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선정비와 송덕비 영세불망비 하마비등

phllilp7 2012. 10. 11. 11:17

 

선정비와 송덕비 영세불망비 하마비등

 

전통 잡가의 (비석타령)에

아문 앞에 서 있는건 개꼬리 목비요

동구밖에 서 있는건 수렁밭 목비라

 

개가 주인을 보면 꼬리부터 흔들 듯 원님이 부임하면 아부하고자 세우는 선정비가 개꼬리 목비요.

감사나 어사가 오면 급조한 송덕비를 만들어 수렁 속에 넣어두어 오래된 것처림 위장하니 이를 수렁밭 목비라고 한다.

또 감사나 유수 같은 보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재임 동안 속덕을 기려 초상화를 모신 생사당까지 지어 민원을 샀다.

 

다산(茶山)은 벼슬아치들이 교활한 향리를 시켜 송덕비나 생사당을 세우게 하거나 이방으로 하여금 돈을 거둬 선정비를 세우게 한다 하고 선조 때 30년 안에 세워진 이 생전(生前) 선정비를 모두 두들겨 부수었는데, 그 금령이 해이해져 비채(碑債) 또는 입비전(立碑錢)이란 명목으로 가렴주구가 혹심하다 했다. 벼슬아치가 떠난 후 그가 강요해 세운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의 비문을 「애민선정비(愛緡善丁碑)」로 고쳐 놓은 일이 있었다. 돈꿰미(緡)를 사랑하여 돈 긁어모으는 고무래(丁)질을 잘한다는 뜻이다. 선정은 후세에 자연스레 드러나는 것이지 생전 송덕은 사실여부를 떠나 역효과를 낸다는 역사의 교훈이다.

 

그래서인지 당대의 업적은 당대에 써 남길 수 없는 것이 법도가 돼 왔다. 세종 13년에 임금은 「태종실록(太宗實錄)」이 완성된 것 같은데 한번 보고 싶구나」 했다. 파란 많았던 아바마마의 일대기인지라 보고 싶었음 직하다. 이에 담당 우의정인 맹사성(孟思誠)은 「실록에 기재된 것은 당대의 사실이며 당대에 실록을 쓰지 않은 이유도 왜곡시킬 수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전하가 보시더라도 아바마마를 위하여 고치지도 못할 것이요, 이렇게 한번 보기 시작하면 후대의 사관들이 의구심이 들어 그 직책을 바르게 수행하지 못할 것이니 보일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민심을 살펴야 하고 전쟁 위기 땐 주민들을 동원해 성곽 개보수 등 공사에 나서야 했다. 이런 가운데 특히 백성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고, 가뭄 때 구휼하고, 각종 송사에서 광명정대한 판단을 내려온 관리라면 선정비·영세불망비를 세우는 대상이 됐다. 그러나 이런 전통은 조선 후기로 가면서 많이 흐려졌다. 선정을 베푼 것과 상관없이 수령이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 세우거나, 지역 유지들이 수령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만들어 세우거나, 그저 관행적으로 세워진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모양도 크기도 가지가지다.

대체로 크기가 크면 클수록, 돌거북이나 용무늬를 새긴 머릿돌 등 장식이 많을수록, 지위가 높았거나 추앙받던 분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기준은 따로 없다는 게 전문가의 말이다.

향토사학자는 “불망비·선정비는 대개 선정을 베푼 수령의 재임기간이 끝날 무렵 주민들이 그를 칭송해 세우는 것”이라며 “여러 비석들을 살펴볼 때 지붕돌이나 거북 받침돌 설치 여부, 그리고 비의 크기 등은 그때그때 형편대로 하는 것이지, 대상자의 지위나 주민들의 추앙 정도에 따라 달라지거나 특별한 기준이 있는 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흔히 ‘守令以下皆下馬’(수령 이하는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라)라고 적혀 있는 하마비는 전국에 많이 남아 있다.

하마비도 일종의 경고문을 적은 빗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