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구산선문(九山禪門)이란?

phllilp7 2012. 9. 4. 05:17

1. 구산선문(九山禪門)이란?

  삼국을 통일한 후 신라의 불교가 한창 성할 때에 고승들이 중국에 들어가 달마선법(達磨禪法)을 받아가지고 와서 선승들의 사상과 실천을 반영하여 한국고유의 종풍(宗風)을 크게 일으켰으며, 신라 말에 남종선이 전래되어 가지산, 실상산, 동리산, 성주산, 사굴산, 사자산, 봉림산 등에 문을 열었고 고려대에 와서 수미산, 희양산문을 이룩함으로써 신라 말 고려 초에 걸쳐 성립된 아홉 개의 선문(禪門)을 말한다.


2. 구산선문의 배경

  문무왕대로부터 혜공왕 대에 이르는 신라 중대의 불교는 화엄사상과 계율학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화엄사상과 같은 불교의 고급교학은 철학적 사유능력과 한문을 해독할 수 있는 상층귀족 계통의 전유물이었다. 구산을 연 대부분의 선성들 역시 입당 전에는 화엄사상을 연마한 화엄종의 학승들이었지만, 그들은 화엄사상을 버리고 선의 길을 걸었다.


  신라 하대의 불교도 학문적인 변쇄함에 빠져 있었으며 지나치게 화려하고 귀족적인 불교였다. 화엄경에서 묘사된 비로자나불의 법계는 웅장하고 화려하며 섬세하기 이를 데 없을 뿐만 아니라 불교도의 완성을 위한 비장한 보살도의 실천 또는 가슴 설레일 정도로 웅혼하다. 그러나, 이와같은 드높은 이상은 자칫 현실과 유리된 사변적인 추상으로 발전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모든 사상의 운명인 것이다. 실제로 아무리 격조 높은 치밀한 화염경의 주석서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실천되지 않으면 경전과 주석서는 결국 한껏 아름다운 언어의 대백과사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즉, 공허한 해박적 번뇌일 뿐이다.


  한때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사회에 운융과 통합의 원리를 제공했던 화엄사상이 결국 초극되고 해체되어야할 관념의 체계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화엄의 이념적 극한을 돌파하고 직관의 실천을 중시한 신란 선문은 민중과의 접촉을 통해서 그들 스스로의 존재를 하강시켰으며 그 하강은 민중을 포교대상으로 삼았다. 그 결과 신라의 수도 경주가 아닌 지방의 산간오지에 독자적인 선문을 세우고 나말여초라는 변혁기의 불교를 이끌어가게 되는 것이다.


  골품제도를 고수하는 전제왕권이 한계에 이른 신라하대에 자주적인 인간성의 자각과 신분의 차별을 부정하는 불교의 보편성을 강조함으로써 전제왕권에서 소외된 지방호족 세력과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선사들은 '불교문자 교외별전'의 가치를 내걸고 절대적인 인간 신뢰의 개성을 강조하는 선의 가르침을 구하기 위해 입당의 길을 택하게 된다.

그들은 이론보다도 마음의 직관과 일상성을 중시하는 대중적인 수행체제인 선에서 새로운 불교의 생명력을 보았던 것이다.


3. 한국의 선종전래

한국의 선 전래는 4조 도신에게 법을 받은 신라승 법랑(法郞)에 의해서라고 본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사회에 토착화되지 못했다.

  중국에서 보리달마 이래 종풍이 확립되어 육조 혜능에 와서 남돈수와 북돈수로 나위어지면서 그 기세가 극성을 이룰 때 신라의 유학승들이 선법을 배워간 것이다.

육조혜능의 뒤를 이은 마조도일 또는 그 뒤를 이은 서당지장에게서 신라하대 고려초에 비로소 가지산 도의(한국 조계종의 종조로 봄)을 필두로 혜철적인 선사 등이 서당지장의 홍주종을 배우고 돌아오게 된다.


※ 선종의 법맥

불교는 크게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으로 구분된다.

교종은 부처의 가르침, 즉 불경에 기록된 부처의 설교와 그에 대한 주석들에 근거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파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선종은 언어의 제약을 뛰어넘고(不立文字), 가르침 너머에서 전해오는(敎外別傳) 진리를 몸으로 추구하는 종파이다.


중국선종은 6세기 경에 인도의 보리달마에 의해 처음 유입된 이후, 혜가 - 승찬 - 도신을 거쳐 홍인을 기점으로 신수의 북종과 혜능의 남종으로 나뉘어진다.

신수의 북종은 오래지 않아 법맥이 끊어지고, 혜능의 남종만이 번창해 5가(家) 7종(宗)을 내었고, 원나라, 명나라 때에 이르러 다른 종파들은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으나, 남종만은 오히려 번성했다.


한국에 유입된 선종의 초기 흐름은 두 갈래이다.

하나는 중국선종의 4조 도신(道信)의 법을 받고 귀국한 법랑(法朗), 그리고 그의 제자 신행(愼行)이 당나라에서 북종의 지공(志空)으로부터 법을 받고 귀국해 남악(현재의 지리산) 단속사(斷俗寺)를 중심으로 선법을 전개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남종의 지장(智藏)의 법을 이어 귀국한 도의(道義), 홍척(洪陟), 혜철(慧徹) 등 조사선(祖師禪)의 흐름이다.


신라시대 선불교의 특징은 '북산의 남악첩'(北山義 南岳陟)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북산은 설악산을 의미하는데, 도의가 이곳의 진전사(陳田寺)로 들어간 일을 말한다. 또한 남악이란 지리산으로 홍척이 남원 실상사(實相寺)를 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산의 남악첩'은 당시에 유행하던 화엄계 일색의 교종불교와 경쟁관계를 띠면서 새로운 불교의 흐름을 펼쳐 놓았다. 이들과 함께 신라에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선불교가 부흥되기 시작한 것이다.

 

 


4. 산문별 요약

1) 실상산문(實相山門) : 전북 남원군 산내면 실상사. 신라 흥덕왕 때 선사 홍척이 세운 선문.

  헌덕왕때 당나라로 건너가 마조도일의 제자 서당지장으로부터 법을 받음. 흥덕왕때 귀국.

  홍척은 가지산 조사 도의와 같은 스승 서당지장에게서 법을 받았으나 도의보다 늦게 신라로 돌아왔지만 산문의 터전은 가장 먼저 닦았으므로 구산선문 중에서 제일 먼저 개산한 선문.

  그의 문하에 편운과 수철 등 수백명의 제자가 배출, 법을 이음.


2) 가지산문(迦智山門) : 전남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의 보림사. 도의국사가 세운 선문.

  도의는 일찍 출가하여 784년 당나라로 가서 마조도일의 제자 서당지장에게서 법을 이었기 때문에 혜능의 4대 법계이다. 또 혜능의 남돈선법을 가장 먼저 신라에 전한 선사.

  그 정통 선법은 해동에서 계승하였다는 뜻으로 寶林寺라는 이름을 붙임.

  서당지장의 법을 받고 821년에 귀국하여 신라에 돌아온 그는 당시의 사람들이 선법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염거에게 법을 전함.

  염거에게 법을 전해받은 보조체징은 공주사람으로 일찍 출가하여 억성사에서 염거에게 배움을 받아 크게 얻은 바가 있었으며, 837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선사들을 만나 본 그는 師祖인 도의가 물려준 법 외엔 따로 더 구할 것이 없음을 깨닫고 당나라에서 840년에 돌아온 후 가지산에 들어가 보림사를 세우고 많은 도제를 양성.

  도의 국사 제자로 염거, 보조체칭이 있으며, 삼국유사의 저자 보각국사 일연도 가지산문의 승려이다.


3) 사굴산문(捨堀山門)  : 강릉 하구정면 굴산사지 문성왕때 범일선사가 개창한 선문. 범일대사.

831년에 당나라로 가서 염관제안의 법을 전수받고 847년에 귀국하여 굴산사에서 법을 폄. 이곳에서 4년을 살면서 산문 밖을 한번도 나가지 않았던 그는 경순왕, 헌강왕, 정강왕, 진서여왕 등 국왕의 존경과 믿음을 받음. 일찍이 당나라에서 스승 염관제안으로부터 '진실로 동방의 보살'이라는 찬탄을 받은 바 있는 범일은 진귀조사설(眞을歸祖師設) 남김.

  많은 제자 가운데 개청, 행적 등 9대 제자가 배출, 문풍을 크게 떨침으로써 사굴산의 선파가 이루어지게 됨. 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위세를 떨쳤으며 고려 중기에 선을 중흥시킨 지눌도 사굴산문 출신.


4) 동리산문(桐裡山門) : 전남 곡성군 죽곡면 동리산 태안사. 신라 문성왕때 선사 혜철이 세운 산문.

혜철은 출가 후 부석사에서 화엄을 공부하다가 814년 당나라로 가서 서당지장에게 공부. 그는 스승의 입멸 후 서주 부사사에서 3년을 공부하다가 839년에 귀국하여 동리산에 태안사를 세우고 선법을 펼침.

그의 문하에는 풍수지리설로 유명한 도선국, 여대사 등 수백의 제자가 있었으며 여대사가 스승의 선맥을 이어 태안사에서 법을 펴다가 광자 윤다에게 선맥을 전함.

윤다는 스승 여대사에게 법을 받고는 문풍을 크게 떨쳤으며 고려 태조의 존경과 믿음을 받음.


5) 성주산문(聖住山門) : 충남 보령군 미산면 성주사지. 신라 문성왕때 선사 무염이 개창한 선문.

태종 무열왕의 8대손으로 설악산 오색석사와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공부하다가 821년 당나라로 가서 마조도일의 제자인 마곡보철에게서 법을 얻음. 귀국 후 성주사에서 법을 펴다가 경문왕과 헌강왕의 국사가 되어 무설토(無舌土 ; 禪을 五惠門(오혜문) 無說門(무설문) 不淨不穢門(부정부예문)으로 나눈 선법을 말한다.)의 법문을 열어 선법을 크게 펼침. 그 문하에 심광, 현휘, 대통, 여엄 등이 뛰어남.


※ 무염국사는 ‘말에 얽매이거나 이론에 의지하지 않으며 곧장 심법에 직입한다’는 '무설토론(無說土論 혹은 無舌土論·선과 교의 토론)’을 주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무염국사는 “교(敎)는 문무백관이 그 직책을 지키는 일이고, 선(禪)은 제왕이 팔짱을 끼고 침묵을 지키고도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며, 순수한 조사(祖師)의 견지에서 무상(無相) 무위(無爲) 무전(無傳)이라야 선(禪)이다”라고 주장했다.


6) 사자산문(師子産門) : 영월군 수주면 흥녕사(현재 법흥사). 신라말의 선사 쌍봉화상(雙峰和尙) 도윤의 제자인 절중이 헌강왕·정강왕·진성왕 때에 사자산(강원도 영월)의 흥녕사를 중심으로 하여 그 門風을 크게 선양함으로써 이루어진 산문.

사자산문의 조사가 되는 도윤은 825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마조도일의 제자인 남전 보원에게서 법을 받고 847년에 귀국하여 금강산에 머물다가 전남 능주 쌍봉사에서 크게 선법을 펼쳤으므로 쌍봉화상이라고 한다.

그의 뒤를 이은 절중은 헌강왕때부터 사자산 흥녕선원에 자리잡고 스승으로부터 이은 선법을 크게 선양. 그의 제자 가운데 여종(如宗), 홍가(弘可), 이정(理靖), 지공(智空) 등이 있다.


7) 희양산문(曦陽山門) : 경북 문경군 가은면 원북리 희양산 봉암사. 지증도헌이 개창.

도헌은 일찍 출가하여 혜은(惠隱)에게 선을 배워 그 법을 이음. 혜은은 尊範에게, 준범은 神行에게, 신행은 法朗에게서 법을 음.

신라의 법랑은 중국 선종의 제4조 雙峯 道信(580∼651)으로부터 법을 받음. 신라 최초의 선법 전래자 법랑(法朗)의 제자인 신행(神行 : 704∼749)은 중국으로 들어가 다시 北漸禪의 神秀계통인 志空에게서 법을 받아옴. 그러나, 도헌은 4조 도신의 법을 받은 法朗과 北宗계통의 志空 두 스승으로부터 선법을 받아 전한 신라 神行의 曾法孫이 됨.

  도헌이 희양산 선문을 성립시키지 못하고 생을 마치자 그의 법손이 되는 정진긍양(靜眞兢讓)이 선풍을 일으키는데 긍양의 비靜眞大師비에 의하면 희양산이 開山祖가 긍양이라고도 한다. 긍양(878∼956)은 국왕으로부터 받은 尊號가 奉宗大師(신라 경애왕으로부터)와 證空大師(고려 光宗으로부터)의 둘이다. 西穴院 楊孚에게서 배움을 받았는데 양부는 도헌의 법을 이은 제자.

긍양은 900년(효공왕 4년)에 중국으로 가서 谷山 道綠에게 법을 얻고 942년(경애왕 4년)에 귀국하여 스승 양부가 있던 康州 伯嚴寺에 머물면서 이름을 크게 떨쳤으며, 고려 태조 18년에 희양산으로 가서 이미 허물어진 봉암사터에 새로 절을 일으켜 鳳嚴寺라 하고, 제자들을 일깨워 佛祖의 가르침을 크게 선양. 逈超등의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희양산 선풍을 확립.


희양산문의 계보는 이와같다.

4조 道信 ― 法朗 ― 神行 ― 遵範 ― 惠隱 ― 智證道憲 ― 伯嚴楊孚 ― 精眞兢讓 ― 逈超 ― 圓空智宗으로 이어진다.

원공지종은 형초에게서 법을 받은 뒤에 중국으로 가서 永明廷壽로부터 心印을 얻고 國淸寺의 淨光 義寂으로부터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우고 귀국.


8) 봉림산문(鳳林山門) : 경남 창원 상남 봉림산사지. 신라말 선사 혜목산화상(慧目山和尙) 현욱(玄昱)의 제자 심희(審希)가 효공왕(897∼912)때 봉림사를 세워 이루어진 선문.

  봉림산문의 개조인 현욱은 헌덕왕(809∼826)때 당나라로 가서 마조도일의 제자 장경회휘(章敬懷暉)로부터 법을 받았다. 그 뒤 현욱은 837년에 귀국하여 처음엔 남악 실상사에서 지내다가 혜목산 고달사(高達寺)로 가서 선법을 크게 펼침으로부터 혜목산화상이라 불리웠다. 현욱의 뒤를 이은 심희(854∼923)는 시호가 眞鏡大師.

9세때 출가하여 혜목산으로 가서 현욱(圓鑑국사)에게 법을 배우고 효공왕때 봉림산에 절을 세우고 후학을 길러 종풍을 크게 선양. 문하에 景質·融諦 등 수백명의 제자들이 있다.


9) 수미산문(須彌山門) : 황해 해주군 금산면 광조사. 고려 태조 15년(932)에 이엄(利嚴 870∼936)이 선법을 펼침으로써 이루어진 산문.

  이엄은 시호가 眞散大師이며, 12세에 출가하여 896년(진성왕 9년) 중국에 가서 운거도응의 문하에서 6년 공부하여 법인(法印)을 얻음.

  911년(효공왕15년) 귀국하여 영동의 영각산에 머물다가 고려 태조의 부름을 받아 궁중에 들어가 스승의 예우를 받음.

  태조(932년)는 해주의 북쪽 수미산 남쪽 기슭에 광조사를 짓게하여 이엄을 머물게 하자 많은 학인들이 모여 수미산문이 형성. 그의 문하에 處光, 道忍, 慶崇, 玄照 등 수백명의 제자가 그 선풍을 떨침.


위의 구산선문중 사굴산문(굴산사지), 성주산문(성주사지), 봉림산문(봉림사지), 수미산문(광조사지)은 터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