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주변의 문화재

조병식

phllilp7 2015. 5. 20. 10:45

조병식

충청도 관찰사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서질(庶姪)이다

조병갑 사촌

태인군수 조규순(趙奎淳),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과 사촌간이다

보덕사 산신탱화는 1877(고종 15)에 관찰사 조병식의 시주를 받아 제작한 것으로 가로 96cm, 세로 123cm 크기에 호랑이를 타고 앉은 산신의 모습이 인상적이다.(성보박문관)

    

 

 

 

 

 

본관 양주(楊州). 자 공훈(公訓). 시호 문정(文靖). 1858(철종 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1860년 검열(檢閱)이 되고, 1862(철종 13) 전라우도 암행어사를 거쳐 1874(고종 11) 강화유수(江華留守), 1876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1878년 탐학(貪虐)하다는 죄로 전남 지도(智島)에 귀양간 뒤 이듬해 풀려나와 1885년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가서 대원군의 석방을 주청하였다.

 

귀국 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 예조 ·형조 판서를 거쳐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가 되어 1888년 조선국 대표로 러시아 대표 베베르와 한로육로통상장정(韓露陸路通商章程)을 체결하여 열국의 이목을 끌었다. 1889(고종 26) 함경도관찰사로 있을 때 흉년이 들자 양곡의 일본 수출을 막고자 방곡령(防穀令)을 선포, 일본의 반발을 사 일본정부에 11만 원의 배상금을 냈다.

 

강원도관찰사, 이조 ·공조 판서, 경기도관찰사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동학교도들이 교조(敎祖)의 신원청원서(伸寃請願書)를 보내오자 이를 일축, 오히려 더욱 탄압을 가해 동학농민운동의 원인(遠因)이 되었다. 정부는 그를 파면하였다.

 

그 뒤 의정부찬성으로 복직,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선동하여 독립협회(獨立協會) 타도에 나서, 고종에게 무고하여 수많은 개화당 요인을 투옥시켰다. 뒤에 의정부 참찬(參贊) ·법부대신 서리를 지내다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규탄을 받고, 독립협회를 무고한 사실이 드러나 체포령이 내리자 외국인 집에 피신하였다. 1890년 주일특명전권공사를 지내고, 1902년 궁내부 특진관 ·외부대신, 1905년 참정대신 ·돈령부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조병식은, 고종 28(1891) 충청도 관찰사로 두 번째 부임하여 역임 시 동학교도들이 교조의 신원청원서를 보내왔으나, 이를 묵살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동학교문에 대해 탄압과 기찰을 강화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켜 정부의 무마책으로 18931월에 경질되었으며 이때 세운 것 같다.

 

이것은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고 보살펴준 은덕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 아니라, 관찰사로 이 지역을 순찰시, 조선말 관리들의 관행으로 세워진 것으로 충청 지역 곳곳에 세워놓은 것 중 하나이다.

 

조선의 마지막 문장으로 유명한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은 부패한 조선 말기 어사 박문수 못지않은 강직함과 애민정신으로 탐관들을 고발하고 백성들을 구제한 인물이었다. 이건창은 강화에서 태어나 고종 3(1866) 15살에 문과에 급제했지만 너무 어려서 4년 후에야 비로소 옥당(玉堂: 홍문관)에 들어갔다. 고종은 동갑나기이며 뛰어난 문장가인 그에게 각별한 정을 보여 혈기 왕성하던 23(1874) 처음 암행어사로 내보냈다, 1876년 충청도관찰사 조병식의 탐학(貪虐)을 탄핵했다가 어처구니없는 화를 당했다. 그 이유는 당시 권문세가의 호랑이 코털을 뽑은 것이다.

 

조병식은 철종 때 좌의정, 고종 때 영의정에까지 오른 조두순(趙斗淳)의 일가붙이로 위의 설명문 내용에도 나와 있듯이 능란한 처세로 나중 외무대신에 오른 협잡꾼이다. 조병식은 두 번째 충청도관찰사로 있는 동안 동학교도들의 교조 최재우(崔濟愚) 신원(伸寃)을 탄압해 농민혁명의 불씨를 심었다. 일족인 조병갑(趙秉甲)은 고부군수로 있는 동안 군민의 고혈을 짜내는 학정으로 동학운동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런 조병식인지라 암행어사 이건창이 도리어 모함 받아 저 멀리 벽동으로 유배되었다.

 

1898년 의정부참정에 올랐으나 이 무렵 황국총상회장(皇國總商會長)이 되어 황국협회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만민공동회로부터 규탄을 받았다. 민종묵(閔種默이기동(李基東) 등과 함께 당시 이른바 5흉으로 독립협회를 타도하는 데 선봉에 서는 등 횡포가 심하여 만민공동회의 규탄을 받고, 독립협회를 무고한 사실이 탄로되어 체포령이 내려지자 외국인 집으로 피신 등, 조선말 조선 백성이 용서 할 수 없는 악질관리 중 한명이다.

                                                   남연군충정비(조두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