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사지

칠당가람 한국 불사의 공간구성과 가람배치

phllilp7 2013. 1. 6. 07:06

 

가람이란 승려들이 사는 사찰 등의 건축물이다. 인도에서는 수행하는 승려가 모여 수행 ·숙박하는 원림을 말하였는데, 나중에는 가람에 7가지 건축물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것을 칠당가람이라고 한다. 7당이란, 중국에서 생겨난 것으로서 금당 ·강당 ·탑 ·식당 ·종루 ·경장 ·승방을 다 갖춘 형식을 말한다. 그런데 이 칠당의 명칭과 배치는 시대와 종파에 따라 다른데 보통 남향으로 세웠다.
가람은 세 종류로 나뉘는데 평지가람, 산지가람, 석굴가람이 그것이다. 평지가람은 평지에 있는 것(사람이 번화하고 눈에 잘 띄는 곳)이고 산지가람은 산지에 가람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가람은 산지에 있다

 

 

당우는 불전(佛殿) ·강당(講堂) ·승당(僧堂) ·주고(廚庫) ·욕실 ·동사(東司:측간) ·

산문(山門)이라는 칠당가람(七堂伽藍)의 원칙에 따라 건립되었다.

 

 

불전은 본존불(本尊佛)과 보살 및 호법신중(護法神衆)을 봉안하는 사찰의 중심건물이다.

 

이 불전의 명칭은 종파에 따라 달리 부르는데,

화엄종(華嚴宗)에서는 주존불(主尊佛)을 비로자나불로 하고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 하였으며,

정토종(淨土宗)에서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시고 극락전(極樂殿)이라 하였고,

천태종(天台宗)에서는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대웅전(大雄殿)이라고 하였다.

극락전은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이 밖에 미륵불(彌勒佛)을 모시는 미륵전(彌勒殿),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봉안하는

약사전(藥師殿), 석가모니의 일생을 팔상으로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을 봉안한 팔상전(八相殿),

16나한을 모신 응진전(應眞殿),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신 원통전(圓通殿),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모신 문수전(文殊殿),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十王)을 모신

명부전(冥府殿) 등이 있다.

 

이들 당우와 함께 사찰의 중요한 구조물은 이다.

 

일탑식(一塔式) 가람배치 : 탑이 불전과 일직선상에 놓이도록 배치

쌍탑식(雙塔式) 가람배치 : 2개의 탑이 불전 앞 동서대칭으로 세워지는 배치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 : 1개의 탑에 금당(金堂)이 3일 때

 

가람의배치

사찰 건물의 배치를 말하는 것으로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사찰의 경계를 시작으로 사천왕문, 불이문, 탑을 지나 법당에 이르게 되는 과정으로 세속의 번뇌를 씻고 부처의 길로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게 점층적 과정의 의미 구조를 가지고 배열되어 있다.

사찰의 구조물들에는 각각 나름의 의미가 있다.

절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문이 일주문이다.

일주문 주변이나 일주문을 지나면 스님들의 사리나 유골을 넣은 부도밭

일주문을 지나면 피안교-일주문 안에 있을 수도 있고 밖에 있을 수도 있다 

가람과 불법을 수호하는 사찰의 대문 역할을 하는 금강문

금강문이 없는 경우 불국토를 지키는 동서남북의 사천왕을 모시는 문인 천왕문

사찰에서 본당에 들어서는 마지막 문인 불이문

예불이나 설법당 등의 역할을 하는 강당격인 보제루

보제루 지나면 넓은 마당이 나오고 마당에는 석탑이나 석등이 놓여 있고

이후 대웅전이 보인다.

마당 좌우에 '관음전'이나 '지장전'이 있을 수 있고

대웅전 좌우 옆을 지나 한 쪽 뒤에 삼성각이나 독성각 등이 있다.

이외에도 사찰에 따라 어느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느냐에 따라

비로전, 약사전, 미타전(무량수전), 용화전 등과 문수전, 보현전, 팔상전, 조사전 등을 볼 수 있다.

 

 

 

                                                                        (해인사인터넷참고자료)

 

 

 

 

 

 

 

 

칠당가람 한국 불사의 공간구성과 가람배치

 

3. 韓國 佛寺의 空間構成과 伽藍配置

 

한국 불사의 공간구성을 기술하는데 있어 어떠한 관점에서, 무엇을 중심으로 하여 기술하는가에 대한 논거가 다양하다. 즉 사찰의 위치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거나 탑과 금당등의 주요 건물을 기준으로 공간구성 형식을 구분하는 방법이 있고 또한 축선의 성질에 따라 구분하기도 한다. 특히 사찰내의 불교의례에 따라 건축위계의 기준, 즉 소위 삼단의 전각계층이 있어 가람배치를 이루는데 크게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하고 이에 따라 구분하기도 한다. 즉 홍윤식은 예불의례를 기준으로 나누되 상단에 대웅전 등의 불·보살을 모신 전각을 속하게 하고, 중단을 조사당이나 신중문 등 신중신앙의 대상을 모신 전각으로 속하게 하고, 하단에는 산신각 등의 토속신앙의 대상으로 설명하였다. 또 이와 비슷한 형식으로 文明大는 상, 중, 하단을 불단, 보살단, 신중단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흔히 탑과 입지조건, 축, 금당을 중심으로, 고구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 불사의 공간구성이 어떻게 변했는가 살피는 것이 일반적인 고찰방법이다.

 

1) 고구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에 불교를 받아들이고 375년에 肖門寺와 伊弗蘭寺를 창건하였다. 또 광개토대왕 2년(403)에는 평양에 9寺가 창건되었고 498년에는 평양 金剛寺가 창건되었다. 보장왕대(662~668)에는 延福寺와 育王寺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불교의 성격으로 보아 都城 가까이 불사가 건립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초기에는 남북축선상에 주건물과 탑을 배치한 일탑식 가람이 이루어졌는데, 이와 같은 배치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주택건축에서 사용해왔던 四合院(四合院의 주택은 중앙 주축에 따라 주요 건물을 배치하되 그 좌우에는 부속건물을 대칭으로 배치하고 사방을 담장으로 둘러막은 배치이다.) 배치를 그 기본을 하여 폐쇄적이고 좌우대칭적인 건물의 배치이다.

우리나라의 사찰로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것은 평양 부근의 淸岩里 절터와 上五里, 元五里 절터인데 그 가람배치의 형태는 중앙부에 목조탑으로 추정되는 八角건물터를 중심으로 동, 서, 북쪽에 金堂이 놓이고 남쪽에 中門을 둔 三金堂一塔式 가람이다.

金剛寺址로 추정되는 청암리 절터는 평야에서 약 3㎞ 떨어져 대동강 상류 우측에 접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넓은 대지 위에서 서남향한 가람이었다. 중앙의 8각기단은 전체 폭이 약 23m나 되고 한 변이 9.5m이다. 주위에는 폭 70㎝ 범위에 할석(割席)을 깔았는데 이것은 낙수받이 시설 같았다. 이 북쪽에서 장방형 건물터가 노출되었는데 고려시대에 그 전대의 유구를 이용하여 재건한 듯하였다. 그 기단의 규모와 길이가 32.47m, 폭이 19.18m였지만 동, 서 금당터와 중문터는 흔적만이 남아 있어 규모를 뚜렷이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절터는 중심廓 규모만도 동서 100m 정도이고 남북이 150m로 추정된다. 이곳 사람들은 이곳에 옛적의 금강사가 있었다고 하며 이곳 대동강 여울을 ‘金剛灘’이라 하고 그 주변 밭을 ‘金剛田는’이라 하므로 이곳이 금강사의 절터인 것으로 추측된다.(장경호, 『한국전통건축』, 문예출판사, 1992)

 

 

 

 

2) 백제

 

삼국시대 건축문화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더욱 발전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건축문화 황금기를 이루는 기반이 되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선진적으로 우리나라 전통건축형식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백제의 불교건축문화라고 믿어진다,

문헌조사를 통하여 알려진 추정 백제 절터는 많이 있으나, 발굴조사를 통하여 백제 절터임이 밝혀진 곳은 주로 부여지방과 익산지역의 몇 곳만이 있으며, 대표적인 彌勒寺의 伽藍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彌勒寺 伽藍은 三院竝列式의 가람으로 동, 서 및 中院으로 구획되어 있는데, 각 院에서는 중문과 塔, 金堂을 1동씩 두어 一塔式 가람을 동서축선상에 나란히 배치하고, 또 東, 西院에는 石塔을 두고 中院에는 木塔을 두어 三塔三金堂을 이룬다.

이외 백제시대의 절터로는 定林寺, 金剛寺, 軍守里 절터, 東南里 절터 등이 있다. 이들 사찰지의 모습은 중심축이 설정되고 좌우대칭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남북자오선을 중심으로 하여 중앙에 금당을 두고 그 남쪽으로 탑을 배치시켰으며 금당의 뒷쪽에 강당을 두었고 강당의 좌우로 회랑을 이어 탑 앞쪽에 있는 중문에 연결시키는 배치이다. 이들 건물에 鍾樓, 經樓등을 포함하여 백제식 칠당가람제라고 부른다.

 

 

 

 

 

 

 

 

 

 

 

 

 

 

 

 

 

 

3) 신라

 

신라시대에 가장 먼저 조영된 불사건축은 興輪寺와 永興寺였다. 이들 사찰에 뒤이은 중요한 불사로는 皇龍寺, 祇園寺, 實際寺, 三郞寺, 芬皇寺, 靈廟寺 등이 창건되었고, 현재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興輪寺, 皇龍寺, 芬皇寺 등이다. 그 중 皇龍寺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절터는 1976년부터 본격적인 발굴결과 여러차례 가람의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최초에는 가람 중앙부에 남북 중심축을 따라 남에서부터 남문과 중문․탑 그리고 금당과 강당을 두고 중문 좌우를 연결하여 單廊의 남회랑터와 금당 양측에 남북으로 뻗은 동․서 단랑을 두었다. 이 단랑에서 외곽으로 좀 떨어져 다시 남북으로 뻗어 남단에는 前記 남회랑과 연결되고 북쪽에는 정방형으로 구획되어 연속된 건물터와 연결되어 이것이 가람 안쪽으로 꺽여 강당과 연결되는 배치를 나타냈다.

이 가람 동․서변에서 남북으로 뻗은 건물터는 보칸이 3칸으로 앞뒤 퇴를 둔 승방터로 보였다. 이렇게 하여 구획된 가람의 동․서 공간에는 중앙금당과 나란히 놓인 동․서 금당터가 있었는데 이것이 청건 때의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기단의 구축기법이 중금당보다 앞서는 것같아 초기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보면 황룡사의 초기가람은 백제의 일탑식 가람에 동․서구에 다시 금당을 각 한개씩 나란히 놓아 3금당1탑식을 이루고 그 외곽의 동․서․북에 긴 승방으로 구획을 두어 중심곽을 이루었다.

다음 제 2차 가람을 이룬 때는 584년에 금당을 신축하고 목탑을 계획하던 시기로, 645년에 목탑을 세움으로써 이룩되는 장대한 사역이다. 이때에는 목탑의 높이나 크기로 보아 그 양옆에 단랑은 있을 수 없게 되어 철거된다. 이때는 중문도 3×2칸에서 4×2칸으로 확장되면서 남쪽으로 증축되었다.

그 후 곧이어 제3차 가람이 이루어지는데 중문과 남회랑이 다시 한번 남쪽으로 옮겨지고, 남회랑은 동․서단에서 외곽쪽으로 연장되며 이 회랑 북변과 동․서 승방 사이에는 작은 연결으로 확장되는데 이때에 鍾․經樓를 세웠을 것이다. 이 기록에 종을 주성한 것이 754년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삼국통일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황룡사의 유구는 기단석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잘 남아 있어 특히 초석에 의한 주칸의 검토가 용이하였다. 초석이 잘 남아 있었던 건물터는 중금당과 목탑자리 그리고 강당터와 후대 회랑터 등이고 중문과 종․경루터는 초석 일부만 남아 있었다. 또 동․서 금당과 승방터, 단랑터 그리고 중문터 등의 초석은 없었지만 그 밑에 적심석은 남아 있었다. 이 절터의 초창기 초석은 上面을 평평하게 가공한 방형 초석인데 이 초석의 상면은 정방형으로 柱座를 이루었고, 이 주좌의 변은 모를 약간 접어 그 밑에서 수직으로 깍은 것, 또 좀 후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것으로서 방형 주좌를 2단으로 만들어 깍은 것이 있고 회랑이나 후대 건물터 등에서 보이는 둥근 주좌를 갖는 둥근 초석과 방형 초석 등을 볼 수 있다. 이 중에는 통일신라시대의 특징인 2단 쇠시리의 둥근 주좌를 갖는 것도 보인다.

이들 초석 밑의 하부구조는 이미 앞에서 설명했듯이 대체로 건물 기단 구축을 한 다음 초석밑을 깊고 넓게 파서 積心石을 차곡차곡 쌓아 견고히 다져 밑이 비교적 평평한 초석을 앉힌형식을 취하였다. 그 규모의 예를 들면 중문 및 동․서 금당터에서 초석의 한 변이 1m 내외 인데 적심석의 범위를 지름 약 2m로 잡고 그 깊이도 2m로 하였다. 기단의 築基는 중요한 건물, 즉 木塔자리와 金堂터에서는 냇돌과 점토층을 여러 번 번갈아 다진 版築法을 사용하여 신라의 고유한 건축구법을 나타냈다.

 

 

 

4) 통일신라

 

 

통일신라시대의 사찰가람은 신라 초기 백제의 영향을 받은 평지 일탑식 가람에서 차츰 구릉으로 위치를 바꾸어 이탑식으로 변하거나 山地伽藍으로 바뀐다. 또 탑에 있어서 이탑식으로 변하면서 통일 직후의 사찰인 四天王寺나 望德寺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石塔으로 변모하는데, 二塔式 가람의 특징은 佛像을 안치한 金堂을 중심으로 이 金堂의 전방 좌우대칭되는 위치에 동, 서 양탑을 배치하고 남북축선상의 남쪽으로부터 中門, 金堂, 講堂을 놓는다. 伽藍의 例로는 四天王寺, 感恩寺, 佛國寺, 浮石寺, 華嚴寺등이 있으며, 불국사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佛國寺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8세기 후반에 재건된 것으로 보인다. 재건될 때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 지었다고 전한다. 경주 토함산 서북 기슭에 위치하여 석축을 쌓고 경사지를 이용해 지었으며 그 석축이 건물과 같이하여 만드는 경관이 빼어나다. 1973년에 복원되어 현재도 사찰기능을 하고 있는 평지가람형의 유일한 예이다. 남향한 2탑식 가람으로 건물구역은 크게 나누어 동쪽에 大雄殿을 중심으로 배치된 구역과 서쪽에 極樂殿을 중심으로 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동쪽의 대웅전 전방 동․서 양측에는 多寶塔과 釋迦塔이 놓이고 정면에 석등이 놓이게 되고 후측에는 강당인 無說殿이 놓이게 된다.

가람 서쪽에 있는 극락전 중심의 구역은 대웅전구역보다 한 단 낮추어 배치되었는데 여기에서는 탑을 두지 않고 극락전 앞에 석등만을 놓았으며 정면에는 安養門을 세우고 그 엎에는 蓮華․七寶橋의 계단을 청운․백운교의 것과 비슷한 수법으로 축조 하였다.

二塔式 가람으로 동쪽에 대웅전을 중심으로 배치된 구역과 서쪽에 극락전을 중심으로 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동쪽의 대웅전 전방 동, 서 양측에는 다보탑과 석가탑이 놓이고, 정면에 석등과 紫霞門이 있다. 후측에는 강당인 無說殿이 놓였으며 다시 그 뒤쪽 높은 지대에 관음전과 비로전이 위치한다. 특히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석가탑과 다보탑은 귀중한 유구이다.

 

 

 

5) 고려시대

 

고려 사찰가람은 토속적인 신앙의 요소들이 가해져서 山神閣, 七星閣, 應眞殿, 靈山殿 등 불교본연의 가람에서 벗어나 잡다한 건물의 배치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 시대 가람의 특성으로는 가람의 형성과 배치에 있어 地勢 또는 山勢에 조화되도록 하고 있어 風水圖讖思想을 존중하여 가람을 조성하였으며, 일탑식 가람의 조성이 많으나, 그 근본은 삼국시대의 가람형식에 두고 있다.

가람의 예로는 萬福寺, 興王寺, 佛日寺, 興王寺 등이 있는데 이중 萬福寺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라북도 남원시에 위치한 이 절터는 북쪽에 낮은 산을 배산하고 남쪽의 광할한 들을 향하여 가람을 이루고 있다.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5층석탑이 있고, 그 북쪽으로 좀 떨어져서 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의 것으로 믿어지는 석불입상이 지하에 깊이 묻혀 있었다. 이 석탑의 서편으로는 금당터가 표면에 보였고 건물 중앙후측에는 6각으로 된 석좌가 있었는데, 이것이 금당의 불좌로 보인다. 이곳은 1979년부터 전면적으로 발굴조사되어 주요 건물터가 발표된 적이 있다. 또 가람의 남쪽으로는 석불입상이 놓여 있었는데, 이것은 돌장승과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 그 밑은 당간이 세워질 수 있게 만든 당간지주의 하나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사찰의 연혁은 「東國輿地勝覽」에 西殿東塔式의 가람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여러 문집이나 기록에 만복사에 대한 것이 나타난다. 이러한 기록들로 보아 만복사는 고려 초에 창건되었다 하나 그 이전에도 같은 위치에 오래된 사찰이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전체적인 가람의 배치로는 남쪽으로부터 中門과 木塔, 그리고 이 목탑 좌, 우 및 후측에 金堂이 놓이고 그 북쪽에 講堂과 부속건물이 있다고 한다. 전체 가람은 목탑을 중심으로 볼 때 三金堂一塔式이라 할 수 있으나 이 견해에 대해서는 더욱 정확한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

 

 

6) 조선시대

 

고려 말 불교의 병폐가 극도로 심해 국가의 재정을 비롯하여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키게 되자 유학자(儒學者)들은 조선이란 새나라를 건국함을 계기로 불교를 배척하고 李成桂가 실권을 잡게 되자 鄭道傳은 斥佛論을 일으키는 등 불교세력의 확대를 억제하였다. 그러나 내면적 혹은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신봉하던 사람들이 있어 이것은 조선시대 山地伽藍寺刹의 역사를 보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사찰로는 上元寺, 奉恩寺, 興天寺, 원각사, 춘천의 청평사 외에도 수없이 많은 사찰들이 있다.

 

 

(1) 조선 전기의 사찰

조선시대 전기에는 숭유억불사상에 의하여, 사찰건축의 활발한 움직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 초기에 지어진 대표적인 사찰은 양주 회암사, 안동 봉정사, 강진 무위사, 영암 도갑사, 서산 개심사, 합천 해인사 등이 있다.

 

 

①무위사 극락전

무위사는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에 있는 사찰로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 대사가 관음사(觀音寺)로 개창하였다가 후에 무위갑사(無爲岬寺)로 개칭되었다.

 

 

②양주 회암사

양주 회암사는 고려말 나옹 혜근에 의해 초창되고 15세기 초에 중창되었는데 명종 때 보우와 연관되어 폐사되었던 사찰로서 지금도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서 고려말, 조선초의 사찰 배치를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구조이다.

 

 

(2) 조선 중기의 사찰

조선 중기로 들어서면서, 초기의 성리학이 불교를 탄압했던 것과는 달리 이를 습합하면서, 주로 양반 지주 계급의 경제적 지원 아래 큰 규모의 사찰을 경영하게 된다. 즉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국가적 차원이 아닌, 신도(주로 양반)들의 힘만으로 지어지게 된다. 따라서 왕조실록 등에는 사찰중창에 대한 기록이 줄어들지만 현실적으로는 사찰의 중창불사가 더욱 증가하고 거대화되었다고 생각된다. 비록 이 시기의 건축물들이 대부분 임진왜란에 의해 불타 없어지기 때문에 남아 있는 유구들이 드물기는 하지만, 당시의 거대 사찰만 해도 김제 금산사, 속리산 법주사, 팔공산 동화사, 동래 범어사, 구례 화엄사, 순천 송광사, 선암사, 마곡사 등을 들 수 있다. 그중 대표적인 건축적 유구들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화엄사 배치도①화엄사

화엄사는 전라남도 구례군에 위치한 대찰(大刹)로서 신라 진흥왕 5년(544)년에 승려 연기(烟起)가 창건하고, 자장법사가 크게 확장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어 인조 8년(1630) 벽암선사가 중창하여 인조 14년(1636) 각황전을 제외한 대웅전과 요사 등을 중건하였다. 장육전(丈六殿)인 각황전은 벽암의 제자 성능선사가 숙종25년(1699)에 중건공사를 시작하여 인조 27년(1701)년에 완공하였다. 그후 인조 30년(1704)경에는 일주문, 천왕문, 보제루 등을 건립하였다.

산지가람인 화엄사는 남향한 일주문을 들어서서, 약 30도 정도 꺾어진 경사길을 따라 북동방향으로 진입하여 금강문, 천왕문을 지나 석축위의 보제루 앞마당에 이르게 되어 있으며, 보제루의 끝단에서 다시 ㄱ자로 꺽어 들어가면 2개의 탑을 볼수 있고, 그 뒤로 대웅전과 각황전을 볼 수 있다.

②완주 송광사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에 있는 완주 송광사(松廣寺)는 신라 진평왕 7년(867)에 체징국사(體澄國師)에 의하여 창건된 사찰이다. 조선시대때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자, 광해군, 15년(1662)에 중창되었고, 병자호란 때에는 승군을 상주시키기도 했다.

광해군 때 중창된 본래의 사역보다 대폭 축소된 지금의 사찰에는 동측으로 냇물을 낀 넓은 평지에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대웅전이 하나의 축상에 서 있고, 대웅전 앞 서측에 종루인 십자각과 요사채, 그리고 동측에 명부전이 대웅전의 동북에 오백나한전과 약사전이 있다.

③해인사 판전

해인사 판전은 경상남도 합천군에 있는 해인사의 대장경들을 보관하는 전각이다.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되었고, 고려 태조가 중수하고 대장경인본을 수장하는 고탑을 중영 하였다 한다. 조선 세조 4년(1458) 장판고가 좁아 40간을 다시 짓게 하였고, 성종 12년(1481)부터 19년(1488)까지 중수(重修)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도 화를 면하였고,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화엄사 배치도

 

 

 

출처 : 우리문화

 

 

 

 

1. 韓國佛敎와 伽藍의 槪要

 

1.1. 불교의 발생과 전래

불교는 기원전 5세기 경, 지금의 인도지방의 석가모니(釋迦牟尼, Shkyamuni, Buddha : B.C.565~486)라는 사람에 의하여 창시되었다. 석가모니는 지금의 인도북부의 네팔지방인 카필라라는 국가의 태자였고, 본명은 고타마싯타르타였다. 그는 태어난지 7일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에 의해 양육되어 왕족의 교양에 필요한 학문과 기예를 배우면서 성장하였다. 16세에는 결혼을 하여 아들을 두기도 하였고, 왕자로서 아주 유복한 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삶의 허무함과 고통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였다. 어느 날 성문 밖으로 나가 병든 사람이 괴로워하는 모습과 죽은 사람을 보고, 인생의 괴로움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29세에 성을 나와 진리를 찾아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행의 길을 떠났으며, 오랫동안의 고행과 수도를 통하여, 어느 날 보리수나무 밑에 앉아 진리를 깨닫고 부처가 되었다. 그 후 남은 여생을 제자들과 함께 설법을 베풀어 불교를 널리 퍼트리다가 80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불교는 A.D. 1세기 중반경 後漢시대에 중국을 통하여, 고구려로 전해진다.

한국의 불교는 고구려에 전진왕 부견(符堅)이 승려 순도(順道)를 시켜 불상과 경문을 보냄으로서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도입된 것이 소수림왕 2년(372)이며,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에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으로부터 와서 漢山에 불사를 창건한 것이 백제불교의 최초 전래이다. 신라는 승려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一善郡에 들어와 법흥왕 14년(527)에는 이차돈이 순교함으로서 신라에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한다.

 

 

1.2. 伽藍의 기원

가람(伽藍)의 뜻을 사전적으로 해석하면 「승가람마(僧伽藍摩)의 줄임말로 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집, 곧 절의 건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가람은 인도어인 ‘Sangarama’, ‘Sangharama’에서 유래된 것으로 ‘Sangarama’를 한자로 음역하여 승가람마(僧伽藍摩), 또는 가람이라 하며 의역하면, ‘승가’란 중(衆), ‘람마’는 동산 원(園)의 뜻으로 衆園, 僧園, 僧院을 의미하며 여러 승려들이 모여 불도를 닦는 곳을 지칭한다.

가람은 불교건축을 대표하는 총칭이다. 승원으로서 가람은 원래 당(堂), 탑(塔), 가람(伽藍)이라하여 이들 3자는 각기 개별적인 것이었으나 후세에 와서 가람이라고 하면 승원으로서 가람에 당, 탑을 합쳐서 불교건축 전부를 말하게 되었다. 즉 사원을 형성하는 불교건축일반을 가람이라 하게 되었고 그 가람속에 승원과 당, 탑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불교미술의 대상으로 가람은 승원, 당, 탑의 건축양식과 그 기법 등이 주목됨은 물론 이들 3자가 상호 어떻게 배치되어 있느냐 하는 소위 가람배치기법도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는 것이다.

 

인도산치의 스투파

 

인도산치의 스투파그러나 이들 가람으로서 승방, 당, 탑 등은 처음부터 정연한 체계를 갖고 가람배치에 의한 불교건축이 이룩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각기 필요에 응하여 개별적으로 발생하였으나 점차 발달하여 승방, 당, 탑 이외에 산문(山門)등을 포함하여 이들 상호간에 조화의 미를 이루게 된 것이 후대의 가람형성이었다. 다만 이들이 발생한 차례를 보면 승방이 가장 빠르고 이어 탑 그리고 당이 세워지면서 일련의 불교 건축군을 형성하게 되자 여기에 하나의 질서를 쫓아 가람배치형식 등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1) 伽藍의 發展過程

(1) 탑, 사리(舍利) 중심의 가람

승원→탑, 사리 중심 가람→탑, 사리와 불상의 伽藍→불상 중심의 가람

 

 

북위 영령사 복원평면도석가모니의 사후, 석가모니를 대신하기 위해 석가모니의 사리(舍利)를 봉안한 사리탑(stupa), 즉 불탑을 곳곳에 건설하였으며, 이 사리탑이 석가모니를 상징하며 예불의 주대상이 되었다.

사리탑을 가람배치의 중심요소로서 단독으로 대규모로 건설하거나, 부속건물이나 회랑을 사리탑을 감싸듯이 건설하였다. 舍利塔 단독의 가람형식은 한국에서는 예가 없고 인도와 중국 초기의 불사건축에서 널리 이용되었다.

불탑이 생기기 이전에 이미 불교적 의미를 지닌 건조물들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승원이다. 승려들이 기거하는 곳을 승원, 즉 승방이라 한다. 원래 불교의 교단에서 출가자는 일정한 거주지가 없는 것을 규율로 삼았으나 출가자도 점차 휴식처를 필요로 하게 되어 승방이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초기의 승방은 아주 간소한 것으로 비바람을 피하면 될 정도의 것이었으며 그 중에서 석굴을 승방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승방에는 단독의 승방과 집단의 승방이 있었다. 단독의 승방을 비하라(vihara)라 함에 반하여 집단적인 승방은 승가람이라고 한다.

석가는 一日一食一宿을 원칙으로 하였으므로, 석가를 따르는 승려들의 승방은 실용적이고 간단한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가람배치상의 승방은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2) 舍利와 佛像의 同格伽藍

석가모니의 사후, 무 불상시대라고 하는 초기에는 불탑이 주된 경배의 대상이 되었으나 시간이 경과하자 석가모니의 상징으로 더욱 사실적인 불상이 출현하였으며, 불상과 예불을 위하여 내부공간이 필요하게 되면서 금당이 발생하였다.

금당이란 불교에서 예불의 주 대상이었던 불보살을 봉안하여 사찰의 중심이 된 건물을 말하며, 본존불의 성격에 따라 대웅전(大雄殿), 극락전(極樂殿), 대적광전(大寂光殿)등으로 세분화된다. 또한 부처의 가르침[法, dharma]를 나누는 장소라 하여 법당(法堂)이라고도 불리운다.

이와 같이 사리탑과 불상이 동등하게 예불의 주 대상이 되었고, 사리탑과 부처님이 계신 금당을 연결하는 직선이 가람배치의 주축을 형성하였다. 즉 시원사찰에 불탑만 있었던 것이 금당이 더해져 불상을 모시니 결국 의미를 반분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때 까지만 해도 커다란 불탑이 가람의 주요한 위치에 자리하게 되고 석가의 사실적 구현체인 불상과 동등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3) 佛像中心의 伽藍

 

석굴암 석불

 

사리탑의 종교적 상징성이 약화되며 불상이 예불의 주된 대상으로 옮아가게 되고, 불상이 안치된 금당이 가람배치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사리탑이 가람배치의 중심적 위치에서 벗어나 금당 전면의 양쪽에 작은 규모로 2개가 세워지거나 아주 드물지만 아예 세워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즉 불탑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그 의미도 양식도 점차 달라지게 되었다. 탑이 본래의 목적에 따라 묘탑으로서 건립되었을 때에는 승방이나 금당 등과는 별도의 시설물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였으나 후세에 이르러 묘탑으로서의 성격이 희박해지자 가람을 형성하는 구성요소로서 의미가 줄어들게 되어졌다. 원래 불타의 묘탑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탑이 점차 그 성격이 흐려지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묘탑으로 조형하기 위하여 필요한 불사리나 석가의 유품에 한도가 있었다는 점과 다른 하나는 불교에 있어 예배의 중심대상이 탑에서 불상으로 옮겨진데 있다. 어떻든 불사리나 석가의 유품을 봉안 할 수 없게 된 탑은 의미가 줄어들면서 가람의 구성과 장엄을 위하여 조영하게 된 것이다

 

 

 

 

2. 伽藍의 構成과 展開

 

2.1. 전각의 명칭

시원적인 가람은 승원(僧院)과 불탑, 그리고 당(堂)으로 구성되어 출발하였으나 불교의 교세가 커지고 발전하면서 새로운 기능을 갖는 건물들이 출현하였다. 사찰건축이 발전단계에 이르렀을 때 나타나는 각종 구성요소들은 전각(殿閣), 당, 승방, 문, 누, 庫, 탑, 기타 석조물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佛殿

 

가람배치에서 가람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당(堂)이다. 당은 불당, 즉 불전을 지칭하는 말로 금당(金堂), 법당(法堂), 불전(佛殿)등으로 불린다. 당은 불상을 봉안하는 불당, 법당 이외에 경당(經堂), 강당(講堂) 등도 포함된다. 물론 이들 경당, 강당에도 불상이 봉안되나 원래의 목적은 그렇지 않다. 삼국시대 우리나라 사찰은 이미 불당과 강당을 별도로 갖추고 있었던 가람이었다.

불당은 불상을 봉안하고 불교의 각종 신앙의례를 집행하는 장소이며 강당은 경(經)과 율(律)을 설하고 연구하는 장소이다. 불당은 어떤 불상을 봉안하느냐에 따라 이름이 따로 붙는다. 불전[佛堂, 法堂]이라 함은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불상을 안치한 전각을 말하며 승려의 일상 거처인 승방, 선방 등은 포함하지 않는다. 당은 탑과 마찬가지로 불교건축으로서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의 가람에 있어 여러 종류의 당이 있으나 초기부터 이같이 많은 종류의 당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불당은 불상을 모시는 곳이기 때문에 불당의 조영은 당연히 불상출현 이후의 일이다.

경전에서 보면 석가가 살아 있을 때에 이미 강당이 있었음을 여러 경론에서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강당이란 석존의 설법장소로서, 혹은 승려와 대중들의 집회장소로서 당시의 교단생활에 필요불가결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강당은 후세에 하나도 그 선례를 남겨놓고 있지 않다.

불전의 명칭은 대웅전을 비롯하여 각종 불전이 있으며 이러한 각종 전각들은 상.중.하단의 개념으로 배치된다. 즉 신앙형태의 구조에서 볼 때 불보살을 신앙의 대상으로 한 상단(上壇), 불법의 수호신을 모신 옹호신중각(擁護神衆閣)의 중단(中壇), 그리고 이들 신중(神衆)이 다시 분화되어 신중과 토속적인 신앙이 습합된 하단(下壇)으로 나뉜다. 또한 가람배치상으로 보면 상단이 가람의 중앙, 중단이 전면, 하단이 불전의 후면에 위치하고 있다.

 

 

문수보살(文殊菩薩) : 석가모니의 좌보처로 지혜의 보살이다. 머리에 오계는 대일여래의 다섯 가지 지혜를 의미하고, 오른손에 지혜의 상징인 칼을 들고 있다. 모든 보살 중에 으뜸가는 위치에 있는 보살이다. 반야의 가르침을 선양하는 지혜의 보살이다.

보현보살(普賢菩薩) : 석가모니의 우보처로 행원의 보살이다. 여래의 이덕과 정덕, 행덕을 상징한다. 중생들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덕을 지니기도 하여 보현연명보살이라고도 한다. 흰 코끼리를 타고 있는 모습이 특징적이다.

월광보살(月光菩薩) : 약사불의 우협시보살이다. 몸은 백홍색으로 왼손으로 월륜을 쥐고, 오른손에 홍백의 연꽃을 잡고 있다. 보관에 흰 색의 달이 표현되어 있다.

일광보살(日光菩薩) : 약사불의 좌협시보살이다. 몸은 적홍색이고 왼손에 태양을 올려놓고, 오른손에 넝쿨로 된 붉은 색의 꽃인 만주적화를 들고 있는 형상이다. 보관에 붉은 색의 태양이 표현되고 있다.

비로자나불 : A.D. 2세기경에 이르러 대승불교가 일어나는데, 여기에서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三身) 나타난다. 그 중 비로자나불은 법신(法身)에 해당하며, 진리 자체를 상징한다.

 

 

 

■ 대웅전(大雄殿)

 

 

 

선암사 대웅전

선암사 대웅전대웅이라는 이름은 석가모니가 마귀를 굴복시키고 사바세계의 큰 영웅[大雄]이 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대웅전은 가람의 주불전인 금당에 해당하며, 사바세계의 석가모니가 계신 곳을 나타낸다. 따라서 대웅전은 사찰 전체건물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장엄하며 대규모로 건축하는 것이다. 즉 잘 짜여진 높은 기단위에 건물을 세우고 다포식으로 공포를 짜고 팔작지붕을 얹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되어 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봉안하고 그 협시로 문수․보현보살을 봉안한다. 대웅전의 격을 높여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 할 때는 주불로 석가모니불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상을 모시며, 각 여래불 좌우에 제각기 협시불을 봉안하기도 한다.

대웅전이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고 있음은 석가모니의 법회모임인 영산회 모임, 즉 영산회상을 나타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 극락전(極樂殿, 無量壽殿, 阿彌陀殿, 普光殿)

 

쌍봉사 극락전

 

아미타불은 극락세계(淨土)를 관장하는 부처로서, 그 수명이 무량하다하여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아미타경 및 무량수경을 근거로 하여 아미타불을 주불로 안치하는 극락전은 극락세계를 상징한다. 따라서 극락전을 무량수전이라고도 부른다. 기타 명칭은 普光殿(남원 실상사, 예천 용문사, 충무 용화사)이 있다. 아미타여래를 주존(主尊)으로 봉안하고 그 협시로 관음․대세지보살을 봉안한다. 대웅전이 영산회상을 상징하고 있다면 아미타전은 아미타여래의 법회인 미타회상을 상징화한 것이다.

 

 

■ 약사전(藥師殿)

 

통도사 약사전

 

약사여래 부처님은 온갖 병고를 없애주고 모든 재난을 제거하여 중생들을 건져주는 부처님이다. 그래서 약사여래 부처님은 왼손바닥 위에 약환이나 약함을 들고 있다. 약사유리광여래(藥師琉璃光如來)를 주불로 안치하는 불전이며 그 협시로 월광보살과 일광보살을 모시기도 한다. 약사여래본원경(藥師如來本願經)의 내용에 따르면 동방의 많은 세계를 지나가서 유리세계(琉璃世界)가 되며 약사여래는 그 교주이고 장엄한 궁전으로서 여자가 없고 죄악고통이 없는 청정한 극락이라 한다. 이 불전은 약사여래의 정토인 동방약사유리광회상(東方藥師琉璃光會上)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 할 것이다.

 

 

■ 관음전(觀音殿, 圓通殿)

 

송광사 관음전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의 진리의 빛이 널리(周圓) 통하여(融通) 막힘이 없이 모든 중생에게 두루 작용한다는 뜻에서 원통전이라는 호칭이 붙었다. 원통전은 副佛殿으로 보살단에 속하는 경우 관음전이라고도 한다.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하며 그 협시로는 南巡童子 海上龍王을 들 수 있으나 이들을 조각상으로 봉안하지 않고 후불(後佛)탱화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중생들을 모든 고난에서 구제하고 해탈로 인도해 주는 보살이며,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보살이다. 이러한 관음신앙을 반영한 불전을 관음전 또는 원통전이라 하며,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아침예불을 할 때면, 바로 이 관세음보살을 위한 경전인 천수경(千手經)을 독경한다.

 

 

■ 응진전(應眞殿, 羅漢殿, 靈山殿)

 

대흥사 응진전

 

석가모니는 많은 제자를 두었는데, 바로 이 석가모니의 제자를 모시는 불전이며 한국내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아집(我執)과 번뇌를 끊고 생사를 초월한 성자를 응진(應眞), 무학(無學), 응공나한(應供羅漢)이라 하므로 응진전을 나한전, 등으로 또한 영산전이라고도 한다.

응진전은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봉안하고 좌우에 석가의 존자인 나한상을 봉안한다. 이 불전은 불교에 있어 수도승에 대한 신앙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 비로전(毘盧殿, 大寂光殿, 大光明殿, 華嚴殿)

 

해인사 대적광전

 

화엄경을 근거로 하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大日如來)을 주불로 모시는 불전이다. 그러므로 화엄경에 근거한다는 뜻에서 화엄전, 화엄경의 주불이 비로자나불이라는 뜻에서 비로전, 그리고 화엄경의 세계가 연화장세계 즉 대정적의 세계라는 뜻에서 대적광전이라고도 한다. 비로자나불은 대적광토(大寂光土)에 있으면서 화엄을 항상 說했다 하여 대적광전이라고도 불리우며 빛을 발하여 어둠을 쫒고 진리를 상징하는 연화장 세계의 불전이다. 주불은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좌우에 화신불로서의 석가모니불과 보신불로는 각각 그 좌우에 문수, 보현, 관음, 세지보살을 협시로 봉안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대적광전은 불전 중에서 가장 큰 규모가 된다.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김제 금산사 대적광전이 그 예이다.

 

 

■ 팔상전(八相殿, 靈山殿)

 

천은사 팔상전

 

석가모니불과 그의 일대기인 팔상탱화를 봉안한 불전을 말한다. 팔상전에는 주불로는 석가모니불, 좌우협시로는 상리보살과 미륵보살을 봉안한다. 팔상이라 함은 불보살이 이 세상에 출현하여 중생을 제도하려고 일생동안 나타내어 보이는 팔종의 상이며, 팔상전은 팔상을 상징하는 불전이다. 강두솔(降兜率), 탁태(託胎), 강탄(降誕), 出家(출가), 강마(降魔), 성도(成道), 전법륜(轉法輪), 열반(涅槃)의 팔상이다. 응진전이 없는 사찰에 있어서는 팔상전을 영산전이라 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묘법연화경을 설한 영산화상의 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를 모신 전각을 영산전이라고 한다. 영산이란 석가의 설법회상인 영산회상의 준말이다.

 

 

■ 미륵전(彌勒殿, 龍華殿)

 

통도사 용화전

 

미륵전은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상징화한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불을 모신 법당이다. 사부아함경(四部阿含經), 유가론(瑜伽論), 미륵상하생경(彌勒上下生經) 등을 근거로 한 미륵불은 56억 7천만년 후에 용화세계에 재현한다는 미래불이며, 미륵불을 신앙하면 사후 도솔천 또는 용화세계에 태어나 죄업이 소멸되고 복덕이 성취된다고 한다. 미륵불은 입상(立像)으로 옥외에 설치된 예가 많으나 미륵불상으로 실내에 안치한 불전이 미륵전이다. 금산사 미륵전이 대표적이다.

 

 

■ 명부전(冥府殿, 地藏殿, 十王殿)

 

무위사 명부전

 

명부라 함은 죽은 영혼의 종착처를 뜻하고, 명부전(冥府殿)은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중생의 구제를 위해서 영원히 부처가 되지 않는 보살인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주존불로 모시고 있다.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기까지의 여섯 가지 형태의 존재, 즉 인간(人間), 천(天), 아수라(阿修羅), 아귀(餓鬼), 축생(畜生), 지옥(地獄)등의 존재를 하나 하나 교화시켜 성불시키는 역할을 함으로 구원의 이상을 표현하는 부처라고 한다.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하고 협시로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배열한다.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冥府十王像)을 배열하고 있다. 그래서 지장이 강조될 때는 지장전이라 하고 명부시왕이 강조될 때는 명부전이라고 한다. 명부시왕 신앙의 불교적인 전개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 나한전(羅漢殿, 應眞殿)

응진전이나 나한전은 모두 부처님의 제자를 모신 전각으로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봉안하고 좌우 주위에 석가의 존자인 16대 나한상을 봉안한다. 이 불전은 불교에 있어 수도승에 대한 신앙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 기타 불전

①문수전(文殊殿) :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을 주불로 안치한 불전

②각황전(覺皇殿) : 구례 화엄사에 있는 불전의 특수명칭이며 각황전의 본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다. 부처님의 몸을 일컬어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 말하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장육전에는 석가여래의 모습인 장육존상(丈六尊像)을 봉안했을 것이다. 그러한 장육존상의 예는 신라 황룡사 금당 장육존상대석에서 알 수 있다.

③수마제전(須摩提殿) : 달성 동화사 내의 특수 불전으로서 인도불상을 안치한 불전이다.

④오백성중전(五百聖衆殿) : 석존의 제자 500나한을 모신 불전

⑤천불전(千佛殿) : 석존의 제자 1000 나한상이 안치된 불전

 

화엄사 각황전 대흥사 천불전

 

 

2) 神閣, 經堂, 庵子, 祖師堂

 

■ 신각(神閣)

한국은 옛부터 산신, 용신, 일월(日月), 성숙(星宿) 등을 받들어 왔는데 불교가 들어오면서 이러한 토속신앙이 불교로 전향되어 천신(天神)은 제석환인(釋帝桓因)으로, 단군은 독성(獨聖) 또는 산신(山神)으로, 일월, 성숙은 약사여래불의 협시불인 일,월광보살(日,月光菩薩)과 약사 七佛의 화신인 칠성신앙(七星信仰)으로 바뀌었다. 신각은 이러한 토속적인 신앙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 같다.

 

 

①산신각(山神閣, 山王壇, 山靈閣)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없는 토착신이나, 불교의 재래신앙에 대한 수용력에 의해 먼저 護法神衆이 되었다가 원래의 성격을 불교안에서 되찾게 된다. 산신을 호랑이와 노인상으로 표현하고 탱화로써 이를 도상화한 전각이다. 산신은 유교․불교․도교가 혼재되어 나타나며 산사의 생활과 평온을 비는 외호신의 역할과 신도들의 부귀공명 및 건강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한적산왕대신(閑寂山王大神), 산신탱화(山神幀畵)를 봉안한다. 건축형식은 1칸의 조그마한 건물로 사찰경내의 맨 뒤에 위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②칠성각(七星閣)

칠성이란 북두칠성을 가르키며 도교에서는 칠성이 길흉화복을 맡았다 하며, 七元星君 또는 七星如來라고 한다. 칠성의 화현인 7여래 등을 탱화로 그려 봉안하는 것이다.

칠성은 산신과 마찬가지로 원래 불교와는 무관한 신이나 산신과 같은 과정을 거쳐 壽命長壽神의 원래 성격을 되찾게 된다.

 

 

③독성각(獨聖閣, 獨聖殿, 天台閣)

독수선정나반존자(獨修禪定那畔尊者)를 위시한 독성탱화 또는 상을 안치하였다. 독성이란 스승 없이 혼자 깨우친 성자, 즉 獨修禪定을 말하고 중국 천태산의 那畔尊者가 그 같은 독성이라고 신앙하고 있으나 한국사원에서 독성이란 단군신앙의 불교적 전개라 볼 수 있다. 이의 불교적 수용도 산신이나 칠성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④삼성각(三聖閣)

독성단, 칠성단, 산신단 등을 동시에 봉안한 신각이다. 이 경우 재래의 壽, 福, 財의 3신신앙과의 습합현상을 살필 수 있다. 칠성각이나 독성각, 삼성각의 건축형식은 맞배지붕으로 3칸규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 경당(經堂, 經藏)

경당은 절에서 불경을 보관하는 곳으로 장경각(藏經閣), 경고(經庫), 법보전(法寶殿), 대장경루(大藏經樓) 등으로 불리운다.

 

 

■ 암자(庵子)

암자라 함은 본사 경내주변에 있으며 본사에 소속된 말사이며 그 위치는 거리상으로 본사에서 가까운 경우가 많고, 庵, 院, 寺, 台 등으로 불리운다. 각 암자 건물의 수는 단일불전 이거나 또는 신각 등으로 시작되어 건물수가 많고 규모가 큰 암자에 이르기까지 규모나 건축양식 등이 일정하지 않다.

 

 

■ 조사당(祖師堂, 祖師殿)

 

부석사 조사당

진영당, 국사전, 영모전 등의 명칭으로 불리우며 宗祖, 開山祖 또는 저명한 주지 등의 화상(畵像)을 벽에 안치하고 그 앞에 제단을 마련한 전각이며 실내 각 벽에 여러 화상을 게시하는 것이부석사 조사당 보통의 예이다.

선종사찰에서는 조사에 대한 신앙이 강하기 때문에 조사의 사리탑인 부도를 건립하고 조사당을 지어 역대 조사들의 영정을 봉안한다. 영정을 봉안한다는 점에서 응진전이라고도 한다. 殿이라고 한 것은 조사의 수행이 부처님과 보살의 경지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閣이나 堂이라 한 것은 비록 수행이 높다하나 어찌 부처님과 보살의 경지와 비교하겠는가 하는 겸손한 생각을 담고 있다.

건물형식은 대부분 맞배지붕으로 규모 역시 3칸 이내이며 주심포나 익공형식이 많다.

 

 

3) 禪堂, 講堂, 僧房, 爐殿

 

선당, 강당, 승방 등은 주로 승려가 修道, 傳道 및 일상생활을 하기 위한 곳이며, 그 각각의 명칭은 일정하지 않고 다양하여 상호간 구별하기가 힘들 뿐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도 동일건물 내에 혼합되어 있는 경우도 있고 개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 선당(禪堂)

참선수행을 위한 공간이며 심검당(尋劍堂), 행해단(解行堂) 등의 예를 들 수 있다.

 

 

■ 강당(講堂)

부처의 가르침을 설법하기 위한 일종의 강의 공간이다. 무설전(無說殿), 우화루(雨花樓), 궁현당(窮玄堂), 열반당(涅槃堂) 등

 

 

■ 승방(僧房)

승려의 거처장소이다. 요사채, 요사(寮舍) 등

 

 

■ 노전(爐殿)

승방의 일종으로서 주지 또는 각 법당에 향화를 올리는 연로스님이 거처하는 경우가 많다. 노향각(爐香閣), 응향각(凝香閣), 추설당(推雪堂), 소향각(燒香閣), 향로전(香爐殿) 등

 

 

4) 樓, 鐘閣, 鼓樓

 

■ 樓

사찰의 여러 문을 지나서 대웅전과 일직선상에 놓이는 樓는 처음 사찰을 찾는 사람에게 사찰의 웅대함을 예고해 준다. 이 누는 대개 다중이 집회하여 강학을 하는 강당의 기능을 하며 초기 사찰에서는 맨위에 있었던 것이 고려시대 이후부터 중정의 앞부분으로 내려왔다. 樓의 명칭은 각 사찰마다 특수한 명칭을 사용하고 있어 일정하지 않고, 용도는 사찰 불법의식이나 축제일에 설제에 사용되고 식당 또는 우천시 집회 혹은 휴식처로 이용된다.

송광사 종고루

 

 

■ 종각(鐘閣, 梵鐘閣), 고루(鼓樓)

 

송광사 종고루

종각은 큰 종을 매달아 두기 위하여 지은 누각이며, 고루는 절에서 큰북을 달아 놓은 다락집을 뜻하며 보통 종루와 마주보고 서 있다. 사찰에서는 범종, 북, 목어, 운판을 불교의 4物이라 하여 함께 두는 경우가 많다.

 

 

5) 門과 기타 건물

 

사찰의 산문은 불법옹호신을 봉안하여 사찰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악귀를 제거하는 기능을 갖는다. 이들 산문을 통과함으로 가람내부는 청정도량이 되는 것이다. 사찰에는 일반적으로 1~3種의 門이 있으며, 사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일주문(一柱門), 천왕문(天王門), 불이문(不二門)의 순서이며 일주문, 불이문, 천왕문으로 되는 例도 있다.

선암사 일주문

 

 

■ 일주문(一柱門, 斷俗門)

 

선암사 일주문

일주문이란 柱가 一列로 배치된 데서 유래한 말로서 사찰에 들어온다는 첫째문인데, 일주란 부처님의 세계와 모든 진리가 하나라는 의미를 상징하며, 일주문은 부처님의 세계 즉 사찰내에 들어선다는 심리적 정화를 꾀한다. 곧 사찰과 외부 俗世界와의 경계를 의미한다.

 

 

 

 

 

■ 천왕문(天王門, 護持門, 鳳凰門)

 

보림사 사천왕문

절 어귀의 사천왕을 모시는 문을 뜻하고, 보통 일주문을 넘어서면 곧 천왕문에 이르는데 이 문은 영산불국의 세계, 하노단(下爐壇)을 오르는 관문이 된다. 즉 천왕문은 부처님이 계신 곳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시는 곳으로, 일주문과 불이문의 중간적 성격(속세를 벗어나 신성한 사찰에 들어가는 과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사천왕상은 원래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이 수용된 것으로 인도에서는 이 상에 대한 규범이 일정하지 않으나 귀인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고 중국에 이르러서 갑옷을 입은 무장의 모습으로 확립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천왕상이 7세기경을 전후로 해서 수용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부터 크게 성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표 6-1> 사천왕상(四天王像)

방위

천왕명

지물(持物)

피부색

얼굴특징

서원(誓願)

 

오른손

왼손

 

지국

주 먹

청 색

다문입

선한 이에게는 복을, 악한 자에게는 벌을 줌

 

증장

여의주

적 색

노한눈

만물을 소생시키는 덕을 베품

 

광목

삼지창

보 탑

백 색

벌린입

악인에게 고통을 주어 도심을 일으키게 함

 

다문

비 파

흑 색

치아보임

어둠속을 방황하는중생을 제도

 

 

 

 

증장천왕 지국천왕 다문천왕 광목천왕

 

 

■ 불이문(不二門, 解脫門)

 

통도사 불이문

“不二” 그 자체는 진리를 나타내는 말로서, 본래 진리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일체에 두루 평등한 불교의 진리가 불이문을 통하여 재조명된다. 삼문의 마지막 문으로 종교적으로는 수미산의 정상에 오르면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도리천이 있고 忉利天 위에 불이의 경지를 상징하는 불이문이 있는 것이다. 제석천은 현실 세계인 사바세계를 다스리는 천왕으로 중생의 번뇌와 죄를 다스리는 역할을 한다. 불이문은 중생이 극락에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것이다. 그래서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 석등(石燈, 光明台, 長燈)

 

 

등감(燈龕)이라고도 하며 기름이나 종진이 많은 나무를 태워서 일반 정원옥외 조명용으로 쓰이며, 부처님의 진리를 비쳐줌으로써 중생을 깨우치고 선한 길을 택하게 한다는 등의 여러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 석상(石床)

 

 

장방형의 상 모양으로 석등 앞에 놓이며 제를 차릴 때 대향로를 놓고 헌향을 하는데 쓰인다. 흔히 양반집에서 정원의 시설물로 사용되는 경우와 모습이 비슷하다.

 

 

■ 배례석(拜禮石)

 

 

사찰의 주불전 앞에 석등과 축을 이루어 위치한다. 부처님께 배례를 드리는 장소라 짐작되나 아직 확실한 기능을 알 수 없다. 직사각형의 돌로 그 위에 연꽃이 새겨진 경우도 있다.

 

 

■ 당간지주(幢竿支柱)

 

 

석주 한쌍을 지주라 하고 중앙에 설치하는 기둥을 당간이라 하며, 석가탄신일 등의 대행사 때에 괘불 또는 기를 거는데 사용된다. 그러나 그 위치와 기능에 따라 당간지주와 괘불대로 구분한다. 사찰의 초입에 있어 사찰임을 알리는 당번이 걸리면 당간지주이고 주불전의 앞에 있어 큰 행사에 괴불을 걸어매는 당간을 세우는 두쌍의 지주가 괘불대이다.

 

 

■ 석비(石碑)

 

 

사찰연혁 등이 기입된 석비는 일주문 근처에 설치하며 불전과 석탑의 건립에 관한 기록이나 종조(宗祖) 등의 사적이 기록된 석비는 각각 그 근처에 설치되므로 위치는 일정하지 않다.

 

 

■ 석교(石橋)

 

 

사찰의 위치는 대개 계곡의 옆에 있으니 계곡을 건너 경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리가 있기 마련이다. 다리는 일반적으로 물을 건너가는 시설로서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여기서 물의 의미는 경계의 의미 뿐 아니라 금지의 의미이다. 또한 깨끗함의 상징이고 성속을 가르는 경계로서 의미가 있는 반면 그 위에 걸쳐지는 다리는 이를 연결해 주는 의미가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다리는 성계와 속계를 구분하는 禁川을 건너는 역할을 하는 다리이다. 속계에서 때묻은 마음을 버리고 성스러운 곳으로 진입하게 되는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다리이다.

 

 

석교(石橋)란 글자 그대로 돌로 만든 다리를 뜻하는데, 대개 아치로 구성된다. 벽돌모양의 돌을 마구리면으로 쌓고 그 위에 사람이 걸어 다니도록 평평한 답도(踏道)를 가설하였다. 중국의 사찰은 대개 사찰 입구에 면하여 대규모의 연지(蓮池)를 둔 예가 많은데 수도자는 연꽃에 싸여서 극락왕생(極樂往生)을 한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연꽃과 관계가 많아서 연지를 두는 것으로 생각되며 연지에 비추어진 장엄하게 보이는 불사를 바라보며 석교를 건너 불사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의 마음에는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안정된 깨끗한 마음으로 사찰을 방문한다고 한다.

부처님을 뵈러 가는 길은 즐거울수록 좋다고 한다. 누구나 쉽게 개울을 건너도록 다리를 놓는 일은 월천공덕(越川功德)이라 해서 큰일한 것으로 손꼽았다. 개울에 비친 반원의 홍예는 결국 지상에 구축된 다리와 연결되어 원을 이루며 완성되는 아름다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돌다리는 대개 스님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다리 건설에 참여한 자들의 공력을 그들의 공덕으로 여겼을 것이다. 튼튼하고 아름다운 돌다리는 결국 이러한 그들의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선암사 승선교

선암사 승선교 조선전기에 궁궐교량의 입지는 天文思想, 陰陽五行思想 및 風水地理說 등이 영향에 의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풍수지리설은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하고 마침내 한양에 定都하는 과정에서도 크게 주목되었었다. 조선시대 창경궁 玉川橋, 경복궁 永濟橋 등 궁궐의 교량은 禁川 위에 가설되어 立地, 橋台 및 橋面의 구성 등이 갖는 정신적 의미가 중국의 궁궐교량과 유사하며 많은 意匠이 설치되었으나 기타 장소에 가설된 홍예교에는 의장이 없어 소박한 분위기를 나타내며, 虹霓橋의 宗石에는 해학적인 용두석이 매달려 있어 수해로 인한 교량의 보전을 상징하고 있는 독특한 정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찰의 초입에 있는 다리는 대개의 경우 아취형의 홍예교이다. 이러한 돌다리는 승려들로 이루어진 장인들이 만들었다. 선암사의 승선교가 대표적인 예이다.

1천년이 넘게 전해 내려오는 지네 모양의 진천 농다리, 예술감각과 정교한 축조기술로 삼남최고의 석교라고 불리는 강경미내다리, 조선시대 한양의 3개 교량인 수표교, 금천교, 살곶이다리, 유일한 조선시대 나무다리인 곡성 태안사의 능파각 등 참으로 의미있고 아름다운 다리가 많다.

 

 

■ 석조(石槽)

 

 

커다란 돌을 파서 만든 일종의 물통으로 대개 사찰 취사장과 가까운 중정에 놓이며 각종 음료수를 저장 공급하는데 쓰인다. 석조는 물이 차서 넘치게 되어 있고 그 주변에 다시 조그마한 석조를 두는 경우가 많다.

 

 

■ 연지(蓮池)

 

 

중국의 사찰은 대개 사찰입구에 면하여 대규모의 연지를 둔 예가 많은데, 수도자는 연꽃에 싸여서 극락왕생을 한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연꽃과 관계가 많아서 연지를 두는 것으로 생각되며, 연지에 비쳐진 아름다운 각종 전각들을 바라보며 석교를 건너 도량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의 마음에는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안정된 깨끗한 마음으로 사찰을 방문하게 할 것이다. 대표적인 연지는 선암사의 삼인당이다.

 

 

 

고려와 조선시대건축양식

고려 초기의 모든 문화는 신라의 것을 그대로 계승하였을 것이고, 건축양식에서도 역시 그랬을 것이다. 다만, 세부의 장식적인 의장(意匠)이 복잡해지는 따위의 부분적인 변화만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은 중국에서나 일본에서도 이 시기에는 특이한 건축양식이 발생하지 않았던 것으로도 알 수 있고, 또 고려시대의 석조유물이나 금동제 소탑(小塔) 등을 살펴보아도 가히 짐작이 간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에는 이러한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고려 중기에 들어가면서, 중국의 중원(中原)을 차지했던 송(宋)의 세력이 약화되어, 중국 동북지방에서 일어나 차츰 화북지방으로 세력을 뻗치게 된 금(金)에게 쫓기게 되자, 1162년에 송은 그 판도(版圖)를 양자강 남쪽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것은 항상 중국대륙의 문화에서 영향을 받아 왔던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고려는 계속 송과의 교류 통상을 하면서 중국 남부지방인 복건성(福建省) 부근에서 성행하던 새로운 건축양식을 도입하게 되었다. 이 양식이 이른바 우리가 말하는 주심포(柱心包)집 양식이다.

 

 

 

그 후, 중국이 몽고족에 의하여 통일되어 대원제국(大元帝國)이 기반을 굳건히 하자, 고려는 다시 원의 모든 문물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에 건축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중국 동북부에서 요 금(遼·金)등에 의하여 성행되었고, 원이 이를 중국 대륙에 퍼트린 화려하고 웅장한 새 건축양식이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다포(多包)집 양식이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의 목조건축에는 이 두 가지 양식이 같이 사용되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고건물의 대부분은 이 두 양식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주심포집과 다포집 두 양식은 발상지도 다르고 도입된 경로도 달라서 원래는 이질적인 건축양식이었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와서는 이미 시공의 편의나 가구(架構)의 합리화 또는 장식적 의장의 융합 등에서 절충된 것이 많아졌고, 나아가 그 양식도 중국대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 고유의 건축양식을 나타내기에 이르렀다.

 

지금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건축은 중국에서 도입된 두 양식의 조형(祖型)으로부터 변화·발달된 것이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도입된 주심포집이나 다포집 두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건물은 전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들도 두 양식 사이의 가장 뚜렷하고 기본적인 차이점인 공포의 배치는 그대로 지키고 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주심포집과 다포집은 이 공포 배치의 차이를 가지고 구분한다.

 

 

 

주심포집 양식이란 건물을 받치는 기둥 위에만 공포를 짜 올리는 것인데, 이것은 고구려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으로, 넓은 뜻에서는 주심포집이라 할 수 있다. 기둥 사이 상부에는 八字形 솟을대공이나 동자주를 세워 도리를 받치게 하고 있는데, 고려 중기 이후에 도입된 새 양식에서는 이것이 화반(花盤)으로 변할 뿐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의 가구양식과 공포형태를 보면 짐작이 가듯이, 우리 나라의 주심포집이란 고대에서 신라를 거쳐 고려 초로 이어졌던 건축양식에서 서서히 새 양식인 주심포집 양식이 영향을 주어 변화·발전되어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반면에, 다포집 양식이란 공포의 짜임이 기둥머리의 상부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1조(組) 또는 그 이상의 공포를 배치해 놓은 양식이다. 이것은 종래에 있어 왔던 양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며, 우리 나라에서도 완전한 하나의 스타일로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주심포와 다포 두 양식은 도입된 후 얼마 동안은 신축 건물을 짓는데 있어서, 아무런 규범이 없이 건축구조의 기호나 시공자의 기술적인 계통에 따라 어느 한 양식이 선택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초기에는 중앙에서 건립된 주요 건물은 다포집 양식을 많이 사용하였다. 이것은 태조(太祖)가 신임하였던 선종승(禪宗僧)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영향을 받았음인지, 당시 중국 선종사찰(禪宗寺刹)에서 즐겨 채택되던 양식이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가장 활발한 건축활동을 보여 주었던 태종대(太宗代)에 와서는, 주심포집과 다포집 양식을 그 건물의 사용목적과 외관상의 필요에 따라 구분하여 채택하는 경향을 나타내게 되었다.

 

곧, 다포집은 궁전·성문 또는 사찰의 주요 법당 등과 같이 위풍이 요구되고 화려해야 할 건물에 주로 채용되었고, 주심포집은 사사롭고 간소한 느낌을 필요로 하는 건물 또는 간소한 외관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건물인 종묘나 사찰의 2차 적인 법당 등에 채용되었다.

 

이렇게 건물에 따라 요구되는 성격에 의하여 건축양식을 구별·채택하는 건축활동은 건축초기에 흔히 볼 수 있는 견실한 건설적 정신에서 이루어지는 합리적 태도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후로 점차 이러한 건설적 기풍의 빛이 바래고, 화려한 외관만을 추구하는 다포집 양식이 일반적으로 많이 채용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삼국시대 건축양식

 

 

 

우리 나라의 건축은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 이전의 건축은 원시적인 기법을 벗어나지 못하여, 규모가 작고 소박한 초가지붕으로 될 수혈주거(竪穴住居) 등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구려·백제는 건국 초부터, 그리고 신라는 늦어도 5세기초부터 발달된 기법과 자재로 궁궐이나 궁위(宮衛) 또는 귀족의 저택을 짓는 등, 화려한 건축양식을 채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어 삼국(三國)에 불교가 들어옴으로써 곳곳에 규모가 큰 사찰들이 창건되어, 한반도의 건축 양상이 일변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건물은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전혀 없으나, 이어져 남아 있는 고려나 조선시대의 목조건축으로 미루어 보아 구조상으로나 양식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것은 고구려의 고분 구조나 고분의 벽화에서 볼 수 있는 건물도(建物圖)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 평양(平壤)이나 공주(公州)·부여(扶與) 및 경주(慶州) 일대에 남아 있는 사찰과 궁전의 유적, 옛 기와와 벽돌 등 유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한반도의 유일한 통일국가로 발전하게 되자, 역대의 왕은 불교에 깊이 귀의하여 경주를 중심으로 곳곳에 큰 가람(伽藍)을 짓고, 마침내 불교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건축은 장엄하고 화려하였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불행히도 이들 건물의 대부분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오늘날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로는, 고려 중기 이후에 세워진 몇몇 건물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조선시대에 세워진 건물들 뿐이다. 그 건물 종류도 성곽(城廓)이나 궁전을 비롯하여 寺刹·문묘(文廟)·객사(客舍)·주택 등 많은 분야에 걸쳐 다양하지만, 특히 사찰건물이 질적으로나 수적으로 가장 두드러진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건축사를 살피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건물 중에서도 사찰건물의 수가 가장 많다.

 

여기서 우리 나라 목조건축의 양식에 대하여 고찰해 보기로 한다.

 

 

 

삼국시대에 고구려는 백제·신라에 비하여 가장 빨리 중앙집권적 국가로서의 기구를 갖추었고, 중국과의 문화교류도 가장 빠른 시기에 행해졌다. 불교 역시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도입되었고, 문화도 삼국 중에서는 가장 먼저 발달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당시의 건축은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 고분의 일부 구조, 또는 벽화 고분에 그려진 건물도 및 건물 부분을 그린 그림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에 의하면, 고구려시대의 목조 건물은 이미 완전한 보(樑)와 도리로 가구(架構)되었고, 기둥에는 뚜렷한 배흘림이 있었다. 기둥 위에는 공포( 包)를 짜 올렸는데, 그 중에는 이중으로 짜인 것도 적지 않다. 또 공포에는 기둥머리(柱頭)나 소로(小累)에 굽받침이 있는 것과 굽받침이 없는 것이 있어, 그 양식이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중에는 공포 부분을 약화(略化)하여 그린 것으로 보이는 역계단형(逆階段形)으로 2단이나 3단으로 된 것도 있다.

 

 

 

대부분의 기둥은 그 공포가 그 위의 긴 가로목(橫材)을 받치고 있으며, 그 위에는 팔자형(八字形)으로 된 솟을대공(臺工)을 두고, 그 위의 도리를 받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솟을대공 사이에 간단한 동자주(童子柱)를 세운 것도 있고, 또 창방(昌枋)과 도리 사이에 공포를 배치한 것도 볼 수 있다.

 

지붕 형태에 있어서는 규모가 큰 건물은 우진각 지붕으로 되어 있고, 규모가 작은 건물에는 맞배지붕이 사용되었던 것 같다.

 

이상과 같이, 고구려의 목조건축은 세부양식이나 구조를 비교적 자세히 짐작할 수 있으나, 이러한 건축양식이 후세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으며, 또 발전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백제의 목조건축 양식에 대해서는 지금 남아 있는 유구(遺構)가 없을 뿐만 아니라, 고분이나 기타 석조유물에도 이를 뚜렷이 나타내고 있는 것이 없어 알 길이 없다.

 

다만, 일본 나량(奈良)에 있는 법륭사(法隆寺) 건물이 백제에서 건너간 공장(工匠)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전해 오는데, 그 중 몇몇 건물은 비록 후세에 보수를 하기는 했다고 하나, 창건 당초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또, 이 절에 소장된 작은 불감(佛龕)인 옥충주자(玉蟲廚子)가 백제로부터 전해진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목조건물을 충실히 모형(模型)한 불감이기 때문에 백제의 목초건축을 고찰하는 데 자료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백제의 것과 동일한지, 또는 그 양식만이 백제에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법륭사의 건물 양식을 보면, 기둥에는 역시 배흘림이 많으며, 기둥머리에는 굽받침이 있고, 공포 모양도 고구려의 것과 비슷하다. 특이한 것은 법륭사의 중문(中門)이나 5중탑(五重塔) 및 옥충주자 등의 공포의 소로, 그리고 첨차( 遮)와 소로가 모두 구름 모양의 곡선으로 되어 있는 점이다. 이러한 양식은 고구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양식이다.

 

 

 

신라에 있어서는 고신라나 통일신라를 통하여 유구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아, 목조 건축의 양식을 짐작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당시의 정세로 보아, 고신라에서는 백제의 영향이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 양식에서는 앞에서 서술한 고구려·백제의 양식과 큰 차이가 없고, 다만 세부구조에서 약간 복잡해진 것뿐인 듯하다. 이것은, 일본의 건물 유구나 중국에서 8세기초에 세워진 대안탑(大雁塔) 미석(楣石)에 선각(線刻)된 불전(佛殿)을 미루어 보아 알 수 있고, 실상사(實相寺) 백장암(百丈庵)의 3층석탑이나 쌍봉사(雙峰寺)의 철감선사탑(澈鑒禪師塔) 등 신라시대의 석조물 세부(細部)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시대별 사찰의 건축 양식적 특징

 

시대적 배경 : 660년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는 무열왕 7년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나, 외부세력인 당나라를 몰아낸 676년에야 삼국 통일을 이루게 된다.

 

건축양식 : 1탑식 가람배치를 따른 삼국시대의 양식과는 달리 통일 신라 시대의 가람배치는 2탑식 가람 배치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불탑의 의의가 감소하면서부터는 다소 격식을 벗어난 직교형이 이어졌다. 중기에는 선종의 성행으로 산지로 자리를 옮기게 되어 산지가람으로 변하게 된다. 화엄사의 가람배치를 보면 평지 2탑식이 산지 가람으로 변천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탑식가람배치도와 2탑식 가람배치도

 

사찰의 종류 :

 

*평지가람 : 사천사지 / 망덕사지 / 감은사지 / 고선사지 / 천군리절터 / 불국사 / 실상사

*산지 가람 : 화엄사/ 보림사 / 법주사 / 해인사 / 범어사

 

 

시대적 배경 :소수림왕에 이르러 찾은 내정 확립으로 고구려는 발전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고, 372년(소수림왕2년) 秦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건축문화의 효시를 이루게 되었다. 당시 전진에서 승려 순도가 오고, 동진에서는 승려 아도를 보내오자 소수림왕은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건립해, 불교 포교를 도왔다. 왕권 유지를 위한 불교는 이후 민간 신앙과도 결부되어 질병과 재앙에서 개인을 구제하고 나라를 번영케 해주는 현세적인 종교로 변화해 널리 융성하게 되었고, 고구려 문화에 있어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

건축양식 :불교가 전래된 초기에는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로 성문 관아의 건물을 임시 사원으로 썼기 때문에 신축하는 대규모의 절 건축은 궁궐 건축의 형식을 본따서 지은 것이다. 이러한 배치는 상오리 절터와 일본의 飛鳥寺의 경우에서도 확인된다. 고구려 후기의 사찰 건축양식의 변화는 상징적인 배치 방법과 기념성에 치중하는 건축에 대한 사고방식은 점차 퇴화하고, 건물의 기능성과 공간성을 중요시하게 되는 중심 위치에는 실제로 유효한 기능을 가진 금당을 세우고 그 주변에 회랑을 두어 사방의 매개 건물을 연결한 폐쇄된 중심 공간을 형성하는 배치 형식으로 변천하게 되었다.

 

 

오성좌에 따른 궁궐과 청암리 절터 배치

 

사찰의 종류 :이불란사(국내성에 창건) / 금강사(문자왕7년-청암리) / 중대사 / 진구사 / 연복사 / 영탑사 / 육왕사 / 원오리 만덕사지(평남 평원) / 정릉사지(고구려 427년-평양시 역포구)

 

 

 

시대적 배경 : 384년 침류왕 원년에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새로운 관념체계와 사찰건축문화의 새로운 발전의 장을 열게 되었다. 호승 마라난타에 의해 전수된 불교는 건축예술의 사상적 근원을 형성하였다. 북쪽으로는 낙랑과 대방군으로부터 문화적 영향을 받았으며, 서쪽으로는 황해를 건너 동진, 송, 제, 양, 진 등의 영향을 받아 문화가 발달

하였고, 성왕 때에 전성기를 이루는 불교 문화는 일본에 백제문화를 전하는 계기가 된다.

 

건축양식 : 백제의 가람 배치는 주로 평지 1탑 가람 배치로 되어 있다. 이 배치법은 불교가 백제에 처음 도입된 이후 중국이나 인도의 전형적인 가람 배치와 알맞게 혼성되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부여 군수리 절터, 금강사지, 정림사지등이 모두 이와 같은 배치법이고, 백제의 공인들이 건축한 일본의 飛鳥寺도 이에 속한다.건축양식의 2대 종류 중의 하나인 주심포 계열의 건물로 되어 있으며 기둥에는 심한 배흘림이 되어 있다. 주두에는 굽받침이 있고 굽의 곡면이 안쪽으로 되어 있고 첨차 끝은 우아한 곡면으로 소로의 굽곡선과 잘 어울리도록 고안되었다. 또한, 첨차 밑곡선에 구름 무늬가 새겨져 있는 구름첨차雲村木라는 것과 오다루끼 華木라고 하는 초단 서까래 상부에 2출목째의 소로를 얹어 포를 짜고 다시 상부 서까래를 걸고 있는 하양구조라는 것이다. (사찰의 전체 배치의 중심에는 중원에 규모가 큰 목탑터와 금당터를 동남향으로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터가 있는 미륵사지가 있다. 그외의 대부분의 사찰의 가람배치는 중문,탑,금당,강당이 동서로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고, 중문과 강당을 연결하는 회랑이 탑과 금당을 둘러싼 형식을 하고 있다.)

 

미륵사지 배치도

 

 

사찰의 종류 : 대통사(527년 성왕5년-공주) / 왕흥사(600년 법왕1년~634년 무왕 35년) / 칠악사 / 오합사 / 천왕사 / 도양사 / 백석사 / 미륵사 / 호암사 / 사자사 / 북부 수덕사 / 전주 보광사 / 익산 오금사 / 전주 경복사

*현존하는 백제의 사찰 ; 익산 미륵사지 / 부여 정림사지 / 군수리,동남리 절터 / 부여 금강사지 / 공주 서혈사지/금산사/내소사/수덕사/개심사/선운사/갑사

 

 

 

시대적 배경 :지증왕시대에 처음으로 신라라는 국호를 쓰기 시작한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부에 위치하여 삼국 중에서 불교를 가장 뒤늦게 받아들여서 법흥왕 15년(528년)에야 공인되었다. 왕국의 사상 통일의요구와 왕권 강화를 위해 호국적 성질을 띤 불교는 왕실과 국가의 비호로 차차 성장하게 되었다.

비록 가장 늦게 전파되었지만 외국과의 빈번한 접촉이 적은 이유로 오히려 고구려나 백제보다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양식을 창출하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건축양식 : 금당과 탑을 중심으로 좌경루, 남문, 회랑이 있었고, 신라시대 사찰의 초석밑의 하부 구조는 대체로 건물 기단구축을 한 다음 초석밑을 깊고 넓게 파서 積心石을 차곡 차곡 쌓아 견고히 다져 비교적 평평한 초석을 앉힌 형식을 취하였다.

 

가람배치도

 

사찰의 종류 : 흥륜사 / 영흥사 / 황룡사 / 기원사 / 실제사 / 분황사 / 영묘사 /화엄사/쌍계사

 

 

시대적 배경 :고구려의 부흥을 꿈꾸던 즈음 만주의 동부 지역을 거점으로 고구려의 지배계급과 말갈족의 피지배계급으로 구성된 발해가 건국되었다. 발해의 정치, 사회, 문화는 고구려 문화 위에 당 문화를 받아들여 독특하게 형성되었다. 통일 신라와 더불어 남북극시대를 이루었다.

 

건축양식 : 불교 문화도 크게 융성하였으며, 그 양식은 직선적이면서 소박한 고구려의 예술 양식을 원천으로 하였다. 발해의 정전은 속칸과 겉칸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속칸의 북쪽 중심에는 불상이 있었고 그 주변에 소상들이 있었으며 불상 앞에 불공 장소가 있었다. 즉, 발해의 정전은 크고 작은 실들을 결합시켜 하나의 건물을 이루었다.

(사각 지붕의 단층 건물의 상경 용천부 제1절터는 기능이 다른 본채와 부속채가 하나 의 건물안에 결합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보통 기와와 함께 녹유를 바른 귀면 8개, 치미 등으로 이루어진 제9절터는 겹지붕으로 되어 있다.

 

상경 용천부 제1절터

 

사찰의 종류 : 상경 용천부 / 동경 용원부 / 서고성 연해주 지방 등지의 사찰

 

 

시대적 배경 :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전환되는 918년 왕건의 고려 건국과 더불어 후삼국을 통합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936년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를 이루게 된다. 건국 초부터 호국 불교의 성격을 부각시켜 국가의 보호를 받으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중기에는 의천에 의한 천태종이, 후기에는 지눌에 의한 조계종이 성행하였다. 고려 시대 예술은 불교와 귀족 생활이 연관되어 크게 발전 하였다.

건축양식 : 한국 목조건축 양식 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는 주심포와 다포 양식이 정착되었으며, 개경의 만월대 궁궐과 현화사, 흥왕사가 그 예가 되겠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 건축의 주심포 양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장중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고려말의 석왕사 응진전은 원의 영향을 받은 다포식으로, 중후하고 장엄한 건축물로 유명하다. 고려 시대의 가람양식은 통일 신라 시대의 2탑식 가람 배치를 계승하였고, 삼국 시대의 1탑식 가람 배치도 함께 사용하였다.

 

흥왕사 배치도

 

 

 

불일사 배치도

 

 

고려 시대의 불교 융성은 민간 신앙에 의한 샤머니즘적인 요소와 통합되어 종래의 가람 양식에 다양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금당이 대웅전, 능인보전, 나한보전으로 이름이 바뀌고, 칠성각, 응진전, 영산전, 산신각등의 건물이 새로이 생겨 났다. 그리하여 후기의 건축은 평지에 자유로이 배치를 가진 것이 많이 세워졌다. 어두운 공간에서 밝은 공간을 만날때 느끼는 극적 효과를 노려 중문을 누형식으로 만들고 누 아래에 있는 계단을 통하도록 하였다.

 

사찰의 종류 : *919년(태조 2년) ; 법왕 / 자운 / 왕륜 / 문수 / 원통 / 내제석 / 사나천선원 / 신흥 / 지장

*기록상의 사찰 ; 광통 보제사 / 흥국사 / 불일사 / 개국사 / 만복사 / 현화사 / 영통사 / 사자빈신사 / 정투사

*현존하는 사찰 ; 안동 봉정사 극락전 /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 예산 수덕사 대웅전 / 강릉 객사문 / 부석사 조사당 / 심원사 보광전 / 석왕사 호지문, 응진전

 

 

 

 

 

 

시대적 배경 : 1392년 조선의 건국과 함께 새로운 국가 체제의 정비가 일단락되어, 왕권이 강화되고 양반 관료 중심의 지배 체제가 정비되면서 국가 재정이 충실해졌다. 조선 사회의 문화는 유교주의에 입각한 양반 문화와 불교, 도교, 토속 신앙이 융합된 서민 문화로 구성 되었으나, 성리학의 발달로 미술, 건축, 공예 등 문화를 향유 하는 계층은 주로 양반

이었다.

 

건축양식 : 조선 시대 사찰 건축의 배치는 자유로운 듯 하면서도 엄격한 질서가 숨어 있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중정이 형성되며 평면은 정사각형이고 그 크기는 환경에 맞도록 면적이 정해져 있다. 대체로 중정을 중심으 로 남북 방향에 문루, 대웅전이 대치하고, 동서로는 강당과 승방이 있 는데, 중심인 대웅전을 보조하는 형식으로 배치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통도사 배치도

 

 

사찰의 종류 : 은혜사 거조암 영산전 / 무위사 극락전 / 도갑사 해탈문 / 송광사 국사전 / 장곡사 상대웅전 / 개목사 원통전 / 청평사 회전문 / 개심사 대웅전 / 신륵사 조사당 /

관룡사 대웅전 / 통도사 대웅전 / 법주사 팔상전 /봉정사 대웅전 / 금산사 미륵전 / 화엄사 각황전 / 전등사 대웅전과 약사전 / 환성사 대웅전 / 개암사 대웅보전 / 내소사 대웅보전 / 쌍계사 대웅전 / 해인사

 

 

 

 

 

사찰 정사 가람

* 정사(精舍;vihara)원래 불교 초기에 스님들이 우기를 피하던 거쳐였습니다. 당연히 우리나라와는 구조가 많이 달랐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불상과 보살상을 모시기 시작했고, 여기서 수행과 설법과 종교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 사찰(寺刹)의 寺는 중국에서 관리들이 묵던 관사였다고 합니다. 처음 스님들이 중국왔을 때 寺에 묵었는데 나중에는 스님들만의 공간을 만들고 ○○寺라고 이름지으면서 스님들이 거주하는 다른 공간도 ○○寺라고 이름지었다고 하는군요. 刹은 인도말을 음역한 것이라고 합니다.

 

*가람(伽藍)은 sangha-arama를 줄인 말로써 그대로 음을 옮긴 것입니다. 무리들의 정원이라는 뜻입니다. 즉 승려들이 거주하면서 수행하고 가르침을 주고 받는 장소입니다.

 

*절은 우리 말로써 그 어원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절은 절하는 곳"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하니 이와 관련이 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단순히, 명사적 의미를 원하시면, 암자만 빼고 다 같은 뜻입니다.

 

※절 : 절은 승려가 불상을 모시고 불도(佛道)를 닦으며 교법을 펴는 집.

<출처 : 국어사전>

 

※사찰[寺刹]

불상을 모시고 승려들이 거주하면서 불도(佛道)를 닦고 교법을 설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

 

절을 한자로 사(寺)라 하고 가람(伽藍)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범어의 상가라마(Sañghãrãma)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이는 중원(衆院) 또는 정사(精舍)라는 뜻으로 남자승려[比丘]·여자승려[比丘尼]·남자신도[淸信男]·여자신도[淸信女]와 같은 4중(四衆)이 모여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출처:브리태니커>

 

※가람 [伽藍]

산스크리트 saṃghārāma를 음역한 승가람마(僧伽藍摩)·승가람(僧伽藍)의 준말.

 

승원(僧院)·승원(僧園)이라고도 한다. 본래 의미는 중원(衆園)으로 여러 승려들이 모여 불도를 닦는 숲 등의 장소를 가리켰는데 나중에는 사원의 건축물을 일컫게 되었다.

 

절은 대개 7종의 건물을 갖추어야 하나의 가람으로 완성되는데 이것을 칠당가람(七堂伽藍)이라 한다.

 

그러나 반드시 7종으로만 제한되지는 않으며 약간의 가감(加減)이 있을 수 있다.

 

칠당은 보통 사람의 몸, 즉 머리[頂]·코[鼻]·입[口]·눈[兩眼]·귀[兩耳] 또는 머리[頭]·마음[心]·음부[陰部]·팔[兩手]·다리[兩脚]에 비유되기도 한다. 칠당의 배치와 명칭은 시대·종파에 따라 다르다.

 

일반적으로 교종사찰(敎宗寺刹)은 탑(塔)·금당(金堂)·강당(講堂)·종루(鐘樓)·장경루(藏經樓)·승방(僧房)·식당(食堂)으로 구성되고, 선종사찰(禪宗寺刹)은 불전(佛殿)·법당(法堂)·승당(僧堂)·고방(庫房)·산문(山門)·서정(西淨)·욕실(浴室)로 구성된다.

<출처: 브리태니커>

 

※정사[精舍]

1 학문을 가르치기 위하여 마련한 집.2 정신을 수양하는 곳.3 같은 말: 절.

<출처: 국어사전>

 

※[庵子/菴子]

[불교] 1 큰 절에 딸린 작은 절.2 도를 닦기 위하여 만든 자그마한 집.

<출처: 국어사전>

 

좀더 넓은 속깊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인도는, 지금으로부터 2500여년 전의 인도는,

수행하기가 굉장히 환경적으로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산에는 맹수들이 우글거리고 독충과 산적 등등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힘든 시대였습니다.

 

그래서,인도의 여러 부족의 왕(王)이나 부호(상업을 하는 분들)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을 하는데, 마땅한 것이 없나 해서, 자신들의 땅 중에서 가장 좋은 정원에, 설법을 편안하게하고, 많은 일반사람들이 와서, 설법을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기증한 것이, 정사(精舍)입니다.

 

또한, 고대의 인도는, 여름인 우기(雨期)가 몇개월이나 계속되었고,

한번 비가 오면 산속의 동물들이 겐지스강으로 떠밀려 오고, 홍수가 나고, 사람들이 많이 죽었지요.

 

그리고, 우기가 끝나면, 각종 병균들이 득실되어, 전염병이 돌고 돌아, 대단히 생활 환경이 열악한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빈비사라왕이란 분이 석가모니부처님께 귀의하여 세우신 것이 죽림정사[竹林精舍]이며, 인도(印度) 중부의 마가다국 사위성(舍衛城)의 수달장자(須達長者)란 분인데,자비심(慈悲心)이 많고 가난한 사람에게 많은 혜택(惠澤)을 주었던 분이 기증한 것이 기원정사[祇園精舍]이며, 이런 식으로 모 국가의 왕자가 자신의 땅에 세운, 정사, 어느 여성이 기증한 정사, 등등 해서, 대림정사[大林精舍], 녹원정사[綠院精舍] 등입니다.

 

상세한 정사를 기증한 분들이 이름을 적으려면, 제가 찾아봐야 하기에 생략했습니다.

 

 

당시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입멸하신 후에 이런 정사가 훗날, 현대의 사찰로 변모한 것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설법하고 수행하기 위한 조용한 곳에 세운 집이란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 처음에는 남자들만 입교를 허락하였고, 후에는, 여성들도 불제자로 들어오게 되었지요.

 

석가모니 당시는, 인도의 계급제도로 인해, 바라문이라고 하는 최고의 승려계급의 가족들만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할 수 있었고, 무사계급, 상인계급, 노예계급 등등은, 감히, 부처님의 법을 설명하는 것은,금기시했던 시대인데,석가모니 부처님이 오시어, 신분의 계급을 타파하시었지요.

 

그래서, 노예계급이 사람들도, 생활고 등, 당시 인도 사회는, 여러 부족국가들이 있어서,

 

서로 침략하는 등이 전쟁이 아주 많았던 시대인지라, 전쟁으로 인한 고아 및 남편을 잃은 여인들도많았고, 언제 어디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시대였던 지라,

 

현대에 불교처럼, 아무나 머리깍고 승려가 되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문제가 되었던 승려들 사이의 일은, 젊은 남자들과 젊은 여성들이 불제자로 들어와,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성욕을 참지 못해, 스스로 자신의 성기를 칼로 잘라, 죽은 비구[남자승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욕을 참지 못하여 수행을 하기 힘든 사람은, 비구이건 비구니이건,세속으로 돌아가 결혼하여, 살면서, 설법대로 살라 하여....재가신도가 탄생한 것이었지요.

 

사실, 정사(精舍)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는, 불상을 모시고, 탱화를 모시고, 하는 그런 형태가 아닌, 석가모니 부처님의 입에서 나오는, 설법을들으며, 스승과 제자의 입장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참회/반성)을 하면서, 자신을 닦던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불을 숭배하던 배화교나 채식주의를 행하던 교단들도 있었고, 여러가지 종파들이 많았는데,당시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는, 현대로 전해진 형태로의, 불상이나 탱화 같은 것을 만들어 모신 적이, 없고, 그 대상물에 절하고 합장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시대가 흐르면서, 후세의 사람들이 직접 석가모니부처님이나 그분의 제자들을 뵐 수 없기에,그분들의 가르침을 따르려 하여, 불상이란 형태를 만들어 모시면서, 그 불상 자체에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닌,그 부처님의 마음, 및 제자분들의 마음을 본받고 바른 삶을 살기 위한 방편으로써,

만들어 모시게 된게, 현대의 불교의 사찰의 형태로 변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석가모니 당시의 정사를 처음 만들 당시에,인도 전역의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아무데나 똥 오줌을 싸서,

 

냄새가 고약한 상태였고, 각종 병을 옮기는 것이 비일비재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돈 많은, 여성이 자신의 재력으로 의약품을 사고, 변소도 만들고, 환자가 생기면 치료할 건물도 세우면서,현대의 형태로 바뀌어 온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 후, 제자들이 모여 입으로 듣고 기억한 것을, 책으로 엮고, 지금에 전해진 것이 불경[佛經]이지요. 석가모니부처님이 생존할 당시에는, 바라문 이외의 많은 사람들이,

 

문맹[文盲]으로 인해, 글을 읽거나 쓰거나 하는 사람이 바라문 이외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일부 무사계급이었던 왕들은, 글을 알지만, 학문을 배운 적이 없는 문맹한 분들을 위해, 쉽게 설법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을 인도 당시의 전역에는 연꽃이 상당히 많이 피는,

 

연못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노예계급과 상인계급 무사계급 그리고 바라문 같은 사람들에게,

 

아주 쉽게 설법을 한 것이 현재의 법화경[法華經]인데, 후세에 전해지면서, 그 앞에 접두어를 첨가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여시아문 "나는 이렇게 들었다" 란 말이 나온 것입니다.

 

고대 인대의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는, 기억력이 상당히 좋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입멸 후,

 

그 제자들 몇 백명이 들은, 말을 글로 옮긴 것이지요. 그런 가운데, 제자들 사이에 종파가, 생기면서, 현재의 여러개의 종파로 변한 것입니다.

 

그리고, 외국말인 인도말을, 중국말로, 다시 우리나라 말로 해석하는 과정에, 깨달은 분들에 따라, 그 가르침을 믿고 따르다 보니, 역시 종파가 갈라진 것입니다.

 

 

※위 내용은, 고 다카하시 신지[故 高橋信次]란 분이, 여러 권의 저서 중에서, 기억나는데로, 적은 것입니다. 또한, 이 분의 수제자분의 글에서도 참고한 것입니다.

 

 

※현재의 불상이나 탱화에 머리 주변의 후광이 비춰지는 모습이나 몸 전체로 후광이 비춰지는 모습은, 실재로 깨달음에 이르면, 누구나가, 머리 주변에 후광이 나온다고 합니다.

 

참고로,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 불제자로 스님이 되기 위해서는, 일주일간 세상에 살 때의 모든 것을 기억해내어, 반성을 하게 한 후에, 사리불이나 다른 제자가, 그 사람이 머리에 후광이 나오면,

 

제자로 받아들이고, 후광이 나오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머리에 후광이 나오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른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수제자였던 사리불이나 다른 제자들이나, 스승이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수행 중에 아라한의 경지에 들었다가, 퇴보하여, 속세로 돌아가는 제자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삼국의 사찰(한국,일본,중국)

 

사찰이란 절·사원(寺院)·정사(精舍)·승원(僧院)·가람(伽藍) 등으로 불리며, 불상을 모셔 놓고 승려들이 거처하며 불도를 닦고 불교교리를 설파하는 곳이다. 원래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에 있어서 승려들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무소유(無所有)를 이상으로 삼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한 주거를 가지지 않고 독신생활을 하면서 걸식으로 수도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7, 8월의 우기에는 비가 많이 내리기 때문에 바깥에서 생활하는 것이 불편했고, 한 곳에 모여 수도에 정진할 수 있는 건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사찰은 바로 그러한 형태가 변형되어 발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아시아권에서 발생된 문명을 거론하자면 인도문화권과 중국문화권으로 대별되는 데, 인도문화권에서 발생된 불교가 중국문화권으로 들어와 현지 토착종교와 융합하면서 크게 발전했다는 사실은 동서 문화교류사에 있어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더욱이 현재 종주국 인 인도에서는 불교가 쇠퇴하고 오히려 힌두교가 번성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한국, 중국, 일본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삼국은 불교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안 될 정도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문화형성에 많은 영향을 받아왔으며, 오늘날까지도 불교가 종교적· 사회적·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왕실불교 융성과 불교의 대중화

 

동아시아 삼국의 불교 유입과정을 보면 정치적이나 경제적으로 힘 있는지배층과 상류층이 먼저 수용했다는 특징이 있다. 아마 일반 민중은 외국에 나갈 여건이 조성되기 어려웠고 외국문 화를 접촉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초의 불교는 국가 통치체계에 문제가 생겼거나 이념적·사상적뒷받침이 필요할 때, 왕권을 유지하고 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여진 경우가 많다. 따라서 초기의 사찰 건축은 이들 지배층에 의해 주도적으로 건립되었으며 그 규모도 궁궐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조성되었다. 이른바 왕실불교가 융성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가 피지배층인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널리 침투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불교가 지니고 있는 포용력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불교가 석가모니 유일신만을 고집하지 않고, 원래부터 그 나라의 신앙대상이었던 천신(天神)·지신(地神)· 조상신(祖上神) 등을 폭넓게 수용하여 공존공생을 꾀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사찰건축에 남아있는 독성각(獨聖閣)·칠성각(七星閣)·산신각(山神閣), 그리고 이 신(神)들을 한데 묶 어 모신 삼성각(三聖閣) 등은 기존에 있던 전통 민간신앙이 불교에 흡수된 사례를 보여주는 전각들이다. 이러한 경우는 동아시아 삼국이 모두 비슷하여, 불교는 중국의 도교(道敎), 한국의 무교(巫敎), 일본의 신도(神道)와 성공적으로 결합하여, 오늘날까지 그 나라 중심종교 로서의 지위를 굳건히 확보하고 있다.

 

동아시아 삼국은 불교역사가 오래된 만큼이나 무수한 사찰들이 존재하며 그 종파와 건축 유형이 매우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일일이 전부를 소개하기가 어렵고, 거론되는 대표적 사찰도 너무 많아 특정해서 설명하기 곤란한 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므로 이번호 에서는 삼국의 대략적인 사찰건축 특성을 소개하는 정도로 내용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먼저 중국의 사찰은 자연경관이 수려한 산 속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불교 4대 명산이라 회자되는 오대산(五대山)·아미산(峨眉山)·구화산(九華山)·보타산(普陀山)에 유명 사찰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건축배치의 특징으로서, 불교 발상지인 인도는 탑을 중심으로 전각을 배치하는데 비해 중국에서는 불당을 중심으로 배치한다. 또한 모든 건축물은 남북방향으로 설정된 축선(軸線)에 따라 질서정연하고 대칭적으로 배치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전체적인 사찰의 조형수법은 궁궐건축의 영향을 받아서 휘황찬란하며 장엄한 분위기를 풍기는 특징을 보인다.

 

각 건축물의 평면구성은 대부분 직사각형이나 정사각형의 단순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개개의 단위 건축물마다 독립된 지붕을 씌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조형식은 지반위에 높은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아 기둥을 세우는 형식을 취했다. 기둥을 현란하게 치장하기도 하고, 재료의 노출부분에 화려한 채색을 하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일본은 평지에 위치하는 평지가람형(平地伽藍型) 사찰이 많다. 이는 평지가람형·산지가 람형(山地伽藍型)·석굴가람형(石窟伽藍型)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중국이나, 산지가람 형이 대부분인 한국의 특성과는 다소 다른 점이다. 그 이유로서 중국과 한국은 불교를 정치·사회적 이념의 기준으로 삼아 탈세속적으로 향유하려는 경향이 강했고, 일본은 국가봉건통치의 기관으로서 활용하거나 교리를 전유(專有)하여 실용화하는 방향으로 세속화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일본 사찰의 건축배치는 시대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졌는데, 아스카(飛鳥)시대에는 탑과 금당(金堂)을 중앙에 두고 주위에 회랑(回廊)을 두른 형태가, 헤이안(平安)시대에는 정토(淨土)신앙이 유행하면서 사찰에 연못을 만드는 형태가, 무로마치(室町)시대에는 선종(禪宗)의 영향으로 이런 것들을 합친 절충식 형태가 주류를 이루었다. 건축의 평면구성은 동대사(東大寺)·법륭사(法隆寺)·사천왕사(四天王寺)·흥복사(興福寺) 등에서 보는 것처럼 대체적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는 형태가 많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는 중국의 경우와 달리, 일본은 세부적으로 철저하게 비대칭 평면이 이어지는 특징이 있다. 아울러 자연스런 형태로 비대칭평면을 구성하는 한국의 경우와 달리, 일본은 구석구석 치밀하게 계산된 공간과 정교하게 다듬은 재료를 사용하여 긴장감을 유도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은 전국 방방곡곡에 사찰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불교가 융성했던 나라이다. 불교가 유입된 삼국시대로부터 숭불정책을 폈던 고려시대까지는 평지가람형과 산지가람형 사찰 수가 비슷했으나, 억불정책이 펼쳐졌던 조선시대에는 평지가람형이 줄어들고 산지가람형이 많이 형성되어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삼보(三寶)사찰’즉 통도사(通度寺)·해인사(海印寺)·송광사(松廣寺)나, ‘오대적멸보궁(五大寂滅寶宮)’즉 통도사(通度寺)·상원사(上院寺)·봉정암(鳳頂庵)·법흥사(法興寺)·정암사 (淨巖寺) 등, 유명하고 규모가 큰 사찰들이 대부분 산 속에 위치하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 연유한다.

 

한국 사찰의 배치특성은 인위적 축선을 설정하지 않고 지형과 지세를 자연스럽게 살리면서 비대칭적으로 조성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므로 사찰공간에 들어서면 여유로움과 편안함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공간구성에 있어 산지가람형이 많은 특성 때문인지 수평적인 개념보다는 수직적인 개념이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특히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구도를 가진 부석사浮石寺)의 전각배치 사례에서 보듯이, 사찰공간이 단순히 건축물만을 나열해놓은 형태가 아닌 특정한 의도에 의해 드라마틱하게 배치된 까닭에, 방문자에게 신심(信心)과 흥미(興味)를 동시에 유발시키며 사찰 조영자의 깊은 철학을 느끼게 한다. 앞으로 이러한 한국 사찰건축에서 느끼는 감동스런 조형미가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을 날이 반드시 도래할 것이라고 믿는다

 

구품연지(극락정토를 모방하여 만든 불교 사찰 안의 못)지.”

 

불교의 출현에 따라 연꽃은 부처님의 탄생을 알리려 꽃이 피었다고 전하며, 불교에서의 극락세계에서는 모든 신자가 연꽃 위에 신으로 태어난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인도에서는 여러 신에게 연꽃을 바치며 신을 연꽃 위에 앉히거나 손에 쥐어주며, 불교에서도 부처상이나 스님이 연꽃 대좌에 앉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중국에서는 불교 전파 이전부터 연꽃이 진흙 속에서 깨끗한 꽃이 달리는 모습을 속세에 물들지 않는 군자의 꽃으로 표현하였고 종자가 많이 달리는 현실을 다산의 징표로 하였습니다. 중국에 들어온 불교에서는 극락세계를 신성한 연꽃이 자라는 연못이라고 생각하여 사찰 경내에 연못을 만들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물이 없는 곳엔 생명이 없다”

부처님께서는 꽃을 무척 좋아 하셨다. 특히 그 중에서도 연꽃을 가장 아끼셨던 것 같다. 그래서 태어나면서부터 일곱 걸음마다 연꽃이 받쳐주었으며, 마음의 법을 가섭에게 전할 때에도 연꽃을 들어서 정법안장열반묘심(正法眼藏涅槃妙心)을 부촉 하신 것이다. 따라서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불화(佛花)이며, 때로는 부처님을 대신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불교의 이상적인 국토를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라고 하며, 극락정토에는 연꽃으로 장식되어 있을뿐 아니라 그 곳에 왕생할 때에도 연꽃에서 태어난다고 한다.

 

연꽃을 중시하는 것은 우리나라 사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찰의 구석구석에 연꽃 조각이 없는 곳이 없으며, 법당에는 온통 연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꽃은 모두 조각이나 그림으로만 표현하고 있을 뿐이지 살아 있는 연꽃은 한 송이도 구경할 수 없는 곳이 많다. 왜 상징적인 연꽃, 즉 석물이나 목조각, 단청, 벽화, 불단, 연등 등은 연꽃으로 장식하면서 도량의 한쪽 구석에 한 송이의 연꽃을 심지 못할까 하는 점이 항상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오래 된 사찰의 입구에는 대부분 연당이 있기 마련이다. 옛 스님들께서 사찰 입구에 연못을 만드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몇 가지를 헤아려 보면 실용적인 측면에서 그 의미가 대단히 중요하다.

첫째는 불교의 상징적인 꽃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타내는 정토(淨土)의 의미가 있다. 둘째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세속에 있으면서도 청정하게 살며,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말라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의 가르침이 있다.

셋째는 연꽃은 오염된 수질을 정화시키는 능력이 있으므로 사찰의 생활오수를 청정하게 한다.

넷째는 사찰에 화재가 났을 경우에 방화수의 역할을 한다. 다섯째는 물고기를 방생할 수 있는 방생지(放生池)의 역할을 한다. 이 외에도 그 장점이 많을 것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연꽃을 심어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한 때는 연꽃이 불교의 상징적인 꽃이라고 하여 몰지각한 일부 이교도들에게 수난을 당한 적도 있다.

 

 

불교에서는 연꽃은 부처님의 탄생을 알리는 꽃, 그리고 신성한 연꽃이 자라는 연못을 극락세계로 생각하여 사찰 경내에 연못을 만들었다고 서술되어 있네요

 

자신의 외모가 아니라 마음속에 그리던 아사달의 영혼을 본 것이다.사진 5-4 해남 대흥사 연지. 불교사찰의 연못은 내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보는 마음의 거울이다

 

돌확

 

우리나라의 정원에 연못을 만드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명당수를 그대로 방류하면 지기를 쇠할 염려가 있어

일단 물을 머물게 하기 위해 정원에 연못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물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기에 연못을 둔다고 했다.

 

동쪽에 연못을 만드는 이유로는 도가(道家)적 요소를 들었다.

바로 서류동입(西流東出)이라고 하였다.

서쪽에서 흘러 들어와 동쪽으로 연못에 입수되도록 연못을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연못의 둘레는 네모나고 가운데 섬은 둥글다.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의미한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고 믿었다.

그래서 정원안에 둥근 섬을 만들고, 연못 둘레는 네모다.

허균은 정원 조성의 동기와 이름을 붙일 때 유교사상을 따르지만

정원조성 경영 실제는 도가와 풍수적 요소를 반영하였다고 말한다.

정원 안에 주로 연꽃을 심는 이유는

더러운 뻘에서 자라지만 물들지 않고 순수함을 상징한다.

바로 유교의 선비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연꽃이라고 했다.

경회루는 우리나라 정원과 누각에서 볼 수 있는 장엄과 치장을

총망라하고 있다

 

 

우리 옛 정원의 연못에 대해 _ 2012.6.14

 

 

 

경복궁에 가보면 두 개의 연못이 있다. 테두리가 네모난 연못은 경회루가 있는 연못이고 둥근 연못은 경복궁 북쪽 깊숙한 곳의 건청궁 앞에 있는 香遠池(향원지)이다.

 

이에 네모진 경회루 연못은 公的(공적)인 역할을 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회루란 이름부터가 君臣慶會(군신경회), 임금과 신하가 즐겁게 만난다는 말에서 따왔으니 그렇다.

 

연못을 바라보며 즐길 수 있는 慶會樓(경회루)는 구조부터가 동아시아의 관념과 철학을 철저하게 반영하고 있다. 일례로 경회루의 기둥은 48 개인데 이는 24 節氣(절기)에 해당된다. 경회루 자체가 우주의 模型(모형)인 셈이다.

 

경회루 연못은 네모난 方池(방지)인데 그 안에 조성된 인공섬 역시 네모지다. 이름을 萬歲山(만세산)이라 하는데 봉래봉 등의 이름을 붙였으니 이상향을 뜻한다.

 

이 연못은 인공적으로 파서 만들었는데 그 파낸 흙으로 만든 假山(가산)이 왕비의 침전인 交泰殿(교태전) 뒤에 있는 峨嵋山(아미산)이다.

 

아미산은 중국 사천성에 있는 신령한 산으로서 수많은 名刹(명찰)들이 있는 산이고 예로부터 산에 오르면 신선을 만날 수 있다고 했기에 궁내에 흙으로 아미산을 조성했던 것이다.

 

평지를 파서 연못을 만들고 그 흙으로 산을 만드니 이는 합쳐서 陰陽(음양)이니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조경방식이다.

 

交泰殿(교태전)이란 말이 정말 의미심장하다. 주역의 天地交泰(천지교태)란 말에서 따온 것인데 양인 남자와 음인 여자의 交感(교감)이고 이를 통해 아이가 태어나니 낳고 또 낳는 이치, 生生之道(생성지도)를 의미한다.

 

임금은 하늘의 아들이자 나라의 주인이니 그 자리를 이어가는 왕자의 생산이야말로 나라의 뿌리임을 말해주고 있다. 참고로 창덕궁의 경우 왕비의 침전을 大造殿(대조전)이라 하니 이 또한 (나라의 주인이 될 사람을) 크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경회루 연못이 공적인 공간이라면 향원정이 있는 香遠池(향원지)는 테두리가 둥글다. 이로서 왕의 私的(사적)인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왕이나 왕의 가족들만 들어갈 수 있는 제한된 구역이니 보통 이런 정원을 禁苑(금원)이라 한다. 향원지는 금원 안에 있는 연못인 셈이다.

 

경회루 연못 안의 섬은 이상향을 상징한 것이어서 다리가 없지만, 향원지 안에는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의 향원정을 만들었고 또 그곳으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까지 있어 醉香橋(취향교)라 이름 지었다. 꽃향기에 취하는 다리라는 뜻이다.

 

향원정의 물은 궁의 뒷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인데 이를 다시 경회루 연못으로 끌었다가 마지막에는 경복궁의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에 놓인 永濟橋(영제교) 아래를 서에서 동으로 흘러나가는 禁川(금천)을 만든다.

 

禁川(금천)이라 하는 이유는 그로서 임금이 거주하는 공간을 나누기 때문이다. 또 서에서 동으로 흐르도록 안배한 이유는 동아시아 문화에서 강은 기본적으로 東流水(동류수)라는 관념을 반영한다.

 

땅을 파서 연못을 조성하고 그 흙으로서 가산을 만드는 방식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중국 베이징에 있는 ‘이화원’이다.

 

이화원의 인공호수인 쿤밍호, 한자로는 崑明湖(공명호)라 하는데 이는 중국 서남부의 운남 지역에 있는 거대한 호수 쿤밍호를 모방한 것으로서 넓이가 2.2 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여기서 파낸 엄청난 양의 흙으로 산을 쌓았으니 곤명호 앞에 있는 萬壽山(만수산)으로서 높이가 근 70 미터에 달한다. (베이징에서 가장 가볼 만한 명소는 자금성이 아니라 이화원이 아닐까 싶다. 자금성은 다리만 아플 뿐이다.)

 

궁내 연못만이 아니라 일반 개인들의 정원 연못에서도 연못이 둥글면 사적인 공간, 즉 가족들만 거니는 곳이고 네모지면 외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공간을 의미한다. (일례로 전남 구례의 운조루 연못은 네모지다.)

 

또 연못이 둥글 경우 안의 섬은 네모지게 만들거나 아니면 반대로 연못이 방형이면 인공섬은 둥글게 해서 음양을 배합한다. (창덕궁 부용지는 연못은 네모지고 인공섬은 둥글다.)

 

인공섬은 대부분 三神山(삼신산), 봉래 방장 영주의 세 섬을 뜻한다. 하나만 있으면 그냥 이상향이지만 세 개가 있는 대표적인 경우가 남원 광한루의 연못이다.

 

광한루 연못의 삼신산은 건너갈 수 있도록 다리가 있어 즐겁다. 건너가서 땅을 밟으면 신선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연못은 동아시아 문화권의 정원 양식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글을 쓰고 있노라니 내가 가 본 우리와 중국의 많은 연못들이 눈앞을 스쳐간다. (일본의 정원에 대해선 관심은 많아도 미처 구경하지 못했다.)

 

고산 윤선도가 조성한 보길도의 부용동 세연정 연못, 영양 서석지의 연못이 생각난다.

 

또 국내 여러 사찰의 여러 연못들, 둥근 연못과 네모진 연못들이 떠오른다.

 

충남 개심사의 연못, 울진 불영사의 연못, 양양 낙산사의 네모진 연못, 또 내가 즐겨 찾는 지리산 칠불사의 둥근 연못과 네모진 연못 등이 떠오른다.

 

우리 정원이나 그 안의 연못을 찾아가 감상할 때 중요한 것에 대해 얘기하고 마무리하겠다.

 

정자가 있을 것이고 누각이 있을 것이며 연못이나 그 안의 섬에는 이름이 있을 것이다.

 

즐기는 핵심은 그 명칭이나 이름을 봐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그 정원이나 연못, 정자나 누각을 조성한 사람의 정신이 기구했던 경계를 이해할 수 있고 그를 통해 작은 공간 속에 깃든 우주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