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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눌 자산 이영원에게

phllilp7 2025. 2. 10. 14:28

<덕산현 고산리를 지나다가 은거하는 자선 이영원을 찾아가다. 산꽃이 마을에 가득한데 헤매면서 길을 알지 못해 말을 돌려 동네를 빠져나와 입으로 절구 한 수를 읊었다. 때는 323일이다.

(過德山縣高山里, 訪李子善榮元幽居. 山花滿村, 迷不知路, 回馬出洞, 口號一絶, 時三月二十三日)>

이안눌

 

尋君疑入武陵溪, 그대를 찾아 무릉도원에 들어온 듯한데

籬落煙花到處迷. 마을의 아름다운 경치에 도처에서 헤맨다.

空着馬鞭回出洞, 부질없이 말에 채찍질하며 돌아서 빠져나오니

亂峯斜日子規啼. 어지러운 봉우리에 석양지고 두견새 운다.

(동악집9 <담주록(潭州錄)>)

[해제]

이안눌은 1610(광해군 2) 2월에 담양부사(潭陽府使)로 임명되었다. 부임하러 내려 갈 때 신창현(新昌縣)을 거쳐 덕산현을 방문했다. 323일 덕산현 고산리를 지나다가 자선 이영원이 은거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다가 지은 작품이다.

 

이영원에 대하여

이영원(李榮元, 1565~1623, 龍溪)의 묘표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지었고, 그의 사위가 명곡(鳴谷) 이산보(李山甫, 韓山李氏)의 손자 이준발(李畯發)이다.

 

덕산현 고산면 높을미[현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서 태어났다.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권필(權韠임숙영(任叔英)과 벗으로 친하게 지냈다.

또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도 교류가 깊었다고 한다. 이영원은 일찍이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산과 강을 다니며 시와 술을 즐겼고, 성리학 연구와 이념을 실천하는 데 솔선수범하는 생활을 하였다.

 

선조 때 신하들끼리 붕당을 형성하여 당쟁이 매우 심해지자 이영원은 나라의 상황을 위태롭게 여기고 극단적인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을 알게 된 사람들은 걱정스럽게 생각하였는데 이영원은 매우 태연하였다고 한다. 이영원은 사람들의 다급한 일을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었으며 친족들과 함께 의창을 설립하여 굶주린 사람을 구제하고 상례와 제사를 치르도록 하였다. 1623(인조 원년) 59일 사망하였다.

 

스승인 송익필에게 학문적 감화를 받아 율곡(栗谷) 성리학의 지향처인 실천궁행(實踐躬行)이라는 뚜렷한 생활 목표를 확립하였다. 이이(李珥)38세 때 일등인(一等人)은 과거에 매달리지 않는다.”라고 한 주장에 크게 공감해 과거에 응할 생각을 버리고 일등인을 자처하며 평생을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

저서는 [遺稿이다

 

몽곡리 (夢谷里)

본래 덕산군 고산면의 지역으로서 굼실 또는 몽곡이라 하였는데,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양금리, 하몽리, 원기리, 두곡리,주교리와 상몽리, 천변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몽곡리라 해서 예산군 고덕면에 편입되었다.

곱돌고개[고개로 곱돌재라고도 함], 굼실[마을로 몽곡리 또는 몽곡이라고도 함],

금바위[몽곡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양금리라고도 함,큰 바위가 있어서 붙여졌음],

대덕교(大德橋)[배다리 마을에 있는다리로 배다리라고도 함],

대평골[금바위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평곡(平谷)이라고도 함], 바리미[마을로 바래미, 하몽(下夢)이라고도 함.

바리는 대나무 이름이고, 미는 원래 뫼()을 뜻함].

배다리[금바위 북쪽에 있는 마을로 주교라고도 함. 배다리가 있기 때문에 붙여졌음],

봉두골[양금리 북쪽에 있는 마을],

빙고개[봉곡리 북쪽에 있는 마을. 전에 빙고(氷庫)가 있었다고 함],

서낭댕이[곱돌고개에서 동네로 들어오는 어구에 있었던 서낭당],

석면광[곱돌고개 옆에 있었던 석면 광산], 옻샘[원덕이 남쪽에 있는

샘으로 옻이 오른 데 씻으면 좋다 해서 붙여졌음],

원대기[몽곡리 중앙에 있는 마을로 원덕, 원덕이라고도 함],

참나무고개[상몽리로 가는 고개. 오래 묵은 참나무가 있어서 붙여졌음],

천변(川邊)[양금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배다리내(도산천)가여서 붙여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