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면 상가리죠, 응 상가리.
[조사자 : 절도 있구, 탑자리였다구요? 그런데 묘자리를 누가 어떻게
잡아 줬나요?] 지관이 잡아줬지요. 그러니까 그 자리가 가야
탑자리라고 그래요.
그런데 대원군이 자기 아버지 모(묘)에다 쓸라고 도당에다가,
여기와서 부강 터라고, 지금 현재 모이 쓴 고기에서 약 100미터 정도
더 올라가면은, 고기 부강 터라고 그러지요. 거기다가 모이를 썼대요.
그러구서 그 탑 자리를 사야 쓸 거 아니것서요.
그런데 그 당시 그 산을 소유를 하고 있던 사람이 윤씨였다고 그래요.
그런디 그 분이 워디 사느냐 하면, 이 옥계 저수지 아래,
그기에 저들도 봤는데, 큰 기와집이 있었어요. 고기서 살았었는데,
인자 대원군이 그 당시에는 대원군이 아니지요.
그 집에 말로에 가서 이렇게 공석을 깔고서, 그 윤씨하고 상대를 해서,
당신이 암디 그 탑자리 그거를 내게 파시요. 그러니까,
얼마 줄라고 그러느냐? 고 하니까,
한 천 냥 드린다고. 하니까,
그러면 사라고.
그래서 천냥에 그 탑자리를 사가지고 묘를 썼다고 그래요.
그런디 그 대원군, 암튼 그 자리 말루 복을 빼고서 갈아 끼었대요.
그 윤씨가. 그러니까 대원군을 그 만큼 나쁘게 본 거죠.
좋지 않았던 사람이 앉았던 자리다. 그 당시 윤씨가 상당히 양반
행세를 하고, 아마 그랬던가 봐요. 인저 그러구서 묘를 썼는디,
그 후로 대원군이 가서 그랬다 말이시. 윤씨한테 얘 내가 너한테
어째 천냥이 이 산 전체를 샀지 그랬다 말이시유. 그래 가지고 빼 갔다.
그런 전설이 있시유.
■ 채록일시 : 1999년 7월 2일
■ 구 연 자 : 이동엽(남. 69. 농업)
■ 학 력 : 초등학교
■ 본 적 : 홍성군 갈산면 운곡리
■ 주 소 :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107
■ 살아온 내력 : 홍성면 갈산에서 태어나서 세 살때 덕산으로 이사와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 채록장소 : 구연자의 집에서
■ 만난경위 : 소개를 받고 직접 찾아가서
■ 채록상황 : 관혼상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갔다가 남연군묘에
대한 전설을 듣게 되었다.
■ 청 중 : 조사자 1
■ 처음 들은 때와 들려준 사람.
남연군묘(3)
기억력이 없어서 모르는데 뭐 남연군에 얽힌 이야기는 많이 있지요. 사실은 정만영이가 그때 당시 구한말, 고종 대원군이 집전허기 전에 정만영이라는 사람은 지금 당시 육관도사 손석우만큼이나 유명했던 지사였던, 풍수지리가였던 모양이예요.
그 사람을 찾아가, 제일 거, 아주 제일 명세가 있는 지관을 찾으니까
정만영이라고 해서 정만영이를 찾어서 에 자기 아버지 이장을 좀 해야 돼겠다.
자기 아버지 이구씨가, 남연군이 경기도 연천에 지금 있는데 명당자리를 한번 좀 모셔야 되겠다. 내적으로는 사실은 그때 당시 아주 몰락해 버린 종친 왕권을 더 이상 짓밟혀서는 안되겠다 해가지구 왕권을 잡기위한 방편으로 자기 아버지 남연군을 이장을 허기 위해서
에 명당 자리를 한번 찾어봐라 해서 정만영이가 찾은 것이 지금 남연군 그 묘 자리 아니겄어요.
그래서 인저 현지를 답사를 허구서 대원군에게 충청도 덕산 땅에 가니까 명당자리가 두 자리가 있는데 하나는 이대천자지지요, 하나는 만대영화지지인데 어느 명당을 원하십니까? 하니까
만대영화지지는 싫고 지금 아주 땅에 떨어진 우리 왕권을 회복허기 위해서 이대 천자지지를 나는 원한다.
그래서 그 천자지지 자리를 알려다오.
그래서 정만영이랑 여기룰 와 보니까 과연 뭐 이 구만리에서 부텀 봐도 예산쪽에서 봐도 청룡 백호라든가 그 혈맥을 봐서든지 다, 뭐 우리가 그렇기 봐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 때 당시에도 둘이 헌 얘기가 과연 명당은 명당 자리다 해가면서 그 자리를 찾어가서 보니까
에 천년이나 된 가야사 절터에 금탑이라고 한, 금탑, 그 탑이름이 금탑인데 햇볕에 이렇기 그 받게 되며는 금색이 나오는 탑이 하나 있었다는데, 바로 이 금탑 이 자리가 이대 천자지지입니다.
절 안에, 그래 절을 불사르고서 금탑을 窪애야 되는데 지금처럼 뭐 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형제가 여기 내려와서 금탑을 불지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야사도 많이 있고, 연못에 나뭇꾼이 불질르는 것을 봐가지구 어, 그 증거를 窪애기 위해서 나뭇꾼을 칼고 찔러서 연못에 빠트려서 그 연못에 빠트려서 헌 그런 얘기두 있고, 그래 금탑을 부수는 데 사형제가 대원군이 제일 막내 아니겄어요. 막내가 금탑을 부시는데 자기 형덜은 벌벌벌 떨면서 부시질 못했다는 거요.
그래서 대원군이 형님덜이 못허며는 지가 하겠습니다.
더 이상 왕권을 이렇기 이 그 김씨덜한테 조롱 당헐 수 있느냐?
하믄서 자기가 도끼루 부셨다구 하는데 지금과 같이 장비가 있으면이야 얼마나 좋았겄어요. 그런디 그 도끼루 얼마를 부셔서 부셨는지 모르지마는 부실 때 뭐 천둥 번개두 뭐 쳤다구 그러는데 천둥 번개를 무릅쓰고서 뭐 대원군이 에 도끼루 그 금탑을 부셨다는 거요.
그래서 바로 그 자리에다가 이장을 허는데 물론 처음에 경기도 연천에서 시신을 옮겨왔다 바로 그 자리에다 쓰질 않았어요.
고기서 몇백미터 떨어진 곳에다가 가묘를 해 놨다가 가매장을 해 놨다가 완전 묘터를 만든 다음에 이장을 했지요. 근데 지금 예산 지방에나 아니며는 덕산 지방의 향토 사학자덜은 지금두 그 남연군 묘자리를 보존헐 것이 아니라 파묘를 시키구서 옛날 가야사를 복원해야 한다는 을 지금까지두 주장을 허는 거요.
■ 채록일시 : 1999년 7월 1일 오후 4시
■ 구 연 자 : 이한만(남. 54. 공무원)
■ 학 력 : 고등학교
■ 본 적 : 예산군 응봉면 노화리 331번지
■ 주 소 : 예산군 응봉면 노화리 44-17번지
■ 살아온 내력 : 응봉면에서 태어나 예산농고를 졸업했으며, 공무원으로
예산군청과 면사무소에서 근무를 하다가 현재 충의사 관리소장으로 있다.
■ 채록장소, 만나게 된 경위, 채록상황, 청중, 설화력 : 앞 이야기와 같음.
남연군묘(南延君墓)(1)
지금 저 요 삼거리 가면 남연군 산소라구 있잖유.
남연군 산소는 거기가 인저 당대 제왕지지라고 그러는데유.
그게 누가 잡었느냐믄 정만영이라는 승려, 중이 잡았유. 누가 인제 그 대원이 대감이 으,
자기 선친이 죽었는데 죽어서 딴 데(다른 곳에) 묘를 썼다 그랬지유.
인제 신위지지(身後之地)를 정하려 중을 데리구 조선 팔도를 다 돌었어. 대원이 대감이.
그래 인제 거(거기에) 와서 중이 인저 지정을 해 줬는디, 대원이가 말하기를, 여기다 친산을 들이믄 등극할 수 있느냐? 하니, 등극한다. 당신 아들이 등극하는디, 당대제왕지지(當代帝王之地)다. 그랬지. 당대밖에 못헌다 왕 노릇을.
그거 좀 연장할 수 있느냐?
그러니께, 그 중이 하는 말이, 만인을 죽여라
하는디, 대원이 대감이 그말을 잘 못 알어 듣고, 오산(誤算)을 한 겨. 만인을 죽여라 한 것은 그 중이 자기를 죽이라는 이런 뜻인디, 이, 저 대원이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만 명을 죽일 사람이 없거든. 그 때 시절에. 생각김에 생각 못허다가 그때 인저 서구에서 인저
천주교라는 게 우리나라에 교가 들왔거든. 아, 요 천주교 하는 놈을 다 잡어죽여야겄다.
그래서 만인을 홍성서 다 잡어 죽였잖아. 만인이니까 자기를 죽이라는 것인디,
사람 만 명을 죽이라는 뜻으로 대원이 대감이 알아들었다 이거여. 인제 거기가 묘를 썼더니 고종이라 대왕이 된거지.
■ 채록일시 : 1999년 6월 28일 오후 2시 30분경
■ 구 연 자 : 김규환(남. 75. 농업)
■ 학 력 : 초등학교
■ 본 적 : 예산군 덕산면
■ 주 소 : 예산군 덕산면 읍내리 2구 36-2번지
■ 살아온 내력 : 덕산면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농사를 지었으나
이제는 읍내리로 이사와 살고 있다. 현재는 농사를 짓지 않고 있다.
■ 채록상황, 만난경위, 청중, 설화력 : 앞 이야기와 같음.
남연군묘(2)
그러구 가야산의 산세가 잘 됐다구. 남연군묘라던가 이런 걸루 해서 전설로두 그렇구,
근세 현대에두 이렇기 일러 오구. 그 래서 이 남연군묘가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라구 그러는디, 그 정 지사(鄭地師)라구, 대원군이 남연군묘를 이장하기 위해서 묘자리를 거- 부탁한 지사가 정 지사. 정 누구더라. 그런디 음, 그 정지사의 말에 의하면은 가야산맥에 이대천자지지, 이미 그 남연군묘루다 쓰여졌구, 그리구 또 한자리는 으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가 있는디, 그 두 자리 중에서 대원군 보구서 어, 택일하라 하니까, 한 곳을 택하라 하니까,
이대군자지지를 택했다 이거지. 인제 나머지 한 자리가 만대영화지지, 이 가야산맥 중에 어딘가 있다구 그래서, 그렇게 일러 오는 곳이 있죠.
왜 이대천자지지를 택했다구 하는지, 그것은 다 공인된 사실인디.
왜냐믄 그 대원군이 으 안동 김씨라든가 세도에 눌러서 그 왕권 강화를 허기 위해서, 우선 그러니까, 음 남연군의 자손들이 왕이 되기 위해서 대원군은 자기 아들을 어찌게든지
왕으루다가 책봉해 가지구서 좀 정권을 잡을라구 했기 때문에, 그래서 만대영화두 좋지마는 우선은 군왕이 되야 이씨왕권을 다시 강화하겠다 하는 그런 뜻에서 했다는 거구.
■ 채록일시 : 1999년 06월 28일 오후 7시
■ 구 연 자 : 이승녕(남. 74. 교직에서 퇴임)
■ 학 력 : 고등학교
■ 본 적 :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 주 소 :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367번지
■ 채록장소, 만나게 된 경위, 채록상황, 청중, 설화력 : 앞 이야기와 같음.
가야산의 풍수와 지명
가야산 연봉에 원효봉이라구, 아주 산 모양이 그 마치 일본의 후지산, 후지산 같은 모양으루다가 되 있는 산봉우리가 있는데, 이 가야산맥에서는 가사봉 다음에 해발 높이는 그 두 번째 갈거유 아마. 근디 그 원효봉에서 전해 온 전설이죠 그러니까. 기록은 없으니까,
으 뭐냐므는 내가 어렸을 적에 들은 얘긴데, 이 저 그 원효봉, 그러니께 남록이라고 하까,
남쪽으로 향한 곳에 에- 절이 많이 있었는데, 통일신라 때에 원효대사가 여기 와서 있었다하는 그런 전설이 있구. 어, 원효봉의 기슭이지. 이 아래 중복보다 더 아래, 저기서부터 절 그, 있어 가지구서 땅을 안 디디구서 절, 그 마루라든가 이런 데루 해서 산 중턱에 까지
올라갈 정도로다가 절이 그 연달어 있었다는 그런 전설이 있어유. 그래서 나두 그 어렸을 때 산 중턱까지 쭉 즘 더러 등산했는데, 그 절터가 많이 있다구 지금도. 에- 근디 그 절 이름은 어려서 들은 얘긴디, 그 좀 어찌 좀 미덥지 않은 게 오방난절이니 뭐 이런 절 이름이 있어서, 그 절 이름이 그 사실 좀 그려. 이우지(이웃) 사람들은 아마 그런 전설이 있었다는 거는 알기유 아마. 나도 어려서 들었는디, 절이 왜 언제 모두다 그 많은 절들이 없어졌느냐는 대개 옛날부터 절이 폐찰되구 하는 것은 불 나구 그래서 없어졌다구 그러는디, 말은 불나서 없어졌다구 그렇기 들었시유.
그러구 가야산맥에 가야봉이 671m가 해발 그렇구. 그 다음에 이름난 봉우리가 석문봉이라구. 석문봉은 흔히 전설루 문다래미라구, 이렇게 양쪽이 이렇게 문처럼 되 있는디,
거기 대한 전설은 있는지 나도 뭐 별로 그 신빙성이 없어서 기억두 않구. 하여튼 문다래미라구 그 봉우리가 있는디, 양쪽이 이렇기 큰 바위루다가 벽처럼 이렇기 되 있는게 지금 뭐 보이기가 잘 그게 구별되서 보이지 않구 그런디, 그것이 문다래미라는 어원에서 보통 석문봉이라구, 돌 석자, 문 문자 석문봉(石門峰)이라구 지금도 이렇기 부르죠.
■ 채록일시 : 1999년 06월 28일 오후 7시
■ 구 연 자 : 이승녕(남. 74. 교직에서 퇴임)
■ 학 력 : 고등학교
■ 본 적 :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 주 소 :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367번지
■ 살아온 내력 : 고등학교를 마치고 교원검정을 거쳐 초등학교, 중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정년퇴임을 하고 쉬고 있다. 국사, 세계사,
일반지리 등을 가르쳤기 때문에 지금도 지역의 역사나
지명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
■ 채록장소 : 구연자의 집 대청에서
■ 만난경위 : 미리 연락을 하고 찾아가서
■ 채록상황 : 대청에 모여 앉아 찾아온 목적을 밝히고 이야기를 청했으나
잘 알지 못한다고 하며 몇 가지 지명에 얽힌 이야기와
옛날에 할아버지께 들었던 이야기와 현재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여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외에도 관혼상제에 대한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청 중 : 조사자 외 구연자의 부인과 동네사람 한 명
■ 처음 들은 때와 들려준 사람 : 어릴 적에 할아버지께 들은 이야기와 개인적인 생각.
가야 구대 정승 자리
그러구 요기 인제 원효봉 맥으루다가 쭉 내려 오면서, 요기 이게 황새이마라구 그러는디,
그런 봉우리가 있는디, 왜 황새이마라구 허느냐는 그 지형, 산 모양으루 해서 황새, 그 머리서 그 황새 입부리가 뾰죽하게 되었죠.
요기서 이렇게 나서 그 저 충의사 있는 거기까지 황새 입부리처럼 찌드랗게 나와있어요.
그런디 그 황새이마의 머리 부분 거기에는 석성(石城)이 지금도 있고,
석성이 거기 지끔 아주 그 참 돌이 거 많이 있어유 지금두.
그 전이 어렸을 적이 많이 올려다니구 그랬는데, 그러구 이 근처 테뫼산이 많이 있는데,
이 봉산, 덕산이 테뫼산이라구, 산 그 정상이지.
대개 정상에 테뫼라는 게 성돌루다가 산봉우리를 둘러싼 그게 대개 석성으루 됐이유 그게.
이저 수암산 이짝, 예전엔 팔봉산이라구 그랬는디,
그 수암산 동남쪽, 동쪽 끝에두 역시 이 여기 황새이마와 같이 석성이 있어유.
근데 군 향토지 이런 데 모두 나왔으니까.
이야기를 그저 옛날에 거기서 싸웠다구.
그래서 거기서 철환(鐵丸),
철환이지 인제 철환이라는 게 인제 총 탄환을 철환이라구 그러는디,
그런 것이 납이 나왔다구. 납을 이 근처에 석성 근처에서 가믄 주을 수 있다구,
어렸을 때 그런 얘기를 들었시유.
그런데 나두 어떤 애들이 주워 가지구 대니는 것을 봤던가.
하두 오래라 희미한 생각이 있구. 이저 황새 이마 산 모랑이를 구정별이라구 그라는데,
구정별이라구 아홉 구자 하구, 우물 정자하구,
산 별자가 있는데, 아무튼 구정별이라구,
그 구정별이라는게 전설은 두가지가 있는데,
거기 정승이 날 터가 있다해서 구정별이라구 한다구.
그게 전설루 내려오는 말이지.
근디 그 구정별이 정승 날 집터가 있다구 해서,
집턴지 묘자린지 있다구 그래서, 그렇기 명칭이 있다구.
그렇기 명칭이 있는디, 내가 생각에는 음 아홉 정승이라는 게,
그 정승이라는게 그 뭐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정승인디,
그렇기까지 구대(九代) 정승이라는 말여.
구대 정승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얘긴가?
내 생각으로서는 그러니께 좋은 명당자리가 있다 그 얘기지.
근디 나는 워티기 인걸 생각했느냐므는, 으- 아홉 구자,
우물 정자를 쓰고 보므는 우물이 아홉 개 있다.
아홉 군데. 별이라는 건 산모랑이, 여기 황새이마를 구정별이라고 명칭이 붙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을 하고, 또 실지가 이 황새 이마 이 밑이, 그 전이 우물이 많이 있었거든.
에- 우물이 여러 개가 있어서, 그래서 우물이 많이 있기 때문에 구정별이라구
이렇게 지명이 붙었나 이렇게 생각을 해유. 지금은 경지정리했기 때문에 다 없어졌지.
그 물이 많이 나는 참 농경수(農耕水)로 쓰던 샘이 다 없어졌지.
근디 그래서 뭐 죽 옛날부터 지사,
지관들이 다니면서 자리가 좋은 자리가 있다구 해 가지구서,
모두 참 쇠두 놓구, 지남철두 놓고 그란 걸 많이 봤는디,
최근에 요새 여기 어떤 지사, 지관질 하던 아들이 여기다 집을 지었다구 그러더라구.
■ 채록일시 : 1999년 6월 28일 오후 7시
■ 구 연 자 : 이승녕(남. 74. 교직에서 퇴임)
■ 학 력 : 고등학교
■ 본 적 :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 주 소 :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367번지
■ 채록장소, 만나게 된 경위, 채록상황, 청중, 설화력 : 앞 이야기와 같음.
'상가리(가동)'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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