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왕-원나라 공주 80년간의 ‘통혼 정치’
고려 왕-원나라 공주 80년간의 ‘통혼 정치’
고려 충렬왕이 세자시절이던 1274년 원나라에서 세조 쿠빌라이의 딸인 제국대장공주 쿠투루칼리미쉬에게 장가든 이래 고려의 왕위계승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 중의 하나는 몽골(원) 황실 공주와의 결혼이었습니다. 물론 각각 12세와 15세의 어린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충목왕과 충정왕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공민왕이 1356년 반원정책을 펴기 전까지 고려 왕들은 세자시절 또는 즉위 직후 어김없이 원 황실의 공주들과 결혼을 했지요. 한국사에서 유례없는 당시 고려와 원나라의 관계는 '부마국체제'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고려와 원이 대대로 통혼(通婚)관계를 맺은 것은 양국의 이해관계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지요. 몽골 황실은 칭기즈칸 선조 또는 칭기즈칸대(代)부터 옹기라트와 오이라트, 옹구트, 위구르 등의 특정 부족과 대대로 통혼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신분이나 정치적 위상이 높은 몽골 공주의 하가(下嫁)는 솔선해서 귀부한 공로에 대한 포상의 의미와 함께 이들을 확실한 자기세력으로 편입시키는 효과가 있었지요.
구체적으로 무신정권을 청산하고 왕정복고를 이뤄내려는 고려 왕실의 입장과 남송(南宋)과 고려의 연합을 방지하고 고려를 일본정벌의 선봉에 세우고자 하는 원 황실의 입장이 일치해 양국의 통혼은 성사될 수 있었습니다. 충렬왕은 원 제국의 부마가 됨으로써 국내 신료들과 원나라 사신과의 관계에서는 확실한 우위를 차지하게 된 반면, 중국 황제의 친딸인 제국대장공주의 위상에 압도당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았지요. 공주의 동침 요구에 충실히 응했지만 간혹 욕설과 함께 몽둥이로 두들겨 맞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제국대장공주와 충렬왕은 위상의 차이가 확연해 양보와 타협으로 그런 대로 결혼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지요.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사이에 태어난 충선왕은 원나라 진왕(晋王) 카마라의 딸인 계국대장공주 부다시린과 결혼했는데 각각 당시 황제였던 성종의 고종사촌이자 조카로 서로 위상도 비슷하고 자부심도 강했습니다. 계국대장공주와 고려출신 조비(趙妃)와의 불화가 정치적 분란으로 확산되면서 충선왕의 폐위와 함께 이혼 직전까지 갔었지요.
고려 왕과 결혼한 원나라 공주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황제와 혈연적으로 가까운 종왕가(宗王家)의 공주 등으로 격이 조금씩 떨어집니다. 고려 왕과 결혼 당시 원나라 황제와의 친족관계를 촌수로 따져보면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가 1촌, 충선왕비 계국대장공주 3촌, 충숙왕비 복국장공주 5촌·조국장공주 4촌, 충혜왕비 덕녕공주 7촌, 공민왕비 휘의노국대장공주 5촌 등이지요. 이 가운데 위상이 가장 약했던 덕녕공주가 충혜왕 사후 원나라 공주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충목왕과 충정왕대(代) 섭정의 자격으로 정치에 깊숙이 관여한 것도 특징입니다.
고려말엽 고려 강진지방 도요지와 원나라
생활 도자기가 많았던 정확한 제작연대는 1250-1300년대 사용 용도는 밥그릇 또는 차사발, 물그릇, 등으로 사용됐던 그릇을 강진에서 많이 제작 되었습니다.
시기는 고려가 몽고 즉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시기로 고려에 원나라 풍속이 유행하던 때입니다.
고려에 원나라 풍속과 원나라 생활도자기들이 유행하게 된 것은 고려의세자들과 왕자들이 모두 원나라 황실이 있는 북경 외갓집으로 유학을 떠나고 영의정을 비롯해 수많은 고려의 고급관리들이 이 세자와 왕자들을 호위해서 북경에 가 있었기 때문에 원나라가 지배한 100년 동안은 고려는 모두 원나라 풍습으로 삼천리가 물결쳤습니다.
물론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공민왕 등 직계 5대가 8번에 거쳐 원나라 공주를 왕비로 맞았습니다.
어린 세자들과 왕제들은 10세 정도가 되면 영의정을 수반으로 편성된수십 명의 고급관리들을 데리고 원나라 서울 북경으로 떠났습니다.
대부분 역사을 기록하는 사람들은 이 세자들과 왕자들이 모두 인질로 잡혀갔다고 하지만 사실, 고려의 세자들과 왕자들이 원나라로 간 것은 인질이 아니라 외할아버지가 황제로 있는 북경 외갓집으로 유학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북경에 가 있는 세자와 왕자 그리고 그들을 호위한 관리들을 위해 고려의 백성 수천 명이 고려에서 북경까지 길을 잇고 고려에서 한해 동안 생산된 수십만 섬의 곡물을 북경으로 운반했습니다.
그리고 고려의 부왕이 죽으면 북경에 있던 세자나 왕자는 황제의 군사의 호위를 받으며 고려로 돌아와 새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새로 돌아온 새 임금은 원나라 옷을 입고, 원나라 말을 하고, 원나라 공주를 맞고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원나라 도자기를 사용했습니다.
이 새 왕을 모시고 온 고려의 고급관리들도 그랬습니다.
몽고가 고려를 지배한지 20-30년이 지난 어느 날, 그 때 척박한 고려 땅에서 소외된 삶의 입에 풀칠하려던 우리들의 조상들은 고려산천을 보았습니다.
여기저기서 모든 양반들이 고려의 풍속이나 생활 자기들을 내 던지고 원나라 것을 요구했습니다.
원나라 물품들은 날개 돗친 듯 팔리기 시작했고, 고려의 정체성이 깃든 것은 팔리지 않았습니다.
고려의 상인들은 원나라 물품을 모방해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려의 옷을 만들던 사람들은 고려의 옷을 내던지고 원나라 옷을 만들기 시작했고, 고려의 도자기를 빚던 사람들은 고려의 도자기를내던지고 원나라 도자기를 빚었습니다.
원나라 상인들은 원나라 도자기를 실고 고려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안 해저 유물선이 바로 이 때 중국 양자강 이남 월주요에서 그릇을 구워 실고 고려도자기 산지인 강진, 해남지방으로 들어오다 다도해 그만 바윗섬에 부딪쳐 그만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왜 원나라 도자기를 실은 배가 고려의 서울 개성으로 가지 않고 고려의 도자기 주요산지인 해남 강진지방으로 갔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마 당시 고려사람들은 고려에서 중국 도자기를 모방해 구운 도자기를 더 선호했던가 봅니다.
그래서 원나라 상인들은 해남 강진으로 가서 고려에서 구운 고려 도자기와 원나라 도자기를 섞어 마치 원나라 도자기들이 고려 도자기인 것처럼 팔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원나라 강남지방 월주요에서 구워져 강진 해남지방에 들어온도자기들은 고려 도자기와 함께 전국으로 팔려 나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때로는 일본으로도 건너가기도 했고, 때로는 만주지방이나 그 너머 시베리아로도 보내졌을 것입니다.
원나라의 마지막 황후.
원나라의 마지막 황후가 고려 여인이었다는데 이익주(명지대 강사)
이러한 정치적 혼란의 한가운데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순제)의 황후였던 고려 여인 기씨 기황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원나라에 공녀로 들어갔다가 순제의 눈에 들어 황후의 지위에 올랐다.
고려와 원나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나?
13세기에 고려는 몽고족의 침략에 맞서 30년이 넘도록 치열하게 싸웠다.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했던 몽고족과 그토록 오랫동안 싸운 나라는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항전의 주체가 되었던 고려 민중의 투쟁담은 역사 속에 길이 남을 것이다.
항쟁의 결과, 고려는 몽고에서 요구하는 강화의 조건을 대폭 완화시켜 강화를 성립시킬 수 있었다. 강화교섭을 위해 몽고에 간 태자가 쿠빌라이(뒤의 원 세조)를 만났을 때, 쿠빌라이는“고려는 만리나 되는 큰 나라이다. 당 태종이 친히 공격했어도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지금 그 태자가 내게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쿠빌라이가 고려를, 고구려를 계승한 강국으로 인식하였던 것은 끈질긴 고려의 항전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때 쿠빌라이는 동생 아릭부게와 황제 자리를 다투고 있었으므로 고려 태자가 자신에게 찾아 온 것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음직하다. 결국 쿠빌라이가 황제가 되었고, 태자가 쿠빌라이 쪽을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중요한 고비에서 외교적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고려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진행된 외교교섭에서 실리를 얻을 수 있었다.
고려는 몽고와의 이 첫 교섭에서 전통적인 풍속, 즉 ‘토풍’을 고치라고 강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이로써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고려의 문화뿐 아니라 독자적인 국가체제의 존속을 인정받은 것으로, 이를 근거로 ‘고려’라는 국가와 왕실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몽고에서 볼 때 고려는 엄연한 하나의 외국이었고, 고려와 몽고의 관계는 외교관계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몽고족이 이때까지 정복한 지역을 모두 자기 영토로 편입시켰던 것과 비교할 때 아주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강화에 반대하는 무신정권을 붕괴시키는 과정에서 몽고의 군사력이 개입하였고, 이에 따라 고려의 자주성은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되었다. 몽고의 군대와 다루가치가 고려에 상주하고 내정에 간섭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충렬왕이 즉위하였는데, 그는 쿠빌라이의 딸과 결혼하여 원 황실의 부마가 되어 있었다. 이 점은 이후 두 나라의 외교 과정에서 큰 효력을 발휘하였다. 유목민족의 전통을 가지고 있던 원나라에서는 국가의 중대사를 쿠릴타이라고 하는 회의에서 결정하였는데, 부마도 왕자들과 나란히 참석할 수 있었다. 이같이 부마의 지위가 왕자와 동등하였으므로, 충렬왕은 이러한 지위를 활용하여 원나라의 간섭을 줄이기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 할 수 있었다.
충렬왕은 직접 원나라에 가서 쿠빌라이를 만나 담판을 벌였고, 그 결과 원나라의 다루가치와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후 고려에는 원나라의 관리나 군대가 주둔하지 않게 되었다. 또 호구 조사를 고려에서 독자적으로 시행하기로 합의하였다. 호구 조사는 일차적으로 세금을 거두기 위한 것이므로, 이 합의를 통해 고려의 백성들은 원나라에 세금을 바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원나라가 고려에 대한 지배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어서 필요할 때마다 사신을 보내 내정에 간섭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에서 이런 정도의 느슨한 지배방식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 국왕에 대한 책봉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책봉이란, 중국 왕조와 주변 국가 간의 사대관계에서 조공의 반대급부로 주어지던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 나라의 왕위 문제에 직접 간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왕위 계승을 추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나라에서는 책봉의 기회를 이용하여 고려의 왕위 계승에 개입하였고, 원나라에서는 책봉권을 이용하여 고려 국왕을 조종할 수 있었고, 그를 통해 고려의 정치에 간섭하였던 것이다.
자주와 사대가 종이 한 장 차이?
당시 고려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를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자료는 많지 않지만, 우리가 잘 아는 일연(1206-1289)의 <삼국유사>와 이승휴(1224-1300)의 <제왕운기>가 모두 충렬왕 때 쓰여 진 역사책들이다. 이 두 책은 무엇보다도 단군신화를 처음 기록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것은 단군으로부터 시작된 우리 역사의 유구함을 강조하고, 또 삼국통일이 이루어진 지 무려 600년이 지난 뒤까지도 각 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 백제. 신라 계승의식을 극복하여 민족의 일체성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몽고와의 전쟁을 전후하여 신라부흥운동, 고구려부흥운동, 백제부흥운동이 각각 일어났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특히 <제왕운기>의 우리 역사에 대한 서술은 “요동에 별천지가 있으니 중국 왕조와 뚜렷히 구분된다”는 말로 시작된다. 중국과 구분되는 딴 세상이란 곧 우리의 독자적인 혈연 및 문화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때 새삼스레 이 점을 강조한 것은 원나라와의 관계에서 ‘토풍’으로 표현되는 독자적인 문화와 국가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점을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이들보다 한세대 뒷 사람인 이곡(1298-1351)이 자기 시대를 말하면서 “오늘날 천하에 임금과 신하가 있고 백성과 사직이 있는 곳은 우리 삼한뿐이다”라고 한 것도 원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고려가 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에 자부심의 표현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몽고족이 세계를 지배하는 현실은 그 자체로서 인정하고 있었다. <제왕운기>에서는 원나라를 중국의 정통 왕조로 인정하면서, “토지는 광대하고 인민은 많으니, 개벽한 이래로 이런 나라 처음이네”라고 노래하여 융성함을 극찬하였다. 또 충렬왕이 쿠빌라이의 부마가 되고, 그 아들인 쿠빌라이의 외손자가 세자가 됨으로써 고려의 왕업이 빛나게 되었다고 찬양하였다. 따라서 원의 간섭 역시 부정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종족에 관계없이 중원을 차지한 나라가 곧 중화이고, 그에 대해 사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로써 합리화되었다.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전통에 대하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민족의 간섭을 인정하는 이중적인 가치관이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원에서 고려의 노비법을 고치려 한다던가, 고려를 원의 한 행성으로 만들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하면서도,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그 곳에서 관직에 오른 것을 평생의 자랑으로 여기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출처 신문기사등)