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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종(高宗)의 후궁 및 그 소생 등의 계보와 생몰에 관한 연혁

phllilp7 2016. 11. 19. 09:33

 고종(高宗)의 후궁 및 그 소생 등의 계보와 생몰에 관한 연혁

 

[*] 아래의 자료에 표시된 일자는 상당수 '음력(陰曆)' 기준으로 정리된 것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 점 이용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대군, 왕자, 공주, 옹주 등의 이름 및 생몰사항은 <선원보략(璿源譜略)>, <국조어첩(國朝御牒)> 등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을 것이나, 이 자료를 직접 열람한 사실이 없기에, 아래에서는 <고종순종실록>, <승정원일기>, <대한제국관보>, <매일신보>, <동아일보> 등에서 추출한 사실만을 정리하였음도 따로 적어둔다.

 

○ 고종(高宗; 1852.9.8~1919.1.21) [금곡 홍릉]

○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 1851.11.17~1895.10.8) [청량리 홍릉; 금곡 홍릉] 4남 1녀

      - 원자(1871.11.4~1871.11.8) [서삼릉 원자묘]

      - 공주(1873.2.13~1873.9.28) [서삼릉 공주묘]

      - 순종(純宗, 1874.2.8~1926.4.25) 1875.2.18 왕세자 책봉 [금곡 유릉]

      - 대군(1875.4.5~1975.4.18) [서삼릉 대군묘]

      - 대군(1878.2.18~1878.6.5) [서삼릉 대군묘]

▲ 영보당 귀인 이씨(永保堂 貴人 李氏; 1843.2.14~1928.11.6 양12.17) 1880.1.29 궁인이씨를 숙원이씨(淑媛李氏)로 봉작, 1906.5.27 숙원이씨를 귀인이씨(貴人李氏)로 봉작 [양주군 숭인면 월곡리 완왕묘 우강 남쪽; 서삼릉 귀인묘역] (永寶堂으로 표기된 사례도 있음)

      - 완친왕 선(完親王 墡; 1868.윤4.10~1880.1.12)  1876.4.10 완화군 책봉, 1907.1.10 완친왕 추봉 [고양군 숭인면 월곡리; 서삼릉 완왕묘(장자묘)]

      - 옹주(생몰년 미상, 1872년 이전으로 추정, <승정원일기> 1872년 3월 22일자에 관련 기사) [서삼릉 옹주묘]

▲ 내안당 귀인 이씨(萊安堂 貴人 李氏; 1847~1914.1.9 양2.13) 1900.8.3 궁인이씨를 소의이씨(昭儀李氏)로 봉작[속음청사(續陰晴史)에서는 이 날짜 봉작된 '소의이씨'를 완화군지모(完和君之母)라고 하여 '영보당 이씨'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이는 착오로 보임. 완친왕묘의 표석에는 '숙원이씨'의 출생으로 분명히 표시되어 있음], 1906.5.27 소의이씨를 귀인이씨(貴人李氏)로 봉작 [양주군 인창면 월곡리 완왕묘역; 서삼릉 귀인묘역] (內安堂으로 표기한 사례도 많음)

      - 왕녀(생몰년 미상, <실록>에 수록된 명성황후 어제행록의 내용에 따르면, 1895년 이전인 것은 확실) [서삼릉 옹주묘]

▲ 귀인 장씨(貴人 張氏; 미상) <관보> 1900.9.18일자 궁인장씨를 숙원장씨로 증(贈)함, <관보> 1906.5.30일자 숙원장씨를 귀인장씨(貴人張氏)에 봉작 [장소불명; 양주군 뚝도면 화양리; 서삼릉]

      - 의친왕 강(義親王 堈; 1877.3.30~1955.8.16) 1891.12.29 의화군 책봉, 1900.8.17 의친왕 책봉 [성동구 화양리; 서삼릉; 금곡 홍릉 구내]

▲ 순헌귀비 엄씨(純獻貴妃 嚴氏; 1854.11.5~1911.7.20) 1897.10.22 궁인엄씨를 귀인엄씨(貴人嚴氏)로 봉작, 1900.8.3 귀인엄씨를 순빈엄씨(淳嬪嚴氏)로 봉작, 1901.10.14 순빈엄씨를 순비엄씨(淳妃嚴氏)로 봉작, 1902.10.28 순비엄씨를 황귀비로 봉작 [영휘원]

      - 영친왕 은(英親王 垠; 1897.10.20~1970.5.1) 1900.8.17 영친왕 책봉, 1907.8.7 황태자 책봉 [금곡 홍릉 구내]

▲ 광화당 귀인 이씨(光華堂 貴人 李氏; 1885~1967.11.10) 1914.윤5.11 궁인이씨를 귀인이씨로 봉작 [금곡 홍릉 외곽]

      - 왕자 육(堉; 1914.7.3~1916.1.22) [고양군 숭인면 청량리; 서삼릉 왕자묘]

▲ 복녕당 귀인 양씨(福寧堂 貴人 梁氏; 1882.9.27~1929.4.22 양5.30) [고양군 숭인면 월곡리; 서삼릉 귀인묘역]

      -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5.25~1989.4.21) [금곡 홍릉 구내]

▲ 보현당 정씨(寶賢堂 鄭氏; 1872~1904 ????) [서삼릉 귀인묘역]

      - 왕자 우(堣; 1915.8.20~1916.7.25) [마장리 유릉 왼편; 서삼릉 왕자묘]

▲ 삼축당 김씨(三祝堂 金氏; 1889~1970.9.23) [금곡 홍릉 외곽]

      - 소생 없음

▲ 정화당 김씨(貞華堂 金氏; 미상) [서삼릉 귀인묘역] [곤도 시로스케의 <이왕궁비사> (1926)에 '정화당' 관련 일화가 수록되어 있음]

      - 소생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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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고종 36권, 34년( 1897 정유 / 대한 광무(光武) 1년) 11월 22일 양력 2번째기사
대행 황후의 지문의 어제 행록을 내리다

네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황태자는 둘째 아들이다. 좌찬성으로서 영의정을 추증 받은 충문공 민태호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를 삼았다. 맏아들과 셋째 대군(大君), 넷째 대군, 그리고 딸 하나 공주(公主)는 모두 일찍 죽었다. 완화군 선(完和君 瑄)은 장가도 못 들고 죽었고, 의화군 강(義和君 堈)은 지금 군수(郡守) 김사준(金思濬)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옹주(翁主)가 둘이 있었으나 다 죽었다.

 

순부(純附) 10권, 12년( 1919 기미(己未) / 일 대정(大正) 8年) 3月 4日 양력(陽曆) 4번째기사
고종 황제의 행장

......  明成后誕四男一女, 嗣聖殿下序居第二, 而餘皆早卒。 完王, 貴人李氏出, 未娶卒。 一女夭。 義王, 貴人張氏出。 一女, 李氏出, 夭。 貴妃嚴氏一男, 卽東宮殿下。 梁氏出一女, 幼。 又二男, 李氏、鄭氏出皆夭。[명성 황후에게서 4남 1녀가 탄생하였는데, 전하(殿下)의 서열은 두 번째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일찍 돌아가셨다. 완왕(完王) 이선(李墡)은 귀인(貴人) 이씨(李氏)에게서 태어났는데 결혼 전에 돌아가셨다. 1녀(女)는 요절하였다. 의왕(義王) 이강(李堈)은 귀인(貴人) 장씨(張氏)에게서 태어났다. 1녀(女)가 이씨(李氏)에게서 태어났으나 요절하였다. 귀비 엄씨(嚴氏)는 1남을 낳았으니, 즉 동궁 전하(東宮殿下)이다. 양씨(梁氏)가 1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또 2남을 낳았는데, 이씨(李氏), 정씨(鄭氏)에게 출생으로 모두 요절하였다.]

 

순부 10권, 12년( 1919 기미 / 일 대정(大正) 8년) 3월 4일 양력 5번째기사
고종 황제의 지문

병인년(1866)에 여성 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따님을 얻어서 비(妃)로 삼았는데, 이분이 명성후(明成后)이다. 우리 전하(殿下)는 둘째 아들로 탄생하였는데, 1남인 원자(元子)와 삼남인 대군(大君), 사남인 대군, 1녀인 공주(公主)는 모두 요절하였다. 완왕(完王) 이선(李墡)과 의왕(義王) 이강(李堈)과 세 따님은 모두 귀인(貴人)에게서 태어났다. 황귀비(皇貴妃) 엄씨(嚴氏)는 우리 세자(世子)이신 휘(諱) 이은(李垠)을 낳으셨는데, 서열이 세 번째로 우리 태종(太宗)의 고사(古事)를 쫓아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매천야록(梅泉野錄)> 제1권 하(下, 1894년 이전) ②

[이강(李堈)과 그 모(母) 장씨(張氏)]

世子旣陽道不舒, 因成沈痼, 明成歎嗣續無望, 擬待王子堈生子, 以承世子上統, 故視堈稍不薄, 與完和君逈別, 至辛卯 (高宗二十八年) 冬勸上封義和君, 堈生, 明成恚之, 杖利刃至張氏所, 揷刃于牖呼曰受釰, 張氏素力大, 卽一手握定釰柄, 一手推牖出, 僂伏乞命, ?散雲垂, 膚顔掩映, 意憐之, 投釰笑曰, 宜乎大殿之眷戀也, 今不可殺, 然不可處宮中, 呼力士縛之, 剜陰溝兩傍肉, 舁出于外, 張氏依其兄弟十餘年, 創蹇以死。 
세자의 양도(陽道)가 아직 발기되지 않는 데다가 고칠 수 없는 신병까지 앓고 있어 명성왕후는 세자에게 후사를 바라볼 수 없음을 한탄하고, 왕자 강(堈)이 아들을 낳으면 세자 대신 고종의 왕통을 잇게 하려고 하였으므로 강을 대할 때 예전보다는 조금 박대하지 않았다. 그것은 완화군(完和君)을 대하는 것과는 각별한 것이었다. 
 그 후 신묘년(1891) 겨울에 명성왕후는 고종에게 강을 의화군(義和君)으로 봉하자고 권하였다. 의화군 강은 상궁 장씨의 아들이었다. 강이 태어났을 때 명성왕후는 화가 나서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장씨의 거처로 가서 그 칼을 문지방에 꽂으며 큰 소리로 말하기를, "칼 받으라"고 하였다 장씨는 본래 힘이 세어 한손으로는 칼자루를 잡고 또 한 손으로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땅에 엎드려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다. 머리는 흩어져 길게 드리워져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명성왕후는 그가 가여운 생각이 들어 칼을 던져 버리고 웃으며 "과연 대전의 사랑을 받을 만하구나. 지금 너를 죽이지는 않겠다만 다시는 궁중에서 거처할 수 없다"고 한 후 역사(力士)를 불러 그를 포박하게 하였다. 그러고 그의 음부 양쪽의 살을 도려낸 후 그를 낭가에 실어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 후 장씨는 그의 형제들에게 10년 동안 의지하고 살다가 그 상처로 인하여 죽고 말았다.  
 

이강공전하(李堈公殿下)의 면례(緬禮)

<매일신보> 1911년 11월 26일자

이강공전하(李堈公殿下)께서는 본일(本日) 동대문외(東大門外) 화양사(華陽寺)에서 사친(私親)의 분묘면례식(墳墓緬禮式)을 거행(擧行)할 터인 고(故)로 박영효후(朴泳孝 候), 이병무자(李秉武 子) 제씨(諸氏)는 작일(昨日) 해사(該寺)로 전왕(前往)하였다더라.

[설명: 여기에서 말하는 '화양사'의 정체와 그 위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화양동'과 관련이 있는 사찰인 듯하고, 기사 가운데 '면례(面禮)' 즉 이장에 관한 내용이 등장하므로, 의친왕의 사친 귀인 장씨의 묘는 다른 곳에 있다가 이 시기에 '화양동'으로 옮겨진 것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겠다.]
 

(정리 : 2007.6.17, 이순우)

출처 : 청계천박의 귀촌/귀농 이야기
글쓴이 : 淸溪川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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