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가리(가동)

내포가야산관음전

phllilp7 2012. 9. 29. 07:17

 

가야산상가리의 대동산제

 

우리나라를 가리켜서 산신당의 나라라 했다.

불교가 들어오고 유교가 들어온 뒤에도 마을마다 산신당이 있고 신단수가 서있는 농촌풍경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아졌다. 정월 당산제, 2월 영둥제, 6월 농신제, 10월 告祀고사 등 모든 연중행사는 단군 이래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어 아무리 나라에서 금지하여도 사라지지 않는 우리 민족문화의 핵심이었다. 모든 축제는 산신을 불러 내리는 降神강신 행사에서 시작된다. 산신은 본시 天神이어서 마치 환웅이 그랬듯이 먼저 하늘과 가장 가까운 큰산에 내리신다. 백두산, 묘향산, 구월산, 금강산, 치악산, 오대산, 태백산, 지리산, 한라산 등 팔도의 모든 명산에서 강신제를 올린다. 고을마다 鎭山진산이 있는데 이들 작은 산에도 신이 내린다. 이렇게 지상에 내린 하늘님(우리는 본시 그렇게 불렀다)은 모든 마을에 풍년이 들고 가정에는 질병이 없는 행복한 새해가 될 것을 약속했던 것이다.

본래 절에서 삼성각이란 고려 말 추앙받던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세 분의 대사를 봉안하던 곳이었으나 핍박받던 조선불교가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구복의 민간신앙을 수용하여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 삼성각 등이 절 안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 시기가 17c~18c로서 석가의 정법과 우리 민간신앙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가 되었다.

 

조선 후기를 살던 삶에 지친 민초들이나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석가의 진리는 우선은 멀고, 불 같이 내 소원 들어주시는 산신님, 독성님, 칠성님은 가깝다 보니 이 곳 구당이나 절집 삼성각에는 오늘도 향불이 꺼지지 않는 것이다

 

굿당, 당집, 서낭당 등 우리의 고유한 정서나 신앙이 미신이라는 이름 아래 철저히 말살되었다는 사실이다. 일제 식민지 아래서 교육 받은 세대부터 근래에 교육받은 세대가 대부분 그런 가치관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수천 년 내려온 우리 것의 많은 부분이 어찌 지켜지겠는가. 게다가 ‘새마을 운동’으로 오지의 시골마을에 남아 있던 우리 것들도 모두 부서져 버렸다. 다 늦게 일부 민속학자들과 외국인들이 그 가치를 알아보고 찾아다니지만 없어진 것들이 다시 살아날 리 없다.

 

안향(安珦: 고려 충렬왕 때 유신)의 미신타파’라 하여 우리 것 말살을 찬양하는 가치관에 물들기 시작하여 서양식 가치관을 존중하는 교육을 받다 보니, 오랫 동안 우리 것을 미신이나 미개한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 속에서 살아 왔다.

 

60년대 불교 정화운동의 일환으로 조계종 총무원에서는 귀일심원 요익중생 상구보리 하화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 上求菩提 下化衆生: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 중생을 이롭게 하고 위로는 진리를 구하며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자)의 근본원리에서 벗어난 모든 대상을 타파하고자 하였으며 성철스님도 정법이 아닌 것은 모두 없애고자 하였으나, 한 번 민초들 마음속에 들어온 믿음의 대상이 쉽게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이후락 씨가 전국불교신도회 회장을 맡으면서 산신각 철거 운동을 벌였다가 신도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회장직마저 잃게 되었다.

 

상가리 가야산의 산신각은 70년대 모두 사라젔으며 관음전은 스님들에 의해 재 건립되었으며 현재는 넉넉한 맘씨의 스님이 한분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