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해미읍성 수호신으로 동서남북 4방에 세워진 수호신 중 동쪽 산수리에 세워졌던 미륵은 현재 호암미술관(왼쪽)에, 북쪽 황락리에 세워진 미륵(오른쪽)은 온전하게 현존, 두 수호신 미륵이 ‘쌍둥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미륵연구가 황준구 씨가 처음으로 본보에 알린 미륵 사진.
<속보>=600여 년 전, 세종 3년 제작돼 문화재적 가치가 큰 것으로 알려진 호암미술관 정원 미륵(彌勒)불(장승불, 미륵)이 그동안 행방을 알 수 없던 서산 산수리 미륵이라는 증언과 함께 황락리 미륵과 쌍둥이 미륵(미력)이라는 새로운 사실, 첫 증언이 나왔다.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서다.
서산 산수리 미륵 제자리 안치를 위한 주민청원운동에 불을 붙인 첫 제보자인 황준구(70·수원) 씨는 29일 기자에게 이 같은 사실을 알렸다.
황준구 씨는 우리나라 미륵 연구가 중 최고 권위자로 손꼽히는 인물.
그는 “해미읍성 수호신, 서산 사방비보(四方裨補) 미륵불을 찾아 나선 2004년 6월 산수리 밭에서 일하던 산수리 80대 주민(여)으로부터 “산수리 ‘미력’은 황락리 미력과 쌍둥이”라고 알려줬다”며 “미력은 미륵과 같은 옛말로 산수리 미륵은 워낙 산속 깊은 곳, 외진 곳에 설치돼 미륵과 가까이 살던 주민들 말고는 사진 등 이를 증명해 줄 자료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많지 않아 진품 여부를 가릴 자료는 주민 증언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산수리와 황락리 미륵이 쌍둥이라는 사실을 아는 주민은 많지 않을 것”이라며 “당시 자신에게 말해 준 80대 주민은 “쌍둥이 ‘미력’을 찾는 구먼, 쌍둥이 미력이란 걸 아는 사람 많지 않을껴, 산수리 미력은 등 뒤와 머리에 금이 가 있어”라고 말했다”며 “당시 증언을 해 준 주민의 생존 여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호암미술관의 정원 미륵은 황준구 씨가 밭에서 일하던 80대 주민의 증언처럼 모양 등 생김새가 똑같다.
특히 그는 “호암미술관이 산수리 미륵을 증명할 사진 등 자료를 요구하는 것은 일본이 증거 제시를 요구하며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며 “산수리 미륵을 보고 자란 주민들의 증언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료의 가치로 인정돼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또 “2004년 당시 직접 촬영한 황락리 미륵 사진과 호암미술관 미륵을 대조를 해보면 커야 2%가량 차이만 날 뿐, 제작연대나 모양은 주민의 증언과 같이 황락리 미륵과 쌍둥이 미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증언했다.
또 그는 “산수리 미륵과 황락리 미륵이 쌍둥이 미륵이란 사실을 모른 채 황락리 미륵을 보고 자란 주민들은 호암미술관의 미륵이 산수리 미륵과 다르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호암미술관 미륵이 황락리 미륵과 쌍둥이라는 점, 미륵의 생김새가 거의 차이가 없다는 점에 비추어 호암미술관 미륵은 산수리 미륵이 확실하다”며 “따라서 호암미술관은 소장 중인 미륵을 제자리인 산수리로 속히 반환을 해야 옳다”고 강조했다.
현재 서산시 해미면 주민들의 산수리 미륵 제자리 안치를 위한 주민청원 운동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본보 6월 25일 1면 보도>
3000명 주민 서명을 목표로 지난 19일 첫 서명에 나선 뒤 10일째인 29일 현재 1200여 명이 서명에 참여하는 등 주민들의 산수리 미륵 제자리 안치 염원은 속도를 내고 있다.
황 씨는 지난 2000년부터 우리나라 전국의 미륵을 찾아나서 국보급을 포함 이름 없는 미륵 600여 개를 찾아내 우리나라 첫 ‘미륵도록’을 편찬 중이며, 올해 말 출간을 앞두고 문화재계와 학계도 비상한 관심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산=이수홍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