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안흥정 일대에도 야철 유적이 확인되었다
고려 시대의 객관(客館)
가야산의 안흥정을 찾아가는 길 가깝고도 먼 길이었다.
안흥정을 찾아서도 민가의 (혹은사찰의보살님)에 두차례나 문의한 끝에 민가에서 300m정도 위쪽의 소나무 숲 옆에 위치한 안흥정을 찾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가야산역사문화연구회“회원들과 가야산의 잊혀진 옛길과 문화재 답사를 몇 주째 진행한다.
여름철 문화재 답사는 쉽지 않습니다.
복더위에 무더우니 땀을 흘려야 하고 인적이 끊긴 옛길을 답사하는데 체력도 쉽게 고갈된다.
폐사지는 대부분 길이 인적이 끊겨 원시림으로 변하고 동물들이 다니는 길로 변하고 경작지로 변하여 농작물로 들어갈 수 없는 곳과 잡목과 풀이 자라 길을 찾기도 어렵다.
멀리서 위치를 확인하고 폐사지를 찾아 숲길을 들어가며 길을 잃는 것도 다반사다.
어렵게 폐사지와 유적을 찾아도 풀과 나무가 자라면 제대로 살피기가 어렵다.
여름철 집중호우에 비가 오고 낯선 길을 걷는 것도 고역이고 가끔은 멧돼지와 낮선 사람들에 두려워지기도 한다.
세상사가 그러듯 어려움만 있겠나. 여름철 답사 기쁨도 있다.
겨울철 적막한 답사지의 모습이지만 여름철은 아름다운 숲과 꽃도 있다는 것이다.
여름철 문화재답사 유적과 함께 꽃을 볼 수 있는 것은 덤으로 얻는 즐거움이다.
지난주 찾은 안흥정 경작지와 여름철 우거진 수풀로 우선은 표지석을 찾는다.
우연과 집요함이 아니면 찾기 어려운 곳에 표지석이 있어 답사하는 분들의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하다.
가을이나 겨울에 왔더라면 좀더 쉽게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숲이 우거지는 여름에 찾으니 쉽지 않은 게 당연하겠다.
안흥정에서 지금처럼 숲이 우거지지 않은 옛적에는 그 위치상 멀리 간월도 AB지구와 해미앞바다 일대를 조망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전방이 큰 느티나무와 칡 등 짙은 숲으로 인하여 고북와 해미쪽 일부만 보이고 바다쪽은 잘 조망되지 않는다.
고소로 걱정이 되어 포기했던 안흥정에 오르는 산비탈을 길을 올라 가야산 중턱의 안흥정터는 밑에서 상상이상의 수만 평의 넓은 터가 있었다.
그곳은 수만 평의 농지와 상류부터 늘 흐르는 풍부한 수원으로 곳곳에 약수터와 연못이 형성되어 있어 작은 시냇물을 이룰 정도 였다.
안흥정의 현재 확인되는 규모로 보아 상당히 넓은 규모의 건축물이 여러동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표지석이 있는 건물지와 중앙과 측면의 경작지와 묘가 조성된 곳등 건축물이 잇었던 곳으로 보여진다.
현재 안흥정터에 있는 표지석이 있는 곳과 그 앞쪽에 산포된 와편과 기초석으로 생각되는 돌들이 있는 곳이 여러 동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산포유물중 고려초기에서 후기의 기와 편은 확인 되고, 고려후기의 청자편, 조선전기와 후기로 추정되는 기와편 등 발견되며 넓은 터의 중앙에서는 기와를 생산하던 가마터도 발견되었다.
기와를 생산하는 소규모의 시설이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곳에서 직접 기와를 생산하여 안흥정에 사용하고 일부는 가야산 주변의 사찰에 사용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현재 안흥정터와 그 주변에서 확인되는 유구의 대부분은 오래전부터 자연적으로 형성된 마을 주민들의 경작과 자연적인 식생 등의 요인으로 인하여 훼손된 상태이며 지속적인 경작과 자연적 요인으로 인하여 추가 훼손의 우려가 높아 보인다.
내년부터 대산항의 개항으로 쾌속선이 중국을 하루에 오가며 중국인들과 많은 교류가 예상된다.
다시 내포시대가 열린 것이다.
내포지역 해미의 안흥정과 중국의 교류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송나라의 사신인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마도[현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신진도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그 위치가 “해미현(海美縣)의 동쪽 11리” 지점이라고 나와 있다.
고려 문종(文宗) 31년에 나주도 제고사 태부소경(羅州道祭告使大府少卿) 이당감(李唐鑑)이 아뢰기를, “중국 조정의 사신이 왕래하는 고만도(高蠻島)의 정자는, 수로가 약간 막혀 있어 배의 정박(碇泊)이 불편하오니, 청하건대 홍주(洪州) 관할하의 정해현(해미) 땅에 한 정자를 창건하여 맞이하고 보내는 장소로 삼도록 하소서.” 하니 제서[制]를 내려 그 말을 따랐다. 옛여미현[古餘美縣] 현 관아의 북쪽 30리에 있다. 돌로 쌓은 성이 있어 주위가 8백 81척인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해미의 동쪽 연안에 객관으로서 해미 안흥정이 마련된 것은 이 지역이 태안반도를 통과하기 전 정박처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안반도의 서쪽은 ‘난행량(難行梁)’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항행이 어려운 난코스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태안반도의 안쪽에 정박처를 마련하여 기상의 변화와 물자의 공급, 휴식 등을 취하도록 조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화봉사고려도경』의 저자인 서긍은 북송말인 1122년 5월 16일 신주를 비롯한
8척의 객주를 타고 남중국 명주를 출항하여 5월 19일에 정해현定海縣에(해미) 이르렀다.
중국사신들이 송(宋)나라 수도였던 낭징(南京)에서 배를 타고 고려땅에 오는 통로가 이 천수만의 끝 지점인 현 해미면 양림리(良林里)에 있었던 양능포항(良陵浦港)에 배를 대고 내리어 가야산 산수리(産水里)에 있었던 안흥정(安興亭)에서 쉬어서 오갔던 것이다.
흔히 사신 다니든 곳이 현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안흥항으로 알고 있지만 옛 사신 왕래길의 안흥(安興)이란 해미 "안흥(安興)"을 말하는 것이다.
중국사신들이 송(宋)나라 수도였던 낭징(南京)에서 배를 타고 고려땅에 오는 통로가 이 천수만의 끝 지점인 현 해미면 양림리(良林里)에 있었던 양능포항(良陵浦港)에 배를 대고 내리어 산수리(産水里)에 있었던 안흥정(安興亭)에서 쉬어서 오갔던 것이다. 흔히 사신 다니든 곳이 현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안흥항으로 알고 있지만 옛 사신 왕래길의 안흥(安興)이란 해미 "안흥(安興)"을 말하는 것이다.
당나라 때인 847년 일본승 엔닌은 중국의 소주蘇州 송강구松江口(지금의 상해시 부근)에서 출발한 신라 배를 기다려, 산동반도 남쪽의 유산포乳山浦에서 탑승하였다.
그뒤 이 배는 정확히 동쪽으로 황해를 횡단한 다음, 신라국 서쪽의 산들을 바라보면서, 동남으로 방향을 틀어 웅주熊州(지금의 공주)의 서쪽과 무주武州(지금의 광주)의 서남쪽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한다.30)
이때 엔닌은 9월 2일 오시午時(12시)에 적산포赤山浦를 출항하여 3일 새벽에 신라국 서쪽의 산들을 보았다.
따라서 그의 배가 황해를 횡단하는 데는 채 1일도 걸리지 않았다.
당시 엔닌의 배는 연안을 항해하고 있었으므로 평저선이다.
그리고 평저선으로 황해를 횡단하는 데 빠르면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29) 이에 대해서는 남송말 보우寶祐 6년(1258)에 남중국 명주明州에 표류해 온 고려인이 고려의 병선兵船에 대해서 오로지 정순풍正順風에만 편할 뿐이라 증언하고 있다.
한편 『선화봉사고려도경』의 저자인 서긍은 북송말인 1122년 5월 16일 신주를 비롯한
8척의 객주를 타고 남중국 명주를 출항하여 5월 19일에 정해현定海縣에(해미) 이르렀다.
여기서 항해의 안전을 빌기 위해 3일 밤낮에 걸쳐서 예불 의식을 마친 뒤에, 5월 24일에
드디어 고려로 향하였다.
5월24일부터 약 1주일의 항해 끝에 비로소 고려의 해역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이어서 6월 3일에 흑산도를 지나갔고, 6월 4일에 죽도竹島에 정박하였다.
그리고 6월5일에는 죽도에서 멀지 않은 고점도苦.島에 묵었으며, 6월 6일에 군산도群山島(古群山島)에 정박하였다.
6월 7일에는 횡서橫嶼에서 묵고, 8일에 마도馬島에 정박하였으며,6월 9일에 자운도紫雲島에 정박, 6월 10일에 합밀蛤密에 정박, 6월 11일에 용골龍骨에정박, 마침내 6월 12일에 예성항 벽란정碧瀾亭에 도착한 뒤, 다음날 송나라 사절들은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들어갔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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