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새로운 천년을 코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 우리 문화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짚어보자는 열기가 높다. '신동아'는 우리 문화의 원류를 찾는 첫 작업으로 미술사가 최완수씨의 글을 연재한다. 독자 여러분의 뜨거운 호응을 기대한다. <편집자>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불상연구의 중요성 |
불 교가 우리 문화사에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서기 372년에 공식 전래된 이래 1600여 년 동안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국토 어느 곳을 가더라도 불교문화 유적과 쉽게 만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흔한 것이 불교 신앙의 주 예배 대상인 불상이다. 우리 미술사에서 불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라 할 만큼 막중막대하여 조각사의 대부분이 불상 연구로 채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느 절에서나 반드시 만나고 어느 박물관에 가더라도 쉽게 마주치는 그 불상은 대체 언제 어떻게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을까. 이런 의문을 품고 이 의문을 차례로 풀어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 문화를 바로 보려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나는 10세 때 부처님을 처음 친견하였다. 충청남도 예산 군내에 있는 가야산(伽倻山) 보덕사(報德寺)가 우리 집안의 원찰(願刹)이었으므로, 선조모(先祖母) 밀양 박씨를 모시고 처음 이 절에 가서 극락전에 독존(獨尊)으로 모셔져 있는 아미타여래좌상을 처음 뵙고 절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의 충격이 나를 장차 미술사 연구에 빠져들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던 듯하다.
유달리 탐미적인 기질을 타고나 꽃과 새 등 아름다운 것을 지극히 좋아하고 사람도 용모가 수려해야 마음에 들어하던 나는 황금빛 나는, 그 잘생긴 인물상에 우선 반하였다. 그러나 얼굴은 마음에 쏙 드는데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유심히 살펴보니 머리가 이상하다. 마치 사발 하나를 머리 위에 엎어놓은 것 같은데 노인들이 쓰는 탕건 같지도 않고, 그 표면에는 작은 고둥 껍데기 같은 것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었다.
왜 저렇게 잘생긴 얼굴에 저런 이상한 머리를 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용기를 내 아는 스님께 그 이유를 물었더니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석가세존께서 보리수 아래에 앉으셔서 6년 고행 끝에 큰 깨달음을 얻으셨는데 그 때 보리수 열매가 머리 위에 떨어져 쌓여 저런 모습이 되었다고 전해온다”고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이 대답은 10세 소년인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한 것이 아니었다. ‘이건 아닐 텐데’ 하는 아쉬움이 가슴속에 자리잡게 되었고 이것을 밝혀보겠다는 묘한 지적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미 더 어린 나이부터 지적 호기심이 강했고 타고난 호고벽(好古癖; 옛것을 좋아하는 별난 성격)으로 노인들의 옛 얘기 자리에 즐겨 끼어들어 귀동냥으로 우리 역사 얘기를 듣고 일일이 기억해 두곤 했다. 이 과정에 우리 역사가 일제에 의해 왜곡 변조된 사실을 알고 어린 마음에 그 잘못 알려지고 있는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일을 내가 해야겠다는 건방진 결심을 다져가고 있던 때였으니, 이와 같은 지적 호기심의 발동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지적 호기심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많은 역사서를 탐독하게 하였고, 그 열정은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하는 동안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역사 연구에 평생을 바칠 결심을 굳히고 서울대학교 사학과로 진학하였다. 이제 전문학자들의 강의도 듣고 수많은 관련 전문서적들을 폭넓게 접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부처님 머리 문제를 한번 본격적으로 구명해보려 하였다.
우선 전문학자라고 생각되는 분들께 질의해 보았다. 그러나 누구도 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 분야의 연구논문이 있는가 하고 찾아보았으나 국내 학계에서는 아직 이에 대한 관심 표현이 없었다. 서구학자와 일본 학자 중에서 전체 불상 양식 변천을 연구해 가는 과정에 불상의 두상 변천을 간단하게 언급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결국 이 문제의 구명은 내 몫이구나 하는 판단 아래 우선 불교미술사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독파할 계획을 세우고 현대 활자로 인쇄된 가장 완벽한 체제의 대장경인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100권(본문 85권, 도상 12권, 목록 3권)을 읽어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사이 대학을 졸업하고 국립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경주와 공주, 부여박물관을 순회하며 도처에 흩어져 있는 불상 자료를 조사하는 한편 일본과 서구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섭렵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팔만대장경을 독파해내는 일은 아직 요원하기만 했다. 1965년경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대정신수대장경’ 전질이 다 갖춰진 곳은 서울대학교 도서관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져 이곳에서만 책을 빌려볼 수 있었다. 그러니 그 빌려보는 번거로움이 적지 않았다. 이에 ‘대정신수대장경’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고 미술사 연구에 적합한 연구소가 있다면 한 10년 파 묻혀 이를 읽고 불교미술사 연구의 기초 다지기에 전념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66년 4월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간송미술관)가 차려지면서 이곳에서 일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고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선생으로부터 받게 되었다.
현장 여건을 확인한 다음 가부를 결정하겠노라고 말하고 북단장(北壇莊)을 찾아가 연구소 건물에 들어섰더니 연구실 방 안 사벽을 둘러친 책장 안에 미술사 연구에 필요한 책들이 가득 꽂혀 있고 게다가 ‘대정신수대장경’ 일습 100권이 봉도 뜯지 않은 새 책으로 완전하게 꽂혀 있지 않은가. 두말없이 즉석에서 이곳에 있겠다고 말했다. 매일 연구소 일을 마치고 나서 밤새워 대장경을 읽으며 이상한 부처님 머리가 어째서 지금과 같이 만들어지게 되었느냐 하는 사실을 학문적으로 구명하는 일에 몰두해나갔다.
결국 이 일은 불상의 출현에서부터 이해되어야 하고 불상 출현의 이해는 불교의 성립과 그 발전 과정을 모르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껏 30여 년이 넘도록 이 문제를 밝히는 데 종사해오고 있다. 그동안 나름대로 얻은 연구성과를 토대로, 불상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처음 만들어져 우리에게 전해져 왔는가 하는 문제부터 풀어나가기 시작하여 우리 불상을 바로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일의 길잡이 노릇을 해나가고자 한다.
먼저 불교가 출현하는 과정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가 현재까지 알고 있는 인류문명은 서력 기원전 3000년쯤 4대 문명이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지구상에 출현했다는 것이다. 황하 유역에서 일어난 중국문명과 인더스강 상류에서 일어난 인도문명,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변의 메소포타미아문명, 나일강 하류의 이집트문명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4대 문명이 서로 아무런 관련 없이 독립 발생하면서 어째서 동시에 출현하였는지에 관해서는 명쾌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지구상에 일어난 기후의 변화가 이들 지역의 농업생산력을 높여놓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또 어떤 까닭인지 서력 기원전 60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4대 문명권 각각에서 상업문명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 역시 농업생산력의 증대에 의한 잉여 농산물의 교역으로 말미암은 현상으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지중해를 끼고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연결돼 있던 그리스를 중심으로 상업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인류문명사상 최초의 상업문명권을 형성해간다. 이곳은 농경에 적합지 않은 악조건이기 때문에 농업문화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지중해를 통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양대 농업문화 지역과 직결돼 있다는 지리적인 이점이 상업문화를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그리스의 도시국가 건설이 바로 이를 증명해준다.
어떻든 이런 상황 속에 인도에서도 상업세력이 크게 성장해간다. 2500년 가까이 농업문명을 유지해 오면서 바라문교(br-ahmanism)의 이념 기반 아래 소위 4성제(四姓制)라는 엄격한 4단계의 계급제도를 유지해오던 인도 사회는 기반이 흔들리는 대변혁을 맞게 된다. 상업세력의 성장은 상업 이윤의 축적 결과 농토 소유의 유무다소(有無多少)를 전제로 하던 계급제도를 무의미하게 만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에 급성장하는 상업세력은 기존 질서를 고수하려는 보수이념인 바라문교를 압도할 수 있는 혁신이념의 출현을 고대하게 되는데, 이런 사회적 요구에 따라 출현한 혁신이념 중의 하나가 불교였다. 그래서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釋迦牟尼, 기원전 623~544년) 부처님은 평등과 금욕을 2대 강령으로 내세워 상업세력의 지위와 권익을 옹호하는 이념체계를 확립해낸다.
그 결과 바라문(婆羅門, br-ahmaa), 찰제리(刹帝利, katriya), 폐사(吠舍, vai′sya), 수다라(首陀羅, ′s~udra)의 4계급 중 최하층 천민에 속하는 수다라 출신의 우바리 (優婆離, Upali)를 10대 제자의 하나로 받아들여 사성제 계급제도 자체를 부정해버렸다. 출가한 승려들은 계급과 부귀의 표상이 되는 머리 장식을 근원적으로 소멸시키기 위해 머리카락을 밀어버리는 한편, 의복은 남이 내다버린 것을 주워다가 입되 주울 때 본 사람들끼리 서로 조각내어 나눈 다음 그 조각들을 잇대어 옷을 만들도록 하였다. 7조 가사니 9조 가사 내지 25조 가사가 이런 조각들을 잇대어 기워낸 줄 수를 표시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석가모니와 비슷한 시기에 출현하여 자이나교를 창시한 자이나(Jaina)도 역시 평등과 금욕을 내세우는 새로운 이념을 내놓았다. 그러나 자이나교는 의복을 거부하고 나체를 고집한다거나 신체상의 터럭을 모두 제거하는 등 극단적인 금욕을 표방하며 반윤리적 규범을 요구함으로써 일반의 지지를 얻지 못해 불교에 압도당하고 만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는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년)가 탄생하여 오히려 상업세력의 성장으로 도전받는 농업사회를 안정시키는 새로운 이념인 유가(儒家) 이념을 확립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기원전 623년에 탄생하여 기원전 544년에 80세로 열반하셨다 하니 기원전 551년에 탄생한 공자가 8세 되던 해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열반한 것이다. 공자는 이후 73세를 살고 기원전 479년에 돌아간다.
어떻든 이와 같이 농업문명과 상업문명의 교체기에 이 두 분은 각기 인도와 중국에서 탄생하여 새 질서를 마련하는 이념기반을 다져놓았기에 이후에 모두 성인(聖人)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불교는 갠지스강 중류에 위치한 마가다국이나 구살라국 등을 중심으로 갠지스강 물줄기를 따라 교세를 펼쳐나간다. 이후 불교는 석가세존 열반으로부터 200여년 뒤에 출현한 아소카(阿育, 기원전 269~232년)왕이라는 대 전륜성왕(轉輪聖王;천하를 통일한 왕중왕)의 광적인 외호로 그가 통일한 전인도 대륙으로 전파됨으로써 통일제국의 국교로 발돋움해 나간다.
불교미술의 시원 |
한편 그리스에서는 상업문명이 점차 발전해 나가면서 도시국가들이 교역대상 지역을 넓히기 위해 끊임없이 정복전쟁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케도니아의 소년왕 알렉산더 (기원전 336~323년)는 20세에 등극하여 그리스 전역을 통일한 다음 22세 때는 지중해를 건너 페르시아 대제국 정복에 나선다. 그는 25세 나던 해에 고가메라 전투에서 소아시아 전역을 장악하고 있던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2세의 대군을 격파하여 페르시아 대제국을 멸망시키고, 패주하는 페르시아의 잔여세력을 추적하면서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로 진격해간다.
드디어 30세가 되던 해에는 인더스강 상류인 간다라 지역을 장악하고 강을 건너 갠지스강 유역인 중인도 지역으로 진군해 들어가려 한다. 전인도의 여러 왕국은 이 미증유의 외침 소식에 접하여 아연 긴장한다. 그래서 최대 강국인 마가다 왕국을 중심으로 연합군을 조직, 이를 격퇴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된다. 마가다국왕 푸랏시가 맹주가 되고 마가다왕국 총대장 찬드라굽타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보병 200만, 기마병 8만, 전차 8000대, 코끼리부대(象軍) 6000의 병력을 모은 것이다. 첩보병을 통해 이 소식을 접한 알렉산더 대왕은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고향 떠난 지가 10년이나 되었다는 핑계로 31세 되던 기원전 325년에 철군명령을 내려 회군하고 만다.
이에 격전을 예상하고 진격해 나갔던 연합군의 대병력은 허탈감에 빠져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이 기회를 틈타 총사령관 찬드라굽타는 병권을 이용해 자국왕 푸랏시를 몰아내고 스스로 마가다 국왕이 되어 마우리아(孔雀) 왕조의 시조가 된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군소국가를 통일해 나가기 시작하니 그 손자인 아소카 대왕에 이르러서는 전인도를 통일한다.
그런데 이 아소카 대왕이 불교에 깊이 귀의하여 자신의 영토는 물론이고 그 주변지역까지 포함한 전인도문화권에 불교를 널리 보급하며, 현존 최고(最古)의 미술품인 아소카 기념주를 만들어 남기기도 한다.
그렇다면 아소카 대왕은 어떤 인연으로 불교의 대외호왕이 돼 이렇게 수많은 공덕을 지을 수 있었을까. 그 내용은 ‘아육왕경(阿育王經)’[512년, 梁 僧 伽婆羅 번역]이나 ‘아육왕전(阿育王傳)’[306년, 西晋 安法欽 번역], ‘잡아함경(雜阿含經)’[433년, 劉宋 求那跋陀羅 번역] 등에 자세히 기술돼 있다. 그중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수기(授記, 豫言)하신 형태로 꾸며진 내용인 ‘잡아함경’ 권 23의 내용을 중심으로 그 대략을 살펴보겠다.
어느 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왕사성 가란타죽원, 즉 죽림정사에 계시다가 아침공양을 받으시려고 여러 비구들을 거느리고 왕사성 안으로 들어가시게 된다. 이때 길가에서 사야와 바사야라는 두 아이가 흙장난을 하고 놀다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공양을 받으러 오시는 것을 보고는 그 거룩한 모습에 환희심이 절로 나서 소꿉장난으로 보릿가루라고 챙겨두었던 모래를 그대로 부처님 바리 안에 담아드린다. 그리고는 장차 이 공덕으로 천하를 얻는 전륜성왕이 되게 해달라고 소원을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그 진심을 아시고 미소로 이를 받으신 다음 뒤따르는 아난(阿難)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멸도(滅度;열반, 육신의 사멸, 즉 죽음을 일컫는 말)한 후 100년 뒤에 이 아이는 파련불(巴連弗;파탈리푸트라)에서 세상 한쪽을 다스리는 전륜성왕이 될 터인데 성은 공작 (孔雀;마우리아)이고 이름은 아육(阿育;아소카)이리라. 정법(正法)으로 다스리고 또 내 사리를 널리 펴기 위해 팔만사천탑을 건설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해서 아난존자에게 그 일생 행적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미리 말씀하신다. 파련불에 월호(月護;찬드라굽타)왕이 나고 그 아들이 빈두사라왕이며 빈두사라왕에게 수사마 태자와 아소카 왕자 등 무수한 왕자가 있게 된다. 그중에서 수사마가 가장 잘생겼고, 아소카는 가장 못생기고 피부도 거칠어서, 빈두사라왕은 왕위를 수사마 태자에게 물려주려 한다.
그래서 왕은 전쟁터에 나가 전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소카 왕자에게 택차실라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라고 명하지만 오히려 아소카 왕자는 이를 평정하고 돌아와 대중의 환심을 산다. 반면 잘생긴 탓에 오만한 수사마 태자는 대중의 인심을 잃어 빈두사라왕이 병으로 위독해졌을 때 신하들의 간계에 빠져 택차실라 지방의 반란을 평정하러 떠나는 바람에 아소카 왕자에게 왕위를 빼앗긴다.
왕위에 오른 아소카는 천하를 평정해서 전륜성왕이 되는데 자신이 정당하게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과 못생겼다는 열등감 때문에 한때 측근 신하들과 잘생긴 궁녀들을 대량학살하고 지옥(地獄)을 꾸며 놓고 죄인을 잡아다가 살육하는 실수를 범한다. 그런데 지옥에 잘못 들어갔다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대각을 얻어 아라한이 된 해(海)존자의 신통력에 감복하여 아소카왕은 불교에 깊이 귀의하게 된다.
그리고 해존자와 장로 야사존자를 통해 자신이 팔만사천탑을 조성하여 부처님 사리를 널리 펼치고 불법을 자신의 영토 내에 전파하리라는 수기를 받고 태어난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천하에 팔만사천탑을 건립하게 된다. 이어 야사존자의 천거로 우바굽타존자를 왕사 (王師)로 삼는데 우바굽타존자는 얼굴이 잘생기고 몸매가 좋으며 피부가 지극히 고왔다.
이에 아소카대왕은 자신의 못생긴 얼굴 및 거친 피부와 우바굽타존자의 용모를 비교하면서 그 까닭을 물으니, 우바굽타존자는 보시한 물건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가르쳐준다. 아소카대왕은 모래를 부처님께 공양하였지만 자신은 좋은 재물을 공양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크게 깨달은 아소카대왕은 우바굽타존자의 안내를 받아 부처님 성적지 모두를 찾아다니며 부처님을 상징하는 사자나 황소, 코끼리 등을 기둥머리에 장식한 아름다운 기념주를 세우게 된다. 이것이 불교미술의 시원을 이루는 아소카왕의 기념주들이다.
이 기념주는 현존하는 것이 모두 14개인데 완전할 경우 높이가 12m 내지 21m, 기단 직경이 90cm 내지 125cm가 되는, 거대하고 둥근 돌기둥이다. 돌기둥 상부에는 인도 사람들의 전통적인 성수(聖獸)이며 불타(佛陀, 크게 깨달은 사람을 의미)를 상징하는 사자나 황소, 코끼리를 조각하여 장식하고 있다. 현존하는 14개는 사자 7개, 코끼리 1개, 소 1개이며 나머지 5개는 파괴돼 알 수 없다. 이는 한결같이 주나르(Junr)에서 산출되는 회백색 사암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왕의 명령으로 한곳에서 제작해 운반된 것임을 알려준다. 이러한 돌기둥의 건립은 페르시아 미술의 영향이었으리라는 것이 학계의 정론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을 누리던 아케메네스왕조의 수도 페르세폴리스의 폐허에 남겨진 왕궁의 돌기둥들을 보면 누구나 그 연계성을 직감할 수 있다. 또 알렉산더대왕에게 쫓긴 페르시아 귀족들이 대거 인도로 피난하였던 사실과 이들의 도움을 받아 아소카왕이 통일인도의 대수도로 페르세폴리스를 모방한 파탈리푸트라를 건설하였다는 사실은 이를 더욱 확실하게 해준다.
이 <사자 기둥머리>(도판 1)는 현존하는 아소카왕 기념 기둥머리 중에서 조각기법이 가장 우수한 것으로, 네 마리의 수사자가 서로 등을 맞대고서 사방을 바라보며 으르렁거리는 모양이다. 사실적인 표현기법으로 물결치는 갈기털과 알통이 드러난 힘찬 앞발의 표현은 백수의 왕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당당한 자세를 과시한다. 이는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423년, 北겆 曇無讖 번역] 권 27에서 사자후를 토하여 백수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 마치 부처님의 설법이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과 같다고 한 사실을 생생하게 실감시켜 주는 듯하다.
사자를 받치고 있는 갓머리돌은 법륜을 상징하는 수레바퀴로 네 구간을 이루고 그 사이사이에는 역시 불타를 상징하는 말, 소, 사자, 코끼리의 네 동물들을 깊게 새겨 장식하고 있다. 이 동물들의 표현도 매우 사실적인데, 이러한 사실적인 표현기법은 아직 인도미술에서 그리 익숙지 않던 것으로 페르시아 미술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이 갓머리돌과 기둥을 연결해주는, 엎어놓은 모양의 연꽃잎 장식은 바로 페르세폴리스의 돌기둥 양식 그대로를 재현해낸 듯하다. 불교미술사의 서장을 장식하는 이 아소카왕의 기념주는 그 미술양식의 연원이 페르시아 미술에 있음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외래양식의 단순한 모방만은 아니고 인도적으로 저작된 의장과 표현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이 방면의 학자들 사이에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 이 사자주두는 인도의 국장(國章)으로 돼 있다.
람풀와에 있는 두 개의 아소카왕 기념주 중 남쪽에 있던 것이 유일하게 <황소 기둥머리> (도판 2) 장식조각을 가지고 있다. 목덜미에 혹이 나 있고 앞가슴 중앙에 목젖이 늘어진 전형적인 인도 황소의 생김새로 두 뿔은 파괴되었으나 우신(牛腎)과 우낭(牛囊)의 표현이 분명하다.
황소 모습은 사자 기둥머리와 같이 사실적인 조각기법으로 처리되고 있는데, 갓머리돌은 손바닥 모양 당초와 접시꽃 모양 꽃무늬가 연속문양으로 장식돼 있고 기둥과 연결되는 엎은 연꽃 받침의 조각은 <사자 기둥머리>의 그것과 한솜씨임을 보여준다.
이는 ‘대반열반경’ 권 17에서 ‘부처님은 사람 가운데의 코끼리왕이며 사람 가운데의 소왕(牛王)이라’고 한 내용을 상징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인도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 인더스문명기로부터 코끼리와 황소를 성수로 떠받들어왔으니, 이 전통을 불교에서도 그대로 수용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페르시아 문화권에서는 아시리아문명 이래 태음숭배를 해오고 초생달과 같은 두 뿔을 가진 소를 그 상징동물로 삼았으며, 그에 대한 태양 상징물이 사자였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혹시 이런 페르시아적 동물관이 인도에 전해져서 불교에 포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상 불(不) 표현의 시대 |
‘장아함경(長阿含經)’[413, 後秦 佛陀耶舍와 竺佛念이 함께 번역] 권 4 유행경(遊行經) 및 ‘잡아함경’ 권 23, ‘대반열반경후분(大般涅槃經後分)’[665년, 唐 若那跋陀羅 번역] 권 하 등의 불교경전들에 의하면, 불타가 열반한 후에 화장으로 남겨진 사리(舍利, sarira;유골의 뜻)가 불교에 깊이 귀의하였던 여덟 나라 임금들에 의해서 나뉘어 탑파(塔婆 st-upa)에 봉안되고[8국 왕이 서로 사리를 독점하고자 전쟁에 돌입하기 직전 향성바라문(香姓婆羅門)의 중재로 8등분하였다고 한다] 예배 공양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소카왕이 전인도를 통일하고 대불교외호왕이 된 후에 그것을 다시 모셔내 8만 4000등분해 천하에 그에 해당하는 탑을 세웠다는 내용이 ‘아육왕전’이나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沙)’[489년, 蕭齊 僧伽跋陀羅 번역] 권 1 등에 수록돼 있다.
물론 8만4000이란 실수 개념이 아니고 4와 8을 숫자의 기본 단위로 즐겨 쓰던 인도인들이 대량이란 뜻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야겠지만, 경전상으로 보면 이 시기에 엄청난 수의 탑파가 세워지고 탑파신앙이 크게 유행했어야 한다.
그러나 미술사의 입장에서 보면 아소카왕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거대한 규모의 탑파 유구는 지금까지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그 다음 시대인 슝가왕조(기원전 184~72년)에 이르러서야 대규모의 탑파가 조영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소카왕 시대에 만들어졌으리라고 생각되는 소규모 탑파 위에 다시 대규모로 증축한 것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아소카왕 시대에는 아직 탑파신앙이 크게 중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자료들일 뿐이다.
그런데 슝가 시대에 이르면 갑자기 대규모의 탑파 조영이 이루어지고 아소카왕의 기념주와 같은 양식의 조영물은 더 이상 제작되지 않는다. 이것은 불교신앙의 성격이 변화한 탓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는 교조 석가모니불에 대한 인간적인 추모의 단계를 벗어나 신격화시켜야 할 계제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유골(사리)을 신비화시켜 신앙의 주 대상으로 삼고 예배 공양하려 한 경향의 표현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높이가 15m 내외, 기단 직경이 35m 내외의 거대한 탑파를 건설하고, 그 주변에는 높이 3m 내외의 난순(欄楯, vedika;난간 모양 울타리)과 높이 7m 내외의 탑문 (塔門 toraa)을 설치하여 탑을 보호하고 장엄하게 했다. 특히 탑문에는 전생사(前生事;불교의 윤회사상에 의하면 불타는 전생의 수많은 선행의 결과로 불타가 되었다고 한다)를 얘기한 본생담을 주제로 한 본생도와 불타의 현생사를 얘기한 불전도가 부조돼 앞뒤를 가득 장식하게 된다.
이 장식 부조들은 불경에서 얘기한 전생·현생의 불타 생애를 설화의 진행에 따라 연속적으로 표현해 나갔기 때문에 한 장면에 시공을 초월한 여러 사실이 복합적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시각을 관념화시켰으므로 서양화를 보는 투시적인 시각으로 보면 매우 어색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불경의 내용을 도설적으로 표현해 나간 변상도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더 마땅한 방법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 시기에 조성돼 현재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스투파는 바르하트(Bh-arhut)대탑과 산치(Sanchi)대탑이다. 그런데 이 두 탑의 탑문에 부조된 불전도에는 그 주역인 불타의 모습이 모두 표현돼 있지 않다. 그 구체적인 실례를 <이라발용왕귀불도(伊羅鉢龍王歸佛圖)> (도판 3)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라발용왕귀불도>는 바르하트대탑의 남문 기둥에 장식된 불전도의 한 장면이다.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592년, 隋 那 堀多 번역] 권 37, 38 ‘나라다출가품(那羅陀出家品)’ 상·하의 내용을 한 화면에 압축 표현한 것으로 나라다(那羅陀, Narada;불타의 10대 제자 중의 하나인 마하가전연의 속명)가 불타의 제자가 되는 과정을 도설한 것이다.
경전에 의하면 이라발(Elapattra)용왕이 과거 가섭불(迦葉佛)시대에 비구로 있으면서 이라수(伊羅樹)라는 나무를 꺾은 죄로 이라발용왕이 되었는데, 다시 사람으로 환생하려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나실 때 만나뵈어야 한다는 수기(授記)를 받는다. 그래서 무수한 세월을 기다리는데 마침 석가모니불이 성불하셨다는 소식을 친구인 상구(商쯖)용왕의 궁에서 다른 친구인 금제야차(金齊夜叉)로부터 듣는다. 그래서 상구용왕의 딸인 절세미인과 금은보화를 상금으로 걸고 부처님을 만나뵐 방도를 세상에 묻게 되고 당시 세상에서 현자로 추앙되던 나라다가 사람들의 요청으로 이들을 데리고 부처님께 나아가게 되는데, 이라발용왕이 너무나 기뻐서 한달음에 부처님 계신 곳으로 달려가려고 서두르다 보니 머리는 벌써 부처님 계신 곳에 와 닿았으나 꼬리는 아직 수천리 밖에 있는 자기의 용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부처님 앞에 청년 바라문 수행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뵙고 장차 미륵불이 나타날 시기에 다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수기를 받는데, 이를 지켜보던 나라다가 부처님의 성스러운 교화에 감격하여 무리를 이끌고 불타의 제자가 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복잡한 내용의 설화를 한 장면으로 압축 표현하기 위해 배경은 평면전개도식의 수직 시각으로 처리하고 인물과 나무는 수평시각으로 처리하는 이중시각법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투시도법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매우 어색해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마땅히 불타의 자태가 표현되어야 할 곳에 그 모습이 보이지 않고 불타의 존재를 암시하는 불좌와 녹야원(鹿野苑)의 설법을 상징하는 니구류 (尼拘類)나무가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당시에 불타를 인격으로 표현하는 것을 금기로 여기는 전통이 있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내용으로, 당시의 모든 불전도에 적용되던 원칙이다.
이는 인도문화권에서나 중국문화권에서 모두 성인으로 추앙되는 위대한 인물이 대중과 자리를 함께 할 경우 그 모습을 대중과 함께 표현하는 것을 불경(不敬)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 모습 대신 그 존재를 상징하는 어좌(御座)나 일산(日傘) 등을 표현하는 전통에 따른 것이었다. 이런 전통은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지켜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땅히 불타께서 계셔야 할 곳에는 불타를 상징하는 성수(聖樹;무우수 나무 아래에서 탄생했으므로 탄생의 경우는 무우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았으므로 대각의 장면에는 보리수, 사라수 아래에서 열반했으므로 열반의 경우는 사라수를 표현함), 윤보(輪寶;법륜을 상징하는 수레바퀴 모양), 삼보표치(三寶標幟;윤보 위에 山자 모양의 장식을 붙인 것으로 불·법·승 삼보를 상징), 불족적(佛足跡;윤보 무늬가 선명한 부처님 발자국), 불좌 (佛座;부처님 자리) 등을 표현하였다.
<이라발용왕귀불도>를 살펴보면 니구류나무 아래 대좌를 향하여 합장하고 꿇어앉은 이라발 용왕과 물 속에 잠겨 있는 상구용왕을 비롯한 두 명의 용녀가 보이고 [터번을 쓴 머리 위에 오두룡의 생김새가 장식되어 용족(龍族)임을 표시하였다], 머리만 먼저 왔다는 오두룡 (이라발용왕)의 두상이 물 속에 크게 표현되었으며 그 위로 금제야차가 보이고 손으로 가리키며 길을 안내하는 나라다선인도 보인다.
이들이 모두 논둑처럼 생긴 육지로 양분된 물 속에 잠긴 듯 표현된 것은 용궁이 사실임을 강조하려는 화면구성 욕구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수면을 상징하기 위해 연꽃과 연잎들을 어지럽게 배치하고 물결무늬라 생각되는 종횡의 평행선을 산만하고 불규칙하게 표현하였으며 육지에는 떡잎 모양의 유치한 나무 표현이 있고 물 위를 나는 오리의 소박한 표현도 보인다.
전체적으로 표현기법이 매우 유치하고 표현 의욕이 너무 과다하여 회화적으로는 성공했다고 볼 수 없는 졸렬한 작품이다. 더구나 앞서 본 <아소카왕 사자 기둥머리>의 사실적인 표현 기법과 비교해볼 때 현저한 양식적 퇴보다. 그러나 이는 외래 미술양식을 받아들여 자기화 시켜가는 과정에는 반드시 겪어야 하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강한 자기전통 회복의 욕구가 작용해 외래미술 요소를 자기화해냄으로써 그 다음 단계에서 고도의 독자적 미술양식을 창안해내게 하는 저작 단계의 양식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아무튼 여기서도 인도미술의 전통적인 표현의지가 강하게 되살아나서 사실적인 표현보다는 상징적인 신비성이 노골화하고 조잡한 화면충전(畵面充塡;화면을 그림으로 가득 채움) 현상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건축구조를 상징한 좌측 기둥에서 보인 기둥머리 형태는 아소카왕 기념 기둥머리의 그것을 조잡하게나마 계승한 것이 분명한데, 이는 외래미술 양식의 자기화 과정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라발용왕의 뒤에 프라크리타(Pr-akta)어로 ‘엘라파트라 용왕’이라 새겼고 아래 난간에는 ‘엘라파트라 용왕 세존을 예배하다’라고 새겨놓아 이것이 <이라발용왕귀불도>임을 밝혀주고 있다.
불상의 출현 |
알렉산더대왕의 동방원정(기원전 326~325년)은 인도인들에게 서방세계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고, 한무제(漢武帝, 기원전 140~87년)의 확장 정책에 따른 서역 경영이 또한 동방세계의 실재를 증명해 주었다. 그래서 종래 인도대륙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 속에 안주하던 인도인들의 사고는 근본적으로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가 불교에서는 교조 석가모니불 이외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지구와 같은 사주(四洲) 세계 1000개가 합하면 1소천(小天)세계가 되고 1000개의 소천세계가 합쳐서 1중천(中天)세계가 되며 1000개의 중천세계가 합쳐서 1대천세계가 되는데, 이 1대 천세계를 3천대천세계라고도 한다. 지구의 10003, 즉 10억 개의 지구에 해당하는 세계란 의미]의 무수한 불보살을 상정하고 대승사상의 출현을 재촉하였다고 생각된다.
대승이란 문자 그대로 큰 수레란 뜻이다. 종래의 불교가 각자의 수행에 따른 자기 해탈만을 목표로 삼았던 것을 1인용 수레인 작은 수레에 비유하고, 주변의 일체 중생을 모두 큰 수레에 태워 함께 해탈시키기 위해 해탈할 능력을 모두 갖추고도 부처의 경지에 오르지 않는 보살의 행위를 큰 수레, 즉 대승에 비유한다. 물론 이는 대승 쪽에서 붙인 이름이다.
이러한 혁신적인 사상을 불교교단 내에서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대중부 계통이 중심이 되어 이뤄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그 발생이 어느 곳이냐 하는 점에서는 남과 북의 두 설이 있다.
그런데 현재 남겨진 불교미술품의 명문 내용으로 보면 대중부의 활동이 개방적인 상업도시에서 흥왕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략 서아시아와 동아시아 및 인도를 연결해주는 교통의 요로에 있으면서 상업적인 부를 축적하던 서북인도의 간다라(Gandh-ara)나, 서북인도와 인도대륙 및 아라비아해에 연결되는 마투라(Mathur-a)지역이 대승불교의 요람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이를 대변하듯이 이 양대 지역에서는 이제껏 불상의 표현을 금기로 여겨오던 불상 불표현의 전통을 깨뜨리고 과감하게 불타의 자태를 표현하기에 이르렀다.이로부터 불교미술은 조상(造像) 중심의 불상시대로 접어들게 되고 불교신앙도 불상예배 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불상이 없던 시대를 인도미술사에서는 고대기미술이라 부른다). 그 시기는 대체로 서기 1세기를 전후해서부터 대제국을 건설해가던 쿠샨(Kus-an)왕조의 전성시대에 해당하는데, 이 왕조의 문화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원래 이 쿠샨왕조의 지배층은 월지족(月氏族;월지라고 읽는다. 로마의 지리학자 스트라보가 동방 그리스문화의 파괴자로 열거한 四蠻族의 하나인 Asii 혹은 Assioi인 듯한데 이것이 아시아의 어원이라는 설이 있다)으로 중국의 서북부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 부근을 근거지로 하여 살던 유목민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150년경 흉노족의 팽창에 밀려 서남쪽으로 쫓겨가다가 기원전 120년경에는 서북인도 간다라지방에 정착하여 대월지국을 건설하고 기원전 80년경에는 그리스 원정군이 세운 식민국가인 박트리아(Bactria;‘漢書’의 大夏가 이 나라일 것으로 비정하지만 이미 박트리아를 신복시키고 있던 Tokhari 혹은 Tokharoi의 음역이 대하일 것이라는 설이 더욱 타당성이 있다)를 멸망시킨 다음 그곳에 안주하여 문명생활로 들어간다.
여기서 쿠샨왕조의 문화성격이 그리스적인 성향을 강렬하게 띨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을 수 있으니, 이는 야만의 정복민족이 고도의 문화를 가진 피정복민에게 문화적으로 역정복된 실례라 할 수 있겠다. 쿠샨왕조의 지배층은 동(중국)·서(그리스) 세계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겸비할 수 있었으므로 당시로서는 가장 진보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곳 간다라지역은 이미 아소카왕 때에 불법이 전래돼 기원전 2세기경에는 그리스계의 미란다(彌蘭陀;Menandros 혹은 Milinda 기원전 160~140년)왕이 불교에 깊이 귀의했던 사실을 ‘미란다왕소문경(彌蘭陀王所問經)’[한역 경전으로는 ‘那先比丘經’인데 이는 東晋代에 失譯]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런 형편에서 난만한 조형미술의 발달을 토대로 인격신상 제작 경험이 풍부하던 그리스인들에게 불상 불표현의 전통은 이해하기 어렵고 무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상징물로 대신하던 불타의 자리에 어느덧 인간 불타의 모습을 표현하게 되었던 듯하다. 여기 <기원보시도(祇園布施圖)>(도판 4)가 바로 그런 예 중의 하나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불타의 모습이다.
프랑스의 불교미술사학자인 푸셰(A. Foucher)에 의하면 이는 ‘대반열반경’ 권 27이나 ‘오분율(五分律)’ 권 25 등에서 보이는 기원정사(祇園精舍) 건립 기증의 내용을 고부조로 나타낸 불전도라 한다. 설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위성(舍衛城;현재 중인도 Sahet-Mahet)에 불타와 그 제자들이 머물 수 있는 정사 (精舍;사찰이란 뜻)를 기증하기로 마음먹은 수달장자(須達長者;고독한 사람을 잘 돕는다 해서 給孤獨長者라고도 함)가 기타(祇陀, Jeta)태자 소유의 원림이 마땅한 장소임을 알고 사려고 하자, 태자는 이를 거절하려고 금으로 땅을 모두 덮는다면 팔겠다고 한다. 이에 수달장자가 흔쾌히 응낙하고 금으로 땅을 덮기 시작하자 기타태자는 그 용도를 묻고 불덕의 위대함에 감동한다. 태자는 자신이 원림을 기증하고 정사는 수달장자가 지어 공동명의로 불타께 기증하기로 합의한다. 이를 완성하여 기타태자의 수림에 급고독장자가 지은 정사란 의미로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란 이름을 붙여 불타에게 공동 기증한다.
푸셰는 이 장면이 그 기증의 현장을 부조로 나타낸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원광이 있는 맨상투, 통견의(通肩衣;양쪽 어깨를 모두 감싸 입은 옷차림) 차림의 인물상이 불타이고 그 뒤 비구 차림이 이의 건설을 감독 지휘했던 불제자 사리불(舍利弗) 이어야 하며 불타께 마주서서 물병을 기울이는 듯한 인물을 비롯한 귀인 차림의 네 사람이 기타태자와 급고독장자 및 그 수행원이라야 한다.
그러나 ‘잡아함경’ 권 22, ‘중본기경(中本起經)’[後漢 建安 12년, 207년, 曇果와 康孟詳이 함께 번역] 권 하 수달품 제7, ‘현우경(賢愚經)’[445년, 元魏 慧覺 등 번역] 권 10 수달기정사품(須達起精舍品), 40권본 ‘대반열반경’ 권 29, 36권본 ‘대반열반경’ 권 27 및 ‘오분율’ 권 25 등에서 기원정사의 건립 시말을 상술하지만 어느 경우에도 보병을 들고 향수를 불타께 공양하는 의식을 행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이런 내용은 오히려 ‘과거현재인 과경(過去現在因果經)’[435~443년, 劉宋 求那跋陀羅 번역] 권 4의 죽원정사봉시 (竹園精舍奉施) 기록과 일치한다.
따라서 이 불전도의 내용은 <기원보시도>라기보다 <죽원봉시도(竹園奉施圖)>일 가능성이 크다. 푸셰가 서슴없이 <기원보시도>라고 단정한 것은 바르하트대탑의 난순부조로 장식된 <기원보시도>에서 기타태자라고 생각되는 귀인이 물주전자[水注] 형태의 그릇을 들고 불타께 공양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과 바로 연결지어 생각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명문이 없는 이 봉시 장면의 묘사가 어떤 내용인지 단언할 수 없지만 경설의 내용만으로 본다면 차라리 빈비사라(頻毘娑羅, Bimbis-ara)왕이 불타께 최초로 사원을 건립 기증하는 죽원봉시의 장면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전체적인 조형기법이 그리스 미술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1896년 인도불교미술사 대가인 프랑스인 푸셰가 북부 인도의 영국수비대가 있는 호티 마르단(Hoti Mardn)을 방문하였다. 그는 초대받은 장교식당에서 벽난로를 장식하고 있는 일군의 부조를 보고 심장이 멎을 만큼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는 “아, 이 수비대는 흥미로운 그리스 미술관을 가지고 있군요!”라고 감탄하는데, 그 내용이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간다라 불상의 초기양식을 보이고 있는 불전부조였기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이 귀중한 불교미술유품은 여러 박물관으로 나뉘어 보관되는데 <기원보시도>나 이제 언급하고자 하는 <사천왕봉발도(四天王奉鉢圖)>(도판 5)가 모두 그중의 하나이다. 학계에서는 이를 마르단 수집품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마르단 주변의 간다라 지역 여기저기에서 수집된 것으로 출토지는 분명치 않으나 대체로 탑파나 사원의 계단층후판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라고 추정된다. 원래 청흑색질의 편암(片岩)으로 만들어져서 검푸른 색조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벽난로 연기에 오래 그을어 더욱 검은빛을 드러내고 있다. 인체의 사실적인 표현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던 그리스 조각기법을 철저히 계승하고 있어 그리스적인 조형기반 위에서 불상들이 출현하였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다만 <기원보시도>의 불상이 비구나 태자 등 일반인과 같은 크기로 표현돼 자연인으로서의 불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데 반해 이 <사천왕봉발도>에서는 불상의 크기가 사천왕이나 천상의 보살들이라고 생각되는 불타의 권속들보다 배는 더 커져서 신격화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것은 장차 대승경전에서 신비적 요소로 받아들여 구체화시키는 내용이다.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683년, 唐 地婆訶羅 번역] 권 3에서는 부처님의 몸길이가 7주(七?, 열네 뼘)로 보통사람의 두 배가 된다고 하였으며,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703년, 唐 義淨 번역] 권 49, ‘동불의량작의학처(同佛衣量作衣學處)’에서는 부처님의 열 뼘은 보통 사람의 서른 뼘이라 하여 부처님의 몸 길이가 보통 사람의 세 배라고 한 것으로도 짐작이 가능하다.
간다라의 불교도들이 불상 표현의 금기를 깨뜨리고, 불멸 후 5세기 남짓 지난 시기에 갑자기 불타의 자태를 만들어낸 데는 인도에서 베다시대 이래로 위대한 지도자가 가져야 할 관상상의 특징인 32대인상호(大人相好)라는 것이 전해져 내려와서 불교에서 이를 불타 상호의 특징으로 수용하였던 사실에 크게 힘입었던 듯하다.
이것은 간다라 불상과 거의 동시대에 출현하는 마투라 불상이 전혀 상이한 조형 기반 위에서 양식적으로 서로 무관하게 불상을 창조해 내면서 원칙적인 특징에서 모두 크게 어그러짐이 없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장아함경’ 권 1 대본경이나 ‘중아함경’ 권 1 등 비교적 원시 경전에 속하는 경전에서부터 32대인상을 타고난 사람은 출가하면 불타가 되고 재가하면 전륜성왕이 된다고 했다. 따라서 간다라 불교도들은 당시 그 지방의 왕자상을 불상의 본보기로 삼았으리라 생각된다. 실제 <기원보시도>에서 태자의 모습과 불타의 모습은 거의 동일한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다만 불타는 출가한 성자의 자태를 보이기 위해 장식적인 터번을 벗고 양어깨를 덮는 점잖은 옷차림을 하였으며 머리 뒤로 원광이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이 <사천왕봉발도>의 부처님 역시 이런 기본적인 요소를 계승하여 눈이 크고 콧날이 오똑하며 윤곽이 분명한 동서 혼혈적인 얼굴(현재 파키스탄 사람들의 얼굴 모습도 이와 비슷함)에 코밑수염을 기른 장년기의 건장한 남자 모습으로 되어 있다. 터번을 벗은 알상투는 상투끈(쬇紐)과 그를 맺어주는 상투구슬(쬇珠)로 다스려서 마치 중국 무협영화에서 나오는 옛사람의 북상투(團쬇)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매우 사실적인 표현이다.
이 불전도의 내용은 ‘보요경(普曜經)’[308년, 西晋 竺法護 번역] 권 7 상인봉초품 (商人奉?品),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권 32 이상봉식품(二商奉食品)을 도설화한 변상도 (變相圖;불경의 내용을 도설적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경전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타께서 49일을 굶으면서 용맹정진하신 끝에 대각을 이루시고 차리니가(差梨尼迦)나무 아래에서 허기를 달래고 계셨는데, 북천축의 두 상인이 중천축에 와서 장사하여 많은 이득을 얻고 돌아가다가 임신(林神;수풀을 다스리는 신)의 권고로 보릿가루에 우유와 꿀을 탄 음식을 공양하게 된다(이렇듯 불교는 그 출발에서부터 상인들과 밀착돼 상업세력의 사상기반으로 성장한다).
이때 불타께서는 이를 받아 먹을 그릇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사천왕들이 이를 재빨리 알아차리고 각각 발(鉢, patra; 鉢多羅의 약자, 밥그릇의 의미, 중국 문화권에서는 보통 鉢盂로 통용한다) 하나씩을 가져와 바치는데 그것이 금제로부터 은, 유리, 마노(瑪瑙), 차거 (?ㄲ) 등의 보석제품이었다. 그렇지만 불타께서는 이를 모두 물리치고 감청색 돌발우만 받아 그 그릇에 담아드셨다는 것이다(현재 승려들의 발우도 네 짝이 한 쌍을 이루고 있다).
차리니가나무라고 생각되는 오엽수 아래 불타께서 좌정하시고 사방에서 사천왕이 발우 하나 씩을 들어 바치고 있어 경전 내용과 일치된다. 천상에는 두원광의 표시로 보아 천인이나 보살이라고 생각되는 네 사람이 합장으로 이를 축하하고 있다. 눈썹 사이에 백호의 표현과 손바닥에 윤보의 표시가 분명하다.
단독 예배상으로 진전 |
1세기경 쿠샨 왕조 초기부터 대승사상에 입각하여 불전도의 주역으로 자연스럽게 표현되기 시작한 불상은 2세기 중반에 이르면 카니슈카(Kani′ska, 128~151년)대왕의 천하 통일과 불교 외호(外護)의 호운(好運; 좋은 운세)을 만나 화려하게 발전한다. 아마 천하를 통일한 강력한 국력과 전륜성왕으로 군림한 카니슈카 대왕의 광적인 불교 외호의 분위기가 이를 재촉하였을 것이다.
여기에는 카니슈카 대왕의 측근인 협(脇)존자나 마명(馬鳴)존자, 승가라찰(僧伽羅刹)존자, 세우(世友)존자 등 대승론사(大乘論師)들의 입김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결행한 제4결집(結集)에서는 이런 불상 조성을 기정사실화 하였을 것이다.
이로부터 불상은 탑파를 대신하여 가장 중심적인 예배 대상으로 승격되고 본생도나 불전도의 주역에서 탈출하여 단독예배상(單獨禮拜像)으로 독립 조성되기 시작하였던 듯하다.
이것은 현존하는 간다라 불상의 단독 예배상으로 가장 초기 단계의 특색을 보이는 불입상(佛立像)들의 양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큰 북상투(團쬇)를 상투구슬과 상투끈으로 묶은 자연 상투를 보이고 있으며 눈을 크게 뜨고 보통의 귀에 코밑수염이 분명하여 2세기 전기에 제작되던 불전도의 주존으로 부조된 불상양식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도판 6).
그런데 바로 그 뒤를 이어 2세기 중반 양식을 주도하는 단독예배상에서는 초기 부조나 원조(圓彫)양식보다 한 단계 더 진전되고 있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준다. 상투끈을 맺어주는 고리 형태의 구슬 장식인 상투구슬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연 상투의 의미가 퇴색되고 상투 자체가 양식화하면서 신비화하는 현상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는 양식사의 입장에서는 또 한 단계의 양식 진전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도판 7).
원래 인도 문화권에서 남자들이 머리 가꾸는 형태는 머리를 위로 걷어모아 상투를 틀고 그 것을 그루터기 삼아 터번을 두름으로써 추위와 더위 및 모래바람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엄격한 계급사회이던 이곳에서는 상투가 자연히 신분의 차이를 나타냈다. 신분이 높을수록 상투와 터번을 많은 금은보배로 장식하기 위해 높은 상투가 요구되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상투를 트는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장치는 상투 트는 방법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마투라 지역의 우렁상투에서는 비틀어 올린 머리 끝을 상투 끝에서 고정시켜줄 동곳[導玉] 형태의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고 간다라 북상투에서는 상투끈과 그를 맺는 고리[帶鉤]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앞서 본 <사천왕봉발도> 등 초기 간다라 불상에서는 상투끈과 상투끈을 맺어주는 고리인 상투구슬이 분명히 표현되었다.
물론 이런 표현은 출가성자(出家聖者)로서 불타가 가지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장신구였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406년, 後秦 鳩摩羅什 번역, 줄여서 法華經이라고 한다] 권 5, 안락행품(安樂行品) 제14에는 이렇게 표현돼 있다. ‘법화경’이 대승이라는 한 수레의 신묘한 뜻을 열어내 보이는 유일한 여래(如來)의 감춰둔 경전으로 모든 경전 중에서 최상위에 놓이는 경전이라는 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전륜성왕이 천하를 평정하는 과정에 자신의 상투구슬을 최후의 유공자(有功者)에게 하사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이는 상투구슬이 남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최후의 보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자연인의 모습을 범본으로 한 초기 불상에서 이렇게 중요한 상투구슬은 당연히 강조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점차 진행되는 양식진전과 신비화 과정에 상투의 본래 의미가 상실되면서 상투구슬 없이도 상투끈이 저절로 맺어지듯, 상투끈만 표현되기에 이르렀으니, 이런 양식단계에서 불상은 단독예배상으로 독립 조성되는 것이 일반화되어갔던 듯하다.
이런 양식진전 단계가 바로 카니슈카 대왕의 치세시기(治世時期)였다고 생각되는데, 이런 양식의 단독 예배상들이 갑자기 많이 만들어진 사실을 현존 유물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도판 8).
그런데 2세기 후반에 이르면 상투구슬과 상투끈 내지 상투끈으로라도 묶여 있던 자연 상투인 북상투의 묶는 장치들이 양식 진전의 결과로 모두 제거하고 만다. 상투를 묶은 흔적이 없는데도 상투 부분이 저절로 솟아 있는 모습의 양식기법이 나타난 것이다.
차르삿다 출토의 페샤와르박물관 소장 <불입상>(도판 9)이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이를 통해 그 양식기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상투끈의 소멸은 코밑수염의 소멸과 병행하면서 눈두덩의 확장과 귓불의 늘어짐과도 비례하는데 이런 양식진전 현상이 이 <불입상>에는 고루 나타나고 있다. 즉 조각기법에 있어서 양식화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술사의 진행 과정을 보면 이런 양식화의 심화가 의외로 신비화 내지 이상화로 발전해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차라리 그런 경로를 거치면서 미술 양식이 발전해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 <불입상>의 경우도 양식화가 바로 신비화로 이어진 좋은 본보기다. 몇 가지 양식화에서 온 비현실적인 인체의 특징이 오히려 불타의 신격을 상징하는 특상(特相; 특별한 상호)으로 수용되고 있다. 32상 중에 열거되는 육계상(肉쬇相; 살이 상투처럼 솟아 있는 상호)과 수족망만상(手足網킏相;손·발가락에 물갈퀴가 달려 있는 상호)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수족망만상은 원래 간다라 단독 예배상의 출현 초기부터 손가락의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 손가락 사이를 연결시켜 놓았던 데서 연유한 특징이므로 양식 진전에 따른 내용의 변경과는 별로 상관 없다. 그러나 육계상의 경우는 애초에 자연 상투인 북상투가 양식 진전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그 명칭과 양식 출현의 선후문제를 놓고 세계의 불교미술사학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인도불교미술사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간다라 불상의 초기 양식에서 자연 상투인 북상투를 확인하게 된다.
그 다음 초기 단독 예배상에 이르면 상투구슬을 갖춘 양식을 잠시 거치고 나서 상투구슬 없이 상투끈으로만 고정된 북상투로 양식 진전한 것을 보게 되고, 그 이후에는 <도판 9>의 불입상과 같이 상투끈조차 사라졌으면서도 북상투는 여전히 남아 있는 양식을 대하게 된다. 따라서 일찍부터 불교미술사학자들은 육계상이란 조기(早期) 대인상(大人相)에는 포함돼 있지 않았거나, 간다라 조공(彫工)들이 그리스인들의 속계(束쬇 ; kr-obylos)를 모방하여 만들어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의 시사를 받아서 만들어냈으리라는 등 잡다한 주장을 하게 되었다.
이에 인도 학자인 쿠마라스와미(A. K. Coomarasw-amy)는 육계의 산스크리트 원어(原語)인 우스니샤 실샤(uia-ira) 혹은 우스니샤 시라스카타(unia-iraskata)가 원래 육계란 의미가 아니라 ‘머리수건을 높이 쓸 수 있는 머리나 머리칼’ 혹은 ‘갓장식을 높이 붙일 수 있는 머리나 두발’이란 의미라고 밝혔다. 이런 원의(原意)가 2세기 중기 어름에 육계(protuberance of the skull)의 의미로 변질되는데, 이는 32상에 대한 경전 해석의 변화에 연유한 것이며 이런 신비화 작업은 불두(佛頭) 표현의 양식 진전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으리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머리수건을 높이 쓸 수 있는 두상(頭相;머리의 상호, 즉 머리의 생김새)’이라는 자연적인 의미가 ‘육계상’이라는 신비적 의미로 이상화됨으로써 두상 표현을 육계의 형태로 유도해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네덜란드의 미술사학자 반 로하이젠(Van Lohuizen de Leeuw) 여사는 양식사 (樣式史)적인 견해에 주안점을 두고 상투 표현의 양식화 결과로 서기 1세기 말경에 간다라 조각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에서 우스니샤 실샤가 육계라는 제2 의미로 변전(變轉)하였다고 주장하여 쿠마라스와미에게 맞섰다.
두 이론이 결국 우스니샤 실샤의 양대 의미를 모두 인정하고 양식 진전과 의미 변화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에서는 공감하면서도 결국 양식 진전이 먼저냐 의미 변화가 먼저냐 하는 것으로 대립한 것이다.
이는 반 로하이젠 여사가 쿠마라스와미의 주장을 지나치게 의식해 제기한 반론이라 할 것이니, 구태여 선후문제를 따질 것이 아니라 표리를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그래서 경전(經典)이 한역(漢譯)되던 시기인 3세기 이후에는 우스니샤 실샤의 의미가 모두 육계로 바뀐 듯하다. 한역 경전에서는 고역시대(古譯時代; 후한, 서진)부터 구역시대 (舊譯時代;남북조)에 걸쳐 모두 ‘육계’로 번역하고 있다. 다만 당대 이후 신역시대(新譯時代)에 이르면 우스니샤 실샤의 음역(音譯)인 오슬니사(烏瑟춁沙)로 쓰고 있지만 혜림 (慧琳, 737~820년)의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권 4 오슬니사조에 “범어(梵語)니, 여래의 정상(頂相;정수리 상호)을 일컫는 이름이다.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에 이르기를 여래 정상의 육계는 둥근데 가운데가 우뚝 솟아서 드높고 단정하여 위엄이 있는 것이 천개 (天蓋)와 같다고 했으며, 또 하나의 번역에서는 무견정상(無見頂相;볼 수 없는 정수리 상호) 이라 하니 각각 깊은 뜻이 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오슬니사도 육계의 의미로 쓰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대승경전들에서는 이 육계상을 선행(善行)의 과보(果報)로 나타난 상서로운 상호로 합리화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대방편불보은경(大方便佛報恩經)’[失譯 在後漢錄] 권 7에서는 “선행을 잊은 자에게 생각나게 하고, 스스로 오계(五戒)를 지키며, 돌이켜 남을 가르치고, 자비심으로 큰 법보시를 행한 공덕으로 육계상을 얻었다” 하였으며, ‘현겁경(賢劫經)’[300 혹은 291, 竺法護 번역] 권 3, 32상품 11에서는 “보시보(布施報)와 지계보(持戒報)에 의해서 육계를 얻었다”라고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우바이정행법문경 (優婆夷淨行法門經)’[失譯 附北凉錄, 397~439년] 권 상·하에서도 “신구의업(身口意業)으로 보시 지계를 실천하고 달마다 육재(六齋)를 닦고 부모, 사문(沙門;승려), 바라문(婆羅門), 친구, 일가붙이, 덕망 있는 노인 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에 육계상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보녀소문경(寶女所問經)’[281년, 西晋 竺法護 번역] 권 4, 32상품 제9에서는 “어진 이를 공경하여 받들고 존장에게 예절을 지킨 까닭으로 육계상을 얻었다” 하였으며, ‘불설무상의경(佛說無上依經)’[557년, 梁 眞諦 번역] 권 하 여래공덕품(如來功德品) 제4에서는 “십선(十善)을 스스로 행하고 남에게 수행하도록 가르치며 수행자를 보면 환희찬탄 (歡喜讚歎)하여 한량없는 대비심(大悲心)으로 중생을 불쌍히 여기고, 큰 맹세하는 마음을 내 바른 법을 거둬들인 업연(業緣)으로 두 종류의 상호를 얻으니 그 하나가 울니사상 (鬱尼沙相)으로 정골(頂骨)이 솟아올라 자연히 상투를 이루었다” 하였다.
이들은 모두 대승경전에 속하는 불경이다. 따라서 육계상을 포함한 32대인상을 불타만이 가질 수 있는 공덕상(功德相; 공덕을 지은 결과로 얻은 상호)으로 개별적인 합리성을 부여하는 것은 대승사상의 출현 이후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는데, 이 <불입상>에서 보인 것처럼 양식화된 상양식의 비현실적인 인체의 특징(양식화된 북상투)을 특상으로 수용하기도 하였으니, 이것은 불상 출현이 대승사상과 관련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증거의 하나로 꼽아야 할 일인 듯하다.
손발이 모두 파손되었을 뿐 광배(光背)까지 완전하게 남아 있어 2세기 말경이라고 생각되는 양식단계를 대표하는 좋은 자료다. 상투끈이 사라져서 상투는 육계로 신비화되고, 코밑수염도 소멸하여 고졸(古拙)한 미소인 듯 윗입술에 흔적만 남겼으며, 눈은 반쯤 감고 내려다보는 명상형(瞑想形)으로 이상화되었고, 귓불은 귀고리를 단 듯 길게 늘어져서 특상으로 신비화가 완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제반 신비적 요소들은 양식 진전이 그 절정에 이르면서 나타난 양식화 현상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육계(肉쬇)와 나발(螺髮) |
2세기 후반기부터 조각기법상 양식화 현상을 보여 사실적인 인체 표현의 의미를 상실하기 시작한 불상은 첫째로 상투끈을 표현하지 않았는데도 상투가 매어져 있는 신비로운 모습을 보여 육계로의 신비화를 진행시켰고, 둘째로 코밑수염이 소멸하여 흔적만 남김으로써 결과적으로 윗입술을 긴장시킨 고졸(古拙)한 미소를 짓게 하였으며, 다시 귓불을 지나치게 늘여 귀고리 장식에 유리한 모습을 나타냈다.
이것은 분명히 양식화 진행에서 이루어진 세부 표현의 원의(原意) 상실에서 기인한 퇴영양식(退창樣式)으로 보아야 하는데, 불교 교단에서는 오히려 이런 양식화 현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신비적인 요소로 소화시켜 나간 듯하다.
그래서 본래 32대인상 중의 하나로 화려한 머리 장식을 할 수 있게 높고 큰 상투를 틀 수 있는 숱 많은 머리라는 의미인 ‘우스니샤 실샤’가 정수리의 살이 상투 모양으로 솟아올라 있다는 ‘육계’의 의미로 신비화되고, 귀고리 장식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늘어진 귓불이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권 10에서 “고리 끼우는 곳이 실하게 늘어져 있다”고 말하였듯이 정도 이상으로 늘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유행상(遊行相; 돌아다니는 모습)을 기본으로 하는 입상의 경우 왼손으로는 대의 (大衣) 자락을 잡고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보이게 쭉 펴 보여서 두려움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손짓을 짓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이것은 마투라와 간다라 입상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이 경우 이들 손가락을 하나하나 사실적으로 표현한다면 자칫 파손되기 쉬운 결점이 따른다. 그래서 마투라의 경우는 쳐든 손의 손등 뒤에 정면으로 보이지 않도록 꽃봉오리 모양의 받침을 어깨에 수평으로 연결시켜놓는 기법을 사용하였고, 간다라에서는 손가락 사이를 서로 연결시켜 개별적인 파손을 막았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마치 손가락 사이에 막(膜)이 형성된 것처럼 보이게 했는데 불교 교단에서는 이것 역시 신비적인 요소로 긍정하였다. 32상의 “손발에 물갈퀴가 있어 기러기 왕과 같다”는 항목이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어쨌든 2세기 후반으로부터 불상의 양식 진전과 신비화의 진행은 표현과 의미 부여의 양대 요소가 표리를 이루면서 활발하게 변천해가는데, 3세기 전반에 이르면 그 정도가 우심(尤甚)해진다. 라호르 중앙박물관 소장의 <불입상>(도판 10)도 기법상의 양식화와 불신관(佛身觀;부처님 몸에 대한 생각)에서의 신비화가 한창 진행되던 3세기 전반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 중의 하나이다.
우선 머리 모양을 보면 상투 밑부분은 곱슬머리 모양의 자연 상태 그대로인데 상투 부분을 보면 덩어리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돌고 있어서 이른바 나발(螺髮;소라껍데기 모양으로 돌아 올라간 머리카락) 형태를 짓고 있다. 이미 상투끈으로 매어진 자연계의 사실적인 의미는 흔적 없이 사라졌고 육계이면서도 그 부분만은 나발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본 페샤와르 박물관 소장의 <불입상>에서 상투 밑머리의 연장 표현이던 육계 부분의 머리 표현보다 분명히 한 단계 더 양식 진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양식 진전이 하필이면 이와 같이 나발 형태로 진행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불경에서 들고 있는 부처님의 특상인 32상의 내용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중아함경’ 권 11 왕상응품(王相應品) 삼십이상경(三十二相經)에서는 “정수리에 육계가 있어 둥글고 가지런하며 머리카락은 소라처럼 오른쪽으로 돌아 오른다” 하는 항목을 들고 있으며, 이보다 대승 색채가 농후한 ‘방광대장엄경’ 권 3에서는 “정수리에 육계가 있다” “소라 같은 머리카락이 오른쪽으로 돌아 오르고 빛은 검푸르다”는 두 항목을 들고 있는데 모두 머리카락이 나발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로써 나발의 표현을 육계로부터 시도해낸 듯한데, 곱슬머리가 지나치게 곱슬거릴 때도 나발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곱슬머리 표현의 자연적인 양식 진전의 당연한 귀결이 이와 연결되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 머리카락이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가는 것을 나발이라 하는 것은 마투라 불상에서 보이던 나계(螺쬇;우렁상투)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마투라 불상을 이야기하는 기회에 자세히 밝히기로 하겠다.
수염이 사라지는 것도 마투라불상에서 적용되고 있던 불신소년신관(佛身少年身觀; 부처님 몸은 영원히 소년의 몸이라는 생각)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입상에서도 수염 흔적은 더욱 엷어져서 수줍은 듯 미소짓는 앳된 소년의 용모로 변하고 있다.
굵은 목과 윤곽이 분명한 이목구비, 고졸한 미소, 이런 것들이 그리스 신상(神像)과 상통하는 점이 있어 이의 영향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간다라 불상이 마투라 불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스스로의 양식진전에 의해 이룩한 독자적인 기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불전에 나타난 32대인상을 비롯한 불신관이 음양으로 작용하였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시무외인을 하였을 오른손이 파손되었을 뿐 비교적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대좌의 정면에는 사리탑(舍利塔)을 공양하는 비구들의 모습이 부조되어 아직도 사리(舍利)신앙이 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 지나치게 크지 않은 두 원광에 장식이 없는 것은 간다라 불상 양식의 전통을 잘 계승하는 것이다.
3세기 중기 페샤와르를 중심으로 한 간다라 지역에서는 쿠샨 왕조의 번영과 함께 수도권 문화의 난만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난숙기 문화의 특성이 모두 그렇듯이 극도의 세련(洗練)과 전형(典型)의 형성이라는 양대 국면이 전개되어 미술 양식에서는 완성된 양식으로 표준화되어 간다.
키는 130cm 내외이고, 어깨는 둥글어 체구에서 여성화 현상을 찾아볼 수 있으며, 얼굴은 수염 흔적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앳된 소년의 용모로 바뀌는데 수염의 흔적이 남아 고졸한 미소를 보이던 전 단계의 그것에 비해 훨씬 자유로워진 가녀린 미소를 머금는다. 그래서 훨씬 더 이지적이고 냉철한 표정이 되었는데 이것이 당시 사회의 세련된 귀족적 풍모가 아니었던가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페샤와르 박물관 소장의 다울라트 출토 <불입상>(도판 11)이다. 이 <불입상>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눈은 더욱 실눈으로 감기고 귓불은 더욱 길어져서 냉소인 듯 엷은 미소와 함께 신비로운 조화를 이루나, 자칫 냉엄한 신비 속에서 교태가 배어날 듯 위태로운 면이 없지 않다. 이것이 난숙기 미술품이 가지는 황홀한 아름다움이다.
이 불상에 신비적인 요소를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머리카락의 전면 나발화(螺髮化) 현상이다. 바로 전단계에 육계로부터 시작된 나발의 표현이 이제 두발 전면으로 확산되어, 종래 곱슬머리의 자연스러운 두발 표현은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 대신 머리카락은 마치 옥수수 알이 박힌 듯이, 작은 소라껍데기를 질서 정연하게 늘어놓은 듯한 도식적 표현으로 바뀌었다.
이는 미술사적으로 볼 때 양식화의 진행이 가져온 도식적인 표현의 확산이라는 기법상의 뒷걸음질 현상으로 파악해야 할 요소다. 그러나 미술사의 진행 과정에 이렇게 굳어지는 현상이 의외로 하나의 틀로 자리잡는 경우가 허다한데 대개 이들이 신비적인 요소로 승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이러한 전면 나발화 현상이 이후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부상하기에 이른다. 물론 여기에는 앞서도 잠깐 언급하였듯이 부처님 머리카락은 오른쪽으로 돈다는 32상 중의 한 항목을 현실화시켜 부처님 머리카락의 특상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는 교리적인 배경이 작용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원시경전에서 머리카락이 오른쪽으로 돈다고 한 것은 우렁상투를 틀 때 전체 두발이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간다는 의미였으므로, 그 본래 의미는 하나 하나의 머리카락이 오른쪽으로 돌아서 각각 소라껍데기 모양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런데 이와 같이 두발을 전면 나발화시키고 난 다음 단계에서는 교단 쪽에서 오히려 이에 합리성을 부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전면 나발화 현상이 이루어진 이 불상의 출현을 의식하고 기술되었다고 생각되는 ‘선비요법경(禪벙要法經)’[402~412년, 후한의 구라마습 등이 번역] 권 중(中)이나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398~421년, 東晋 佛陀跋陀羅 번역] 권 1 관상품(觀相品) 등 대승경전에, 부처님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소라껍데기처럼 오른쪽으로 말려 있는데 그것을 쭉 뽑아 늘이면 길이가 1장 2척(또는 1장 2척 5촌)이 되고 놓으면 다시 도르르 말려서 소라껍데기처럼 된다고 기록된 것 등이 이를 증명해준다.
어떻든 이러한 단계적인 양식 진전과 교단의 추후 인정이라는 합리적인 과정을 거쳐서 부처님의 특상 중의 특상인 나발이 형성돼온 것을 우리는 이 불상을 통해서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이 불상 양식은 바로 이후 불상의 전범(典範)이 될 만큼 양식적으로 거의 완벽하다고 보아야 하겠다. 즉 신격으로서의 불상양식이 이제야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맨 처음 간다라 미술에서 출현했던 <기원보시도>의 위엄 있는 중년왕자풍 불상이 보이던 자연인으로서의 사실적인 표현과 비교해볼 때 하늘과 땅만큼 용모의 변화가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기본적인 자세에 있어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아무 장식 없는 원판형두광이 그대로이고 양쪽 어깨를 덮어 내린 후직의(厚織衣;두꺼운 천으로 짠 옷)의 통견의복 표현에도 큰 변화가 없다. 다만 옷주름선이 복잡해지고 치마의 아랫부분이 넓어져서 세련된 표현을 보일 뿐이다.
손은 양쪽이 파손되어 자세한 모양을 알 수 없지만 <기원보시도>로부터 입상의 기본적인 자세인 시무외인 형태로 미루어보아 오른손은 어깨 가까이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옷자락을 잡은 모습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양발은 맨발인 채 좌대를 밟고 서 있다. ‘중아함경’ 권 11 왕상응품(王相應品)에서 32상을 열거하는 가운데 발에 대해 제1에서 제6까지 무려 6항목을 첫머리에 들고 있는 것처럼, 이 불입상의 발은 발가락이 가늘고 긴 편평족에 복사뼈가 두드러지지 않은 단정한 생김새다. 1000개의 살이 달린 수레바퀴 문양이 있다는 발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손·발가락 사이에 물갈퀴가 있는 것은 확인된다. 발가락 사이에 물갈퀴가 나타나므로 파괴된 손가락 사이에도 그것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좌대 정면에는 4부대중이 탑을 공양하는 광경이 부조돼 있어 탑파신앙의 여운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3세기 말경에 이르면 쿠샨제국이 노쇠해지면서 불상에서도 양식 파탄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라호르 중앙박물관 소장의 <불좌상>(도판 12)이라 할 수 있다.이를 통해 그 실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불좌상은 양식파탄을 보인 퇴영양식이다. 육계 부위가 나발화돼 있는데 상투끈뿐만 아니라 상투구슬의 표현이 분명하고 상투 아래는 편도 모양의 머리카락이 있어 간다라 불두의 변천과정 가운데 어느 단계에도 편입시킬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좁은 이마에 눈썹과 눈자위 위에 윤곽선이 가해지고 두 눈썹이 백호 아래에서 연결돼 마투라 후기 양식에서 보이던 특징까지 나타난다. 귓불은 늘어지고, 코밑수염이 양감있게 표현되며, 목에는 삼도 (三道;세 가닥의 목줄선)가 분명하고, 옷주름 표현에는 마투라적인 음각선이 첨가되는 등 간다라 불상과 마투라 불상에서 보이던 모든 양식적 특색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이로 보면 이 불상은 이미 간다라에서 양식 진전의 한계를 보인 3세기 후기에 종래의 모든 양식적 특색을 아무 생각 없이 혼합하여 이루어낸 파탄양식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파탄양식이 양식으로 정립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이런 파탄 양식은 몇몇 일관되지 않은 양식의 불보살상을 남기고 소멸한 듯 그 유례가 많지 않다. 쿠샨제국 문화의 노쇠화를 반영하는 양식파탄현상인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가야산폐사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삽교석불입상 (0) | 2018.09.29 |
---|---|
[스크랩] 우리나라의 현재 파악된 마애불 수 (0) | 2015.09.14 |
[스크랩] 가야산 ‘폐사지’ 지역 살릴 수 있는 자원 (0) | 2014.12.15 |
정도전의 호 ‘삼봉’은 도담삼봉이 아니다 (0) | 2013.08.28 |
석등의 구조 (0) | 2013.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