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군

[스크랩] 흥선 대원군 이하응

phllilp7 2014. 9. 28. 12:48

 

 

 

 

                           흥선대원군  이하응                        興宣大院君  李昰應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아들 고종(高宗)의 즉위로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왕(王)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으면서도, 살아 있는 왕의 아버지로 대원군(大院君)에 봉해지고,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는 섭정(攝政)을 맡게 되었다.

 

 

그가 정치를 주도하였던 19세기 후반 조선은 여러 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급변(急變)하는 세계정세를 따라잡지는 못하였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새로운 세계사적 흐름과 세도정치(勢道政治)로 피폐한 국가의 재건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야 했던 흥선대원군은 오늘날 한편에서는 개혁(改革) 정치가로, 다른 한편에서는 보수적(保守的)인 국수주의자(國粹主義자)로,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흥선 대원군 이하응은 1820년 12월 서울 안국동에서 출생하였다.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7세에 아버지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를 여의었다. 13세에 민씨(閔氏)와 결혼한다.  그 후 왕족으로서 한직(閑職)을 전전하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극(極)에 달한 시절...불우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큰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하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였지만, 당시의 철종(哲宗)에게 후사(後嗣)가 없었던 점을 잊지 않고, 조대비(趙大妃..대왕대비)와는 가깝게 지내며, 후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안동김씨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세도가문의 잔치집을 찾아다니며 걸식(乞食)도 서슴치 않았고, 세도가들이 식은 전에 침을 뱉어 내던지면, 그것을 얼른 주워 도포자락에 쓱쓱 닦아 앙천대소(仰天大笑)하며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모욕도 감수하였다. 그리고 천하장안(천희연.하정일.장순규.안필주)이라 불리는 시장의 건달들과 어울리며 놀았다. 

 

 

그는 풍수지리를 굳게 믿어,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경기도 연천에서 충청도 예산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지관(地官)에 알아보아 두 군데를 추천 받는다. 한 곳은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즉 왕이 두명 나온다는 명당)인 충청도 예산과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라는 충청도 광천 지역 중..이하응은 당연히 예산땅을 선택하고 아버지 묘를 이장하는 것이다. 이후 7년만에 아들 명복(命福)을 낳고.....그리고 고종과 순종(조선의 마지막 王)...두명의 왕이 탄생하는 것이다.

 

 

 

 

                                         파락호                        破落戶

 

 

 

 

이하응(李昰應)은 혈통으로 보면 인조(仁祖)의 셋째 아들 인편대군의 8세손으로 왕권과 그다지 가까운 왕족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이 정조(正祖)의 이복형제인 '은신군'의 양자(養子)로 들어감으로써 영조(英祖)로부터 이어지는 왕가(王家)의 가계(家系)에 편입되어 왕위(王位)와 가까워졌다. 

 

 

그러나 당시 '안동 김씨 (安東 金氏)'의 세도정치 상황에서 왕위와 멀지 않은 왕족(王族)이라는 것은 그다지 축복이 아니었다. 헌종(憲宗) 이후 끊어진 정조(正祖)의 직계는 정조(正祖)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손자인 철종(哲宗)으로 이어졌고, 철종마저도 후사(後嗣)가 없는 상태에서 그나마 왕위와 가까운 왕족들은 모두 왕이 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안동 김씨'들로부터 끊임없는 견제를 받아야 했다.

 

 

안동 김씨는 세도(勢道)를 이어가기 위해 자신들이 골라서 강화도(江華島)에서 데려온 철종(哲宗)처럼 정치에 문외한(門外閑)인 왕을 원했다. '안동 김씨'들은 조금이라도 왕(王)의 재목으로 보이는 왕족들을 끊임없이 견제하였고, 견제는 역모(逆謀)라는 무서운 누명으로 이어졌다. 조금이라도 왕의 자질이 있어 보이는 왕족은 꾸미지도 않은 역모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멀리 귀양가서 죽임을 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혈통적으로는 왕의 자리와 멀지만 편입된 가계상(家系上) 왕권과 제법 가까운 자리에 있던 이하응(李昰應)이 택한 목숨의 부지 방법은 건달처럼 행세하는 것이었다.

 

 

이하응은 야심 없는 파락호(破落戶)를 자처하고 '궁도령' 혹은 '상갓집 개'라는 치욕적인 별명까지 얻으며 세도가(勢道家)들의 눈을 피한 이하응은 아무도 모르게 조대비(趙大妃)와 연줄을 대어 자신의 야망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조대비(趙大妃)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순조(純祖)의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의 세자비(世子妃)로 아들 헌종(憲宗)이 왕위에 오르면서 대비(大妃)가 되었지만, '안동 김씨'를 친정으로 둔 시어머니 순원왕후(純元王后)에 밀려 한(恨) 많은 궁중생화를 했던 비운(悲運)의 대비(大妃)이었다. 

 

 

당시 조대비(趙大妃)는 순원왕후(純元王后) 사망 이후 궁중의 최고 어른이 되어 '안동 김씨'에게 친정의 원한을 갚을 기회를 찾고 있었다. 이하응은 조대비의 조카 조성하(趙成夏)와 친교를 맺어 조대비에게 접근하였고, 철종(哲宗)이 후사(後嗣)가 없이 죽을 경우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철종의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도록 설득하였다.          

 

 

 

 

 

 

 

 

 

 

드디어 철종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이하응은  평소 가깝게 지내던 조대비(趙大妃)와 상의하여 그의 아들 명복(命福)을 왕으로 만든다. 12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高宗)이다. 대원군(大院君)이라는 호칭은....王이 후사 없이 죽어 종친(宗親) 가운데에서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 새로운 왕의 생부(生父)를 말한다. 조선에 4명의 대원군이 있었지만, 이하응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어서 추존(追尊)되었다.  따라서 흥선대원군은  살아있는 대원군이라고 불리었다. 

 

 

1863년 12월 초, 철종(哲宗)이 사망하자, 조대비(趙大妃)는 이하응과 맺은 묵계(默計)대로 그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철종의 후사(後嗣)로 지명하였다. 12살 고종(高宗)은 이렇게 그의 아버지 이하응의 노력으로 왕위에 올랐고, 이하응(李昰應)은 왕이 아닌 왕의 아버지, 즉 대원군(大院君)이 되었다. 조선 역사상 대원군은 선조(宣祖)의 아버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인조(仁祖)의 아버지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그리고 고종(高宗)의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등 모두 4명이 있지만, 왕의 아버지로 왕이 즉위할 때 살아 있었던 사람은 '흥선대원군'이 유일하였다.  

 

 

어린 나이의 고종(高宗)을 왕으로 지명한 조대비(趙大妃)는 수렴청정(垂簾廳政)을 하면서 정책결정권(政策決定權)을 흥선대원군에게 주어 그의 집정(執政)을 이루게 하였다. 오랫동안 세도가(勢道家) 양반들에게 무시당하며 절치부심 기회를 누리던 흥선대원군은 시정(市井)의 건달 행세를 하면서 깨달은 당시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개혁정책을 통하여 해결하고자 했다.    

 

 

 

 

 

                                                   영정                         影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장년기와 노년기, 전신초상(全身肖像) 6점으로 이 가운데 5점은 서울역사박물관, 1점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5점의 초상은 모두 조선 말기 최고의 어진화사(御眞畵師)인 ' 이한철(李漢喆) '이 그렸는데, 먼저 그린 3점, 즉 흑단령포본(黑團領袍本), 금관조복본(金冠朝服本), 와룡관학창의본(臥龍冠鶴창衣本)은 고종(高宗) 원년(元年)인 1863년, 44세 때 그린 초본을 토대로 하여 50세가 되던 1869년에 이모(移模)된 것이고, 뒤에 그린 2점은 환갑을 맞은 1880년의 61세 주갑상(周甲像)이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때마다 매번 옷을 갈아 입었다. 눈부신 예복과 당당한 관복(官服) 그리고 깔끔한 평상복 두어 벌, 매무새는 지금껏 남아 있는 그림들에 고스란하다. 몸에 딱 맞는 의관(衣冠)이 하나같이 귀티 나고 있다.

 

위 그림에서 입은 옷과 깃과 도련에 검은 천을 댄 연초록빛 학창의(鶴창衣)이다. 사대부나 학자가 한가로이 걸치는 평복인데, 숱이 달린 띠가 드리워져 맵시가 여간 아니다. 모자도 이채롭다. 세로로 골이 지고 가운데가 높다. 와룡선생 제갈량(諸葛亮)이 즐겨 써서 '와룡관(臥龍冠)'이다. 그 안쪽을 보면 세심한 묘사에 입이 딱 벌어진다. 와룡관 속에 탕건, 탕건 속에 망건, 망건 위에 상투가 모두 비치고 있다. 

 

흥선대원군은 초상화를 그린 내력을 오른쪽에 기록하였다. ' 경진년에 태어나 기사년에 초상을 그리니 이때가 쉰살이다 ' 쉰 살이라니 ! 웬걸, 치켜뜬 눈과 도톰한 눈두덩, 탱탱한 피부에 기운이 성하다. 실은, 44세 때 초본을 그려놓았다가 6년 뒤에 완성한 그림이다. 나이에 비해 젊은 안색이 슬며시 끼어 들어간 것은 그 때문이다. 흥선대원군의 50세는 ' 10년 섭정(攝政)'의 이력이 붙었을 때이다. 이 그림에 느긋한 자신감이 보인다. 

 

초상화의 형식도 매우 새롭다.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유례가 드물게 장식품이 가득하다. 키 높은 탁자에 놓인 기물(器物)은 서첩, 청화백자, 도장, 탁상시계, 벼루, 단주(短珠), 타구, 안경 등이다. 협탁에 향로와 향꽂이, 발치에 팔을 괴는 장침이 있다. 모두 초상화의 주인공이 아끼던 물건이다. 탁자에 세워둔 칼, 칼집에서 칼을 뺏다.       

 

 

 

 

 

 

 

 

이 6점의 초상화는 일괄하여 보물 제1499호 지정되어 있다. 모두 복식(服飾)이 다르며 의관(衣冠)과 기물(器物)이 매우 화려하고 성대할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이한철(李漢喆)이 그려 수준 높은 묘사력과 화격(畵格)을 보여주는 최상급의 걸작들이다.

 

더욱이 뛰어난 필력(筆力)을 자랑하였던 이하응(李昰應)의 친필(親筆) 표제(表題)와 영정함 안에 써넣은 별폭의 홍지표제(紅紙表題), 궁중 표구장의 족?장(簇子表粧), 유소(流蘇), 영정보, 향낭, 영정함, 영정함보 등이 고스란히 전하고 있어 조선 말기 왕실의 아름답고 격조 있는 초상화 문화를 종합적으로 엿볼 수 있다.  

 

 

 

 

                                                흥선대원군의 묘(墓)

 

 

 

 

흥선대원군의 묘(墓)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흥원(興園)이라고 한다. 1898년에 사망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묘는 처음에는 고양군 공덕리(지금의 마포구 염리동 동도중고등학교 자리)에 있다가, 1906년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되었고, 1966년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겨졌다.   

 

 

 

 

 

 

 

 

 

 

 

 

 

 

 

 

1898년 2월 흥선대원군은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현재의 마포구 염리동)의 운형궁(雲峴宮) 별장 '아소당(我笑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아버지의 묘를 쓰는 일에 운명을 걸었던 노정객(老政客)은 그대로 아소당(我笑堂) 뒤뜰에 묻혔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10년이 흐른 뒤에야 조정은 흥선대원군의 묘(墓)인 흥원(興園)을 '아소당' 뒤뜰에서 경기도 파주 운천면 대덕동(현재의 경기도 파주군 문산읍 운천리)으로 옮겼다. 첫 번째 천봉(遷奉 .. 왕실의 묘를 이장하는 일)이었다. '흥원천봉등록(興園遷奉騰錄)'은 흥원(興園)을 경기도 파주로 천봉할 당시의 기록을 옮겨 적은 책이다. 흥원(興園)을 천봉하는 과정과 거기에 들어간 물력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당시 국가차원에서 시행한 천봉(遷奉)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1966년 흥원(興園)은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로 또 한번 자리를 옮긴다. 흥원 일대에 미군(美軍) 군사시설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척화비(斥和碑)까지 세우며 외세(外勢)를 배척하였던 그가 사후(死後)에도 외세(外勢)에 밀려 쉴 곳을 옮겨야 했다는 점이 얄궂다.      

 

 

 

 

                                          아소당                        我笑堂

 

 

 

아소당(我笑堂)은 지금의 마포구 염리동 150번지 '동도(東都)중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이다. 원래는 그의 손자 '준용(埈鎔)'의 99간 집이었으나, '준용'이 교동도(僑洞島)로 귀양을 가게 되자 운현궁에 유배(流配)를 당했던 흥선대원군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이름을 아소당(我笑堂)이라 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죽어 처음에는 이곳에 묻혔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회한(悔恨)이 담긴 ' 아소당(我笑堂) '이라는 제목의 시(詩)를 남겼다.

 

 

 

                                    오부오신임불경              吾負吾身任不輕

                                    퇴공한일주준경              退公閒日酒樽傾

                                    종지왕사개오몽              從知往事皆吾夢

                                    유괴여년임세정              惟愧餘年任世情

                                    리극산촌리담호              理극山村俚談好

                                    문선계류고시성              聞蟬溪柳古詩成

                                    세론백세안배지              世論百歲安排地

                                    아소전생우차생              我笑前生又此生

 

 

                                    나의 짐, 나의 몸이 맡은 것이 가볍지 않은데

                                    벼슬에서 물러나와 한가로이 술잔만 기울이네

                                    지난 일을 생각하면 모두가 한바탕 꿈인 것을

                                    오로지 남은 생애 세속에 맡기자니 부끄럽네

                                    나막신 신고 산촌을 걸으니 시골 덕담이 좋아

                                    냇가 버들그늘에서 매미소리 들으며 시를 짓네

                                    세론은 어찌 나를 물러난 신분이라고 말하나

                                    전생도 이승도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만 나네

 

 

 

흥선대원군은 1870년, 공덕리에 자신의 묘자리를 조성하고, 묘(墓) 앞에 아소당(我笑堂)이라고 하는 별장을 짓는다. 부암동에 있는 석파정(石坡亭)이 1866~1867년 사이에 김흥근(金興根)의 별장을 반강제적으로 빼앗은 별장이라고 한다면, 아소당(我笑堂)은 흥선대원군이 직접 길지(吉地)라고 알려진 곳을 찾아 자신이 묻힐 묘지를 조성하면서 건립한 첫 번째 별장이기도 한 셈이다. 아래의 사진들이 바로 아소당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을 당시의 모습들이다.  

 

 

 

 

 

 

 

 

 

 

 

 

 

그리고 이곳 아소당(我笑堂)은 1873년 11월 4일 고종(高宗)이 명성황후의 조언과 최익현(崔益賢) 등의 상소(上疏)를 받아들여 친정(親政) 체제로 들어 가면서 정치의 중심에서 갑자기 밀려난 흥선대원군이 본저(本邸)인 운현궁(雲峴宮), 양주의 직동(直洞) 별장을 함께 오가며 머물면서 복수의 칼날을 갈던 곳이기도 하다.

 

 

흥선대원군 자신은 훗날 한사코 부인(否認)한 바 있지만, 1895년 10월 일본의 주한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명성황후 시해(弑害)의 직접 하수인인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를 보내 흥선대원군에게 승락을 받아낸 곳도 역시 이곳 아소당(我笑堂)이다. 1898년 1월 세상을 떠난 여흥대부대부인 '민씨'의 뒤를 이어 같은 해 2월 운현궁에서 세상을 떠난 흥선대원군이 돈의문을 지나 자신의 식은 몸을 누인 곳도 바로 이곳 아소당이다. 흥선대원군은 1907년 대원왕(大院王)으로 추봉(追封)되고, 9월에 이장(移葬) 논의가 일어나 1908년 1월 30일, 그의 묘(墓)가 파주로 이장되고 흥원(興園)으로 위상도 높아지게 되었다.   

 

 

 

 

 

 

                                      1차 집권                     一次 執權

 

 

 

 

 

1863년 아들인 고종(高宗)이 12세에 즉위하자 조대비(趙大妃)가 수렴청정하였으나, 이는 형식적이었으며  실질적으로는 이하응에게 전권(專權)을 위임한다.  이하응은 '안동김씨' 일파를 모두 축출하고, 문벌(門閥)을 배제한 인사 등용을 시행한다.

 

 

 

 

                                         개혁정치                   改革政治 

 

 

 

 

흥선대원군은 일단 19세기 초부터 시작된 세도정치(勢道政治)의 고리를 끊기 위해 '안동 김씨' 주류들을 대거 정계에서 몰아냈다. 그 와중에 국정의 공백을 막기 위하여 '김병학' 등 일부 안동김씨와는 손을 잡았고, 당파를 초월한 인재 등용과 부패(腐敗) 관리 척결에 힘썼다. 그는 조선 후기 오랫동안 계속된 붕당(朋黨) 간 갈등과 국가 재정 파탄의 일부 원인이 전국에 널리 퍼진 서원(書院)에 있다고 보고 47개의 중요한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철폐하였다.

 

 

그리고 법전(法典)의 간행을 통하여 19세기 변화된 사회에 적합한 법률 제도를 확립하였고, 세도정치 동안 비대해진 신권(臣權)을 제한하고 왕권 강화를 위한 여러가지 정책들을 전개하였다. 비변사(備邊司)를 페지하고 양반에게도 세금(稅金)을 징수하였으며 사치(奢侈)를 근절하기 위하여 의복(衣服)제도를 고치고 사창(私倉)제도의 실시로 지방관리의 부정을 막고 민생을 안정시켰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는 양반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양반들은 크게 반발하였지만, 흥선대원군의 개혁(改革)으로 국가에 대한 의무(義務)와 부담을 고스란히 양인(良人)에게 전가하고, 사유층의 권리만 누렸던 양반층에게 그 부담이 일부 돌아감으로써 국고(國庫)는 풍족해졌고, 양인(良人)의 부담은 줄어들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

 

 

 

 

 

 

 

 

그  당시 서구 열강의 개방압력이 점점 노골화되었으나, 대원군은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맞섰다.

1866년 평양에서의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프랑스와의 병인양요(丙寅洋擾)...1871년 미국과의 신미양요(申未洋擾)가 일어 났으나, 대원군은 단호한 집념으로 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척화비(斥和碑)까지 세웠다. 

 

 

제너럴셔먼號가 대동강에 가라 앉았다는 보고를 받은 대원군은 그 배를 건져 한강으로 옮겨다가 연구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그 배를 그대로 만들라고 지시한다. 김기두 등 기술자들이 수많은 경비와 조선정부에서 보유한 동(銅)과 철(鐵)을 거의 다 사용하여 1876년 제너럴셔먼호와 동일한 형태의 선박을 만드는데 성공하였고, 연료는 목탄을 사용하였다. 처음 그배는 움직이지 않았고, 다시 고친 뒤에는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경복궁(景福宮)의 중건(重建)

 

 

 

 

조선(朝鮮)은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조화를 표방한 나라이었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조화(調和)는 세도정치(勢道政治)라는 신권(臣權)의 독주로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상태에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비정상적으로 커진 신권(臣權)을 제압하기 위하여 왕권(王權)의 강화를 도모하는 정책을 위주로 개혁을 주도해 나갔는데, 이는 조선이 세계사(世界史)의 커다란 물결 속에 휩쓸리지 않았다면 일정 정도는 주효한 개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는 19세기 후반, 일찌감치 산업혁명 등을 통하여 발달한 기술문명의 세례를 받고 제국주의화 되어가던 서양국가들은 거침없이 동양으로 진출해 오고 있었다. 이러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기 속에서 흥선대원군의 왕권(王權) 강화에 대한 집착은 일부분 시대착오적(時代錯誤的)인 면이 없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는 왕권 강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기로 한다.     

 

 

경복궁(景福宮)은 헌종(憲宗) 때 수리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재정이 모자라 보류되었다. 대원군은 안동김씨 세력들에 의하여 실추된 왕실(王室)의 권위를 되찾기 위하여, 반대를 무릎쓰고 그 중건을 강행한다. 세금을 인상하고 인두세(人頭稅)라는 특별세금을 부과하고, 장정들을 징집하여 매일 수만명을 동원하였다.  또한 춤꾼과 노래 잘하는 기녀(妓女)를 모집하여 인부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열었다. (바우덕이 사당패에게 당상관(堂上官)의 옥관자를 수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원납전(願納錢)이라는 강제 기부금을 백성들에게서 징수하고, 다시 당백전(當百錢),원납전(願納錢)을 만들어 공사비를 조달하였다. 재목이 부족하자, 전국 각지의 무덤가에 있는 나무까지 벌채하고는, 이것은 국가의 성스러운 일이니 그대 집안 先代가 영험이 있다면 필시 즐겨하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하였다.

 

 

 

 

                                                   서원(書院)의 정리

 

 

 

 

 

대원군은 書院에 대하여 적대적이지는 않았지만, 서원이 당쟁의 소굴이 되며, 백성들에게 고혈을 긁어 모으고, 심지어는 사형(私刑)을 가하였으므로 집권 직후 서원철폐령을 내렸다. 이 지시로 47개의 서원을 제외한 수백여개의 서원이 철폐되었다. 이 철폐령을 취소해 달라는 전국 유림(儒林)들이 집단 상경(上京) 집회가 있었으나, 이때마다 대원군은 유림들의 집회를 강제 진압하고, 유림들을 노량진 밖으로 축출하여 유학자들의 심한 반발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서원(書院)의 착취로 고통받던 백성들로부터는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천주교,동학(東學) 등 종교 탄압.

 

 

 

 

대원군은 처음 남하정책을 펴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하여 베르뇌 주교(천주교 조선교구장)에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곧 강경정책으로 바뀐다. 천주교는 조선 정치에 개입할 의사가 없어서 이용가치가 없었고, 천당과 지옥을 주장하는 천주교는 엄격한 계급사회에 어울리지 않았고, 서구 열강들은 천주교를 앞세워 침투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1866년 1만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새남터,절두산,해미읍성 등 전국에서 처형당한다. 이때 선교사 12명중 9명이 처형 당하고, 여기서 탈출한 프랑스신부 리델은 청나라로 가서 프랑스 함대사령관에게 이 사실을 통보한다. 프랑스는 함대 7척과 군사 600명을 이끌고 강화도로  침입하여 서강까지 들어 왔으나, 강화도 정족산성 전투에서 대패하고 철군한다(60명 戰死). 이때 양헌수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의 피해는 사망 1명,부상 4명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당시 널리 전파되던 동학(東學)에 대하여, 그 창시자 최제우(崔濟隅)를 처형한다.

 

 

 

 

 

                                                                                 

 

 

 

 

1873년 최익현 등 보수적 유학자를 앞세운 高宗의 견제로 대원군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고, 이후 조선은 쇄국정책을 버리고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계기로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1891년 대원군 측근인 안기영 등의 주도로 흥선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이재선 추대 음모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는 내부의 고변으로 실패하고 안기영,이재선 등은 처형당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舊式) 군대의 추대로 재집권하게 된다. 이때 고종의 부인인 명성황후는 변장을 하고 궁궐을 벗어나 고향인 여주로 내려가 은신하였다. 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 보고한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민씨세력과 내통한 淸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대원군 자신도 청나라 천진으로 압송되어, 제2차 집권은 1개월만에 실패하였다.이후 대원군은 4년간 중국 천진에 억류되어 생활하였고, 1895년 민씨 세력들이 친러, 친일 등의 성향을 보이며 청나라를 견제하려하자, 청나라의 정치적 계산으로 4년만에 귀국하였다.

 

 

 

 

 

 

 

 

 

 

 

 

 

 

 

 

 

 

                                    제3차 집권                  第3次 執權 

 

 

 

 

 

 

1892년 운현궁(雲峴宮...대원군의 私家)에서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견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황현(黃玹.1855~1910)은 명성황후가 대원군 일파를 폭살하기 위하여 벌인 짓이라고 하였다.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에게 폭약을 보내 폭사시켰던 전례에 대한 정치적 보복이라는 주장이었으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이때 흥선대원군의 사랑채와 큰아들 이재면(李載冕), 손자 이준용(李埈鎔) 부자의 거처에도 폭약이 장치되어 있었으나, 점화되기 전에 발견되었다.

  

 

1893~1894년..동학(東學)에 의한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의 죄를 며하고져 벌이는...전봉준이 주도하였다)을 기회로 삼아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실패한다. 이때 대원군은 전봉군의 지도자와 밀통하였다는 견해가 있고, 체포된 동학의 지도자 전봉준은 대원군과 내통 여부를 추궁당하기도 하였다. 동학운동을 기화로 일본군은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하고, 대원군은 일본군이 호위아래 입궐하였다.

 

 

 

 

 

 

 

 

 

 

 

입궐한 대원군과 이준용은 명성황후의 축출을 추진하지만 일본측의 반대로 실패하고, 대산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감시를 더욱 강화한다.1894년 갑오개혁 당시 대원군은 일본의 종용에 의하여 제3차 집권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바라는 것과는 달리 대원군이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관철하려 하자, 일본은 대원군과 이준용의 항일운동 증거를 들이대며 공직사퇴를 요구한다. 

 

 

여기에는 고종도 사전에 동의하였다. 대원군은 자신이 추진한 항일운동에 대하여 일본 공사 이노우에(井上馨)에게 사과하고, 손자 이준용의 장래 교육을 부탁하고 물러났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대신하여 김홍집내각(金弘集 內閣)을 앞세워 경장사업(更張事業)을 추진한다.

 

 

 

1895년 일본 공사로 부임한 미우라는 민비(명성황후)의 제거를 추진하는데 이때 대원군을 끌어 들이려 하지만 대원군은 처음에는 거절하였다.  대원군은 장손 이준용이 강화도 교동에 유폐된 이래 불만을 품고 공덕동 별장에 칩거하면서 외출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일본측은 대원군을 찾아가 대원군을 설득하였고, 드디어 일본은 명성황후를 살해한다. 이후 대원군은 친일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 민비는 옷을 바꿔 입고 변장을 하고 있었는데, 민비를 식별하여 알으켜 준 인물이 대원군이라고 한다. 즉 민비의 시해현장에 대원군이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주장이기는하지만, 최소한 일본은 대원군의 양해를 받았으며, 시해 현장에 있었다는 얘기도 사실인 듯하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 高宗과 太子가 러시아공관으로 옮겨지자 대원군은 은퇴하여 다시 양주로 은거(隱居)했다. 그리고 1898년 그 곳 양주에서 죽었다. 지금의 남양주이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무덤은 세번의 이장(移葬)끝에 이곳 남양주에 다시 묻혔다. 그가 죽자 처음에는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에 그의 부인과 같이 묻혔으나, 1908년 경기도 파주군 운천으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1966년 이 곳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섭정(攝政)이나 수렴청정(垂簾廳政)은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임시적(臨時的)이라는 한계가 있다. 어리다는 이유로 권력을 잠시 위임해 주었던 왕은 성장하면 원래 자기 것이었던 그 권력을 반드시 되찾으려 한다.  

 

  

 

                                                    아버지와 아들

 

 

  

 

흥선대원군의 아들 고종(高宗)도 예외는 아니었다.12살에 왕좌에 오르면서 아버지에게 권력을 위임하였던 고종(高宗)이 22세가 되어서도 여전히 아버지의 그늘아래 있기를 원할 리는 만무했다. 그는 자신이 왕인 나라를 직접 다스리고 싶어했고 너무나 강력한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성인(成人)으로 성장한 아들에게 자신이 10년간 휘두르던 권력을 넘겨주지 않으려 했다. 

 

 

 

 

 

 

 

 

 

 

고종(高宗) 내외(內外)는 권력을 되찾아오기 위하여 최익현(崔益鉉)과 반(反) 흥선대원군 세력을 부추겼다. 최익현(崔益鉉)은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書院) 철폐에악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는 동부승지로 기용되면서 명성왕후의 측근과 '반 흥선대원군' 세력들과 손을 잡고 흥성대원군의 실정(失政)을 비판하는 상소(上疏)를 올리고 그의 퇴진을 강려히 주장하였다. 최익현의 탄핵(彈劾)은결국 흥선대원군의 실각(失脚)에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1873년 고종(高宗)은 친정(親政)을 선포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은 원치 않는 정계 은퇴를 하였다.

 

 

강제로 물러난 탓에 흥선대원군은 정계복귀를 호시탐탐 노렸다. 그 과정은 그다기 산뜻하지 못했다. 권력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집착은 이전에 그가 보여주었던 확고한 개혁의지(改革意志)와 경세가(經世家)로서의 품위마저 손상시키는 것이었다. 재집권(再執權)에 대한 야망은 결국 며느리 명성황후와 갈등으로 이어졌다. 외척(外戚)의 정치 참여를 극단적으로 막고자 하였던 그의 섭정기간 동안과는 너무나 상반되게도 그가 권력을 잃어버린 후 정국은 완전히 왕비의 친정인 민씨(閔氏)가 주도하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高宗)을 폐립하고 자신의 다른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자 하는 역모(역모)에 연루되었으며,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는 난도(亂徒)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가 피신(ㅍ피신)한 명성황후의 사망(死亡)을 공포하고 잠시 정권을 잡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잠깐의 재집권은 청나라의 힘을 빌린 명성황후의 역습으로 청나라에 납치되며 물거품이 되었다. 정권을 다시 잡기 위해 그는 그 어떤 세력과도 제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한때 '위안스카이'와 손을 잡기도 했고, 1894년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 때는 동학세력(東學勢力)에 손을 뻗었으며, 갑오경장(甲午更張) 때에는 일본과 줄을 대어 재집권기회를 노렸으나 실패하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의 이러한 행동은 아들 고종(高宗)에게 큰부담이 되었다. 1895년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정치활동을 대부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해 그의 바깥 활동을 막았다. 사실상 유폐나 다름없는 생활 속에서도 흥선대원군은 정계복귀를 꿈꾸었으며, 만년(晩年)의 그의 헛된 꿈은 며느리 명성황후의 시해(弑害) 사건, 즉 을미사변(乙未事變)과 관련해 일본공사 '미우라'에게 이용당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대워군은 또다시 잠시 정권을 잡지만 신변에 위험을 느낀 고종(高宗)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하여 친러파(親露派)가 대두하면서 축출되었다. 이로부터 3년 후인 1898년 흥선대원군은 7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1907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追奉)되었다.           

 

 

 

 

 

 

                                     흥선대원군과 민비(명성황후)의 대립

 

 

 

 

 

 

외척(外戚)으로 인한 폐해를 없애려고  대원군이 일부러 선택한 며느리,,민비.  시아버지 대원군과 며느리 민비는 사사건건 부딪친다. 결과적으로 외교정책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두사람의 권력다툼에서 빚어진 그때그때의 선택일 뿐이었다.  

 

 

고종5년(1868), 궁인(宮人) 이씨에게서 아들이 태어난다. 완화군(完和君.1868~1880)이다. 당시 정비(正妃)인 민비에게서는 소생이 없었다. 조대비를 비롯하여 고종, 대원군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

선대왕인 철종(哲宗 .. 강화도령)도, 고종(高宗)도 직계 왕손이 아니었기에, 정통의 혈통을 이은 첫 왕손이었다.

 

  

반면 민비는 초조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민비는 대원군을 멀리하고,견제하기 시작한다. 위기를 느낀 민비는 고종의 총애를 얻기 위하여 필사적인 노력을 전개하는 한편 대원군의 반대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한다. 민비는 민승호,민규호 등 근친들을 요직에 배치하고, 대원군에게 중용되지 못한 조대비(趙大妃) 측의 조영하,조성하 등에게 접근하여 자기 세력으로 만든다. 대원군의 아들 이재면(李載冕)을 교묘히 이용하여 대원군측의 비밀을 캐내고, 대원군의 형인 이최응(李催應)의 불만을 부추키고...한편 서원철폐로 불만에 차있던 유림들과 제휴하면서 최익현 등 유림의 거물들까지 동원하여 대원군을 견제하였다.

 

 

 

 

 

 

 

 

 

 

 

민비가 元子(후일 순종)를 낳을 때까지 7년동안 민씨일족을 등용하는데 30여명에 이르렀다. 1872년 11월 고종의 사랑을 독점한 민비는 원자를 생산하지만, 통변불능이라는 선천적 결함으로 4일만에 죽는다. (2년후 다시 아들을 낳는데, 후일 조선의 마지막 왕인 純宗이다). 이때부터 대원군과 민비는 사사건건 부딪치며 대립은 격화된다.  여러 크고 작은 대립이 있은후 민비측의 교감을 얻은 유림의 대표 최익현(崔益賢)은 1873년 11월3일 대원군을 직접 겨냥한 상소문을 올렸다.

 

  

전하께서 어리신 것을 기화로 정치를 마음대로 전횡하였다고 공격한 다음 " 임금이 재위하는 동안 종친된 자에게는 그 지위를 높이 받들고,녹(祿)을 후하게 하는데 그칠 것이요, 국정에 관여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대원군의 제거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최익현을 처벌해야한다는 대원군측의 상소가 뒤따랐다. 고종은 최익현을 제주도로 유배보냈으나, 이는 최익현을 살려두기 위한 조치이었을 뿐이다.

 

 

 

최익현의 상소 이틀후, 고종은 마침내 친정(親政)을 선포한다. 국왕의 친정선포 사실을 전국에 알리는 한편, 창덕궁에서 운현궁으로 직접 통하는 2개의 문, 즉 임금 전용의 경근문과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을 막아버렸다.  임금이 어리다는 이유로 집권하였으니,국법으로는 항상 임금이 최고 권력자로서 명령과 포고는 모두 임금의 이름으로 내려지고 있었다. 고종의 나이 21세...대원군을 이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대원군은 북문 밖 삼계동 산장에 나가 있다가, 예산에 있는 아버지 남연군의 묘소를 참배한 뒤, 남양주로 은퇴하고 말았다. 이 때 대원군 53세...민비 22세이었다.

 

 

 

 

                              흥선대원군이 며느리 명성황후에게 보낸 편지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쇄국정책은 시대착오적이었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 그 시대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 (그의 아버지 남연군묘가 도굴된 사건, 병인양요,신미양요 등으로 인한 서구 열강의 횡포 등)로 인한 자구책(自救策)이었다는 반론도 있다.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유산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천주교회, 안동김씨, 민씨가문 등 흥선대원군과 관련자들의 복잡한 이해관계로 공정한 평가는 참으로 어렵다고 한다.

 

 

 

 

 

 

 

 

 

 

 

 

 

 

 

 

 

 

 

 

 

 

 

출처 : 김규봉 ... 사는 이야기
글쓴이 : 歲寒松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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