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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三唐詩人

phllilp7 2012. 10. 7. 21:20
삼당시인 (조선 문인)  [三唐詩人]
출처: 브리태니커

조선 중기 문인 이달(李達)·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을 묶어서 부르는 용어.
삼당이라는 용어가 확실하게 사용된 것은 신위(申緯)의 〈동인론시절구 東人論詩絶句〉에서이다. 임상원의 〈손곡집서 蓀谷集序〉에도 삼당이라는 구절이 보이며, 삼당이란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허균은 이들의 공통적 시 경향을 묶어서 언급했다. 그당시부터 이들의 시는 전대의 송(宋) 시풍과는 다른 지향과 성취를 지녔음을 인정받았다. 이달은 교리를 지낸 이수함(李秀咸)의 서얼로서 어머니는 관기(官妓)였다. 젊어서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박학하고 문장에도 능했지만 신분 때문에 방랑과 좌절의 불우한 일생을 보냈다. 그는 처음에는 정사룡(鄭士龍)에게 소동파·황산곡의 시를 익혀 강서파(江西派)의 시풍을 지녔다. 박순(朴淳)·최경창·백광훈을 만나면서 그전의 시를 불살라버리고 5년에 걸친 각고 끝에 당시(唐詩)의 특색을 지닌 작품들을 짓게 되었다. 허균은 이들의 시를 '청신아려'(淸新雅麗)하다고 평했다. 내용은 신분적 결함으로 인해 불우해진 자신의 처지를 읊은 것이 많은데, 이러한 비애의 정조(情調)는 임진왜란 뒤의 어려운 삶과 폐허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검무를 소재로 한 〈만랑무가 漫浪舞歌〉는 호화롭고 웅장한 검무의 율동과 음악에 맞추어 시의 호흡을 변화시키면서 인간의 자유로운 경지를 노래한 뛰어난 시이다.
최경창은 29세에 대과에 합격한 후 북평사(北評事)·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냈다. 그의 시는 동서 분당(分黨)으로 대립되었던 혼탁한 정치현실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드러낸 작품이 많으며, 속세에서 떨어져 있는 고고한 삶을 읊었다. 만년에 이르면 일상적·경험적 정감을 노래하는 것으로 바뀌기도 했다. 1557년에 지은 장편의 고시(古詩) 〈기군환락우성서작 棄郡還洛寓城西作〉에서는 그해를 휩쓴 전염병, 기근과 더불어 부도덕한 정치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고고함과 그때문에 생긴 가난을 읊으면서 자신의 가치관을 지키겠다는 결의를 드러냈다. 백광훈은 일생 동안 궁핍했으면서도 과거를 통한 출세의 길을 포기했다. 그의 시는 현실에서의 패배를 체념한 것과 전원에서의 평온한 삶을 노래한 것의 2가지가 있다.
삼당파 시인들은 비애와 고독, 좌절과 불만을 주로 그렸는데, 이는 현실을 암담하고 혼탁한 것으로 본 그들의 세계관과 맞아떨어진다. 이들의 문학사적 의의는 당시의 시들이 표절과 논리에 치우치고 난삽했던 경향에서 벗어나 당시풍(唐詩風)의 창작활동을 통해 인간적 정서를 진솔하게 표현했다는 데 있다. 그들은 시를 기교와 현학의 과시나 심성 수양의 한 방편으로 여기던 풍조에 맞서고 삶의 구체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정감을 충실하게 드러냈다.
출처 : 광주민학회
글쓴이 : 조청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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