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중기 망이·망소이의 봉기
고려 중기에 이르러 이 지역의 중요한 사건은 망이·망소이의 봉기였다. 1170년(의종 24) 무신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혼란이 계속되고 백성들에 대한 수탈이 강화되자 1176년(명종 6) 공주에 속해있던 명학소의 망이·망소이 형제가 봉기를 하였다. 그들은 백성들을 모아 봉기를 하면서 자신들을 산행병마사라 칭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지후 채원부와 낭장(郎將) 박강수를 보내어 이들을 달래었다. 강경책보다 회유책을 쓴 것이다. 그것은 아직도 서북 지역에서 일어난 조위총의 봉기를 진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회유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1176년 2월 조정에서는 장사 3,000명을 불러 모아 대장군 정황재(丁黃載)와 장군 장박인(張博仁)으로 하여금 이들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케 하였다.
그러나 싸움은 여의치 않았다. 3월에 출동하였던 남적집착병마사(南賊執捉兵馬使)가 남적과의 싸움이 불리하여 사졸이 많이 도망하였으니 청컨대 승병을 모아 군사를 구제하여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조정에 보낸 것에서 알 수 있다. 봉기가 시작된 지 5개월 후에 정부에서는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켰다. 앞으로는 국가에 대해 충성하고 국가의 명령을 잘 따르라는 의미였다. 이에 따라 현령(縣令)과 현위(縣尉)라는 외관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명학소민의 봉기는 쉽게 그치지 않았고 조정에서도 이를 매우 근심하고 있었다. 당시의 집권자들조차도 이의 확산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군사들이 ‘남적’이 봉기한 것은 당시의 집권자인 정중부와 그 아들 정균, 그리고 정중부의 사위 송유인 때문이었다고 방을 붙이자 당사자인 정균이 두려워 관청에 나오지도 못했다 한다. 여기서 ‘남적’이란 다름 아닌 명학소민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조정에서 우려했던 대로 명학소민의 봉기는 더욱 확대되어 9월에는 예산현까지 진출하여 그곳의 외관인 감무(監務)를 살해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예산현을 함락시킨 것은 명학소민과 연대한 또 다른 세력이었다. 그저 ‘남적’이라고만 표현되어 있는 이 무리의 우두머리는 손청(孫淸)이란 자였다. 손청은 스스로 병마사를 칭하고 봉기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노약순이나 한수도 등 중앙의 관직자들조차 이들과 연합하여 집권 무신들을 처단코자 했다. 그러나 오히려 망이가 그 사자(使者)를 안무별감 노약충에게 보냄으로써 그들은 죄를 받게 되었다. 망이·망소이의 봉기군은 정부군과 어느 정도 타협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봉기는 더욱 확대되어 충주까지 확대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12월 대장군 정세유와 이부를 처치병마사(處置兵馬使)로 삼아 좌우도(左右道)로 나누어 남적을 토벌케 했다. 이에 망이·망소이 등은 정부군에 투항하였다. 투항한 이들에게는 곡식을 하사하고 고향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이들은 다시 봉기하였다. 충순현으로 승격하고 수령을 두면서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한 정부측이 약속을 어기고 다시 군사를 발하여 자신들의 처와 모(母)를 잡아 가둔 것에 대한 억울함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공주시 유구면을 거쳐 현재의 차동고개를 넘어 예산의 가야사를 습격하였다. 이곳에는 이에 앞서 손청 등의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과 연합하여 가야사를 점령하였다. 곧이어 이들은 황려현(경기도 여주)을 점령하고 진주(충청북도 진천)를 점령하였다. 여주 지역의 지도자는 이광(李光)이었다. 그러나 1177년(명종 7) 2월 가야산의 손청 무리들이 우도병마사에 의해 잡혀 죽었다. 3월에는 좌도병마사가 이광(李光) 등 10여 명을 사로잡았다. 그러자 망이 등의 봉기군은 다시 돌아오다 지금의 경기도 성환 지역에 있는 홍경원을 불사르고 승려 10여 명을 죽였다.
이렇듯 명학소민의 봉기가 수그러들 기세를 보이지 않자 조정에서는 강력한 토벌책으로 선회하자 망이 등은 6월에 항복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토벌을 감행하여 7월에 망이·망소이 등을 잡아 청주 옥에 가두게 되었다. 이로써 1년 6개월에 걸친 공주 명학소민의 봉기는 끝이 났다. 그러나 이 봉기로 인하여 인근 지역의 민중들도 부패한 정부에 저항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천민에 가까운 대우를 받았던 소(所) 지역의 민중들이 봉기함으로써 점차 이러한 행정구역이 해소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남적
南賊 고려시대 농민봉기를 지칭하는 용어. 지역적으로 개경 이남의 봉기 가운데 일부를 당시 기록에서 남적이라 했다. 이 용어는 1174년(명종 4)에 일어난 서경지역의 조위총(趙位寵) 봉기가 진압된 후 그 남은 무리(餘衆, 혹은 遺種)가 1177~79년 서북지역 일대에서 일으킨 봉기를 서적(西賊)이라 한 것에 대비되는 용어이다. 남적(南賊)으로 표현된 당시의 농민봉기에 대한 기록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이 용어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175년 8월 중앙관인 승선(承宣) 송지인(宋智仁) 등이 남적 석령사(石令史)와 함께 봉기를 폐하고자 했다는 기록이다. 또한 같은 해 11월 문신들이 남적과 모란(謨亂)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 1176년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일어난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의 봉기와, 같은 해 가야산(伽耶山) 일대에서 전개된 손청(孫淸)의 봉기를 당시 기록에서는 남적이라 했다. 또한 1193년(명종 23)에서 이듬해까지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대규모 농민봉기 가운데 그 주모자인 김사미(金沙彌)와 효심(孝心), 그리고 득보(得甫)를 모두 남적의 괴수[南賊魁]라 한 것으로 보아, 이때 일어난 이 지역 일대의 농민봉기를 남적이라 했다(→ 색인 : 동경민란, 김사미와 효심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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