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가야산엔 왜 `이산` 표석이 세워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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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가야산의 조선왕실의 문화재
이산李山은(조선왕조의 산)이왕산(李王山)의 준말이며 조선시대 가야산의 상가리 일원에 남연군묘을 중심으로 왕실 소유의 산이라는 뜻이다.
조선왕실 소유의 토지의 경계를 알리는 경계표지석를 말한다.
재질은 석재로 높이 30cm 가로 세로 13cm 직사각형 앞면 이산(李山)한자로 음각되어 있다.
가야산의 상가리에는 60년대까지 남연군묘을 중심으로 밭과 논 뚝 주변에 토지 경계를 알리는 李山이라고 각자된 표석이 많았다.
이산표석을 흔하게 볼 수 있었으나 최근에는 볼 수 없고 경작이 늘어나며 돌무더기 속이나 일부는 기념물로 반출되고 훼손되어 사라졌다.
* 사진은 가야산 용연사지의 돌무더기에서 발견된 이산표석이다.
일제강점기 1918년 총독부의 조사령에 의해 조선왕조와 인연이 깊던 현종태실과 남연군묘가 있던 가야산과 전국의 임야는 조선총독부의 소유지가 된다.
이에 조선왕조는 남연군 묘가 있는 가야산의 상가리 일대 곳곳에 이산이라는 표석을 세워 가야산이 조선왕실의(전주이씨종친) 사유재산임을 내세워 조선 총독부의 재산으로 넘어가는 것을 모면 한다.
조선왕실의 창덕궁(이 왕실 사무를 총괄)은 일본 총독부에 사유지 이의서를 제출하고 가야산 일대에 조선 왕실의 소유지라는 표시로 표(標)항(杭)인 이산표석을 세우는 한편, 조선총독부에 가야산일대의 조선왕실 소유의 토지를 사유지로 신고한다.
그 결과 조선왕조 소유의 임야는 1924년 창덕궁에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이산 표석은 일제강점기 조선왕조 소유의 산림과 임야 약탈 때 창덕궁 소유권(왕실)표시 하며 저항한 역사적인 산물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산 표석을 통해 왕조체제의 해체 과정과 함께 식민지 상황에서 전통 왕실 소유의 토지가 어떻게 관리 또는 이용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임야에 대한 소유 개념이 없었다. 조선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산림을 개인이 점유하면 볼기 80대를 때린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른바 공산무주(公山無主) 원칙을 지켜왔다. 다만 임야에 관한 배타적 이용이 금지되었을 뿐 누구든지 주인 없는 임야에 출입해 가축 방목, 연료 채취, 토석 채취, 수렵 채집을 할 권리가 인정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개인의 재산으로 등록되지 않은 임야는 모두 조선 총독부의 재산으로 몰수하는 법이 시행되었다.
일제는 군사·학술상 필요한 보안림에 준하는 국유림은 ‘요존치 임야’로 나머지는 ‘불요존치 임야’로 분류해 관리했다. 국유림에 속한 촌락공유림과 분묘림은 일본인 등에게 선심 쓰듯 내주었다. 당시 전체 임야의 50%가 총독부 소유로 되었다가 다시 일본인 개개인에게 불하되었다
그 시절에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임야를 등록하지 않고 사용하다 자신의 땅을 빼앗긴 억울한 백성도 많았다고 한다.
한편 가야산의 상가리쪽의 임야와 토지는 제주목사 박성식의 사페지로 사위인 윤봉구에게 상속되었으며 윤씨 일가의 토지는 100 여 년간 온전히 소유권이 보존 되다 가야산에 대원군이 남연군묘를 면례하며 윤봉구의 토지는 대원군의 회유와 강압에 의해 헐값에 빼앗기게 된다.
대원군에 의해 1846년 가야산은 조선시대 왕가의 땅이되며 조선왕실의 소유가 된다.
가야산 일대에서 발견된 이산(李山) 표석은 1918년 일제 총독부가 주인 없던 임야를 모두 자신들의 소유로 귀속시키려던 수탈에 맞서 이 씨 왕가가 세운 것이다. 이 땅의 주인이 창덕궁임을 알리려던 조선 왕조의 고된 싸움을 이산 표석은 보여준다.
내포지역의 주산인 가야산의 상가리는 조선왕실와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헌종태실과 남연군묘을 비롯하여 숙종의 명빈박씨와 연령군등을 모셨으며, 인근에 대원군의 형인 흥영군의 묘 등 왕실과 아주 많은 인연이 있는 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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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지역은 지리적으로 서울과 바닷길로 하루면 오갈 수 있는 오가는 길이 수월했던 지역이다.
바닷길이 내륙 깊숙이 연결되는 당진과 예산 아산만지역의 넓은 평야의 사대부들이 많이 정착하며 왕실의 궁방전과 삽교천과 해미바닷길로 통하던 가야산주변의 태실이 많다. 특히 예산군 상가리는 왕실 옹주들이 어린 나이에 죽으면 모시는 곳이 으름제로 가는 백제의 미소길의 이었으며 아시묘골이라는 지명으로 아직도 전해진다.
마을에서는 탑 터 (자리)라고 불려지는데 아마도 그곳에 일찍 사망하는 옹주들의 추모하기 위한 작은 사당과 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산표석이 세워지기 바로전인 120년전의 상가리의 모습을 정치인이자 수필가인 운양(雲養)김윤식은(헌종1년 1835∼1922)면양행견일기(沔陽行遣日記)에 1893년5월 초 6일 가야산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원당곡을 경유하여 다시 쌍룡폭포를 보았다.
비온뒤라 물소리가 매우 커 전에 비해 좋았다.
이로부터 가야동(상가리)에 도착하니 산길이 구불구불하고 곳곳마다 물소리가 시끄럽게 했다.
남연군묘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가야사의 유적이다.
산세가 웅장하고 사방을 에워싼듯 멀리서 바라보니 맑고 깨긋했다.
예부터 이 산은 왕기가 있다고 일컬었는데 과연 이곳으로 묘소를 이장한 뒤에 성인이 탄생하고 이어서 용흥(임금)의 경사가 있었으니 지관(정만인)들이 풍수를 떠드는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산을 가꾸고 소나무를 기르고(조경) 각을(집) 짓고 비세우는 등의 일들이 능소보다 덜하지 않다.
보덕사는 동북쪽 기슭에 있었는데 역시 갑자년 이후로 나라에서 세운 것이다.라며 기록을 남긴다.
2015년 2월에는 의친왕의 아들인 이청(李淸, 1936- )의 부인은(고종의손자) 역사적 의미가 있는 남연군묘 주변의 임야 16,000m² 를 보존과 관리하는데 어려움에 충청남도에 양도하여 관리하는 방안을 찾기 위하여 마을을 방문하기도 한다.
마을에서는 가야사지 일원의 왕실과 국유 토지에 가야산의 방치된 왕실유적과 가야사의 폐사지와 가야사지 3차래에서 발견된 8개의 소조불상을(복재하여) 석조유적을 상설 전시할 수 있는 야외전시장을 조성하여 보존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국유지와 왕실소유의 토지를 활용하여 방치한 유적을 전시하여 보존하는 사업을 추진하자는 주민들의 주장이다.
이번 기회에 충청남도와 예산군은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을 기울이고 상가리의 국유지와 조선왕실 토지를 지역을 위하여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봤으면 한다.
180여 년간 가야산내 조선왕실의 유적을 직접관리한 상가리주민들의 의견도 타당해 보인다.
한편 상가리의 조선왕실 토지중 일부는 강점기 총독부의 소유에서 조선왕실(전주이씨종친)로 이후에는 이왕직과 재무부 문화재관리국에서 다시 이왕직 최근에는 충청남도로 소유주가 변경되게 된다.
이왕직 [李王職]이란?
일제 강점기, 궁내부(宮內府) 대신에게 딸려 조선 왕가(王家)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국호를 개칭하고, 조선 왕실의 일을 맡아볼 관청을 내세웠는데, 바로 궁내부 소속의 이왕직이다.
1910년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으로 흡수됨으로써 조선은 일본 정치조칙에 편입되게 된다.
조선을 관할하는 기관으로서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었고 별도로 “이왕직”이라고 하는 조직이 생겿, 이왕가에 관한 직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왕가의 모든 토지는 이왕직에서 관리하게 된다.
가야산의 이왕가 토지는 이왕직에서 이후 재무부, 문화재관리청, 충청남도와 예산군의 소유로 현재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