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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역사의 흔적을 담다

phllilp7 2025. 2. 12. 08:55

가야산, 역사의 흔적을 담다

 

가야산을 오가며 찍은 사진들이 쌓여간다. 처음에는 그저 스치는 풍경이라 생각하고 셔터를 눌렀지만,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니 그것이 역사의 한 조각이 되었다. 기록은 순간을 잡아두는 행위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것은 과거를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

가야사지 발굴 현장도 마찬가지다. 한때는 흙 속에 묻혀 아무도 알지 못했던 터가 이제는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걷는 길의 시공 현장 역시 그렇다. 없던 길이 생기고, 그 길을 따라 사람들이 오간다. 예전에는 흔적조차 없던 공간이 지금은 새로운 의미를 가진 장소로 바뀌어 간다.

기록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한 순간을 남긴다는 것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 후대가 과거를 되짚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일이 된다. 지금 내가 가야산을 기록하는 것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시간 속에 흔적을 새기는 작업이다.

오늘도 가야산을 오르며 사진을 찍고, 걸으며 눈에 담는다. 사라지는 것들, 새로 생기는 것들, 그 모든 것이 언젠가 누군가에게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하늘에서 바라다보는 가야산 상가리는 천 년의 불교 역사와 1608년, 1728년, 1845년, 1865년, 1868년, 1870년 조선 왕실과 도굴을 시도하던 유럽인들의 이야기가 깃든 독특한 역사문화 공간이지만, 오페르트만 기억하고 오늘날 가야사와 상가리의 역사에 대하여 이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남연군묘 아래 동쪽에 자리한 마을 상가리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한때 가야사와 함께 사하촌으로서 천 년의 평온을 누렸으나,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변화를 피할 수 없었다. 1608년 이후 가야사는 폐사의 운명을 맞았으며, 1728년 이후 더 이상 운영될 수 없었다. 조용했던 산골 마을은 1845년 이하응이 이곳을 차지하면서 변화의 전환점을 맞았고, 1865년 흥선대원군이 되면서 마을 중심을 거대한 무덤이라는 인공 조형물로 채우게 되었다. 그는 이곳을 자신의 노후와 사후를 위한 공간으로 여겼으나, 결국 돌아오지 못했고, 이곳에 묻히지도 못했다.

그렇게 다시 150년이 흐르고, 예배의 공간에서 왕실의 공간으로, 다시 새로운 시민들의 공간으로 변신하고 있다. 남연군 묘역과 그 주변 가야사지 발굴 흔적은 이곳이 천 년 불교 유적이 잠자고 있는 곳임을 암시하며, 조선 중기부터 조선 왕실과 깊이 연결된 장소임을 증명한다.

가야사지 유적과 현존하는 남연군묘는 고대부터 대한제국 시기까지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공간으로서, 역사 연구자와 지역민, 탐방객들에게 가야산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2012년부터 진행된 매장문화재 발굴 조사를 통해, 이곳이 과거 왕실의 공간에서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쳐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까운 미래에는 야외 전시장과 공원으로 조성되고, 내(川)를 따라 천천히 걸을 수 있는 탐방로가 마련되어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갈 전망이다.

오늘도 수많은 청소년이 가야사지를 방문했다. 천 년 역사의 현장, 근현대 역사의 현장에서 그들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지 궁금하다. 아마도 이 공간이 그들에게도 역사적 의미를 새기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