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주변의 문화재

[스크랩] 천 년의 기다림, 매향(埋香)

phllilp7 2015. 7. 13. 15:22

 

해미읍에서 매향비가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있어 올려봅니다.

 

 

 

 

 

천 년의 기다림, 매향(埋香)


연구위원 신상미

 
 우리가 자주 접하고 있는 향은 불교와 함께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향(香)이란 불가의 6법 공양물 중 하나로 일찍부터 모든 의례를 봉행함에 있어 가장 소중하게 생각돼 오고 신성시해 온 공양물이다. 향을 피우는 이유는 부정(不淨)을 제거하고 몸과 정신을 맑게 함으로써 신과의 소통을 꾀하고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함이었다.01 『법화경』 「법사공덕품」을 보면 향 가운데서도 특히 침향(沈香)의 향을 ‘천상의 향기’라 묘사한 부분이 있다. 침향은 향의 한 종류로 태우면 그윽한 향기를 낼뿐만 아니라 뛰어난 약효를 가진 영약으로 알려져 예부터 보석보다 더 귀하게 여겨져 왔다. 침향의 우수한 향과 효능은 침향나무의 수지가 굳어가는 동안 생성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침향나무에 생채기가 생겼을 때 주위의 세포들이 치료를 위해 수지 함량을 급격히 늘리는데, 이때 수지가 엉겨 붙어서 굳은 덩어리가 침향이다. 침향나무의 수명은 천 년이다. 이 천 년의 세월을 견디면 고품질의 침향이 탄생하게 된다.
침향나무 외에 다른 나무에도 수지가 생기지만 침향나무의 수지 함량이 훨씬 많은 편이기에 귀하게 여겼다. 더구나 수지 함량이 25%를 넘어 물에 가라앉는 경우는 고급품으로 인정되어 특별한 취급을 받았다. 침향나무는 우리나라에서는 구할 수 없고 베트남 지역에만 있는 귀한 나무여서 침향을 사치품으로도 여겨 신라에서는 수입을 규제했을 정도였다. 임금과 귀족들에게도 귀했던 침향은 일반 백성에게는 더욱 접하기 힘든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진짜 침향을 대신할 좋은 향을 만들고자 애썼으며, 새로운 향에 대한 기대뿐만 아니라 현실적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여 민간신앙을 이루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민간신앙으로서의 매향의식이다.
매향(埋香)이란 글자 그대로 향나무를 묻는 것을 말한다. 즉, 흔히 구할 수 있는 향나무를 바닷물이나 개펄에 묻어 천 년이 지난 후 만들어지는 침향으로 미륵하생 시 용화삼회(龍華三會)02에 동참하기를 비는 것을 매향의식이라 하며, 이 의식에 세웠던 비를 매향비라고 한다. 사천 매향비를 보면 사천의 지방민 4,100여 명이 모여 향나무를 묻고 비석을 세웠다고 되어 있다. 1999년 ‘매향 찾기 운동’이 있었을 무렵에 모악산 금산사에서도 600년 만에 매향의식을 재현하였다. 1천여 명의 불자들이 행진하는 모습을 보니 사천 매향비를 세울 당시의 광경은 더욱 장엄했을것 같다.

 
 매향비에는 발원ㆍ시기ㆍ장소ㆍ단체 등이 새겨져 있다. 세운 지점은 하나같이 좋은 침향을 만들어 내는데에 최적지로 알려진 민물과 바다가 만나는 합수처에 자리 잡고 있다.03 매향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1309년(고려 말)의 것을 기점으로 1434년(조선 초)까지 125년 동안 매향의식은 크게 성행하였는데, 오늘날 동ㆍ서ㆍ남해 전국의 해안 곳곳에서 발견된 매향비 수는 13개04에 이른다.

 
 매향의식의 기점인 고려 말은 왜구뿐만 아니라 원나라의 침략과 흉년ㆍ질병, 귀족들의 사치와 관리들의 부패, 불교가 타락하기 시작한 때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현실적인 위기ㆍ불안감에 구세(救世)ㆍ기복적(祈福的) 신앙형태인 미륵하생 신앙을 믿으며 종교적 구원을 받고자 하였다. 향을 공양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향 하나에도 흔히 구할 수 있는 일반 향을 쓰지 않고 정성스레 만든 귀한 향을 공양하고자 매향의식을 하게 된 것이다. 
백성들은 향나무를 묻으면서 천 년의 긴 세월을 견디며 세상을 고칠 명약으로 태어나길 기대했으며 먼 훗날 그 향나무에 서린 천 년 세월의 향이 미륵세계로 그들을 인도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현대과학으로 보면 그저 ‘땅속에 오래 묻힌 나무’일뿐 진짜 침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렇듯 현대에는 매향의식이 부질없는 일로만 여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의식 속에 약속한 천 년 세월의 기다림은 침향의 그것보다 더 깊은 향기를 인간의 마음속에 품게 한다. 그것은 미륵하생에 대한 믿음과 용화삼회에의 동참에 대한 백성들의 신념에서 피어난 향내일 것이기 때문이다.
고려 말, 우왕 13(1387)년 8월 여름에 세워진 사천 매향비에 “행(行)과 원(願)이 반드시 서로 도와야 비로소 무상묘과(無上妙果)05를 구하게 되니, 행이 있으되 원이 없으면 그 행은 필시 외롭게 된다. 원이 있으되 행이 없으면 그 원은 반드시 허망한 것이라. 행이 외로우면 그 맺음은 없는 것이며, 원이 허(虛)하면 복이 떨어지므로 행과 원이 함께 움직여야만 비로소 묘과(妙果)를 얻는다. 그리하여 소승(小僧)이 향도(香徒)06 천인(千人)과 더불어 대원을 발하여 침향을 땅에 묻어 미륵보살이 하생하여 용화삼회하기를 기다려서 그 증명을 보려고 향을 봉헌공양하고 미륵여래가 오실 것을 염원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07 이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백성들은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진실하고 사심 없이 미륵을 공경하여 행동으로 실천하였고, 매향을 통해 얻은 침향으로 용화세계가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선조들은 이무기가 천 년이 되면 용이 되어 승천하듯이, 땅속에 묻힌 평범한 향나무도 침향이 되면 떠오를 것이라 믿었다. 미륵하생을 기다리는 민중들에게 침향의 상승은 바로 새로운 세상의 떠오름이 아니었을까.
믿음과 노력이 없는 희망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 희망을 가슴 속에만 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성과도 이루어낼 수 없다. 지극한 믿음과 노력으로 침향을 만들어 미륵세계를 간절히 염원하고자 하였던 선조들의 마음만큼은 일심(一心)으로 도를 믿어야 하는 도인들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이라 생각된다. 우리 수도인들은 상제님을 향한 흔들림 없는 확고한 믿음과 지극한 정성으로 수도에 전념하여야 할 것이다. 

__주__
01 한국문화상징사전편찬위원회, 『韓國文化상징사전2』, 두산동아, 1996, pp.738∼741 참고.
 
02 미륵보살이 성불한 후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연 법회.
 
03 최종례, 『미륵의 나라』, 우리출판사, 2006, p.168.
 
04 1. 평안북도 남부 정주시 정주매향비(1335년)  2. 강원(북한) 고성군 삼일포 매향비(1309년)  3. 강원도 삼척 맹방 매향비  4. 충남 당진군 해미 매향비(1427년)  5. 충남 당진군 안국사지 매향비  6. 충남 예산군 덕산 매향비  7. 전남 영광 법성포 매향비A(1371년), B(1410년)  8. 전남 해남에 있는 장군바위 매향비  9. 전남 신안 암태도 매향비(1405년)  10. 전남 장흥 매향비(1434년)  11. 전남 영암 암각 매향비(1344년)  12. 인천 십리포 매향비  13. 경남 사천시 사천 매향비(1387년).
 
05 그 위에 더 할 수 없이 높은 열반과 같은 아주 뛰어나고 미묘한 결과.
 
06 불교신앙 활동만을 위하여 존재하였다기보다는 구성원 간의 길흉경조(吉凶慶弔), 재난구제 등의 기능도 담당하였다. 향도는 지역민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신앙단체이기 때문에 행정편제나 생산 공동체 등과는 구별되지만, 향도가 존재한 각 시기의 촌락 사회구조 및 성장과 연관되면서 지역사회의 공동체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07 주강현, 『주강현의 우리문화기행』, 해냄, 1997, pp.206∼207.
 
 

 

 

     

내포지방의 매향비

吳 允 熙

. 서론

내포라는 지명은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중환(16901752)택리지에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이전은 상고할 수 없다. 이중환은 실사구시학파 이익의 문인으로 영조 즉위 후 여러 차례 형을 받고 유배생활을 거처 세상 떠날 때까지 30여 년 동안 방랑생활을 하며 여기저기 답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국의 인심과 풍속 토산품의 생산지와 집산지를 파악하였다.

그가 택리지팔도총론 충청편에서 차령을 경계로 남북을 나누었는데 차령 북쪽을 다음과 같이 논함으로써 내포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내포는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곳이다(內浦忠淸道則上).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2백리쯤 되는 곳에 가야산이 있다. 서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경기의 바닷가 고을과 큰 만을 사이에 두고 마주 했는데 곧 서해가 쑥 들어온 곳이다. 동쪽은 대평야를 이루고 들 가운데 큰 개()가 하나 있는 데 유궁진[범근내포]이라 하며 만조가 아니면 배를 사용할 수 없다. 남쪽은 오서산이 막아 다만 산 동남편으로 공주와 통할뿐인데, 오서산은 가야산에서 온 지맥이다. 가야산 둘레의 10 현을 총칭하여 내포라 한다. ‘

이상이 택리지에서 내포를 설명한 들인데 지금의 신창예산당진서산태안홍성청양보령이다. 매향비는 주로 내포 해안가에 있는데 이 지방에 4종의 매향비가 있다. 이중에 2종은 필자가 발견한 것이다.

본고는 이 내포지방에 있는 매향비의 해석을 통하여 매향의 주체는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매향을 하였는가.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매향자는 누구이며, 그 결과물인 침향은 어떠한가에 대하여 논하고, 전개하고자 한다.

 

. 내포지방의 매향비

이제까지의 학계에서 보고된 매향비는 11종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포지방에서 발견된 매향비는 4종이 있다. 덕산매향비, 1978년에 국사편찬위원장 최영희와 최병헌(서울대교수)에 의해 발견된 해미매향비라 불리던 것이 있는데, 실은 홍성 남당 어사리[용오리]매향비(세종9,1427)이고, 그리고 당진군 정미면 안국산 안국사지의 매향비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목공전설로 지칭되던 것인데 또 하나의 매향임을 발견하였다.

1. 덕산 매향비

필자는 호서 가야산록에 있는 한서 대학교에 부임하여 주변문화에 관심을 가지던 중 예산의 맥을 읽다가 다음 글을 읽었다.

봉산면 효교리에 전설에 얽힌 바위가 있다. 바위에는 둥근 홈이 하나 네모진 홈이 두 개가 파여 있다. 또 그 주변에는 글자들이 써 있는데 판독할 수 없다. 이 마을 조선행 옹에 의하면 옛날에는 는 둥글고 은 네모졌는데 후에 제도가 바뀌어 되는 네모지고 말을 둥글게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고 한다. 그래서 그 동네에서는 그 바위를 마되바위라고 부른다. 마되바위 주변에 글자가 있는데 판독할 수 없다.

필자는 마되바위 주변에 글자가 써 있는데 판독할 수 없다.“는 글을 읽고는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1975년 여름에 답사를 하였다. 처음에는 글자가 없는 듯하였다. 그러나 탁본을 해 보니 요령모를 글자들이 나타났다. 바로 바위 밑에 사는 사람에게 몇 가지를 들었다.

바위가 있는 동산까지 구만포로부터 물이 들어왔으며 상인들이 새우젓을 그 곳에서 담아서 팔기도 했었다. 마되바위는 여러번 T.V '전설의 고향등에서 덕산의 보부상과 관련하여 다루었다. 언제는 보부상 옷을 입고 바위에 곡식을 부어 재는 연출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산 뒤를 덕재벌이라 하였는데 죽은 사람들을 장사 지내고 시체를 말리던 곳이었다.

본고는 처음에는 글씨도 고졸하고 혹시 보부상과 관련된 도량형에 관한 글 인가도 생각했으나 마되바위 근처까지 바닷물이 들어와서 새우젓도 담아 팔았다는 촌노의 말에 매향비일 가능성을 가지고 글자를 판독하던 중, ‘매향이란 글자를 읽어낼 수 있었다. 물론 현재 모든 글자가 판독된 것은 아니다. 여러번 탁본을 거듭했더니 글자들이 더욱 또렷해졌다. 매향비의 석질은 아주 견고한 화강암이나, 입비한 후에 돌이 변화되어서 알아 볼 수 없는 것도 있다. 지금도 아주 안보이는 글자도 있고, 또 본고가 미쳐 못 보는 글자도 있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 누가 매향을 하였다는 것을 알고는 미흡하나마 소개를 하고 여러 다음 연구자에게 기대를 걸기로 하였다.

덕산 매향비의 현재 소재지는 봉산면 효교리인데 덕산 매향비라고 필자가 부르는 것은 매향 당시는 이산과 덕 풍사람들이 주체가 되었기에 매향 당시를 존중하자는 뜻도 있고, 행정구역의 지명은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개연성이 있고, 행정구역의 지명은 언제나 별할 수 있는 개연성이 있고, 또 지금의 봉산면 효교리도 당시는 같은 구역이었기 때문에 본고는 덕풍의 덕자와 이산의 산자를 따 덕산매향비라고 부르고자 한다. 실제로도 덕산면과 봉산면의 면계부근이다.

매향바위는 세로 185cm, 가로 173cm, 두께 44cm이고, 좌우로 매향사실이 입비되었고, 가운데는 3개의 구멍이 있다.(사진1)

중앙의 둥근 구멍, 소위 말이라고 하는 것은 직경이 37cm, 깊이 10cm이고, 네모진 홈 중에 되라고 하는 것은 가로 22cm 세로9cm 깊이 7cm이며, 네모진 작은 홈은 소위 홉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로 14cm 세로 8cm 깊이가 5cm이다.

비문은 돌의 홈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에 刻字했다. 바위 밑에는 옛날에 바위를 올려놨던 돌이 있는데 지금으로 보아서는 남방식 고인돌의 전형 같은데 古老에 의하면 돌이 더 있었다고 하여서 북방식의 탁자식 고인돌이었을 가능성도 있다.(사진 2)

그러면 덕산 매향비문을 보기로 하자

<本文 右>

第一行 □□(六年)

第二行 癸未 三月 十

第三行 二日伊山德豊袈裟

第四行 結願香徒丌告

第五行 城出龍吾里埜頭

第六行 理香庫司

<附記 左>(사진3)

第一行 峯巒間一万

第二行 二七□□間兀富菜()

第三行 香()主理香()勒 前

 

 

 

본고는 글자 형태는 있는데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글자는 로 표기했고 필자가 추정하는 글자는( )로 표기했다.

이 매향비에 나타난 글자로 우리는 다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오른쪽 석각을 보면 □□六年 癸未 三月 十二日伊山德豊의 가사[승려]와 결원향도들이 고인돌 위에 매향한 사실을 알린다. 성에서 나와 용오리 들머리에 매향을 하였고 庫司가 주관하였다.“ 그리고 3개의 구멍을 가운데에 두고 왼쪽 석각을 해석해 보면 뫼뿌리 사이에 [매향의 숫자인 듯] 그리고 二七[매향의 숫자인 듯 □□□□()가 미륵님전에 매향을 했다.“

이상으로 본 덕산 매향비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가 있을까. 본고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아쉬운대로 헤아리고자 한다.

1) 매향은 고려시대

매향은 고려 시대라고 보여진다. '伊山'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본래는 백제의 馬尸山郡이었던 것을 신라가 伊山郡으로 개명했다. 고려 현종 무오(1018)에는 이름은 그대로 부르고 운주[홍주] 관할이었다. '德豊'은 본 백제 今勿縣이었는데 신라가 今武로 고쳐 伊山縣에 속하게 했다가 고려 현종 戊午年(1018)에 운주에 속하게 하고, 조선초 태종 을유년(1405)伊山德豊을 합하여 德山으로 개편하였다.

따라서 伊山德豊이 공존하였던 시대를 본다면 고려 현종 무오(1018)와 조선조 태종 을유(1405) 사이가 된다. 그리고 간지 癸未로 보자면 1043(계미)1403(계미)사이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400년 사이에 매향한 것은 사실인데 승려의 개입으로 보아서 고려시대로 보고자 한다.

앞으로 이 덕산매향비는 이곳에서 나오는 침향의 연대측정으로 매향시대가 보다 정확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본고는 그런 계기는 빨리 오리라고 생각한다.

2) 매향의 주체는 禪宗계열의 袈裟[僧侶]香徒

이산현과 덕풍현의 승려와 결원향도가 참여하였고 사찰의 庫司가 매향을 주도했다는 것으로 보아 덕산매향은 선종 사찰차원에서 하였다고 보고자 한다. 지금의 덕산지방의 新增東國與地勝覽에 보이는 사찰만 해도 伽倻寺, 修德寺, 西林寺, 龍淵寺, 水菴寺, 雲庵寺 등이 있었는데 고려시대에는 어떠했을까. 여기에 신행단체인 향도들까지 참여하였으니 대단히 성대한 일이었을 것이고, 당시는 이 지방은 가히 불국토라 지칭해도 유감이 없을 것이다.

고사의 사전적 의미는 都司, 監司, 副司라고도 하는 데 禪寺總監으로 온갖 寺務를 맡아보는 직책이다. 따라서 매향은 진감선사이래 선종에서 이어온 것이고 참여한 가사도 선종계열이라고 보고자 하는 것이다.

3) 고인돌에 立碑

다음은 兀字이다. 본고는 兀字說文解字에 의하면 평평한 곳에 다리()를 놓은 것이란 글을 읽고 반가웠다. 왜냐하면 촌노가 마되바위는 원래는 축대 위에 있었다는 소리를 들었었기 때문이다. 축대의 모양은 兀字형태의 고인돌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본고도 처음에는 마되바위가 고인돌 蓋石인줄 몰랐다. 그것이 고인돌인줄 알자 실마리는 모두 합리적으로 풀렸다.

당시의 사람들이 그 돌이 고인돌인 줄 알았는지, 혹은 몰랐는지 모르지만 고인돌을 그대로 표현하자면 兀字형태가 되니 매우 합리적 표현이라고 하겠다.

4) 神性이 발생한 性穴

다음은 3개의 구멍들이다. 고인돌이라고 본다면 소위 말과 되와 홉이라고 하는 세 개의 구멍이 문제가 되는데 가운데 크고 둥근 것은 본고가 생각하는 것은 성혈이고, 네모진 두 개는 돌을 캐고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고인돌의 성혈치곤 조금 큰 것이 문제이다.

토착 민속에서는 성혈을 갈아서 가루를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신이 있기 때문에 신성이 발생해서 갈기를 많이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성혈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사람들이 구멍을 갈아왔다는 것이 된다. 사실 둥근 구멍은 면이 매끄러워 갈아온 흔적이 있다.

5) 미륵사상과 관련된 매향

다음은 왼쪽의 附記표시로 보아 적어도 매향은 적어도 一万條이상 하였고, 미륵전에 바치는 것으로 되었다. 보이는 글자는 勒字 하나이지만 자가 마모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내포의 가야산 주변에는 유별나게 미륵불상이 많고 그리고 고려시대 미륵불상이라는 점이 매향비와 유관한 것임을 증명한다고 할 것이다.

2. 洪城 龍五理[於沙理] 埋香碑

학계에 해미 매향비로 알려진 것인데, 지금은 인천 이흥렬씨가 소장하고 있다. 세로 90cm, 가로 50cm, 두께 47cm.

第一行 宣德二年丁未八月十日立碑

第二行 里中古老男女幼兒

第三行 □□□ 功西吉述浦

第四行 里香()五里來世

第五行 彌勒富來初會名

第六行 □□

吉述浦於沙里에 있고 또 龍五理라고도 불렀는데 南塘에 있다. 이 매향비는 현전하는 매향비 가운데 비교적 후대에 속하는 1427(조선 세종 9, 선덕 2) 8월에 입비하였다.

중요한 것은 마을 古老男女幼兒 모두가 미륵이 하생하여 나타난 초희에 성불을 위하여 매향을 한 것이라는 점이다. 또 매향의 주체가 다른 매향처럼 승려 개입이 없고 주민이라는 점이 특색이다. 당시 억불숭유 정책으로 말마암아 그리 되었으리라 유추할 수 있다. 지금은 청룡산에서 흘러내리는 냇가에 제방을 쌓고 정리하였다. 근처 고산사에 미륵불이 고려불인 만큼 고려시대에도 매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3. 唐津 余美里[壽堂里] 埋香碑

현재 매향비가 있는 곳은 당진군 정미면 수당리이지만 옛날에는 여미현에 속하는 여미리였다. 충청도 읍지(조선 헌종대 편찬)에 의하면, 여미현은 태종 7년에 이웃 정해현과 합해져 貞海海字餘美美字가 합하여 海美縣에 속했다. 이어 자유당 때 당진군에 편입되었다. 이 고을은 일명 아미타고을이라고도 했다. 이것으로 보물 100호로 지정된 미륵삼존불과 101호인 석탑 그리고 부근의 안국사지로 미루어 이 일대가 커다란 불교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매향비가 있는 곳은 화강암 지역으로 기암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그리고 계곡의 물은 아직도 맑아 산천이 수려하다. 이 냇물을 타고 바다로 나아가면 천의포이다. 매향을 기록한 돌은 속칭 배바위라고도 하고 고래바위라고도 한다. 배모양으로 길게 동서로 누워 있다. 배바위에는 촛불을 켜놓고 승려가 기도를 드리고 일반 사람들도 예배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필자가 무엇 떄문에 공경하느냐고 물어 보니까 산신님이라고 대답한다. 혹시 거석 신앙의 한 형태가 전래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였다.

배바위는 안국사지 석불입상 바로 뒤에 있다. 길이는 15m 높이는 23m의 큰 바위에 글씨는 남향 측면에 세로로 쓰여졌다.

경오년 매향비

第一行 庚年 二月日

第二行 餘美北天口

第三行 浦東際理香

第四行 一丘 化主兗先

第五行 結願香徒(사진참조)

라고 되었다. 당진군(1997. 12. 30)에서는 향토유적 9(1997.6.20)로 지정하였다.

경오년 이월 일 여미 북쪽 천구포 동쪽가에 매향하였다. 비구 화주 연선과 結願香徒라고 해석할 수 있다.

경술년 매향비

그리고 오른쪽 암각은 목공전설에 관련된 것이라 하여당진군지와 향토사학자들은 모두 목공전설로 받아들였다.

第一行 庚戌十月日

第二行 鹽率西村出由

第三行 木公合理

라고 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을 가지고 있다 하였다.

고려 초엽에 중국에 큰 난리가 일어나자 바닷가에서 목공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씨라는 사람이 자기가 만든 배를 타고 동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난리를 피하여 달아나던 가씨는 황해바다에서 큰 풍랑을 만나 탄 배가 부서졌다. 간신히 부러진 돛대에 의지한 채 물결에 밀려 표류하다가 지나가던 어부에게 발견된 곳이 여미리 포구였다. 그는 극진한 간호를 받고 회복되었다.

어느 날 어부의 아내가 한숨을 쉬면서 배 한 척이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하자 가씨는 어부에게 배를 만들어 주게 되었다. 목공이 만든 배는 이상하게도 속력이 빠르고 튼튼했다. 소문이 퍼지자 배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쇄도했고 목공은 늙을 때까지 돈을 많이 벌었다. 모두 곡식으로 바꾸어 그가 일하는 여미리 바위구멍에 섬섬이 쌓았다.

어느 날 갑자기 먼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울리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곡식을 쌓은 굴에 거적을 가리려 하는 때에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이 떨어지더니 가씨는 곡식과 함께 굴속에 묻혀 버렸고 만들던 배는 바위로 변했다.

이상이 배바위에 얽힌 목공전설이다. 필자는 1999. 7. 11당진군지에 실린 매향비의 제 오행 <結熊香徒>에 대한 의심과 혹시 庚年근처에 연호의 흔적이 없을까 하여 탁본하게 되었다. 그리고 목공전설의 암각도 유심히 살펴본 결과 실은 매향비임을 알 수 있었다. 필자가 보는 목공전설 암각은 이러하다.

第一行 庚戌十月日

第二行 鹽率西村出由

第三行 ()木香理置

경술 시월 일, 염솔의 서쪽 마을에 향을 묻어 두었다는 내용이다. ‘木公合理라 한 부분이 工合은 합하여 인 것이었고 뒤에 가 알아보기 힘드나마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필자가 또 하나의 매향비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鹽率廉率로도 불렀던 부곡이 있던 곳이다. 서촌에 향나무가 있었는지를 확인을 하지 않았고, 대부분 매향의 소재가 향나무가 없어서 참나무로 했는데 경술년의 매향은 香木을 사용한 것으로 보고자 한다. 사실 목공 전설이라고 불리는 매향비는 회칠을 많이 해서 식별하기 곤란하였다. 촌노에 의하면 절터에 분규가 일어났었을 때 회뭉치를 배바위에 던지면 싸웠다고 한다. 香木도 있다고 믿고자 하는 이유는 뻘에서 향나무로 된 침향이 나왔기 떄문이다.

천의포 구티마을에서 침향목이 발견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구티마을은 여미 매향비 소재의 산 넘어 북쪽마을에 해당하고 개답되기 전에는 바닷물과 안국산에서 흐르는 산곡수가 만나는 곳이었다. 침향목이 발견될 당시에 주원장 목사가 마을과 마을이 신자 가정 심방을 다니는 중에 갯벌에 밀물이 들어오면 안보이고 썰물 때는 무엇이 보이기를 여러번 하여서 궁금하던 차에 하루는 동네청년 수명과 함께 우정 들어가서 건져올려 봤는데 나무토막이었다. 오래된 것 같아서 확인결과 수령이 13001500년이나 된 앉은뱅이 향나무였다는 것이다. 일설에는 앉은뱅이 향나무는 우리 나라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묘지 같은 데에 전혀 없지는 않다.

주원장 목사가 떠날 때에 후임자인 최병남 목사에게 1982년에 10만원을 받고 넘겨주었다는 풍문이다. 지금은 최병남 목사가 니스칠을 하여 장식용으로 거실에 두고 있다고 한다. 그 침향의 연대를 조사하면 매향연대가 확실해 질것이나 당시 나무연대를 조사했다는 말은 없다.

여미리의 몇 자 않되는 2종의 매향비에서 본고는 다음을 유추하였다.

1) 동시에 거행한 매향과 미륵불 조성

餘美라는 명칭은 고려 현종 9(1018)부터 불리어 졌다. 조선조 태종7(1407)부터는 餘美縣貞海縣의 정해의 와 여미의 가 합해서 海美현으로 되었다. 정확히 말해서 현종 이후 庚午年으로 따지면 1030(현종 21)-1390(공양왕 2)사이이다. 물론 余美里의 여미와 치소인 餘美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는 고증할 길이 없으나 음차로 보고자 한다. 그리고 중국년호를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원나라가 등장할 무렵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縣治所로 부르던 餘美와 년대가 비슷해진다고 하겠다.

인접한 안국사지의 보물 100호인 삼존석불입상과 보물 101호인 석탑(9181090)의 연대로 보아 같은 시기일 것으로 생각해본다. 만약에 경술이 고려 초엽이라면 당시의 경술은 950년이나 1030년이 된다. 그렇다면 미륵불 조성과 동시대로 아직까지 발견된 매향비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아닐까 한다. 둘 중 어느 것이 먼저인가가 관심이 되겠는데 짜임새나 글씨의 古拙性으로 보아 목공전설이라 여기던 경술년 매향이 선행된 것으로 보고자 한다. 여기서 우리는 전설이라는 구비문학이 덕산의 매향비를 보아도 여미리 매향비를 보아도 상상력을 보태서 허구화한 좋은 예를 보는 셈이다.

2) 매향 주체자는 비구승 兗先結願香徒들이다.

연선의 생존연대만 알면 보다 더욱 정확히 알 수 있으련만 상고할 수 없는 게 유감이다. 이제까지 발표된 자료에는 '結熊'이라고 하였는데 본고는 '結願'으로 보았다. 전에 <동방학>에 발표할 때는 ''를 미상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일단 결연을 한 향도들이 함께 매향을 했다고 하는데는 무리가 없을 줄 안다고 했는데 이번 답사 결과 소득이 있었다. 화주승 연선과 결원향도들이 함께 내세를 위하여 매향을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3) 天口浦는 현재의 천의포이다.

그리고 천의포는 天口浦의 음차일 것이다. 천의포는 한자 口字가 우리말로 이니까 천입포->천이포->천의포로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발견된 향나무는 목공전설이라 불리던 경술년의 향나무로 보고자 한다.

 

. 埋香動機와 최초의 매향자 眞鑑禪師

1. 매향동기

그렇다면 왜 매향을 했을까. 당연히 의문시 될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이미 발표된 바 있다. 미륵신앙은 석가의 시대가 가고 미래불인 彌勒을 축으로 하는 메시아니즘이다. 석존이 입멸한 후 567천만년 후에 도솔천으로부터 이 세상에 하생하여 용화수 밑에서 3회에 걸쳐 설법하고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이 미륵하생 신앙의 골자이다. 보통사람이 용화회상에 태어나길 기원하려면 가장 쉽게 택할 수 있으며, 수승한 방법이 무엇일까. 사찰건축, 불상조성, 그리고 향을 공향하는 일 등이 있다.

또 하나는 불가에서 현실적으로 향이 필요한 점도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향나무가 적어서 木香을 사용하기도 어렵고 비싸게 외국에서 구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에 실질적으로 후손이 향을 사용하기 쉽게 하려는 배려도 무시할 수는 없다고 본다. 특히 우리 나라는 향나무가 귀하고 또 향기가 뛰어난 편이 아니라서 매향을 하여 침향을 얻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래불인 미륵과 관련한 매향이 근간을 이룬다 하겠다. 이는 실제로 동기를 기술했고 그리고 미륵불 조성이 웅변한다고 하겠다.

불교에서는 침향의 냄새 말고 향물을 몸에 바르면 五根이 청정하여져서 무량의 공덕을 얻는다고 한다. 이와 같이 매향은 미륵하생경에 근거한 신앙형태로써 향나무를 묻었다가 침향을 얻어 그 향연을 매개로 하여 발원자가 미륵세계와 연결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침향의 연기는 신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고리로 보았고 그 고리 앞에서 소원을 빌면 성취가 된다는 것이다. 즉 매향을 하는 것은 미륵불이 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여 수많은 중생을 제도할 때, 그 세상에 태어나서 미륵불의 교화를 받아 용화세계에서 살고 싶다는 소원을 담고 있다.

덕산 매향비와 여미리 매향비에 結願香徒은 모두 미륵세계에 나서 성불하고 싶다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보고자 한다. 후대에 입비한 것이지만 고성 삼일포 매향비와 홍성 용오리 매향비에서 우리는 그 소원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미륵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석가세상에서 석가를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당시의 승려와 향도는 緣起에 의한 윤회설을 믿고 먼 훗날을 기약했다는 것이 된다.

2. 結願香徒

다음 여미리 매향비와 덕산 매향비의 매향 주도자는 승려와 결원향도인데 승려들은 매향 발원자들을 결속시키고 향도를 지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향도란 무엇인가. 신라 중엽에 저술된 의심방(醫心方 ; 일본 동경대학 박물관 소장)에는 매향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향을 만들고 피우는 집단을 향도라고 했다고 한다.

향도는 전통시대에 여러 가지 공동목적 달성을 위한 조직체, 역사적으로 삼국시대에 고대사회의 발전과정 속에서 우리나라에 불교가 수용된 이후 널리 결성되어 활동하여 왔다. 그 성격은 시대적 추이에 따라 단일하지 않지만 본래 불교신앙 활동을 목적으로 조직된 시도들의 結社를 일컫는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단체개념을 부인하고 그 당시 불교도들을 지칭하던 보통명사로 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신앙결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파악한다. 향도는 불교신앙 활동만을 위하여 존재한 것만이 아니고 구성원간의 吉凶慶弔, 재난구제 등의 기능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신앙단체이기 때문에 향도가 존재한 시기의 촌락사회구조 및 성장과 연관되면서 지역사회 공동체 형성에 큰 구실을 담당하여왔다.

지금까지 확인된 최초의 향도사례는 609(신라 진평왕 31)경에 김유신을 중심으로 조직된 화랑도를 龍華香徒라고 지칭한 것이다. 물론 용화향도란 말은 미륵신앙을 전제로 한 말이고 화랑도를 일명 향도라고도 하였다. 또한 백제유민들이 삼국통일 직후(673 문무왕 17)에 연기지역에서 향도를 결성하고 구체적인 신앙활동으로 癸西銘三尊千佛碑銘을 남기고 있어 백제에서도 향도가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그러니까 내포지방도 백제시대부터 향도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이 지방은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통로였기 때문에 백제시대의 사찰과 불상이 발견되는 곳이다. 그러니까 이 지방의 결원향도의 역사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고려전기까지의 향도사례를 보며는 전국적으로 분포하면서활동내용은 불상석탑사찰의 조성법회보시매향 등 대규모적인 노동력과 경제력 등의 제공을 하는 불교신앙 활동의 주류를 이루었다. 덕산의 매향비와 여미리매향비에서는 결원향도가 있었음을 나타내는데 홍성 용오리 매향비에는 향도가 나타나지 않고 마을의 古老男女幼兒 모든 사람이 주체가 되어서 매향을 했다. 이 지방에서 향도의 마지막 사례는 당진 운정리 미륵 명문석에서 보인다. 그 명문석은 세종 10년 세운 것이다. 미륵을 세운 시주자는 縣內香徒라고 입비되었다. 그러니까 향도는 백제시대부터 고려조선초까지 존속되었음이 입증된다 하겠다.

3. 진감선사와 沈香

향이 기록으로 보이는 것은 신라 법흥왕 시에 묵호자가 양나라에서 전해온 향으로 분향, 기도한 후 왕녀의 병을 치료했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제사 법흥왕15년부터이다. 그것이 침향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묵호자에 의하면 이것을 피우면 향기가 대단하여 神聖에 정성을 통할 수 있으며 그 신성은 삼보보다 나온 것이 없다고 하였다.

1) 眞鑑禪師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시대 진감선사는 후손을 위하여 선운사에 주석하고 계실 때 계곡에 숲을 이루고 있는 침향나무를 몇 년 두고 베어다 선운사 계곡 민물과 바닷물이 합쳐지는 곳에다 매향을 하였다고 한다. 이에 매향비를 세웠으나 자취가 없고 침향은 일제강점 때에 몇 톤 분량을 캐내어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60년대까지 살아 계시던 노승려가 말하였다고 한다. 60년대 초반까지는 작은 분량의 침향이 떨어질 만하면 나오곤 했으나 지금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매향을 한 사람은 진감선사(774850)라고 구전되어 왔다. 최치원의 진감선사 비문에 의하면 진감선사의 법호는 慈照이고 속성은 최씨로 金馬(익산) 사람이다. 선대는 漢族으로 산동의 명문이었는데 수나라가 요동을 공격할 때에 어쩌다가 한반도로 이주하게 되었다.

아버지 창원은 속가에 있으면서 출가의 행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칠팔 세가 되자 놀 때에는 반드시 잎을 태워서 향을 삼고 꽃을 따서 공양으로 삼았으며, 서쪽으로 향하여 꿇어앉아 시간이 지나도록 몸을 움직이지 않곤 했다. 부모를 지극히 봉양하다가 돌아가시자 미묘한 도리를 찾고자 貞元년간에 당나라로 가는 歲貢使를 따라 滄州神鑑禪師에 의해 득도햇는데 얼굴이 검다하여 대중들이 黑頭陀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는 종남산에 들어가 3년 동안 止觀을 닦았으며 또 길거리에서 2년 동안 짚신을 삼아 오가는 사람들에게 보시하기도 하였다.

흥덕왕 5(830)에 귀국하여 상주의 장백사에 머물다가 곧 지리산 화개곡으로 가서 禪堂을 지었다. 아시다시피 진감선사는 청아한 목소리로 범패를 불렀고 행동은 꾸밈없고 검소했다고 한다. 그런데 진감선사가 매향을 했다는 구전을 본고는 진감선사의 비문에서 그 실체를 처음으로 발견하였다.

본고는 최치원의 진감선사 비문을 차근차근 보던 중에 다음의 글귀를 찾아 내었다. 海岸植香 久而彌芳인데 그 동안 그 글에 아무도 매향과 관련하에 주목하지 않았다. 성락훈씨에 해석은 '향을 해안에 심었으니 오랠수록 더욱 향기롭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연구자들은 해안을 우리나라 전체로 본 모양이다. "우리나라에 향기를 심었으니 오래도록 그 이름이 빛날것이다."라는 정도로 여겨왔다. 이제 본고는 실체가 확실한 매향행위로 보고자 한다. 당시는 매향을 '植香'이란 단어로 사용햇던 것 같다. 진감선사가 중국에 갔을 때 식향의 풍속을 배워 온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면 진감선사가 식향[매향]을 했다는 뜻은 어떤 것일까. 그 동안 이 글을 보기 전에는 매향행위 주체가 선종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햇다. 진감선사는 우리나라에 선종이 들어와 전래된 이후 기성교파에 의해 배척을 받아오던 선종의 세력을 크게 扶植시킨 분이었다. 따라서 그는 우리나라의 선종의 한 중 흉조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禪風아 흠모되고 山門이 형성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 泊巖和尙[智證大師:道憲孫弟子이 자신의 법계를 혜조[진감선사의 법호]의 증손제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감선사가 최초의 향을 심기 시작한 이래 선종에서는 꾸준히 매향을 해온 증명이 덕산매향비에서 보인다. 庫司가 그를 증명하는 것이다.

2) 沈香

원로 한의학계에서는 중국에서도 매향을 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향나무나 참나무를 묻어두고 문서로 작성하여 대대로 자손에게 재산목록처럼 전수했다고 한다. 이것이 천년쯤 지나면 沈水香이 되는데 자손을 위한 좋은 계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초강목에서는 그런 사실을 발견할 수 없었다. 본고는 침향목이 물에 가라앉는다는 침수향을 편의상 침향으로 부르고자 한다.

침향은 아무 냄새가 없다. 그러나 피우게 되면 향내가 피어난다. 대부분 겁껍질은 썩어 버리고 목심이나 절, 그리고 樹脂만 딱딱한 형태로 남는다 이 침향은 잘 말리면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물에 가라앉는다. 그리고 단단하기가 쇠붙이 같이 톱으로 잘라내기가 힘들고 천만년가도 벌레가 먹지 아니한다. 이 침향목에는 독특한 물질(Meroxylhydro -acid of Lignaloes)이 들어있다. 이 침향의 향연은 다음과 같은 효능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가람은 '부석사 무량수전'은 건립한지 13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건물과 단청이 아직도 건재하다. 오래된 탱화와 단청이 부식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은 침향의 향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예에 사용하는 먹도 종류가 여러 가지 있으나 침향의 향연으로 만든 먹이 지상 최고라고 한다. 침향의 향연으로 만든 먹으로 글씨나 그림을 그렸을 때 묵향이 향기로우며 책은 오래가도록 벌레 먹지 않고 천년이 지나도 묵향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침향을 다른 약재와 구분하여 尙衣院에서 궁중의 상비약으로 다루었다. 이는 불교적 영향이 희미해진 이후이다. 오늘날 침향의 일반적 용도는 상품의 희귀약재로 논의되고 있다. 黃度淵方藥合編, 藥性歌에는

(침향)

沈香煖胃兼逐邪 침향은 위를 덥게 해주고 사사로운 기운을 몰아내오

降氣衛氣攻難加 치민기운을 내리고 衛氣 돕는 데는 따를 약이 없도다.

중국에서는 沈香靑桂鷄骨馬蹄煎香이라 불리는 향들은 모두 한 나무에서 나오는 것인데, 상태에 ?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 에 따라 각기 분별이 있는 것이다. 이 나무의 心節을 물이나 흑에 묻어두면 沈水香이 된다. 이것을 줄여서 침향이라 한다. 마디나 심이 아닌 것은 반이 잠기고 반이 물에 뜨므로 棧香이 되며 잎이나 가지는 물에 뜨므로 黃熟香이라 한다. 침향은 물에 가라앉는 것이 제일 좋고 절반정도 가라앉는 것이 그 다음가는 것이다. 맛은 신, 미온, 무독하고 익기화신, 치상열하한, 풍수독증, 주심복증 등 여러 가지 약효가 있다. 李時珍

침향의 品類의 여러 설은 자못 여러 책에 상세하다. 상고해 보면 楊億談苑, 蔡絛, 叢談, 范成大桂海志, 張師正倦游錄, 洪駒父香譜, 葉延珪香錄 등에 실려 있다. 흙 속에서 세월이 오래된 것 중에 깍아내지 않아도 溥片을 이루는데 이것을 龍鱗이라 부른다. 그것을 깎아서 저작을 하면 부드럽고 질기다. 이름하여 黃蜡沈이라 하는데 구하기 더욱 어렵다

고 하였다. 한편 인도네시아나 중국의 남방에서 주로 생산되는 자연침향을 蜜香이라고 한다. 남월지교주에서 밀향이 나는데 그 蜜脾와 같으므로 밀향이라 한다. 목밀을 밀향이라고 하는데 대수의 마디로 沈香과 같다. 법화경주에 목밀은 향밀이고 나무형태는 홰나무같으나 향이 있다. 벌목한지 5.6이 지나면 썩지 않는 부분에서 향을 취한다. 또 남해 여러 산중에 있는데 심은 지 5.6년이 지나면 향이 있다. 이 시진은 밀향도 침향종류이고 쓰임도 방불하다 하였고 교주지에도 이르기를 밀향은 침향과 같다고 하였다.

요즈음도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지방에 팥꽃나무과에 속한 밀향을 구하여 판매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우리나라 심마니 같이 산을 돌아다니는데 樹脂가 바로 밀향이다. 이 밀향은 말하자면 소나무의 수지인 광솔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큰 나무 속에도 얼마 잇지 않은 것이다. 일생동안 향을 찾는 사람들이 제일 소원하는 것은 하얀 밀향이라고 하는데 이 하얀 밀향을 본 사람은 다시는 향을 구하지 못한다고 한다. 다시 향을 찾아 생계를 꾸릴 수 없기 때문이다. 기이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향에 신비가 있다는 뜻을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나라에 현재까지 발견된 매향비는 모두 바닷물이 유입되는 내만 해안에 위치하고 있는데 불가에서 전하여 지고 있는 매향의 최적지가 산골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에 내포지방의 매향비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홍성 용오리[어사리] 매향비도 청룡산에서 흘러내리는 중리 냇물이 길술포로 흘러가기 때문에 바닷물의 유입이 있었고, 여미리[수당리] 매향비도 안국산 계곡물과 해수가 만나는 천구포[천의포]이고 덕산 매향비도 가야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만나는 바닷물이 구만포로 해서 매향비 앞까지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해안에 묻어야 좋은 향이 된다는 말은 중국의 본초강목에는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있는 설로 추정된다.

필자는 내포의 금마뜰에서 경지 정리하다가 발견됐다는 침향이라고 하는 것을 접할 수 있었다. 이 지방의 고노들의 이야기로는 침향은 우리나라 향나무가 많지 않아서 참나무를 묻어서 침향을 만든다고 들었다는 것이다. 사실 금마는 삽교천의 발원지라 해수가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는데 해수가 없어서 그런지 침향의 색과 향이 제대로 나지 않은 황숙향 같았다.

옛날에는 오서산 삽교천 발원지와 금마천에도 바닷물이 유입된 흔적이 보인다. 지명에 배다리 등 바닷물과 관련된 것이 있고 실지 농지 정리 할 때 뻘이 나왔고 흙에 염분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자연침향 나타난 것을 홍성군청에서 연대를 측정한 일이 있다. 연대로 볼 때 매향과는 무관한 것이지만 금마천 외에 오서산 발원지 근처 장곡에서도 최근에 농지정리 관계로 침향이 나온 바 있다. 특히 장곡에서 나온 것은 硬質이었다. 본고는 삽교천 상류에서 침향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이는 매향과는 무관한 것인지 유관한 것인지는 모른다. 염분기가 있는 땅에서 캐낸 침향목은 까맣고 단단하고 윤기가 흐른다. 필자는 이 논물은 집필하는 시기에 삽교천 상류에서 까만 나무토막은 조금 얻어 태워보니 향내가 좋았다. 이것이 매향과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그곳에 매향비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시에서도 큰나무 채로 묻혀 있던 것을 캐낸 일이 있는데 껍질이 용린처럼 일어났다. 겉의 색깔은 누르스름한 軟質이었다. 당진군 우강에서도 경지 정리할 적에 침향목이 많이 나왔는데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들었다. 또 서산의 지곡에서 물웅덩이를 파는데 까만 나무토막이 제법 나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포전 지역에 걸쳐 매장해 있었음을 의미한다. 지금은 내포지역이 경지정리가 끝난 상태인데 큰 물이 나거나 하면 불거져 나온다. 옛날에는 주민들이 토탄이라고 말려서 땔감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모두 매향비 출현 이전의 일이다.

 

.

매향의 주체는 승려와 결원향도라는 점이 금번에 밝혀진 것 중의 하나이다. 결원향도는 덕산과 당진 여미리에서도 같은데 미륵하생경을 소의로 하여 침향을 매개로 좋은 세상에 태어나는 것, 즉 좋은 세상이 오기를 기원하는 불교신행결사였다. 또한 덕산 매향비는 선사시대부터의 공동묘지인 덕재벌에 고인돌상에 입비한 것을 본고가 밝히게 되었다. 그리고 가운데 구멍은 성혈로 신성이 발생해서 오랜 세월 동안 갈아먹었기 때문에 일반 고인돌의 성혈이 직경 5cm인데 비하여 덕산 매향비의 성혈은 37cm로 커졌다고 보고자 한다.

구멍이 크게 된 것은 상당히 긴 세월 신성이 유지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민속에서 성혈을 갈아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풍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매향자는 진감선사라고 구전되어 오던 것을 금번에 최치원의 진감선사비의 기록을 통하여 사실로 밝혔으며, 진감선사는 지관을 닦던 선사였고, 우리나라에 선종이 들어온 이후 기존교파에 대립하여 화개에 선당을 열고 선풍을 진작시킨 인물이다.진감선사가 시작한 매향행위가 선종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덕산 매향비의 '고사'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진감선사는 중국에 유학시에 매향을 매워 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당시에는 '리향''식향'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유추된다.

진감선사의 매향동기 기록이 없어 함부로 논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에 향목이 충분치 않아 불가에서 실질적으로 필요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당진 여미리 배바위에는 기존에 목공전설로 여기던 암각이 실은 또 하나의 매향비임을 이번에 밝히게 되었다. 기존에 '목공합리'라고 당진군지에 기재된 것을 본고가 답사한 결고 '공합'이 실은 ''자임을 알았다. 즉 향목 향리치로 보게된 것이다. 그러니까 배바위에는 매향입비를 경술년과 경오년 두 번 햇고 매향은 고려초기로 미륵삼존불 조성과 같은 시기에 거행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발견되 매향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고자 한다.

본고에서는 해미 매향비로 알려진 것이 사실은 홍성 용오리 매향비임을 밝혔다. 지금은 서부면 어사리이지만 청룡산에서 발원하는 냇물이 서해바다로 흘러가는 옜 이름은 용오리 냇가이다. 이제까지의 필자 이외 학자가 발표한 논문에서는 매향시기를 려말선초로 규정하고 왜구의 창궐이 주요 이유라고 햇는데, 고려초엽과 중기라면 왜구뿐만 아니라 원나라 몽고 침략이 동기 유발일 수도 있고, 흉년과 질병이 그 이유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해변가에 집중적으로 매향처가 있는 것을 왜구의 침입과 관련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침향이 되려면 바닷물과 산골물이 만나야 하기 때문에 해안에 매향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보여진다.

매향비의 발견으로 가야산 주변의 고려시대 미륵불상이 많은 이유가 더욱 분명해졌다고 할 수 있다. 산야에 흩어져 있는 불상의 조성도 승려와 향도들이 사찰차원에서 이루어낸 미륵신앙의 결정이면서도 현실의 인간생활의 보호를 기원하고 있다. 대개 고려불인 점으로 미루어 이 지역에서 매향과 동시에 미륵불 조성을 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상을 다시 종합하자면 우리는 내포지방의 매향비를 통하여 매향의 주체는 승려와 결원향도, 그리고 일반 주민의 수행했음을 알았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향도라는 신행단체의 활동이 지대했음이 매향과 미륵불로 입증되었다 하겠다. 사실 결원향도라고 했지만 불교가 국교인 고려시대에는 모든 주민이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매향 목적은 침향을 얻어 향연을 매개로 미륵의 성불을 축하하고 미륵회상에서 태어나 득도하기 원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평화롭고 안락한 삶을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침향의 불교적 의미가 희미해진 오늘날 희귀약재로써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본고는 처음으로 매향이 진감선사이래 선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을 밝혔다. 그렇다면 산야에 있는 미륵불상도 매향과 유관할 것인데 선종 사찰에서도 미륵신앙이 보편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1. 사천 흥사리의 매향비

  돌이 아무리 보잘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값어치를 매길 수는 없다. 그것을 세우고 그 위에다 글자를 새겨서 후세에까지 남기게 되면 그때에는 무한한 가치가 있어서 후세에 크게 빛을 보태어 주는 경우가 많다. 그 예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이고, 우리 사천 ‘흥사리(興士里)의 매향비’가 그것이다.
  곤양면 흥사리 산 48번지에 있는 매향비는 외관상의 생김새가 한 개의 산돌, 즉 동그스름한 자연석에 불과하다. 그러나 비면(碑面)을 유심히 뜯어보면 무엇인가 뜻이 새겨져 있고, 내용을 읽고 나면 6백여 년 동안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홀로 선 채 세상의 영욕과 성쇠를 멀리 보면서 잊어버린 세월 속에 버려져 왔다.
그러던 중 뜻있는 주민의 노력과 제보로 1977년 6월 동아대학교 강용권(康龍權), 김동호(金東鎬) 교수 등이 두 차례에 걸친 학술조사를 실시한 결과 매향석각비(埋香石刻碑)로서는 국내에서 유일한 불교사 및 금석문 사료임이 밝혀져, 이에 1978년 3월 8일 보물 제614호로 지정되어 비로소 세상에 그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빗돌의 크기는 높이 160cm, 넓이 및 두께는 각 120cm의 흑운모 화강암(黑雲母花崗岩) 자연석이며, 돌의 전면에다 자경(字經) 5cm 내외의 전자체로 세로 17행 204자의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그리고 비문은 오랜 풍우로 인해 많이 마멸되어 그 중의 한 자만 판독이 불가하나 비문 구성상으로 보아 ‘성(成)’자가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고려 시대 최말기인 우왕(禑王) 13년(1387) 8월에 건립된 것으로서 ‘왜구의 창궐’이라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서 국운이 쇠퇴하여지자, 매향(埋香)의 주도집단인 향도(香徒) 천명이 결계(結契)하여 사중(四衆)30)의 신도 4천여 명과 더불어 대원(大願)을 발원하고 침향목(沈香木)을 행함으로써 미륵보살(彌勒菩薩)의 용화삼회(龍華三會)를 기다려 내세의 복을 축원함과 동시에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발원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현실 위기감을 바탕으로 한 순수한 민간사회의 신앙형태 즉 미륵신앙의 사상적 측면에서 미륵을 만나는 수단으로 침향을 매개화 했다고 보인다. 비문과 그 내용을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 천인결계 매향 원왕문>

“무릇 더 없는 좋은 묘과(妙果)31)를 구하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행원(行願)32)이 서로 도와야 합니다. 원(願)이 없는 행(行)은 반드시 외로워지며 행이 없는 원은 허망할 것이니 외로운 행을 베풀면 복이 덜할 것입니다. 행과 원 두 업(業)은 쌍운(雙運)이니 서로 도와야 좋은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빈도는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대원(大願)33)을 함께 내어 침향목을 묻고 기다림으로써 미륵보살이 하생하여 개최하는 용화(龍華) 삼회(三會)에 이 향을 가지고 공양을 봉헌코자 합니다. 미륵여래의 말씀을 듣고 청정한 법을 깨달아 무생인(無生忍)34)을 얻음으로써 불퇴지(不退地)35)를 이루렵니다. 사람들이 함께 내는 원은 생이 다할 때 불퇴지를 내원(內院)36)으로 바꾸고자 함입니다. 미륵보살은 용화회에서 설법을 듣고 도를 깨우쳐 이 나라에서 생을 바꿀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나타나실 것이며 일체를 다 갖추어 정각(正覺)37)을 이루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주상전하 만만세 하옵고 국태민안 하소서. 달공(達空)
38)
  홍무 20년(1387) 정묘 8월 28일 묻고, 김용(金用)이 새기고 수안(守安)이 글을 쓰다. 기혼 미혼 남녀 불자 도합 4천1백인 대표 대화주 각선(覺禪) 주상(主上)39)님께”



<千人結契埋香願王文>

(夫欲求无上妙果必須行願相扶有行无願其行必孤有願无行其願虛設行孤則果喪願虛則福劣二業雙運方得助○妙果貧道與諸千人同發大願埋`術諶香木以待慈氏下生龍華汾持此香達奉獻供養 彌勒如來聞淸淨法悟无生忍成不退地願同發人盡生內院訂不退地慈氏如來見爲我訂預生此國預在植汾聞法悟道一切具足成其正覺 主上殿下万万 歲國泰民安 達空 洪武卄年丁卯八月卄八日埋刻金用書守安
優婆塞優婆夷比丘比丘尼 都計四千一百人個中大化主 覺禪 主上)


30) 四衆 : 불문의 네 가지 제자인 比丘·比丘尼·優婆塞·優婆尼의 총칭, 사부. 四部衆.
31) 妙果 : 훌륭한 결과 妙行妙因으로 얻는 證果 곧 佛果. 깨달음
32) 行願 : 구제라는 利他의 願과 그 실천수행. 身行과 心願
33) 大願 : 한없이 넓고 큰 誓願. 부처가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서원.
34) 無生忍 : 無生·無滅의 法理 곧 불생불멸의 진리를 깨달아 알고 거기에 안주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
35) 不退地 : 불퇴의 지위를 말함. 항상 보살 初地의 位를 말하는 것.
36) 內院 : 도솔천에 내외 두 원이 있는데 내원을 善法堂이라 하며 미륵보살이 이곳에 상주하여 법을 설한다 함.
37) 正覺 : 불타의 깨달음. 성불한 순간.
38) 達空 : 洪武 20년은 고려 우왕 13년(1387)이니 李成桂의 威化島회군 전년이다. 달공은 <懶翁集>에 ‘戒行達空澄源...’이라 있는데, 이것은 홍무년간의 사실이므로 달공 스님이 매항처와 가까운 文達寺에 주석하였거나 아니면 사천에 왔음직도 하다.
39) 上 : 彖 + 主(音). ‘主’는 신주의 뜻. 사당의 모신 신주의 뜻을 나타냄.

가. 기존의 조사된 매향비

  이제까지 학계에 알려진 매향비로는 고성 삼일포(高城三日浦) 매향비(충선왕1, 1309)·정주 침향동(定州沈香洞) 매향비(충숙왕4, 1335)·사천 흥사리(泗川興士里) 매향비(우왕 13, 1387) 및 향촌동(香村洞) 매향비(태종 18, 1418)·신안 암태도(新安岩泰島) 매향비(태종 5, 1405)·해남 맹진리(海南孟津里) 매향비(태종 6, 1406)·영암 엄길리(靈岩奄吉里) 매향비(충목왕 1, 1344)와 입암리(笠岩里)의 A매향비(공민왕 20, 1371) 및 매향비(태종 10, 1410)·장흥 덕암리(長興德岩里) 매향비(세종 16, 1434)·홍성 어사리(洪城於沙里) 매향비(세종 9, 1427)·당진 수당리(唐津壽堂里)의 경오년과 경술년의 매향비 2종·예산(禮山) 효교리에 소재한 판독불명의 덕산(德山) 매향비 등 모두 14종이다.
  이 가운데 1926년 후지다(藤田亮策)에 의하여 발표된 고성 삼일포 매향비와 정주 침향동 매향비 2종(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12종은 모두 광복후 최근까지 남한에서 발견된 침향암각(沈香岩刻) 혹은 매향비이다. 그리고 이들 매향비의 건립 시기는 모두 14, 5세기의 것으로 그 명문(銘文)이 대부분 수십자에 불과한 간단한 내용들이다. 하지만 매향비로서의 면모를 잘 드러내고 내용이 풍부한 것으로는 북한 삼일포의 매향비가 가장 많은 369자로 알려져 있고, 그 다음이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많은 204자의 사천 흥사리 매향비가 그것이다.
  현재 전하는 매향비 가운데 매향의 경위나 유래, 또 그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신앙형태를 보다 자세히 전하는 것은 고성 삼일포 매향비, 사천 흥사리 매향비, 그리고 홍성 어사리(해미) 매향비의 3례 뿐이다. 이들 3종 매향비에 나타난 발원형태는 신앙집단들이 실제 생활하고 있는 환경 가운데 나타나는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하는 희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모두 미륵 하생신앙(彌勒下生信仰)과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나. 매향동기와 매향의식

  그러면 기존의 매향사례에서 ‘침향’ 혹은 ‘매향’은 왜 했으며 매향의식의 실체는 무었이었을까? 이에 대한 연구는 이미 발표된40)바 있으므로 차제에 본고는 이들 연구서를 참고하여 살피고자 한다.
  미륵신앙은 석가의 시대가 가고 미륵불인 미륵을 축(軸)으로 하는 종교적 신앙이다. 석존이 입멸한 후 56억 7천만년 후에 도솔천(兜率天)으로부터 이 세상에 하생하여 용화수 밑에서 3회에 걸쳐 설법하고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이 미륵하생 신앙의 골자이다. 보통사람이 용화회상에 태어나길 기원하려면 가장 쉽게 택할 수 있으며, 수승한 방법이 무엇일까. 그것은 사찰건축·불상조성, 그리고 향을 공양하는 일 등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향나무가 적어서 목향(木香)을 사용하기도 어렵고 비싸게 외국에서 구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에 실질적으로 후손이 향을 사용하기 쉽게 하려는 배려도 무시할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향나무가 귀하고 또 향기가 뛰어난 편이 아니라서 매향을 하여 침향을 얻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미래불인 미륵과 관련한 매향이 근간을 이룬다 하겠다.
  불교에서는 침향의 냄새 말고 향물을 몸에 바르면 오근(五根)이 청정하여져서 무량의 공덕을 얻는다고 한다. 이와 같이 매향은 <미륵하생경>에 근거한 신앙 형태로서 향나무를 묻었다가 침향을 얻어 그 향연을 매개로 하여 발원자가 미륵세계와 연결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침향의 연기(緣起)는 신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고리로 보았고 그 고리 앞에서 소원을 빌면 성취가 된다는 것이다. 즉 매향을 하는 것은 미륵불<자씨(慈氏)>이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여 수많은 중생을 제도(濟度)할 때, 그 세상에 태어나서 미륵불의 교화를 받아 용화세계에서 살고 싶다는 소원을 담고 있다.
  사천 흥사리 매향비에 보이는 ‘이대자씨(미륵보살) 하생(以待慈氏下生), 용화삼회(龍華三汾) 지차향달봉헌(持此香達奉獻), 공양미륵여래문청정법(供養彌勒如來聞淸淨法), 오무생인(悟无生忍), 성불퇴지원동발인(成不退地願同發人), 진생내원정불퇴지(盡生內院訂不退地)(제5∼7행)는 모두 미륵세계에 나서 성불하고 싶다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보고자 한다. 고성 삼일포 매향비와 이보다 후대에 입비한 홍성 어사리(해미) 매향비에서도 그 소원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41) 그리고 미륵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석가세상에서 석가를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당시의 승려와 향도는 연기에 의한 윤회설을 믿고 먼 훗날을 기약했다는 것이 된다.42)
  불가에 구전되는 바로 매향의 최적지는 시냇물과 해수가 만나는 지점이라 한다. 따라서 매향처가 해안지방에 한정되는 것은 필연적이고, 실제 앞에 소개 한 매향처들도 모두 해수가 유입되는 내만(內灣)· 첨입부(添入部)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매향을 한 사람은 진감선사(眞鑑禪師 ; 774∼850)라고 한다. 현재 하동 쌍계사 경내에 서 있는 고운 최치원(孤雲崔致遠; 857∼?) 선생의 진감선사 대공탑비(大空塔碑) 비문에 의하면 ‘해안식향(海岸植香) 구이미방(久而彌芳)’이란 행문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성락훈씨의 해석은 즉 ‘향을 해안에 심었으니 오랠수록 더욱 향기롭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간의 연구자들은 “우리나라에 향기를 심었으니 오래도록 그 이름이 빛날 것이다”라는 정도로 해안을 우리나라 전체로 본 모양 같다고 오윤희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43)
  바로 이 같은 입지적 조건-해안지방이 구세(救世)· 기복적(祈福的)인 매향을 추진케 한 배경이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현전 매향비들의 건립시기가 ‘왜구의 창궐’ 이라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필적하기 때문이다. 즉 여말선초라고 하는 역사 전환기가 정치적인 면에서 지배층의 불안이었다면, 민중-적어도 왜구에 의해 격심한 침탈을 받던 해안지방 민중들의 입장에서는 왜구의 창궐이 보다 큰 불안이요, 현실적 위기감이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매향처 사천과 고성지방은 본격적인 왜구침략의 초기부터 침탈을 받고 있으며,44) 전라도의 해안과 도서지방도 그 피해가 더욱 심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 지역의 조창은 물론 조운선(漕運船)이 잇달아 수백 척씩 피해를 입자 연해창름(沿海倉鹿)을 내륙으로 옮긴 것이다. 왜구의 피해가 가장 극심한 남해현의 경우에는 전주민을 진주목 관내의 대야천 부곡에 이주시키고 섬 전체를 공동화(空洞化) 시키기까지 한 것은45) 모두 왜구 탓이었다.
  고려말 우왕 연간(1375∼1385)에 왜구는 무려 370여 회에 걸쳐 침구하여 한반도의 연해 주군(州郡)은 인적을 찾아 볼 수 없는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는데, 특히 전라· 경상도지역이 왜구의 소굴46)로 지칭되는 것도 저간의 사정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이같은 해안지방의 불안감은 조선 건국 후에도 한동안 지속되었던 것이다. 사천의 경우만 해도 태조 5년(1396) 8월, 사천 통양포(通洋浦)에 침구하여 병선 9척을 탈취하여 달아났다. 이때 왜구는 1백20척의 대규모 선단을 편성하여 경상도 연해를 침구했던 것인데, 1백20척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가장 큰 규모의 것이었다.
결국 매향지의 민중들은, 그들이 피부로 느끼고 있는 이같은 현실적 고통과 불안감으로부터 구원받는 방법으로서 미륵신앙과 접합된 매향을 택했던 것이다.
또한 매향비문에서 볼 수 있듯이 매향은 미륵신앙중에서도 그 하생신앙과 직접 연결되고 있다. 미륵하생 신앙은 상생신앙(上生信仰)이 중품인(中品人)을 위한 것인데 반해 하품인(下品人)을 위한 것이었고,47) 하품수자(修者)는 하생한 미륵의 용화회에 참여함으로써 정토(淨土)에 왕생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결국 중품수자가 되지 못하는 민중은 보다 저급의 하품수자로서 하생하는 미륵을 만나는 방법으로 ‘침향’을 매개화했다고 보인다. 매향의 결과 얻어진 침향을 매개물로 하생한 미륵과 만나고, 그가 주관하는 용화회에 참여함으로써 미륵과 함께 내원궁(內院宮)에 들 수 있다는 논리는 단순하면서도 정연한 것이다. 민중의 입장에서 볼 때 이같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발원은 매우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40) 李海濬, <14∼15세기 埋香과 香徒集團>, 《朝鮮時期 村落社會史》, 민족문화사, 1996.
吳允熙, <內浦地方의 埋香碑>, 《史學硏究》 第58·59 合集號, 韓國史學會, 1999.
41) 高城 三日浦埋香碑 第六行 ; ‘ 龍華會主彌勒下生之( ) 同生會下供養三寶者 ’.洪城 於沙里埋香碑 第五行 ; ‘ 彌勒當來初會 ’.
42) 吳允熙, 앞의책, 668∼669쪽.
43) 吳允熙, 앞의책, 671쪽.
44) 《高麗史》 世家 37 忠定王 2년(1350) 2月條. “倭寇固城·竹林·巨濟·合浦 (中略) 倭寇之侵 始此”
45) 《高麗史》 卷 57 志11 地理2 慶尙道 晋州牧 南海縣條.
46) 《高麗史》 列傳 50 辛禑 14년 3月條. “是時 全羅·慶尙二道 爲倭寇巢穴”
47) 安啓賢 <元曉의 彌勒淨土往生思想>, 《歷史學報》 제17·18합집호,1962, pp.252∼253. 彌勒經은 다시 上生經·下生經·成佛經으로 나뉘고,下生經의 경우 下品人이 비록 上天은 못 하더라도 미륵의 下生과 더불어 理想境의 실현을 고대하는 것이라 한다.

다. 매향의 주도집단

  다음으로 기존의 매향사례를 통하여 검출되는 매향의 주도집단이나 조직은 지방관, 보(寶)48), 결계(結契), 향도(香徒) 등이며, 여기에 승려와 지방민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매향주도층은 엄밀히 말할 때, 이들 어느 한 계층(집단)에 의해 완전 주도되기보다 복합적인 구성(예를 들면 지방관+보, 승려+계중(契衆), 향도+승려 등등)이었다. 먼저 고성 삼일포 매향비의 예에서 보면 주도층은 강릉도안무사(江陵道按撫使) 김천호(金天皓) 이하 인근의 9개지방 수령들이다.
  사천 매향비의 경우 매향주도층· 주도집단은 명쾌하게 밝혀지고 있다. 즉 비문 제1행에 명시된 ‘천인결계(千人結契)’와 제4행의 ‘빈도여제천인(貧道與諸千人)’이 그것이다. 매향의 발원집단인 ‘천인결계’는 그 계중이 4,100명으로(제14행), 비단 사천 지방민에 국한되지 않고 인접된 수개 지역을 포괄한 규모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건립기의 사천(곤명현) 인구가 그 전체의 수로도 3,100 미만이었기 때문이다. 매향시(1387)의 인구는 《경상도지리지》(1425) 편찬 당시와 별로 차이가 없었을 것인데, 동지리지의 곤남군(昆南郡) 호구수는 210호 3,062명에 불과하다. 결국 전군의 인구수로도 충원되지 않는 ‘도계 4,100인’이란 인근의 지방민이 함께 참여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한편 ‘천인결계’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결계의 구성· 조직문제다. 매향경위를 설명한 비문 중 이 문제에 관련된 내용은 ‘빈도여제천인’과 계중을 묘사한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제12행), 그리고 비를 건립하는 데 직접 참여한 인물(찬자· 각자· 서자· 대화주) 등이 그 전부이다. 먼저 ‘빈도여제천인’에서 우리는 천인결계라는 신앙집단(조직)과 빈도라 겸칭된 인물의 성격에 대해 주목하여야 한다. 비문 내용만으로서 ‘빈도’가 과연 누구였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혹 매향비의 찬자였던 달공(達空, 제10행 하단)이거나 화주였던 각선(覺禪, 제12행 하단)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그가 누구였던간에 천인결계를 주도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고, 신분상으로는 승려였음이 분명하다. 천인결계의 계중이 우바새· 우바이· 비구· 비구니로 지칭되는 것이나 스스로를 빈도라 하는 것에서 그것은 자명해진다. 결국 ‘천인결계’는 ① 몇몇 지역의 신도들로 조직된 신앙집단이며, ② 그 핵심인물 내지 주도자는 매향처와 가장 가까운 문달사(文達寺)의 승려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앞에 말한 고성 삼일포 매향비의 ‘보’와 비교할 때 사천매향비의 ‘천인결계’는 승려가 주도하고 몇몇 지역 신도들이 참여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다만 고성 삼일포 매향의 경우 지방관이 매향의 주도층으로 개재되고 이에 따라 신앙조직(보)의 하층구조가 불투명했던 것에 비하면, 관권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사천의 예는 결계의 구성문제를 비교적 선명히 밝히고 있는 셈이다.


48) 高城 三日浦 埋香碑 비문에 나오는 ‘ 彌勒前長燈寶 ’.

 

출처 : 암자에서 하룻밤 (천장암 홈 페이지)
글쓴이 : 천장암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