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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덕산현에 대하여

phllilp7 2025. 11. 27. 06:09
18세기 덕산현에 대하여
아래의 글은 18세기 덕산현(德山縣)이 겪었던 쇠퇴와 극적인 중수(重修) 과정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기록이다.
원문에서
<<....백여 년을 거치는 동안 서까래와 대들보가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위로는 비가 새고 옆으로는 바람이 불어 들며, 물이 스며들고 벌레가 갉아먹어 이미 극에 달했다. 동쪽으로 기울고 서쪽으로 무너져 보수도 불가능할 정도였다. 초라한 처소에서 겨우 몸을 의지하며, 임시로 관청 창고를 빌려 거처하였다.
관사는 서쪽에, 정당은 동쪽에 두고, 옛 터를 넓혀 약간 아래로 낮추었고 북쪽에는 북루를, 뒤쪽에는 사정을 배치하였다. 예전의 설계보다 증축하되, 검소하지도 사치스럽지도 않게 하였다......
조정에 재정을 의지하지 않고 수령의 월급으로 공사를 감당했다.
....관청 마당은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어 들짐승과 나무가지가 무성했으나, 이제 새롭게 단장되었다. 오늘날에는 제비와 버드나무가 어우러져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
새로운 모습이 눈앞에 드러나니 산천도 새롭게 변한 듯하다. 백성들과 관리들이 모두 기뻐하며 이를 축하했다.>>
18세기 덕산현의 관아와 가야산 가야사(伽倻寺)를 비롯한 사찰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쇠락에 이르렀는지는, 이 한 편의 기록만으로도 상당 부분 짚어볼 수 있다. 글에 따르면 관아 건물은 백여 년을 지나는 동안 서까래와 대들보 가운데 온전한 것이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피폐해졌다. 위로는 비가 새고, 옆으로는 바람이 들이치며, 물이 스며들고 벌레가 갉아먹어 더는 손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동쪽으로 기울고 서쪽으로 무너져 보수조차 불가능해지자 새로 부임하는 수령은 초라한 처소에 몸을 의탁하고, 관청의 창고를 빌려 임시로 거처했다고 전한다.
이후 새 관아를 세우면서 관사는 서쪽에, 정당은 동쪽에 배치하고, 옛 터를 조금 넓히되 지대를 약간 낮추었으며, 북쪽에는 누각을, 뒤편에는 사정을 두었다. 예전 설계에 비해 규모를 다소 늘리면서도 지나치게 검소하거나 사치스럽지 않게 조영했다고 밝혔다. 특히 재건에 필요한 공사비를 조정의 교부금이 아니라 수령의 녹봉으로 충당했다는 대목은, 중앙 재정이 덕산현에 원활히 내려오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오랫동안 잡목과 들짐승에 내맡겨졌던 관청 마당이 정비된 뒤에는 제비가 날고 버드나무 사이로 노랫소리가 퍼지는 평온한 풍경이 펼쳐졌고, 산천까지 새로워진 듯하다며 백성과 아전이 함께 기뻐했다는 결구로 글은 마무리된다.
이 기록이 전하는 덕산현의 처지는 1728년 이인좌의 난 이후의 정세와도 맞물려 읽힌다. 난에 가담한 세력이 가야산 일대와 세력과 연결되었다는 이유로 덕산은 ‘반역향’이되어 처벌 받는다. 결국 덕산현과 가야사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결과 행정적 서열이 전국에서 가장 아래 현으로 떨어졌다는 사실이 정사에 등장한다. 관아 중수 비용을 중앙이 아닌 수령 개인의 녹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