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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청나라 상인의 내륙 상업 행위

phllilp7 2018. 3. 31. 05:51

      청나라 상인의 내륙 상업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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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 상인의 내륙 상업 활동은 이번에 순회한 지방에서는 실로 놀랄 만큼 진보했다. 상업지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청국 상인이 거주하면서 상업을 운영하고 있었고, 아무리 궁벽한 곳에 있는 촌락일지라도 장날에는 청국 상인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공주강경예산 등의 시장에는 20~30인이 찾아왔다. 그 중 다수는 장날을 따라 돌아다니는 천상(賤商)이지만 공주•강경•예산 등에는 괜찮은 상인들이 들어와 상당히 큰 거래를 한다고 한다. 게다가 면직물류, 각종 서양 물품, 청국산 옷감, 잡화류 등으로 곡물을 대규모로 사들이고 있으며, 구만포 같은 곳에서는 상당한 자금을 투입해 매입하고 있다고 한다.

종래 안성시에는 수원 상인들이 많아, 외국 상품을 인천에서 들여와 판매했다. 이 상인들은 100명이나 있었는데 근래 청국 상인들이 많이 시장에 찾아와 점점 상권을 빼앗겨 요즘 폐업한 자가 많았다. 공주•강경 등의 경우에는 (청국 상인들) 모두 가옥을 소유하여 가게를 열었으며, 전라도 전주의 경우는 30명 정도의 청국 상인이 들어와 전라도 각 지방의 장날에는 청국 상인들이 오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한다.

……(중략)……

일본•중국•서양•조선 상품 등을 팔면서 장날을 따라 행상하는 자들은 스스로 짐을 지거나 혹은 한국인을 고용해 지게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들 청국 상인의 일상 비용은 식사비는 2회 혹은 3회분을 지불하고 숙박료는 한국의 관습에 따라 식비에 포함되며, 하루에 300문에서 500문 정도이다. 화물 운반을 위해 한국인을 고용하면 식사 3회를 제공하고 하루에 500문을 준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청국 상인은 음식물이나 복장 등이 추악하기 때문에 종종 한국인들에게 천시를 당하지만, 현재 상황을 보면 근검함과 인내함으로 한층 더 진보하여 한국의 보부상들을 점차 압도하고 있다. 또 상당히 큰 거래를 하는 상인들도 자본이 부족해 점차 청국 상인들에게 추월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된다면 조선 팔도의 상권은 남김없이 조선 상인의 손에서 청국 상인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본 외무성통상국, 『통상휘찬』 제1호 부속, 61~63쪽

 

 

이 사료는 1894년(고종 31년) 2월 일본 외무성 통상국(通商局)에서 편집•간행한 『통상휘찬(通商彙纂)』 중에서 1890년대 초 청나라 상인의 조선 내륙 상업 활동에 대해 기술한 것이다. 이 책에는 189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 관계 연구에 중요한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청국 사람들이 조선에서 상업 활동을 시작한 것은 1882년(고종 19년) 8월 23일 조선의 주정사(奏正使) 조영하(趙寧夏, 1845~1884)와 청국의 직예총독(直隷總督) 리훙장[李鴻章, 1823~1901] 사이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이 체결되면서부터이다. 이 무역 장정은 표면상 근대 서양 제국의 조약 체결 형식을 모방하고 있으나, 내용은 종속 관계 성격으로 비준서 교환과 같은 공법상의 절차 없이 체결과 동시에 효력이 발생하였다.

종래 조선과 청국은 중화주의적인 외교 질서상 종주국과 조공국 위치에 있었다. 또한 두 나라 사이에서 무역이란 사신단을 수행하는 상단을 통한 외교나 국경 지방인 의주•회령•경원에서 물품을 교역하는 개시(開市) 외에는 밀무역이 전부였다. 그러나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이를 모방한 일본의 공세 속에 조선과 청국도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종래와 같은 내왕의 제한을 철폐하고 새로운 통상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 조약 자체가 임오군란이라는 정치적 사건을 빌미로 일어났고, 임오군란 이후 청국은 리훙장의 심복인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를 조선에 파견해 사실상 조선의 내정을 장악하였다. 조선의 내정이나 경제적 이권에는 관여하지 않았던 전통적 중화 사대 질서와는 달리, 당시 청국의 외교정책을 주관했던 리훙장은 조선에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적극적인 진출을 기획하고 있었다. 그 결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통해 청국 상인들이 조선의 내륙 지방으로 대거 진출해 들어왔다.

1차 진출 장소는 중국과 조선이 해로를 통해 가장 가깝게 교통할 수 있는 인천 지역이었으며, 한성 내부에도 다수의 청국 상인이 진출해 상행위를 시작했다. 청국 상인들의 상가는 청계천 남쪽 변에 위치했으며, 이들은 현실적으로 치외법권을 보장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한성 안에서도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이러한 청국 정부의 조선 내정 간섭, 청국 상인들의 조선 경제 침략으로 인해 조선인 사이에서 반청 감정이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1884년(고종 21년) 갑신정변이 발생하는 사회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일본은 조선의 정치•외교적인 분야에는 관여할 수 없는 상태였다. 대신 조선에 경제적으로 진출할 것을 시도하면서 청국과의 대결을 준비해 왔다.

이 사료는 주로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약진했던 청국 상인들의 활동 양상을 일본 공사관에서 조사하여 보고한 것이다. 본 사료에 나타난 청국 상인들은 대규모로 활동하는 정예 상업 조직이라기보다는 “음식이나 복장이 추악하여 한국인들에게도 멸시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은 본 사료가 청국과 경쟁 관계에 있는 일본 공사관에 의해 작성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당시 한국에서 활동한 청국 상인들은 중국에서의 빈곤과 정치적 혼란을 피해 새로운 기회를 얻고자 조선에 진출한 집단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조선에서 보였던 행태가 엘리트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청국 상인들은 충청도•전라도 지역의 장시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기존 상권을 잠식해 들어갔다. 특히 인천 지역을 통해 수입되었던 외국 상품들을 각 지역에 판매하면서 보부상 및 전통 상인의 입지는 점차 줄어들었으며, 청국 상인들은 조선의 미곡을 대거 구매하여 반출해 갔다. 이러한 무역 형태는 청국과 일본 상인들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외국 상인들이 조선에 진출하면 할수록 조선 상인들이 도산하는 것과 아울러 곡물 가격이 올라가 조선 서민들의 생활 조건은 악화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상황에 대한 불만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으로 폭발된다.

청국에 대해 결코 호의적일 수 없는 일본 공사관의 시선임에도 불구하고 청국 상인들의 활동에 대한 이 사료의 최종적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다. 음식물과 의복이 추악하여 한국인들에게 경멸을 당하는 것조차 그들의 근검과 인내의 증거이며, “상당히 큰 거래를 하는 상인들도 자본이 부족하여 점차 청국 상인들에게 추월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된다면 조선 팔도의 상권은 남김없이 조선 상인의 손에서 청국 상인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는 조선의 지방에서 약진하는 청국 상인들의 활약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한 일본 상인들의 성과에 대한 조바심과, 최종적으로는 조선에 대한 통제권을 놓고 대립해 왔던 청국, 새롭게 대두되는 러시아 등 주변 국가들과의 경쟁이 반영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1894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독점하기 위해 일본이 청국과 일전을 불사하게 만들었다.



출처 : 가야산역사문화연구회(덕산도립공원가야산지구발전위원회)
글쓴이 : 이기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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