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부도
<여말선초기 懶翁 현창 운동/남동신>, <朝鮮前期 浮屠의 特徵硏究/이수정>, <조선시대 在家信者들의 浮屠(墓塔) 건립 양상과 의의/엄기표>를 읽었다.
이 세 논문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우선 공부라는 것이 끝이 없고 내가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깊게 깨달았고, 그간 생각보다는 많이 조선시대 부도에 대해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논문을 통해 그간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부분들에 대해 어느 정도 정리 된 것 같다. 조선시대 부도에 대한 것은 추후 준비한 자료를 다 읽은 후 다시 쓰기로 하고 우선 몇 가지 사실에 대해 우선 기록하려 한다.
첫 번째는 ‘석종형 부도의 시원은 무엇인가.’라는 부분이다. 이미 앞서 쓴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라마계탑의 변형이다.’라는 주장과 ‘금강계단의 변형이다.’라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이 두 주장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화장사부도가 언제 만들어졌는가.’이다.
라마탑의 변형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화장사부도가 먼저 만들어졌다는 것이고, 금강계단에서 변형된 것이라 주장하는 쪽에서는 <화장사지華藏寺誌>에 태조 2년인 1393년에 무학이 세웠다는 기록이 있고, <수현문집壽峴文集>에 화장사는 1385년(우왕 11년) 창건하였다는 자료를 근거로 화장사부도가 나중에 지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금강계단 형태를 기본으로 한 것은 나옹을 부처와 같은 반열로 본 것과도 관계가 있다고 한다. 부처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을 차용함으로써 나옹을 부처와 같은 수준으로 격상하려한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금강계단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더 우세해 보인다.
두 번째는 분사리에 대한 개념이다. 고려시대까지는 부도가 하산처나 자신이 생전에 깊은 관련이 있었던 곳에 하나만 세우지만 나옹 때부터 분사리가 되어 부도가 여러 곳에 세워진다. 이런 분사리 현상은 나옹선사의 현창운동과 관계있다고 한다.
나옹은 당시 최고의 선승이었지만 권력싸움의 희생양이 되었다. 나옹은 회암사 중창불사로 신흥유교세력에 탄핵을 받아 지방의 절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입적한다. 그러나 나옹의 사후 많은 이적異蹟과 사리가 나옴으로서 나옹에 대한 현창운동이 불붙었다고 한다.
현창운동의 일환으로 그간 스님들 부도에서는 하지 않았던 부처님의 분사리 개념을 차용해 여러 곳에 부도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 후에도 나옹 현창운동의 위세는 대단하여서 그의 영정이나 의발을 모신 절이 수없이 많았다고 한다. 그 한 예로 나옹에 대한 글을 써준 이색에게 주려했던 글 값 즉 潤筆料를 이색이 받지 않자 이를 기본으로 하여 시주를 모아 영각을 지어 영정을 모셨는데 이곳을 ‘윤필암潤筆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전국에 이런 윤필암만도 7군데에 이른다고 한다.
* 윤필암 목록 : 용문산 윤필암, 금강산 윤필암, 사불산 윤필암, 구룡산 윤필암, 향산 윤필암, 소백산 윤필암, 치악산 윤필암
또한 나옹을 부처와 같은 존재로 추앙하는 <치성광명경熾盛光明經>이라는 위경까지 만들어서 조선조 초 나옹에 대한 현창운동은 위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나옹에 대한 현창운동은 고려 말부터 나타나는 불교의 위기의식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세 번째는 재가신자들이 부도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록상으로 최초의 재가신자부도는 고려시대 이자현의 부도이다. 이후 조선 초에 무학대사 어머니 부도, 행호조사 어머니 부도가 만들어졌다. 이후 정의옹주부도가 만들어졌다가 한참 단절된 후 조선 후기 18세기 이후부터 재가신자의 부도가 적극적으로 만들어진다.
재가신자의 부도는 주로 서울 주변에 많이 분포하고 있으나 기타 전국에 걸쳐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런 부도는 남성의 부도보다는 여성의 부도가 많은데 이것은 남성은 일반적으로 매장을 선호하나, 상궁과 같이 홀로 사는 여자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보니 불교에 귀의하면서 화장을 한 후 묘탑을 세우게 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이런 재가신자 부도의 형태는 기존 부도형식인 팔각원당형, 석종형, 또는 원구형과 같은 형식보다는 바위를 깎아, 탑비모양을 조각하고 그 안에 조그마한 감실을 만들어 사리를 넣는 형식이 대부분이다. 조선 후기에는 일부 승려도 이런 방식으로 부도를 조성했다고 한다.
네 번째는 부도설립에 대한 것이다. 조선 초에는 부도가 거의 세워지지 않다가 조선 후기 불교가 부흥하면서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후기 부도는 과거와 같은 부도의 개념이 아니라 일반인의 무덤과 같은 묘탑의 개념으로 부도를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부도가 많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조선조 초만 해도 왕명에 의해 만들어지던 부도였기 때문에 조선으로 넘어오면서도 왕명없이 부도를 만드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 적극적으로 부도를 세울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이유로 부도를 세울 생각을 하지 못하다가 이수정 논문에 의하면 성종 때 효령대군에 명에 의해 기화대사 부도가 만들어지면서 부도의 맥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때도 그렇게 활발하지는 못했다. 이수정의 논문에 의하면 불교 신자가 아니었던 태종 때 이후인 1400년부터 성종 때인 1514년까지 세워진 부도는 10기인데 그 중에서 안국사 평행조사의 어머니 부도(1418년)와 수종사 정의옹주부도(1439년)를 빼면 8기 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서 효령대군의 명에 의해 지어진 기화대사 부도(1433년)가 3기, 학조(1514년)가 2기인 것을 고려하면 부도를 세운 스님은 다섯 분이다.
기화대사 전에는 1423년 고봉화상 한 분뿐이었고, 기화대사 이후에는 1480년 수암화상, 1495년 설잠화상, 1514년 학조대사 부도가 세워졌다. 회암사의 부도가 잠시 불교가 흥했던 명종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임진란 전까지는 부도가 거의 세워지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때 만들어진 부도는 태조가 조성한 부도와는 달리 부도비가 없다. 이전까지는 왕명에 의해 탑호와 탑비문을 받아야 부도비를 설치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부도비를 만들 수 없었다는 것이다. 탑비를 조성할 수 없다보니 이때부터 부도에 ‘00당’과 같이 부도 주인의 이름을 몸이나 기단 등에 써넣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석종형부도에 대한 것이다. 고려말 나옹의 부도에서 시작하여 1430년까지 6기가 만들어지는데 이후 1515년까지 1기만 만들어진다. 그후는 거의 만들어지지 않다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 후기 들어 묘탑개념으로 많은 부도가 만들어지면서 엄청난 양의 석종형부도가 만들어진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석종형 부도의 변화가 생기는데 첫 번째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졌던 석종형 부도를 간략화한 방식이고 두 번째는 전기 석종형 부도에다 범종의 형태를 더 명확하게 나타나는 형태 두 가지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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