삼재 예방책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형태

삼재는 간지기년법에 의해 파악되기 때문에 태어난 해의 간지가 그 기준이 된다. 일단 삼재가 들면, 3년 동안 머무르게 된다. 삼재의 그 첫해는 ‘들삼재’, 둘째 해는 ‘묵삼재(또는 눌삼재)’, 셋째 해는 ‘날삼재라’ 한다. 3년 동안 어려움을 심하게 겪기도 하고, 어느 한 해가 어려웠다면 다른 해에는 조금 낫다고도 한다. 보편적으로는 3년 중에 들삼재가 가장 무섭다. 그다음으로 눌 삼재가 불길하다. 날삼재에는 경거망동하지 않고 근신하면 되듯이 점차 시간이 갈수록 재난의 정도가 약해진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날삼재가 가장 위험하다고도 하고, 둘째 해인 묵삼재를‘악삼재’라 하여 특히 꺼리기도 한다. 충청도의 옛말에 “들삼재는 몰라 보더라도 날삼재는 안다.”라고 한다. 이는 날삼재가 더욱 위험함을 뜻한다. 이 때문에 삼재가 들면 날 때까지 일단 3년 동안 조심한다.

한편 삼재가 든 나이에 ‘3’이나 ‘7’의 숫자가 들면 복삼재, 4·5·7의 숫자가 들면 파산삼재라 하여 흉한 것으로 여기기도 하고, 신수가 생기복덕 등의 길한 운수라면 조금 편할 것으로 여긴다. 유명․절체 등의 흉한 운수라면 위험할 것으로 간주한다.

이 밖에 다양한 민속관념이 삼재와 관련해 존재한다. 들삼재에는 마음이 심란하고, 묵삼재에는 집안에 우환이 들고, 날삼재에는 대체로 좋지 않다. 연령대에 따라 삼재를 달리 부르기도 한다. 0∼15세는 애기삼재, 16∼25세는 청년삼재, 26∼55세는 중년삼재, 55세 이상은 노삼재라고 각각 일컫는다. 애기삼재에는 낙상(落傷)이 잦고, 청년삼재에는 구설(口舌)이 빈번하고, 중년삼재에는 재산이 줄고, 노삼재에는 낙상과 구설이 많다고도 한다.

어느 한 해가 비교적 쉽게 넘어갔다면 다른 해의 삼재에는 큰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다. 혹은 식구 중에 삼재가 든 사람이 세 명이 있다면 한 명이 앞에서 잘 극복해 나가면 나머지 두 명은 그 뒤를 쫓아가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넘길 수 있다. 반면에 삼재가 든 사람이 두 명이라면 서로 삼재가 싸워서 풍파를 심하게 겪는다. 이처럼 삼재가 들면 3년 동안은 삼재 든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집안도 우환을 겪게 되어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삼재는 다음의 간지가 기년에 해당될 때에 든다.

 

사·유·축(巳·酉·丑)생은 해(亥)에 들어와 자(子)에 묵고 축(丑)에 나간다.

신·자·진(申·子·辰)생은 인(寅)에 들어와 묘(卯)에 묵고 진(辰)에 나간다.

해·묘·미(亥·卯·未)생은 사(巳)에 들어와 오(午)에 묵고 미(未)에 나간다.

인·오·술(寅·午·戌)생은 신(申)에 들어와 유(酉)에 묵고 술(戌)에 나간다.

 

삼재가 들면 3년 동안 액운이 미치기 때문에 이를 예방하거나 조심해야 한다. 12년을 단위로 3년 동안 삶을 교란시키는 삼재는 그 종류가 다양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사람에게 닥치는 세 가지 재앙으로 대삼재와 소삼재로 구분하였다. 대삼재는 수재(水災)․화재(火災)․풍재(風災)삼재, 소삼재는 도병재(刀兵災, 연장이나 무기로 입는 재난)․역려재(疫癘災, 전염병에 걸리는 재난)․기근재(飢饉災, 굶주리는 재난) 등을 각각 뜻한다. 대삼재는 인간에게 닥치는 자연재해 가운데 가장 크다. 소삼재는 인간이 견뎌야 하는 가장 어려운 재난을 뜻한다. 개인이 겪어야 하는 자그마한 고통이라기보다는 인간사에서 인간의 능력 밖에서 발생하는 최고의 재난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계산으로 미치지 못하는 긴 세월인 겁(劫)의 말(末)에 일어나는 재해를 삼재라고 한다. 우리 몸[身], 말[口], 생각[意]으로 인하여 생기는 재앙이 삼재이다. 이처럼 인간의 삶에 위해(危害)한 세 가지 재앙의 대표명사로서 삼재는 삶의 문제 가운데 어느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민간에서는 삼재를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온갖 재앙으로 관념한다. 삼재가 드는 사람의 운과 관련하여 미치는 여덟 가지 재앙이라는 의미에서 ‘삼재팔난(三災八難)’으로 간주한다. 여덟 가지 재난은 ①손재(損財), ②주색(酒色), ③질병(疾病), ④부모(父母), ⑤형제(兄弟), ⑥부부(夫婦), ⑦관재(官災), ⑧학업(學業)이다. 이들 재난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와 연관된다. 삼재가 들었다는 불안감과 더불어 그로 인해 불미스러운 일을 당할까 하는 두려움에서 삼재풀이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쏟은 것이다.

음력 정월이 되면 새해를 안정되게 이끌기 위해 각 가정의 주부는 식구들의 운수를 본다. 이때 대표적인 액운으로 지목되는 것이 삼재이다. 조선시대의 세시기류에는 직성(直星), 즉 구성(九星)도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직성보다는 삼재 비중이 높아졌다. 지금도 정월에 신수를 볼 때 빠뜨리지 않는 것이 삼재 유무이다 직성은 별로 중시되지 않는다. 간혹 직성을 막는 방법이 삼재풀이로 와전되어 활용되기도 한다.

삼재의 유무는 간지법만 알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전통사회에서는 간지법이 식자(識者)의 전유물로 여겨졌기 때문에 마을 내의 한학자나 무당, 법사, 스님 등 전문 사제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다. 삼재는 역법에 준하기 때문에 예측이 가능하고, 그에 따라 예방할 수 있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내용

삼재는 태어난 해의 간지에 따라 9년마다 돌아와 3년 동안 머무르는 액운이다. ‘삼재팔난’이라 하여 인간에게 닥치는 온갖 재앙을 상징하기 때문에 반드시 막아야 한다. 해[年]에 드는 간지에 따라 그 여부를 확인하는 간지기년법 예방이 가능하고, 삼재에 의한 탈인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어서 풀이도 가능하다. 삼재가 들면 ‘되는 일은 없고 안 되는 일이 많다.’고 하여 예방하고, 삼가고, 풀어내기 위해 다양한 주술적 방법을 사용한다. 이를 ‘삼재풀이’, ‘삼재막이’, ‘삼재맥이’, ‘삼재내기’, ‘삼재막지’라 부른다.

인간의 삶에 예기치 않은 문제를 미연에 막고자 하는 예방법과 더불어 살다가 탈이 났을 때 그것을 풀어내는 치유법이 있다. 간지기년법에 따라 9년마다 반복되어 예측이 가능해 치유법보다는 예방법이 더욱 발달되어 있다. 가장 보편적인 예방법은 부적법(符籍法)이다. 삼재부(三災符) 또는 삼재소멸부라고 칭하며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삼두일족응부(三頭一足鷹符)이다. 노란색의 괴황지에 붉은색의 경명주사로 몸통과 다리가 하나에 머리가 셋인 매를 그린 부적이다. 매의 강력한 힘으로 세 가지 재앙을 한꺼번에 잡겠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 부적은 방문 위에 붙여 둔다. 이것은 절기상 동지(冬至)가 지나면 효험이 없기 때문에 동지 즈음에 떼어서 이듬해에 다시 붙인다. 삼재부적은 삼재가든 사람이 직접 몸에 지니기도 하고, 자신의 몸과 접촉하는 물건에 숨겨 넣기도 하며, 태워서 물과 함께 마시기도 한다.

강원도 인제군의 한 가정에서는 삼재를 상징하는 물건을 만들어 부적과 함께 두기도 한다. 빈 병 세 개를 묶고 그 안에 삼재귀를 각기 잡아넣는다. 삼재가 든 사람의 나이 수대로 쌀알을 세어 부적과 함께 넣고, 복숭아나무를 깎아 병마개를 만들어 끼운다. 이 병은 거꾸로 해서 방문 위의 삼재부적 옆에 매달아 둔다.

또 다른 예방법은 미리 삼재가든 사람을 위해 삼재풀이를 하는 것이다. 삼재풀이는 무당집이나 절에서 한다. 시기는 음력 정초나 열 나흗날이 주를 이룬다. ‘열 나흗날은 액막이날이다’라는 관념처럼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인 대보름 이전에 모든 액을 막고자 했다. 대보름이 지나도 절기상 입춘(立春)을 넘기지는 않는다. 입춘 역시 보름과 마찬가지로 한 해의 새로운 출발로 여겼기 때문에 그 이전에 액막음을 하여 평안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늦어도 음력 3월을 넘기지는 않는다. 이는 3월이 지나면 봄이 다해 여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삼재풀이는 집에서 가정주부가 주도적으로 행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무당이나 법사가 주관한다. 삼재가 들면 그 한 해 내내 운수가 좋지 않다. 그 사람의 신수를 보아 특별히 좋지 않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피하기 위한 풀이방법을 활용한다. 예를 들어 수재(水災)의 운이 있으면 용왕제로 풀이를 한다. 거리에서 액이 든다면 거리제, 화재(火災)를 당할 운수라면 화재막이로 각각 푼다. 죽을 운수라면 닭이나 명태 등을 활용하여 대수대명(代數代命)을 위한 풀이를 한다.

삼재풀이 방법은 삼재가 든 사람의 운수에 따라 다르다. 수재를 면하기 위해 용왕공을 드리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새 박바가지, 쌀, 초를 준비한다. 바가지 안에 기름불이나 촛불을 밝혀서 물에 띄운다. 그런 다음 대수 대명하라는 의미에서 산닭의 머리를 잘라 땅에 묻거나 물에 띄우기도 한다.

거리에서 든 액이라면 제물을 가지고 거리에 나가 풀이를 한다. 이를 ‘길산제’라고 칭한다. 정월에 치성을 드릴 때는 운이 나쁜 사람의 윗도리[웃옷], 삼월에는 하의를 각각 가져간다. 땅거미가 지는 시간에 제물을 가지고 세 갈래 길로 나간다. 짚을 이용하여 엑스(X)자로 놓고, 그 중앙에 기름불을 밝힌 다음 제물을 진설한다. 먼저 칠성님을 부르고 이어서 사방의 질대장군님을 불러 “사방의 질대장군님! 부탁합니다! 동두질대장금! 서두질대장군님! 남두질대장군님! 서두질대장군님! 부탁드립니다.”라고 축언한다. 이때 “몇 살 먹은 애가 삼재가 들었으니 도와주십사!”라고 추가로 비손한다. 그 사람을 위해 소지 한 장을 올리고, 가져간 옷으로 북어를 싸서 삼재가 든 사람의 몸 둘레를 세 번 돌린 뒤 땅에 묻는다. 이것을 삼년 동안 반복한다. 길산제를 드리고는 간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돌아온다.

가장 흔한 삼재풀이 방식은 법사가 주관하는 대수대명을 위한 풀이이다. 대수 대명물은 다양하다.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는 삼재가 든 사람의 속옷에 그 사람의 이름과 생년월일시를 적은 것이다. 속옷은 입던 것을 빨지 않은 것으로 하여 그 사람의 체취가 남아 있도록 한다. 이 밖에 삼재가 든 사람의 손․발톱이나 삼재가 든 사람의 나이 수대로 고추나 동전을 사용하기도 한다. 달걀 세 개에 이름과 생년월일시 등을 적은 것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삼재든 사람 그 자체를 상징하는 상징물인 셈이다. 간혹은 동전으로 3,800원을 마련해 가기도 한다. 이는 삼재팔난을 의미한다. 마른 명태를 삼재가 든 사람의 속옷으로 싸고, 삼베로 일곱 매듭을 지어 묶는다. 머리 쪽을 표시하기 위해 오색천을 묶기도 한다. 삼거리로 나가 상을 놓고 밥, 물, 나물을 세 그릇씩 올린다. 징을 치면서 비손을 한 뒤에 삼베로 묶어 둔 명태를 거리 바깥쪽으로 내던진다. 명태 머리가 바깥으로 나가면 삼재가 풀린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 다음 오방기를 뽑아 그 사람의 운수를 점친다. 이때 파란색이나 녹색기가 나오면 소금을 끼얹고 다시 한 번 뽑도록 한다. 좋은 색의 기를 뽑으면 밤과 대추 등을 짚는다. 그런 뒤 명태는 동서남북으로 각기 일곱 걸음을 하여 땅을 파서 묻거나 불을 놓고 태운다. 마지막으로 소금, 메밀, 볶은 팥 등을 섞어 들고 삼재가 든 사람을 향해 던진다. 이때 “삼재 풀어주십사!”라고 다시 한 번 빈다.

계란을 이용한 대수대명법도 있다. 계란에 각기 삼재가 든 사람의 이름, 귀신 귀(鬼)자, 임금 왕(王)자를 써 넣는다. 조밥과 오곡 볶은 것을 짚으로 만든 종그랭이(종지)에 모두 담는다. 이것을 오색천으로 일곱 장을 묶는다. 별도로 동전 일곱 개와 막걸리 한 통도 가져간다. 세 갈래로 갈라진 길에서 제물을 놓고 비손한다. 동전 일곱 개는 신작로 사방에 던지고 막걸리는 사방에 뿌린다. 그러고 나서 계란을 땅에 파묻는다.

요즘에는 무당집이나 만신, 법사에게 삼재풀이를 하기보다는 절기상 동지나 입춘에 사찰에서 하는 대규모 삼재풀이에 참석하는 경향이 짙다. 이때는 개별적으로 풀이를 하기보다는 삼재가 든 사람 모두 함께 참석하여 집단적으로 한다. 법당에서 정월 열 나흗날이나 입춘맞이 치성을 드린 뒤에 삼재막이를 한다. 삼재가 든 사람들은 미리 가져온 속옷을 가지고 삼재막이 장소로 간다. 삼재가 든 사람의 나이 수대로 동전을 준비한다.

경기도 평택시의 서천사에서는 정월대보름날에 절 뒤의 서낭당에서 서낭고사와 함께 삼재막이를 한다. 미리 법당에서 대보름 불공을 드리고 나서 마지막 절차로 삼재를 막는다. 작고 흰 종이에 삼재가 든 사람의 이름과 고향을 적어서 준비된 새끼줄에 끼워 둔다. 절 뒤에 있는 서낭당에는 작은 동자상과 서낭나무가 있다. 스님이 천수경을 낭송하고 먼저 서낭고사를 지낸 다음 삼재 소멸을 위한 축문을 구송한다. 그러면 각자 준비해 간 촛불을 밝혀서 간단히 비손한다. 잡곡을 사방에 뿌리고는 마지막으로 절에서 구입한 삼재부적을 태운다. 이때 가지고 간 속옷도 함께 불에 넣어 태운다. 부적과 속옷이 모두 탈 때까지 그 곁에 서서 비손한다.

삼재풀이를 위해 특별한 존재에게 공을 들이기도 한다. 전라남도 여수시의 한 보살은 일 년 동안 칠성공을 들이면 삼재막이가 된다고 하여 신자들에게 칠성공을 권유한다. 칠성님께 한 달에 한 번씩 시루떡을 쪄 올리고 치성을 드린다. 이 밖에도 집안의 변소신인 측신에게 삼재를 막아 달라고 정성을 들이기도 한다.

다음으로는 안택(安宅)을 행할 때 법사가 내전을 하기 이전에 삼재가 든 식구를 위해 특별히 삼재풀이를 베풀기도 한다. 안택에 초빙된 집안의 신령을 위한 축언을 모두 마치고 나서 삼재풀이를 한다. 식구들의 안녕을 위한 배려인 셈이다. 법사가 삼재경을 읊고 칼을 던져서 삼재가 나갔는지를 확인한다. 삼재를 풀면 집에 초청한 모든 신령을 돌려보내는 내전을 한다.

이러한 형태의 의례들은 전국에서 골고루 나타난다. 지역적인 특색이라면 해안과 내륙 산악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관련된 것을 꼽을 수 있다. 전남의 해안가에서는 삼재가 들면 용왕공을 들이는 사례가 좀 더 많다. 띠배를 띄우듯 바가지에 불을 밝혀서 바다로 떠내려 보낸다. 해안가는 수재를 입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바다 건너 먼 곳으로 수재를 보내고자 한 것이다. 충청남도의 내륙지역에서는 길산제 형태로 삼재풀이를 한다. 세 갈래로 갈라진 길에서 거리제 또는 산제를 지내면서 마지막에 삼재풀이를 추가한다. 대수대명을 위해 북어를 일곱 매듭으로 묶어 던져서 머리가 바깥쪽을 향하면 삼재가 나갔다고 여긴다. 북어는 태우거나 땅에 묻는다. 내륙에서는 자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하려면 불사르거나 땅에 묻어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다른 지역은 지금까지 언급한 형태를 상황에 따라 각기 베푼다.

간혹 살면서 좋지 않은 일을 당하게 되어 점을 쳐서 삼재가 들었다고 하면 맥이를 한다. 이때는 그 사실을 안 시점에 곧바로 행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법인 셈이다. 그러나 삼재는 예방이 가능하므로 정초에 예방하는 것이 좀 더 보편적이다.

 

의의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예측 가능한 시간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주술적인 의례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태어난 해의 간지에 따라 9년마다 액운을 맞이하게 된다는 순환적인 세계관을 볼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의 가정신앙 (국립문화재연구소, 2005∼2008)

삼재맥이 (김종대, 한국의 세시풍속-정월,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삼재맞이 (이필영, 한국민속신앙사전-무속신앙, 국립민속박물관, 2009)

 

 

 

 

 

 

 

 

 

 

무한정보의 기사

샘제, 산신제, 목신제 등 마을동제
명맥유지 위한 지원절실
이재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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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2.17  10: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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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예산4리 주민들이 공원산 산신각에서 제를 올리고 있다. ⓒ 무한정보신문

정월대보름을 전후해 일부 마을에서 열리고 있는 산신제, 목신제, 샘제 등 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체계적인 지원과 관심이 절실한 실정이다.

자연환경을 소중히 여기고 무병장수와 풍년을 기원하며 이웃간의 사랑을 중시하는 이런 전통은 우리 민족의 순수한 토템이다.

마을마다 정월이 되면 안녕과 무사태평, 풍년, 풍어를 기원하는 산신제, 장승제, 목신제, 서낭제 등 제를 올렸다. 이런 동제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며, 가치있는 관광자원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소홀히 대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미신을 멀리해야 한다는 1960~1970년대 사회적 분위기 속에 많은 동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최근에 일부 마을에서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 예산군 300여개 마을 가운데 동제풍속이 남아있는 마을은 예산읍 간양리와 신암면 조곡리 등 20여곳 뿐이다.

현재 유지되고 있는 동제들은 수백년이 넘게 계승돼 온, 그 시초를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된 전통이다. 그나마 명맥을 잇고 있는 많은 동제들도 격식과 복식, 기물 등 원형이 전승되지 않아 아쉬움을 더해주고 있다.

현재 예산군에서는 마을동제지원 민간행사 보조금으로 6개 마을의 동제만을 예산문화원을 통해 약 50만원씩 지원하고 있다. 지원을 받고 있는 동제는 예산4리 공원산 산신제, 간양리 덕방산 산신제, 대흥 갈신리 산신제, 대흥 교촌리 행당제, 신암 조곡리 당제, 고덕 호음리 당제이다. 동제를 올리고 있는 나머지 14개 마을은 관심밖의 대상이다.

전통 계승과 향토문화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면 조례를 제정해 체계적인 지원과 함께 원형을 찾아 보존하도록 도움이 필요한 대목이다.

실례로 신암 신종2리 원성골에서 해마다 정원대보름 밤에 올리는 샘제는 군내에서 유일하게 마을공동 우물에 물이 잘 나오도록 기원하는 동제이다.

마을의 주민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전해오던 큰 행사였는데 이젠 관심들이 없다. 종교가 다양해지고 생활풍속이 바뀌기 때문인데 그래도 대를 이어온 마을 큰 일이니, 어르신들 몇몇이 손을 놓지 않고 맥을 이어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산식각 등 시설물에 대한 보존도 시급해 보인다. 예산읍내 상업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은 공원산 산신제는 예산4리(교남동) 주민들이 공원산 산신각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13일(정월 열나흘) 안영환씨를 비롯해 주민 10여명이 산신제를 올리며 예산읍의 안녕을 기원했다.

삼국시대부터 전해오는 이 산신각은 단기 4299년(1966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용마루에 기록이 돼 있다. 50년 가까이 된 산신각은 보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향토사에 관심이 깊은 지역의 한 인사는 “동제 등 전통신앙은 결코 미신이 아니라 단군이래 계승돼 온 소중한 전통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각종 축제에 수억원의 돈을 들이면서도 행정과 정치하는 사람들의 인식부족으로 실제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들은 맥이 끊기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편 <무한정보>가 조사한 최근까지 동제를 올리고 있는 마을현황은 다음과 같다.

■예산읍 예산4리 공원산 산신제, 간양리 덕방산 산신제 ■신암면 계촌리·조곡리 당제, 신종2리 샘제 ■광시면 운산1리 산신제, 대리 당산나무제 ■응봉면 계정1리 산신제 ■대술면 방산리 서낭제·미륵제, 궐곡1리 산신제, 마전2리 목신제 ■신양면 가지1리 당제 ■덕산면 상가리 산신제, 광천1·1리 산신제

 

정월은 기원의 달
목신제 올린 마전2리는 행복하다

   
▲ 마을 안의 정자나무 아래서 주민들이 모두모여 목신제를 지내고 있다. ⓒ 무한정보신문

천지에 달(음)의 기운이 꽉차오른 정월대보름은 만물과 사람을 위한 온 소망을 기원하는 날이다.

대술 마전2리(이장 이영근)에서 맞은 보름 아침, 요즘엔 시골에서도 보기드문 동제가 열렸다.

산 아래 조용한 마을 중심에 뿌리를 박은 정자나무는 500년 풍상을 맞으며 그 유장한 세월의 나이테 속에 세상만사를 담고 수호신이 됐을 터이다.

아침 일찍 부럼을 깨고 일어난 마을 어른들이 정자나무 앞에 제물을 진설한다.

네모반듯한 떡시루가 올라오고 잘생긴 돼지머리도 자리를 잡는다.

대추, 밤, 배 곶감, 사과도 빠지지 않았고 술과 포가 갖춰지자 정자나무 아래는 금새 푸짐해진다.

   
▲ 마을 어귀에 있는 노거수에도 제물을 차려 정성껏 목식제를 지낸다. 마전2리는 ‘위하는’ 나무가 두그루나 되는 풍족한 마을이다. ⓒ 무한정보신문
“나 어릴 적에 이 나무가 이만큼은 더 컸는데 새마을 운동때 나무 아래를 콘크리트로 포장한 뒤로 60년이 지나며 폭삭 늙어 버렸어”

박승균 전 대술농협 조합장은 사람 편리 위주의 개발여파 속에 노거수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는 표정이다.

그는 마전2리 동제의 유래에 대해 “예전엔 산제당이 있어 해마다 당산제를 올렸는데 제를 올리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맥이 끊겼어. 그런데 마을에 교통사고 같은 우환이 자꾸만 생겨 목신제를 올리게 됐지”라고 설명했다.

동제의 여러 형태 중 목신제는 산신제와 달리 법도와 가림이 엄격하지 않고 남녀 구분없이 전체가 한데 어울려 무사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잔치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제물이 모두 차려지고 동민회장인 박찬종씨가 유사(제주)로 나서 첫번째 잔을 올린다. 그리고 박승균씨는 축문을 읽어내려간다.

“유세차~ 우리 마을 수호신께 정성들여 주가포를 올리고 올 한해도 무사안녕과 대풍이 이뤄지기를 비오나이다. ~ 흠향하옵소서~”

대부분 70대가 넘어 보이는 30여명의 주민들이 연이어 잔을 올리고 환한 얼굴로 덕담을 주고 받으며 기원은 이어진다. 어른들의 축원에는 자신들을 위한 복 보다 대처로 나간 자식들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바람이 더 컸으리라.

마전2리 목신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 마을엔 위하는 나무가 두그루이다. 이번엔 마을 어귀에 있는 노거수에 바칠 젯상준비가 다시 시작된다.

주민들에 따르면 마을 안에 있는 정자나무의 아들뻘이 되는 나무란다. 수령도 310년으로 젊다.

노거수 아래 정성을 들인 제물이 차려지고 이번엔 나무에서 가까이 살아 보살핌을 한 번 더 준다는 허인성씨가 가장 먼저 잔을 올린다. 기원축문은 생략하고 주민들은 똑같이 정성을 다해 절을 올리고 축원을 드린다.

그리고 저마다 소지를 태우며 오늘의 기원을 하늘로 보낸다.

모두 마음이 평안해져 맑은 표정이 된다.

갑오년 정월 마전2리는 행복하다.

 

천지에 달(음)의 기운이 꽉차오른 정월대보름은 만물과 사람을 위한 온 소망을 기원하는 날이다.

충남 예산군 대술면 마전2리(이장 이영근)에서 맞은 보름 아침, 요즘엔 시골에서도 보기드문 동제가 열렸다. 산 아래 조용한 마을 중심에 뿌리를 박은 정자나무는 500년 풍상을 맞으며 그 유장한 세월의 나이테 속에 세상만사를 담고 수호신이 됐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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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안의 정자나무 아래서 주민들이 모두모여 목신제를 지내고 있다.
ⓒ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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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부럼을 깨고 일어난 마을 어른들이 정자나무 앞에 제물을 진설한다. 네모반듯한 떡시루가 올라오고 잘생긴 돼지머리도 자리를 잡는다. 대추, 밤, 배 곶감, 사과도 빠지지 않았고 술과 포가 갖춰지자 정자나무 아래는 금새 푸짐해진다.

"나 어릴 적에 이 나무가 이만큼은 더 컸는데 새마을 운동때 나무 아래를 콘크리트로 포장한 뒤로 60년이 지나며 폭삭 늙어 버렸어."

박승균 전 대술농협 조합장은 사람 편리 위주의 개발여파 속에 노거수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는 표정이다.

그는 마전2리 동제의 유래에 대해 "예전엔 산제당이 있어 해마다 당산제를 올렸는데 제를 올리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맥이 끊겼어. 그런데 마을에 교통사고 같은 우환이 자꾸만 생겨 목신제를 올리게 됐지"라고 설명했다.

동제의 여러 형태 중 목신제는 산신제와 달리 법도와 가림이 엄격하지 않고 남녀 구분없이 전체가 한데 어울려 무사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잔치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제물이 모두 차려지고 동민회장인 박찬종씨가 유사(제주)로 나서 첫번째 잔을 올린다. 그리고 박승균씨는 축문을 읽어내려간다.

"유세차~ 우리 마을 수호신께 정성들여 주가포를 올리고 올 한해도 무사안녕과 대풍이 이뤄지기를 비오나이다. ~ 흠향하옵소서~"

대부분 70대가 넘어 보이는 30여명의 주민들이 연이어 잔을 올리고 환한 얼굴로 덕담을 주고 받으며 기원은 이어진다. 어른들의 축원에는 자신들을 위한 복 보다 대처로 나간 자식들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바람이 더 컸으리라.

마전2리 목신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 마을엔 위하는 나무가 두 그루다. 이번엔 마을 어귀에 있는 노거수에 바칠 젯상준비가 다시 시작된다. 주민들에 따르면 마을 안에 있는 정자나무의 아들뻘이 되는 나무란다. 수령도 310년으로 젊다.

노거수 아래 정성을 들인 제물이 차려지고 이번엔 나무에서 가까이 살아 보살핌을 한 번 더 준다는 허인성씨가 가장 먼저 잔을 올린다. 기원축문은 생략하고 주민들은 똑같이 정성을 다해 절을 올리고 축원을 드린다. 그리고 저마다 소지를 태우며 오늘의 기원을 하늘로 보낸다. 모두 마음이 평안해져 맑은 표정이 된다. 갑오년 정월 마전2리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